(11/2)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아내의 죽음을 어떻게 대하라 말씀하십니까? (24:16-17)
“인자야 내가 네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밭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24장을 모두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큰 궁금증을 가지게 될것이며 어떤이는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문제로 인하여 불평을 가지게 된다고 본다. ‘왜 하나님은 에스겔의 아내를 죽이시면서 까지 에스겔에게 예언을 하도록 하셔야만 하는가?’
성경을 대하다보면 이와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이할때가 종종있다. 이와같은 본문(특히, 예언서)을 대할때 조심해야 하는것은 읽는 관점을 자신이나 지금 시대에 맞추게되면 올바른 해석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그시대의 배경을 잘 알아야 하고,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까지 하셔야만 했을까를 잘 조명해 볼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왜 하필 에스겔의 아내를 희생양으로 삼으셨을까? 이것이 가장 궁금해할거 같다. ‘에스겔의 아내는 뭔 죄야?’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을것이다. 누구를 택하셨는가를 생각하기전에 하나님의 의도를 잘보아야 한다.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것을 쳐서 빼앗으리니’ 라는 구절을 보면, ‘네 눈에 기뻐하는것’ 이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이 되겠는가? 에스겔은 그것이 그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성전제사’ 를 의미한다(정작 그들은 우상과 세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은 그릇된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만들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에스겔에게 그와같은 예언을 하신것이다. 에스겔조차 자신에게 어떤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으나, 아내가 죽는 슬픈일이 일어난것이다. 자, 에스겔보다 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없다. 그냥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인간적인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고 싶은것뿐일 것이다. (평소에는 누가 죽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지 않은가)
그러나, 당사자인 에스겔은 아주 태연하게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이부분에서 솔직히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에스겔은 사역도 중요하지만 아내가 죽었는데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따를수가 있었을까? 여기에 독자들은 모든 촛점을 맞출수가 있어야 한다. 에스겔의 신앙은 절대적인 순종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나’ 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 옳으시고 선하시다’ 이것밖에 없다. 그러면, 나는 뭐가되고 나의 가족은 뭐가 되는가? 그렇다.
그런데 모든것이 옳으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에스겔에게 악하고 잘못된것을 주신것일까?
하나님이 이번만큼은 실수하신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말아야 한다. 자, 이제 하나님이 에스겔의 아내에게 행하신 것을 생각해 보자. 먼저,하나님은 이 지구상에서 살다가 죽음을 당하는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계신다. 소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죽고 사는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에스겔의 아내도 인간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음을 당한다 (어떻게 죽을진 모르지만)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죽고 천국에 들어간것이 궁극적으로 볼때 그녀에게 축복인가? 저주인가? 천국을 믿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답이 나올것이다. 완전한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곧 최고의 행복, 최고의 축복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족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과 그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을때 무조건 하나님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불만을 품고)
그렇다면 당사자인 에스겔의 아내는 죽어서 하나님앞에서 원망을 쏟아내었을까?
에스겔의 아내는 천국에 가서 너무나 기뻐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자신을 하나님의 예언의 도구로 사용하신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았을까? 비록 에스겔이라는 대선지자의 아내로 살았지만, 그 어려운 시기에 이름한번 거론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아니 에스겔보다더 힘든 삶을 살았던 사람이 그의 아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기 위해서 쓰임받은 것이었으므로 에스겔 못지않은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너는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귀먹은 사람처럼 에스겔의 말을 절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에스겔의 행동을 보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 모인것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에스겔의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과 에스겔의 태연한 순종을 통해 이와같은 일이 일어난것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닌가? 에스겔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더 놀라고 용기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믿는것과 행함이 다른 사람은 믿는것이 아니든지, 세상것에 더 관심이 많든지 둘중하나 일것이다.
이 시대는 믿는자들도 천국에 대하여 점점 관심을 잃어가는거 같다. 아마 이세상에서 느끼고 소유하는것때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질수록 우리의 신앙도 열정이 사라지고 후에는 그릇된 구원관을 가지게 될수도 있다. 정신을 차리자.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지키자! (끝까지 읽어주심에 감사합니다)
(11/3)
*본문에서 말하는 암몬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25:1-3)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성전이 더럽혀졌을 때에, 너는 그것을 보고 잘 되엇다고 하였고, 이스라엘 땅이 황폐하게 되었을 때에,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잘 되었다고 하였고, 유다 백성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을 때에도, 그들을 보고 잘 되었다고 소리쳤다.”
