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마가복음1장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그리스도의 족보를 시작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조명했던 마태와 달리 마가는 예수님의 족보, 탄생을 과감히 생략하고 곧바로 공생애의 삶을 조명하면서 종으로 오신 메시야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마태가 설교형식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많았던 반면 마가의 복음서는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는형식으로 내용을 꾸몄다.
마가는 세례요한의 사역을 예수님 공생애보다 먼저 기록하면서 그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인 영혼구원을 위해 죄 씻음이 절실함을 깨닫게 함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인생들이 진정으로 받아야 할 세례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세례임을 밝힌다.
성령세례없이 그리스도인이 될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죄 사함은 오롯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세례를 얻기 위한 과정이 되었던 것이다. 죄를 깨닫는 자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필요없는 사람일것이다. 하지만 지구상에 이런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명을 받았다. 우리의 사명은 철저하게 회개의 삶과 겸손의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늘 성령의 조명을 받으며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세례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철저히 낮아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것이다. 마가의 복음서는 그렇게 겸손히 낮아지셔서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섬기는 빛이 환하게 비추이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합니다.
(4/6) 마가복음2장 “갈급한 믿음”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한 중풍병자를 위한 네 사람의 갈급함이 만들어낸 감동적인 힐링 스토리다. 서로 어떤 관계인지 명확히 알수는 없지만 그들의 행동을 유추해볼때 절친이 아니면 만들어 낼수 없지 싶다. 이 네 사람은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왜 급히 지붕을 뚫게 되었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비상식적인 행동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첫째는 아픈 친구를 위한 사랑이며, 둘째는 지금 예수앞에 나아가지 못하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나와 줄서있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
물론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가운데서 가장 갈급했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하고 지붕을 뚫는 행동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며 흐믓해 하셨다. 그리고 곧바로 중풍병 환자를 치료해 친구들의 품으로 돌려 보내주셨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 주신것이 아니라 네 친구들의 갈급한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 주신것이다. 의인의 간구는 병을 치료하는 역사를 만들어 낼수가 있다. 의인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앞에 무엇이든지 불가능이 가능해짐을 온전히 믿는사람을 말한다.
질병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능히 풀어 내실 수 있음을 믿는자가 바로 의인이며 그들의 갈급한 기도가 믿음의 기도이다. 당신은 기도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갈급히 기도하는 사람인가? 기도의 응답은 바로 여기서 예스와 노로 나뉘어 진다고 본다.
시편기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는다고 고백한것을 볼수 있다.
죽기 살기, 필사적인 마음이 갈급함이다. 물컵에 물이 넘치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방울의 물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말은 마지막 한 방울이 부족하면 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쥐어짜는것이 갈급한 믿음이다. 사슴은 그 시냇물을 목숨걸고 찾는다. 못 찾으면 죽는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믿음의 기도가 바로 이런것이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의 이름만 붙들고 부르짖는 사람이 응답을 받을것이다.
(4/7) 마가복음2장 “죄인을 부르심”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집중적인 타깃이 된 이유중 하나는 예수님이 죄인들의 집에 머물며 그들과 교제하였음이었다. 그 당시 세리는 매국노와 같이 취급받았던 직업이었다. 돈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매우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 집안과 혼인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율법주의자들의 눈에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예수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거세게 비판하며 정죄를 했지만 예수님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밝혀내어 주셨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하늘로 부터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 죄인을 부르신다는 뜻은 죄인에게 뭔가 해 주실일이 있다는 뜻인데 그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판사가 죄수들에게 판결을 내리면 그대로 시행되는것은 나라가 판사에게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허락하신 죄사함의 권위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하지 못할 죄는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어떤 죄를 가지고 있더라도 예수 이름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면 모두 용서함 받을 것이다.
죄의 댓가가 두려워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누룩처럼 퍼져서 되돌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수가 있다. 주님이 회개의 은혜를 베푸실때 순종하고 회개하는 자는 십자가상의 한 강도처럼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된다.
