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 마가복음7장 “자존심을 내려놓는것이 믿음이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하나님을 믿지않는 헬라지역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든 병을 고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멀리서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성도 무시된채 예수님께 자존심만 다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딸을 마치 개로 여기는듯한 말을 들었지만 그 여인의 입에서는 상상치 못할 말이 나왔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을 바꾸면 이런뜻이 될거 같습니다. ‘네, 주님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천한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같은 인생에게도 은혜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말에 감동을 받으시고 즉시 딸의 몸에 있었던 귀신을 쫒아 내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 여인은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고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을까? 지금 자존심 같은것을 따질때가 아니란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녀에게는 오로지 딸의 질병을 고침받는것 밖에 없었습니다 .
자존심보다 더 귀한것이 고침받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의 말에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리한 질문을 가볍게 넘어간 여인의 재치를 예수님은 믿음으로 여겨주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겸손한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나가고 탁월할지 몰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앞에서는 자신을 개로 여긴 여인처럼 낮추고 또 낮아져야 합니다.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했다면 문등병을 치료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종이지만 그의 훈계를 듣고 엘리사의 지시에 겸손히 순종했을때 더러운 문등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나를 교만하게 만드는 자존심은 우리의 영혼까지 더럽힐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총을 더 사모한다면 그 자존심을 꺽어야 하고 내려놓아야 씻음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존심은 정말 하찮은것입니다. 하늘의 복과 바꿀만큼 우리가 굳게 잡아야하는것이 아니란뜻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면 나의 자존심 하찮게 여기는게 맞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딸의 질병을 고침받게된 이 여인이 참으로 지혜로와 보입니다. 인간적인 자존심은 No, 신앙의 자존심은 Yes!
(4/28) 마가복음8장 “잊어버리지 말아야할 은혜”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복음서에서 무리들을 먹이시는 두번째 기적입니다. 이전에는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열두광주리를 남기셨고 이번에는 떡 일곱개와 생선 두마리로 사천명을 먹이셨고 일곱 광주리를 거두셨다. 그래서 각각 오병이어 그리고 칠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기전에 볼 수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마음에 아쉬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굶고있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을때 그들은 말하기를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로 얼마전에 똑같은 상황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들 눈 앞에서 보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또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왜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걸까요? 혹시 이런 마음을 가진것은 아닐까요?
‘에이, 설마 또?’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의심은 신앙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오랜시간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허구한 날 책망을 받은것이 믿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왜 믿지 못하느냐’ 제자들의 믿음이 자라지 못한 원인은 받았던 은혜들을 잊은채 또 다시 육신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영을 만족하게 하며 영안을 뜨게 하는 도구입니다. 어제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는 사모하고 갈급한 심령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우리의 영혼도 주님의 은혜를 찾기에 갈급해야 합니다. 찾는자만이 찾을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새 은혜, 새 능력, 새 기쁨을 얻도록 간구합시다.
(5/3) 마가복음9장 “믿는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재중에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귀신을 내쫒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돌아오신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 실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지만 이미 제자들에게 실망했던 그 아버지가 예수님에게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격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 아버지는 곧바로 뉘우치며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고 하소연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 내시자 제자들이 와서 자신들은 왜 못했었는지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이 믿음의 기도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믿음이 부족한 경우가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이처럼 반신 반의하는것은 믿음도 아니고 그런 마음이 있는 기도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99% 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1%의 불신앙이 의심과 두려움을 만들어 넘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결과를 따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기도전에 모든것을 하나님께 맡기었다면 원하지 않았던 결과도 응답으로 받아들일수 있는것이 참 믿음입니다. 자신의 기도대로 되면 좋으신 하나님이고, 안되면 나쁜 하나님입니까?
온전히 기도하다가 결과를 보고 불신앙으로 기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신실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주시든 우리에게 가장 좋은것을 주십니다. 눈 앞에 보이는것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깊고 높으신 주님의 뜻을 잠잠히 바라보는 믿음을 가집시다.