암몬은 유다가 바벨론의 공격으로 패망할때에 ‘잘 되었다’ 하며 기뻐하였다. 암몬 뿐만 아니라 본문에 등장하는 모압, 에돔,블레셋, 두로, 이 나라들은 이스라엘의 번영때는 질투를 패망때는 기뻐하며 그들의 악한 속내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복수심을 가지고 유다를 괴롭혔던 나라였다.
남의 행복을 질투하고, 불행을 기뻐하는것은 타락하고 부패한 자아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비정상적인 인격을 드러내는 자들을 증오하시며 뉘우침이 없을때 결국에 징계의 매를 드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비판하고 독화살을 쏘아대는 단체나, 개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손을 피하기 힘들것이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려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비단 암몬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이 그런 모습을 비치며 살아간다면, 그들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는것은 말씀의 가르침이 아니다. 믿는자가 받은데로 돌려주는 삶을 사는것은 옳지 않다. 믿는자는 받은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영위할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믿는 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주님께 맡겼을때, 하나님은 뒷처리를 도맡아 해주셨지 않은가? 원수갚는것이 우리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다. 진흙탕 싸움은 결국 믿는 자를 더 수치스럽게 만들뿐이다. 주님께 맡겨야 한다. 다 맡기는 것이 신앙이다
(11/4)
*두로 왕이 책망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8:1-5)
“너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너는 네가 신이라고 하고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마음 속으로 신이라도 된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두로라는 나라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했으며 특이한 점은 땅과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들을 가졌다는 점이다. 특히 육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다한가운데 세워진 도시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두로는 지역적인 장점을 이용해서 해상무역에 성공하여 나라가 부강해진 케이스이다.
그러나 결국 그 부강함이 교만이 되어버렸다. ‘너는 네가 신이라하고 신의 자리에 앉았다 하니’
이 땅의 역사가운데 인간이 마치 하나님인것처럼 행세한 사람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헤롯, 네로, 그리고 여럿 이단의 교주들도 그렇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증오하시고 혐오하신다. 교만은 악한 마귀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으며 선한자도 교만하게 만드는것이 마귀의 전공이다. 마귀는 늘 물질과 지식으로 교만의 왕관을 쓰도록 만든다. 착하고 겸손했던 사울이 왕위되고 권력을 얻게되자 제일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교만한 자가 되었지 않은가.
교만은 늘 우리의 주위에 맴도는거 같다. 우리가 자신이 가진것으로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틈을 타고 들어와 교만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이끄시도록 기도하며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도 나의 삶을 미혹하고 교만의 미끼를 던지는 마귀로 부터 승리하도록 그리스도의 겸손의 옷을 입자!
(11/5)
*이집트가 심판 받을 때 이스라엘 족속은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29:16)
“이집트는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이 의지할 나라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당한 것을 보고서, 이집트에 의지하려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상기하고,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 하나님인 줄 알 것이다.”
이집트(애굽)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된 까닭은 이집트의 젖줄인 나일강의 소유주가 바로왕 자신이라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만들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자신이 곧 창조주인냥 으시대며 교만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까지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자는 주신 모든것에 감사부터 할 수 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는 말씀처럼 모든 만물이 오직 하나님의 소유이며 공급자도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잊어 버리고 하나님보다 이집트를 의지하려는것이 얼마나 큰 그들의 착각인지 하나님은 이집트를 심판하시며 깨닫게 해 주셨다. 이 세상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칼을 의지하는 자는 칼로, 총을 의지하는 자는 총으로, 돈을 의지하는 자는 돈에 의해,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사람으로 인하여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를 다시 바라보며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구원함을 얻을 것이며, 범사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 은혜 가운데 살리라.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는 자는 낮추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높이시리라.