죄인들을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자가 복있는 사람이며 그 음성에 반응하여 그 앞에 무릎꿇는 자가 그리스도의 은혜의 돌보심을 얻게 된다. 주저하지 말고 고백하여 죄 씻음을 받기를…
(4/8) 마가복음2장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Sabbath Day 은 창조 마지막날인 7일째를 안식의 날로 제정하신것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안식하신날에 우리 인간도 안식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안식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제사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비하신 축복과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근본 이유는 인간에게 더 유익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소위 율법주의자들은 이와같은 안식일의 규범을 잣대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죄인 취급했던 것이다. 의식보다, 제사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정죄하는데에만 급급했던 율법주의자들을 책망하셨다.
안식Rest는 인간에게 회복과 평안을 제공해준다. 달리는 말들도 쉼을 주지 않으면 탈진해 쓰러진다. 인간의 신체구조나 정신구조도 마찬가지이다. 과부하가 걸리면 누구나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지 않은가!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과거의 안식일 다음날을 주일로 정하여 예배드리고 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는자에게 하나님은 복과 은혜를 부어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지 못하는 안식은 진정한 유익을 얻을수 없다. 그 날 하루 좋은곳에가서 놀거나, 일한다고 우리 인생이 더 유익해지거나 부유해지는것이 아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헤아리시는 하나님앞에 나와 감사의 예배 드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육신과 영이 모두 회복의 은혜를 받는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안식이 되는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말자. 율법주의자처럼 형식과 의식, 절차에 얽매여 사람을 정죄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진실하고 성실한 예배자로 바로 설 수 있도록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신자가 됩시다.
(4/9) 마가복음3장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시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안식일에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데리고 와 예수님이 가장 잘 보이시는곳에 앉혀놓았다. 당연히 함정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도록 만들어 놓고 안식일을 범한걸로 간주해 고발하려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모를리 없으신 예수님은 보란듯이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다. 그리고 치유하시기전에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그들을 뒷전으로 하시고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손을 펴지도록 하셨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함정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신것은 그들이 정해놓은 기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못함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신셈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그릇되이 사용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은혜 부어주시려고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아픈자를 치료하시고 마음에 고통당하는 심령을 위로하시고 평강을 주시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시고 탄식하셨다.
하늘로부터 놀라운 축복과 평강이 임하는 날이 주의 날, 곧 주일이다.
우리의 완악하고 세속적인 마음을 모두 깨뜨리고 주님의 날에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 나와서 펴지지 않던 우리의 뻣뻣해진 심령을 고침받아야 한다. 한쪽 손 마른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비록 메말라진 손이지만 믿음으로 내미는 자만이 고침을 얻을수가 있다.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 한분이시다. 주님께 나아와 새롭게 고침을 받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4/12) 마가복음4장 “좋은 땅이 되는 방법”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심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씨는 말씀을 의미하며 네 종류의 땅은 각각 우리의 마음상태를 일컫는다. 길 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곧바로 먹어 버렸다는것은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고 세상일에만 마음이 열린사람이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조금 나오나 뿌리가 약해 금방 말라버렸다. 이런 마음은 잠시 말씀에 대한 기쁨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유혹과 같은 가시로 인하여 말씀이 막혀져 이루어지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좋은땅은 씨가 떨어져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좋은땅이 되고싶어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어떤 땅이 자신과 흡사한지 유심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좋은땅이 될수 있는 조건에 대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 육십배,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 이 조건은 앞에 보았던 세가지의 땅이 놓쳤던 부분임을 알수있다.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시면서 일단 말씀을 듣기 원하는 마음을 가지는것이 우선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들은 말씀을 마음에 받아 들이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을 돌비에 새기지 말고 마음에 새기라고 하셨지 않은가. 귀로 듣고 마음에 까지 품을수 있는 사람의 그 다음 단계는 자신의 모든 삶에서 품었던 말씀을 적용해보는 것이다.
아무리 말씀을 듣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었을지라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적용하지 못한다면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할것이다. 하지만 작은 일에라도 말씀을 비춰서 적용하는 사람은 그 말씀이 주시는 깊은 뜻을 깨닫고야 말 것이다. 바로 이 상태가 열매 맺는 모습이다.