(5/4) 마가복음9장 “겸손하고 또 겸손하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제자들이 서로 누가 더 높으냐고 다투는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시청각 교육을 하셨습니다. 그당시 가장 천대받고 외면받는 대상이었던 어린아이를 가리키시면서 천국인의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과는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것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강하고 똑똑하고 부자일수록 더 높아지고 교만해지는곳이 세상이라면, 천국은 그 반대로 사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 = 예수님을 영접 = 하나님을 영접
놀랍게도 천국은 가장 낮은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크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물질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 사랑을 자신의 뒤에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천국의 도식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답은 한가지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를 자신의 삶에 늘 적용하면 됩니다. 나의 자아로는 안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는 어린아이를 섬기는 일이 어려운데 그 사이에 예수님을 모시면 이 일이 이루어 집니다.
배우자,직장동료, 자녀, 부모, 이웃, 어떤 관계에도 예수님만 모실 수 있다면 우리는 천국의 도식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들을 무시하고 외면하지만
천국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일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삶이었습니다.
하나 하나씩 알아가고 배워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말씀을 펴서 읽으시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안을 여시고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있기를 소망합니다.
(5/5) 마가복음 9장 “죄와 벌”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 구절을 한번 이상은 들어 봤거나 읽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찔림을 받거나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오면서 이와같은 경험을 했었기 때문일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과격하게 표현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이 구절은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자’ 즉 아주 미약한 자일수록 더욱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믿는 자를 꾀어 범죄하도록 만드는 자, 예수를 잘못 믿게 만들거나 거짓 복음을 가르치는 자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떨어지게 될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신 내용도 우리의 마음을 떨리게 하신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이 지옥임을 강조하시면서 지옥의 무서움과 비참함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천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곳임을 강렬하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우습게 여기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이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 한탄하게 될것이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보면 이 땅에 살때에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았던 부자가 죽자마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수 있습니다. 천국에 있던 나사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반드시 예수 믿어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천국의 삶의 백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것이며,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나빠도 지옥에 비하면 여기가 천국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벌을 주시며 공의를 실천하십니다.
이 땅에서 소금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맛을 잃으며 사는것이 죄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예수가 되어 이땅에서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천국의 맛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자신은 이 세상에서 어떤 맛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의 행동과 삶을 말씀에 비추어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5/6) 마가복음 10장 “어린아이 같이 받지 아니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이의 부모들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아이를 만져주시길 바라며 아이들을 예수님께 보냈으나 제자들은 이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꾸짖는 일이 일어납니다. 아마 그들은 바쁘신 예수님을 위한답시고 했었던 행동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귀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당시 아이들은 여자와 더불어 유다 공동체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 부류에 속합니다.
어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항상 뒷전이었던 아이들을 예수님은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그들을 안아 축복해 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과 무리들의 귀에 경종을 울리는 메세지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 같이 받지 않으면 들어갈수 없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이들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일순위라는 말이 아니라
어른과는 다른 어린아이의 단순한 행동을 예로 삼으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주려하는것에 불평하지 않는다. 먹여주면 먹고, 입혀주면 입으며, 무엇보다 부모의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부모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천국은 거래해서 가질수 있는것도, 분석해서 답을 얻어야 갈수 있는곳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온전히 믿는자에게만 입국이 허용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갈때는 요목조목 따져보고 계산도 해야하지만 믿음의 삶은 오직 은혜이며 믿는 자에게 조건없이 주시는 선물이 천국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없이 살아갈 수 없는것처럼 믿는자는 은혜 주시는 하나님 없이 살수가 없습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그 나라에 가기까지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5/7) 마가복음 10장 “나의 진짜 관심은?”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는 이 사람을 가리켜 ‘부자 청년’ 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청년은 천국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것일까? 이세상의 귀한것을 다 누리고 있으니 천국도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여긴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 부자청년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슬펐습니다. 그에게 물질은 인생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것을 놓아야 한다는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던거 같습니다. ‘아무리 천국이 좋은곳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돈이 천국이야.