(11/6)
*이집트의 멸망 소식은 다른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32:9)
“네가 망했다는 소식을 내가 뭇 민족에게 알리면, 뭇 민족이 네가 알지도 못하던 그 나라들이 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에 떨 것이다.”
이집트의 멸망 소식은 다른 나라들에게도 불안요소가 될수 있는데 그 멸망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그들이 듣게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입성했을때에도 여리고성 사람들과 가나안땅 거민들은 몹시 불안에 떨었는데 바로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집트에서 내리고 나오셨는지 광야에서 어떻게 그들을 먹여 살리셨고 광야의 거민들을 어떻게 멸망시키셨는지를 소문으로 모두 들은 상태였으므로 그들이 가졌던 공포심은 극에 달하였다.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고 오가는 사람들은 흔적도 볼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세상이 갖추어 놓은 경보업체를 신뢰하여 집을 안전하게 지키길 원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에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막을수가 있을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 놓은 안전장치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하신다.
자연재해나 전염병과 같은 것으로 인간의 무능력과 연약함을 드러내시며, 부강했던 나라들을 꺽으시기도 하시고 이시대에 저마다의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에 대한 경각심을 주신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못하실일이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교만한자는 교만함의 댓가를 치르게 하시며 겸손한 자에게는 한없는 은혜를 물붓듯이 부어 주신다. 이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음을 볼때 신자들은 두려움속에서 중보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라도 인생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역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할때입니다.
(11/7)
*파수꾼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33:2-6)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고를 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파수꾼은 늘 주위를 살피는 사람이다. 행여나 적이나 이상한 사람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살피고 그런 징후가 보이면 경고의 나팔을 부는것이 그의 직무이다. 그 나팔로 인하여 원수는 두려워 도망가도록 하고, 지키는 사람들은 경각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신자들을 파수꾼으로 세워주셨다.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항상 경고를 받고 또한 세상을 향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함에도 불지 않아 사람들이 죽게되면 그 책임을 파수꾼에게 두겠노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말씀을 거울삼아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하는데 만약에 자신의 삶이 게으르고 죄악된 모습이 보이면 말씀으로 경고의 나팔을 불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창문삼아 세상을 살펴볼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이 말씀에 어긋나게 나아간다면, 세상을 향해서도 경고의 나팔을 불어 위기의 상황임을 알릴수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나팔을 분다는 의미는 선포의 의미이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말씀선포로 물리치셨다. 신자들은 삶에 찾아오는 시험과 유혹을 볼때 말씀을 선포하며 원수 마귀를 이겨야 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너희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시대 영적 파수꾼의 사명을 받았다면, 그 사명을 게을리 행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하겠다. 안으로 밖으로 잘 살펴서 말씀의 나팔이 항상 울려퍼지도록 합시다.
(11/8)
*이스라엘 목자들의 구체적인 악행은 무엇입니까? (34:4-6)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쌔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유다의 정치인과 종교지도자들의 악행과 불순종에 대한 말씀이다. 지도자들이 있으나 그들이 자신의 배를 위해서만 살았으므로 양들은 온갖 짐승들에게 공격을 당할수 밖에 없었다. 목자가 있어도 실질적으로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았기 때문에 양들은 고아처럼 방황하며 낙망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어 주실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헤미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참목자이실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의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분이다.
그는 오셔서 양과 염소를 나누시겠다고 하셨다.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신실하게 쫒는 자들은 보호하심을 얻겠으나, 목자의 음성보다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며 그쪽으로 나아가는 염소와 같은 자들은 영원히 길을 잃고 방황할것이라고 예언하셨다.
마지막날 참 목자가 오셔서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믿는자와 불신자를 나누실 것이다. 믿는자는 영생의 복을, 불신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준비될것이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음성과 우리를 미혹하는 마귀의 소리를 잘 구별할 수 있도록 주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1/9)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6:22-24)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가끔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착각하며 살때가 있는거 같다. 거울을 보며 ‘이 정도면 괜찮은데’ 물론 긍정적인 마인드가 나쁜건 아니다. 하지만 남들도 그렇게 동의해 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할때 마음이 상하고 섭섭해 진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착각속에 빠진듯하다. 스스로 ‘우리는 의롭게 살았으니 잘 될거다.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다. ‘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 징계받고 이방 나라에게 끌려가고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던 마지막 소망이었던 성전까지 무너졌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들의 착각을 깨우셨다. 하나님은 신자들의 믿음의 배경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신다. 오늘 말씀도 왠지 섭섭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럽혀 놓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시려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살도록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게 하시기 위해서 만드셨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만 산다면, 결국 주어지는것은 실패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름을 위하여 쌓아올린 바벨탑을 중지시키신것이다.