말씀적용하여 얻는 삶의 기쁨은 그저 말씀을 듣고 받은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희락이 있습니다. 그 맛을 경험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적용하여 삶에 성령의 열매가 넘쳐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어느 상태에서 주저하거나 멈추어 버리는지 심각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도전해야 합니다. 열매를 보아야 그 나무의 정체성을 알수가 있습니다. 열매없어 책망받은 무화과나무의 인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4/14) 마가복음4장 “복음의 능력”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예수님은 자신을 등불 혹은 복음에 비유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빛은 그리스도를 어둠은 세상이나 인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둠속에 있는 우리 인생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알리려면 마치 등불이나 등대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수가 있을까요? 거리로 나아가 그리스도를 전하는것도 맞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의 빛을 받아 살아가는 참된 모습을 보이는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심이나 도덕적인면에서 어두운 세상과는 다른 수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게되면 굳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삶에서 빛이 반사되어 어둠을 밝히게 됩니다. 성도된 자들이 세상과 비슷하게 살거나 더 어둡게 살면 빛이 날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등불을 등경위에 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것이 없느니라”
성도가 잘나고 착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빛이 믿는자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 변화된 모습이 어둠을 뚫고 세상에 길을 비추어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언제나 경청하여 세상의 소리에 유혹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신자, 즉 받은 빛의 은혜를 인정하고 잘 보존하는 자는 더욱 많고 크신 은혜를 얻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받았던 은혜까지도 잃어 버리게 될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신자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경외할때 비로소 빛을 비출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복음의 빛을 기쁘게 받아 세상에 반사시키는 거울이 되며 나아가 어두운 세상에 인간 등대가 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4/15) 마가복음4장 “겨자씨의 최대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나라를 고작 겨자씨 한 알과 비교를 하신걸까요? 본문에 답이 있었습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가장 작은 씨앗중에 하나이지만 ‘생명력’ 이 겨자씨에도 있는 겁니다. 하필 겨자씨를 표본으로 삼으신 이유는?겨자씨의 처음 모습과 자란후의 모습이 가장 크게 대조를 이루기때문이 아닐까요?
이 생명력이 어디서 나온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창조의 능력이죠. 창조는 죽은것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있는것을 만드는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하나님께 생명을 얻은 존재는 끈질기게 생명력을 지켜 나갑니다. 봄만 되면 우리는 그 끈질긴 생명력을 여기저기서 무료로 감상할 수가 있을겁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겨자씨가 가진 생명력을 하나님 나라에 비유를 하신걸까요? 천국인 하나님의 나라도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심어진 사람의 삶이 마치 겨자씨의 성장과 같습니다. 겨자씨가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보이지 않게 자라나듯이 우리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나라도 보이지 않게 성장하게 됩니다. 성장하는것까지는 겨자씨와 같은데 사람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나라는 두가지 다른 모양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성장이고 하나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성장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장만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성장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자칫 기복신앙에 빠지게 만듭니다.물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물질의 복도 아낌없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이 겨우 물질의 복, 이생의 자랑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그것은 타 종교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갈구하는 내용과 별반 다를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복은 그런 차원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복입니다.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록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렇게 이루어 주실것을 믿으며 확신하는 자에게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성장입니다.
성도는 고목이 아니라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고목과 거목은 겉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한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고목은 더이상 나무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나무입니다. 열매맺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목은 오래 될수록 더 많이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말합니다.
교회만 오래다니는 사람은 고목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인정받기만 하려고 하고 자존심만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거목이 될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거목이 된 사람은 세상의 일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에 좌우로 치우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깊은 뿌리를 통해서 중심을 잘 잡습니다. 이것이 거목에 새들이 많은 날아오는 이유입니다. 흔들리는 나무에 새들은 집을 짓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천국의 씨가 심기어 졌음을 믿습니까? 겉만 크고 화려한 인생보다 심령이 크고 흔들림없는 단단한 하나님 나라의 나무로 성장할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자라나가길 소망합니다.
(4/19) 마가복음5장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회당장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회당의 대표로서 유대인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인물들 가운데서 선정되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다급히 예수님께 찾아와서 중병에 걸린 딸을 치료해 주기를 간구합니다. 즉시 예수님이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으나 가는 도중 혈루증 앓는 여인을 만나면서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
하지만 야이로는 한번도 예수님의 걸음을 재촉하거나 다른 환자를 돌보시는 모습에 불평하지도 않는 넓은 마음과 성숙한 인품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인내심은 마치 그의 신앙심을 비춰주는듯하는데 불행하게도 집으로부터 딸이 결국 죽게되었다는 가슴아픈 소식을 듣게된다.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이 ‘이제 다 끝났으니 예수님을 괴롭게 하지 마시라’ 는 말을 회당장에게 하였다. 야이로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믿음으로 참아왔었던 그는 잠잠히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가슴을 울리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흔들리던 야이로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예수님을 죽은 딸에게로 인도하게 됩니다. 결국 슬픔에 빠졌던 야이로 집안은 예수님이 다시 살린 딸의 회복으로 인하여 큰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주신 메세지는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사람은 끝이라고 말할때라도 믿는자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고 죽은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포기하게 만드는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대세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될거 같은 두려움, 염려가 우리의 믿음까지 내려놓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의 목전에서 광야로 돌아갔던 이스라엘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홍해를 건너온 그들의 믿음이 결국 대세를 쫒다가 망하게 된것입니다. 10명의 정탐군들의 포기하자는 보고가 대세가 되었을때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가나안에 들어갔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도 내려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타협하는것은 신앙도 믿음도 아닙니다. 끝날때까지 끝난것이 아니란 말이 있습니다. 주님에게는 끝이 없는 영원만 있습니다. 믿는자의 삶도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에 일희일비하기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야이로는 그렇게 인내하고 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기적을 보게 되었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마음이 상한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을 성실히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두려워말고 오직 믿기만 합시다!
(4/20) 마가복음6장 “사명완수”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더라.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믿는 성도에게 주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선택적인 사명이 아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하는 필수적인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교회나 크리스찬은 솔직히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신자들로 판명되면서 교회는 더더욱 복음을 전하는 길이 막히고 있는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신자의 사명은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도 가로 막히는 시간들이 있으셨던 것을 볼수 있고, 그의 제자들의 전도또한 외면을 당하기 일수였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자신의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면서 그들이 믿지 않음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말이 더 잘 통하고 더 친근하게 대해줄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는것처럼 고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은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를 고치시는 일만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알길이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전도하고 가르치는데도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귀찮아 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실을 이상히 여기실 정도였으니, 우리에게도 그다지 놀랄일은 아닌거 같아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 전하실것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전할 기회가 있을때 그저 전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훗날에 하나님앞에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한 자에게나 전함을 들은 자에게도 증거가 될 것입니다. 전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의 담당이시기 때문에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하다가 낙심되고 상처를 받는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니 더 기쁨이 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많은 증거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자신의 학력, 배경,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전하였는지에 대한 증거를 여기저기 남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상급이 될 것이며, 그 증거만 천국에서 유효합니다. 문자 하나를 통해서도 복음전파의 증거를 남기시길 원합니다.
(4/21) 마가복음6장 “회개없는 번민의 결과”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헤롯은 자신이 저지른 불륜에 대한 세례요한의 강직한 믿음과 심장을 찌르는 경고에 마음이 찔리고 삶에 번민함을 느꼈던것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요한의 죽음을 지시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은 헤롯의 모습은 우리에게 양심은 있으나 양심대로 실행하지 못한 그의 나약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가 양심의 찔림을 받고도 양심의 호소에 따르지 못한것은 그에게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만 넣어두신 죄에 대한 경고의 종과 같은 것입니다. 누구나 양심의 종이 울릴때 뜨끔해진다. 하지만 그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헤롯의 번민은 그가 세례 요한의 말이 옳은 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로운 행동에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양심을 통해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죄에 대한 번민함을 주신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넘어가는 번민함은 오히려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거나 양심의 소리를 무시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헤롯은 헤로디아의 딸의 섬뜩한 요청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자신의 위신을 보존하기 위해 허락해 버리는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을 찌르시는것은 우리의 가려는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시는 현상입니다. 그 현상을 무시하지 마십시요. 회개는 우리의 잘못되고 그릇된 삶과 모습을 바로 잡도록 합니다.