하나님이 질투하셔서 그렇게 하신것이 아니라 그 길에는 멸망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파괴는 결국 인생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행함이셨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방편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절대로 구원을 얻을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항상 거룩하도록 행하신다. 하나님의 의가 거룩해야지 죄인들이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인들의 착각을 깨우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셨고 십자가 지신것이다. 아직도 자신의 이름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생각을 얼른 고쳐야 한다.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충만할수 있도록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주님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착각은 자유일수 있지만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는 절대로 자신의 의를 믿어서는 안된다. 철저히 내려놓자. 예수의 피 밖에 없음을 기억하자. 그 피로 씻겨지고 의롭게 되었다.
(11/10)
*에스겔이 생기에 대해 대언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7:9-10)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서에서 가정 익사이팅하고 제일 많이 알고 있는 말씀일 것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해 버린 유다를 마른뼈에 비유하신 하나님은 훗날 그들이 다시 회복될것을 약속하셨는데 지금 에스겔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될것임을 시청각으로 보여주고 계신것이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조용한곳이 있다면 어디일까? 아마 무덤일것이다. 무덤에는 말이 없다.
소음도 없다. 그저 침묵만 흐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재림하실때 가장 시끄럽고 활기를 뛸곳도 역시 무덤이다. 생명없던 시체들이 생명을 얻고 깨어 일어나 재림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른뼈같이 소망없었던 유다백성들이 기적같이 회복되어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것처럼, 이 땅에서 소망없이 살던 인생들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의 소망을 얻게 되는 신약시대의 기적을 또한 예언하고 있다.
아무 반응도 감정도 없는 마른뼈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대언하라고 명령하셨을때 순종하고보니 마른뼈들이 일어나 군대를 이루는 기적이 일어났다. 누구든지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할때 하나님은 그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위대한 영혼구원을 이루어 주실것이다.
지금 당장 내 눈에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고 나가 전해야 한다. 그 전한 말씀이 씨앗이 되고 씨앗이 죽어 싹이 생기고, 가지가 만들어지고, 나무가 형성되어 열매를 맺는 역사가 이루어 질것이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웃으며 기쁨으로 거두는 때가 올것이다.
(11/11)
*하나님은 뭇 민족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십니까? (39:27)
“내가 그들을 만민 가운데서 돌아오게 하고, 원수들의 땅에서 그들을 모아 데리고 나올 때에, 뭇 민족이 보는 앞에서,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나타낼 것이라.”
하나님은 38-39장을 통해서 장차 이스라엘에 임할 악한세력의 엄청난 공격에 대하여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에스겔이 예언을 해야할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누구인가? 마곡땅의 왕인 곡이란 사람을 향하여 예언하도록 하셨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곡을 통하여 주변의 나라들을 연합시키는데 표현하기를 마치 갈고리로 꿰어 끌어오듯이 수많은 무리를 끌어내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악한 무리들을 끌어모으는것일까? 하나님의 원수들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가리에 갈고기를 꿰듯이 그들을 붙잡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무서울지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하나님이 힘이 없으셔서 당신의 백성을 원수에게 패하게 만들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자연만물을 이용해서도 간단하게 인간의 권력과 능력을 무장해제시킬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이 곡의 전쟁은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영적인 전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세상 마지막 날에 사단이 일어나 곡의 세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결국 유황 불못에 던지움을 받는다는 예언이 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세력이라도 결국은 멸망의 길로 들어간다는것이 성경의 기초적인 메세지이다.
마지막때에 임할 곡의 전쟁은 이스라엘에 국한된 전쟁이 아니라 모든 세계에 흩어져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영적전쟁이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시대가 악하고 종말에 다가갈수록 더 깨어나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앞에 올바로 서도록 해야함이 마땅하다.
(11/12-13)
에스겔 40-43장까지는 새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40장에는 성전 곳곳에 나있는 문에 대한 설계도와 특히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의 방을 보여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문지기들의 방이 있는데, 각각 길이가 한 장대요, 너비가 한 장대였다.”
이것이 주는 의미는 중요하다. 문지기들의 방은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등급이 있거나 하지 않고, 사이즈나 모든것이 똑같다. 그냥 다 한 등급으로 지어져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그 사람의 등급을 의미하는것이 절대로 아니다. 어떤일이든지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는데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전에서는 하나님만 중심이시고 나머지 사람들, 제사장이던지, 수종드는 사람이든지, 막론하고 모두다 ‘문지기의 정신’ 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한분외에, 즉 하나님의 은혜 아래 모두다 동일한 백성, 자녀들이다.
시편 고라자손의 찬송에서 보면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것이 좋다’ 라는 감동적인 구절이 나온다. 예수님도 양들의 문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다. 그 문으로 한마리, 한마리, 보살피고 지키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교회는 계급사회가 아니라 섬기는 공동체이다.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지신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지체들을 섬기는곳이 교회이어야 한다. 문지기의 정신을 회복할때 교회가 참된 진리를 세상에 올바로 전하게 되리라 믿는다.
41-42장은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다.
“그가 지성소의 내부를 재니, 길이가 스무 자이고, 너비도 스무 자였다. 그가 나에게 “이곳이 지성소다”하고 일러주었다.”
지성소는 광야 성막때도 그랬고 솔로몬 성전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완전한 정육면체perfect cube 형식으로 지어졌다. 가로, 세로 모두 20척으로 완전한 정사각형모양이었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이 좁아진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삶, 마음가짐, 정신상태 등 모두를 신중하게 여기며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은 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문을 찾는이가 적다고도 하셨다. 천국을 향해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이세상에서 가진 기름덩어리들을 줄여야 하는것이다. 욕심, 욕망, 이기심, 거짓, 명예,,,, 줄여야 할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영적다이어트를 해야만 하는데, 줄이고 줄여야지 좁은문을 통할수가 있기 때문이다.
(11/14)
*성전의 법은 무엇입니까? (43:12)
“성전의 법은 이러하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
에스겔은 성전환상을 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환상적인 모습을 보게된다. 떠나셨던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신다는것은 절망에서 희망을 찾는것과 같은것이다. 사실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버리시자, 이스라엘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수 없었고 할수 있는것이라고는 죄짓는것밖에 없었다. 나라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힘을 잃어 이방나라의 놀림거리가 되었고, 백성들은 노예로 끌려가 나라없는 백성의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시면 그 즉시로 우리에게도 절망감이 나타난다. 다윗이 범죄하고 절망감에 빠졌다. 비록 그가 왕이었지만, 할수 있는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기도를 안했겠는가? 예배를 안드렸겠는가? 그러나 모든것이 이전과 다르다는것을 다윗이 느낀것이다. 이것이 영적 침체이다. 불러도 불러도 아무런 응답과 반응이 없는 상태, 이것이 하나님이 떠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잘나서 영적으로 부흥하는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실때 부흥하는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으로는 범죄하고 살면서 뻔뻔하게 하나님께 나아와서 은혜달라고 외치는것은 벽에다가 부르짖는것과 같은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렇다.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에 나와서 머리를 숙여 우리의 죄를 회개하여 씻음을 받아야 한다. 더이상 짐승의 피가 필요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씻음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야 우리의 삶 또한 거룩히 변화되어갈 수가 있다. 오늘도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음성이 많은 물소리처럼 흘러넘치기를 소망합니다.
(11/15)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리므로 닫아 둘지니라.”
흥미로운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문을 향해 들어오셨는데 그 이후로 동쪽문은 완전히 폐쇄하라는 명령을 들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으로 들어오셨기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 첫째는 하나님이 들어오신 그곳을 거룩히 지키라는 의미이며, 둘째는 한번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 그곳에, 즉 하나님의 백성들, 예배자들이 있는곳에 계속 임재하시겠다는 의미로 볼수가 있다.