다윗의 유명한 회개와 비탄의 시인 시편51편을 살펴보면 그가 왕이었으나 하나님이 주신 번민함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깊게 반응하였는지 살펴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며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미워하시지만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항상 민감하게 깨어 반응하는 주님의 종들이 됩시다.
(4/22) 마가복음6장 “기다리는 신앙”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고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만약 점심때라면 아마 사람들에게 어느정도 먹을것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대개 아침에 나온 사람들은 점심을 챙겨오던지 아니면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식을 가진 사람이 없었던것을 보면 그들이 거기에 저녁까지 있게될줄은 몰랐던것 같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저녁 먹을때즘 일어난것이 주는 인사이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끝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며 예수님과 함께 있는자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죠? 배고프다고 먼저 간사람들은 놀라운 은혜의 잔치에 참여할수 없었다는 겁니다. 신앙(믿음)은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기다리지 못해서 믿음의 능력을 맛보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득히 기다리며 기도의 자리, 말씀묵상의 자리를 지킬수 있어야 합니다. 농부는 늘 비를 기다린다. 이스라엘에는 농사에 필요한 비가 세종류가 있다고 한다. 가을비, 봄비, 겨울비이다. 강수량을 보면 가을비와 봄비가15%,겨울비가 무려70%라고 한다.
우리 생각에 농부는 겨울비를 제일로 기다리고 좋아할거 같죠? 그런데 농부는 가을비와 봄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적당하게 내리는 비를 통해 여름동안 메말라있던 땅이 적당하게 적셔져서 농작물이 잘 성장할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성경은 가을비와 봄비를 이른 비, 늦은 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른 비, 늦은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신명기 11:14)
욕심이 많은 초보 농부는 아마 겨울비를 기다리다가 한해 농사를 망칠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지혜로운 농부와 같이 적당하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며, 그날주시는 은혜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해서는 염려보다는 내일 주시는 은혜를 또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귀한 믿음입니다.
(4/23) 마가복음6장 “성도의 상식과 논리”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기적이 일어나기전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절대 순종에 대한 믿음이 아직 부족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가지 제안하였는데 거기가 빈 들이라 먹을것을 얻을때가 없다는것이고, 각자 해결하도록 하자는 것이 모든 제자들의 하나된 의견이었다.
제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는것은 충분히 수긍할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의견에 예수님이 동의하지 않으셨다는것은 우리가 깊이 상고해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모든사람들이 합의하고 동의했다고해서 그것이 항상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수가 동의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방향을 가르킨다면 그 길로 가보아야 한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수가 동의할때 나오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마음에 결정을 내리고 합의를 이루어 냅니다. 세상은 이것을 상식이고 논리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증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홍해앞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합의한것이 ‘이길은 아니다’ 였지만 모세는 거기에 합의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홍해앞이었지만 거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면 분명히 길이 있을것이란걸 믿고 하나님께 간구했더니 정말 그곳에 길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자에게 있어서 상식은 눈에 보이던 보이지 않던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논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어떤일에 만장일치라는 결과가 나오고 그것이 대세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 결과를 수락하지 않는사람입니다. 즉, 버티고 부딫히란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합의를 깨버리신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더이상 길이없어, 답이 없어, 우리 능력밖이야’ 이런 말들이 나올때에도 그것이 오직 상식이라고 답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말씀에 제자들의 반응을 보세요.
“우리가 가서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으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을것이라고 단정했지만 예수님말 듣고 조사해보니 비록 조금이지만 뭔가 음식이 있긴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결국 그들이 찾아낸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나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지만 접지말고 더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수 있다고 하신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찾아온 음식을 가지고 기적을 창출하신것입니다.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인간적인 결론부터 내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때에도
답이 없다, 길이 없다고 미리 결론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수백만가지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길을 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것. 그것이 우리의 상식이요 논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