사실 이 두가지 이유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동쪽문으로 들어오신후 그 문을 닫고 절대 열지마라 하신것은 ‘내가 늘 이곳에서 너희를 만나줄께.’ 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은자’ 즉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들로 인침을 받은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받지 아니한자가 성소에 들어오는것을 막도록 했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이렇게 적용하면 어떨까? 성전의 법을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이라도 그 성전을 들어가는 문이 어디있는지 모른다면 그 지식들이 모두 다 헛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영원히 임재하시는 성전을 천국으로 생각해보면, 성전의 법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는 법을 말하는것이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법을 아무리 잘 배워도, 천국의 문을 열수있는 열쇠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 배운것들이 다 헛것이 되는것이다.
성전 환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는 이시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분명히 예배에 임재하심을 의심해서는 안되고, 예배하는 사람이 형식과 의식에 치우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흠없이 드릴수 있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해야함을 기억하자.
(11/16)
*거룩한 구역을 구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4)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제비뽑아 땅을 분배할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을 알려주셨다.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하나님께서 한 구역을 정해서 거룩한 땅으로 삼으라고 명령하신 의미가 무엇일까?
모든것의 원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땅을 인간에게 맡기시고 잘 보살피고 보존하길 명령하셨으므로 우리를 청지기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이와같은 질서를 온전히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것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늘 기억하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안될때 우리 안에 내것이라는 욕심과 탐심이 일어나 죄를 짓는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는것 가운데 모든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할수 있을때, 그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릴준비가 된것이리라. (마치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까지 자기것으로 여기지 않고 드린것처럼)
그 반면에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자는 늘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할수 밖에 없다. 부자청년이 영생을 얻고 싶어 예수님께 찾아왔으나 얼굴을 붉히고 돌아간 이유가 무엇인가? 돈을 놓지 못해서다. ‘보물이 있는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느니라’
물질도 내가 벌었으니 다 내것이다. 라는 마음으로 일하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악착같이 끌어모아 내것으로 만들려고만 할것이다. 하지만 물질에 대해서도 나는 청지기다. 라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만 더 가지려고 술수나 편법을 쓰지 않는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벌려고 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거룩하게 구별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곳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장소로 여기며 그곳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진실하고 성실하며, 경건하고 거룩히 책임을 감당하는것이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라 생각한다.
(11/17)
*사독의 자손이 거룩하게 바친 땅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48:11-12)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 레위 지파의 자손이 잘못된 길로 간것처럼 하지 않고, 내가 맡겨 준 직책을 지킨 사람들이다.”
에스겔서의 마지막은 새롭게 회복될 새성전과 더불어 이스라엘에게 각 지파를 따라 땅을 분배하는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하나님은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시고 그들이 거할 성읍의 크기를 측정하여 주셨고, 12지파의 성읍에 12문을 만드시고 각 지파의 이름을 문패처럼 달아주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전체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 라고 명명하셨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 라는 뜻인데, 여호와께서 이제 영원히 그들을 떠나시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의미다.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그들의 유토피아는 인간 중심으로 세워지는 바벨탑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으로 세우려는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바벨탑을 무너뜨리신 이유는 인간들이 진정한 행복을 잘못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는것은 그야말로 비극이다.
사독의 자손이 가장 거룩한 땅을 받은 이유는 이 땅에서 바벨탑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일로 인해 따돌림을 당하고 고난과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의지했다.
그 약속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에서 ‘거기’ 가 상징하는 의미를 심중에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땅 ‘여기’ 서 살아가고 있지만, 천국 ‘거기’ 를 볼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으로만 ‘거기’에 갈수가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의 시작은 하나님의 징계로 시작했지만 결말은 회복과 소망의 메세지였다. 소망으로 시작해서 징계로 끝나는 인생이 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여기가 살기에 만만치 않지만, 사독의 자손들처럼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날마다 거기를 꿈꾸며 살아갈때, 이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으며, 거기,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