‘라고 결정합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천국에 가는것이 이 땅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부유하게 사는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는것을 알려주시려고 했지만 그는 돈을 잃어 버리느니 천국을 포기하는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세상의 것들이라면 그것들에서 시선을 다시 가져 오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을 포함해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소유인 것은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모든것의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것으로 우리는 살아가는것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청지기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이 천국을 소유할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무엇이든지 천국을 위해서 내려놓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자청년이 예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었다면, 그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거 같습니까? 예수님이 그가 다 팔았던 물질을 다시 돌려주셨을까요? 그러실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예수님은 그 부자청년의 삶을 완전히 리셋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더이상 물질에 만족하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세상의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의 것을 더 믿고 가치있게 여기게될때 인생은 완전히 새로워 지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관심을 오직 하늘의 상급에 두시길 축원합니다. 그렇게 될때 우리는 이 땅에서 온전히 순종하며 청지기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또 하나님의 소유를 맡은 자일뿐입니다. 주인의 것에 욕심을 내는 어리석은자가 되지 마시고
주인의 마음에 더 관심을 가지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5/10) 마가복음10장 “너희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야고보와 요한형제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언가를 구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셨고 그들은 다른 10제자들의 원망과 원성을 자아내는 말을 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공교롭게도 이들의 간구가 예수님이 당신의 고난을 예고하신 직후에 나왔다는것이다. 이 형제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듯 보이며 그저 자신들의 미래만 고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는자는 당신이 당하실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실수 있는 자여야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현실을 정확히 볼수있는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가 지나가심을 듣자마자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심을 간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가로막힘을 받았으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소리 질러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르시고 마치 야고보 요한에게 질문한것처럼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에 바디매오는 망설임없이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간청같아 보이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 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진실한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만약, 그가 금이나 은을 구했다면? 혹시 얻었을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에게 그것이 과연 무슨 유익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간구를 믿음으로 받아주신것은 그가 육신의 눈을 떠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니라.’
믿음의 삶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주신 말씀을 정확히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찾는자가 현실을 올바로 바라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이 하신 말씀을 외면했을때 그들이 바라본것은 인간적인 욕심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세상의 물질과 헛된 욕망에 어두워지지 않도록 말씀을 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빛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볼수 있는 신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5/11) 마가복음11장 “변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이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렇게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뻐했던 사람들이 왜 몇일후에는 성난 군중이 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것일까? 왜 이들은 변심한 것일까? 사람들이 변심하는 이유는 배신과 탐심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자신을 배신했을때 마음이 떠나게 되며, 더이상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할때 마음이 돌아서게 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들이 변심한 까닭은 후자라고 볼수있다. 메시야가 엄청난 파워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고 태평성대를 누릴줄 알았는데 예루살렘에서 보여준 예수는 기대이하였을뿐만 아니라 힘없이 붙잡혀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0명의 보고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 변심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거기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던지 광야에서 살자는 쪽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최적의 때라고 믿고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습니다. 왜 그들은 변심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에게 가나안은 환경이 아니라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은 약속때문에 하는것이지 눈에 보이는 환경이나 유익을 바라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성도라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믿고 변심하는 세대와 반대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가나안땅에 들어간 사람은 1세대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맺으신 약속은 온전히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갈렙을 향해 하나님은 ‘그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영어로 보니 ‘He has a different spirit’ 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변심해 버리는 이 세대가운데 신자들은 적어도 세상과는 다른 심령으로 살아야 천국이 가까와 지지 않을까요?
(5/12) 마가복음 11장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은 이시대 신자들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께 저주를 받은 까닭은 간단하다. 창조하신 고유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무화과 나무는 다른 열매맺는 나무와 달리 열매를 맺은후에야 잎이 무성해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보신 이 나무는 앨매 맺기도 전에 잎이 먼저 무성해진 것이다. 이것은 창조질서를 거스런 기괴한 현상이었으므로 예수님께 저주를 받아 말라버렸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통해서 열매없고 잎만 푸른 신자의 모습을 경고하신다고 믿습니다. 겉모습은 신자인데 삶에는 믿음의 열매없이 살아간다면 바로 주님의 경고의 대상이 될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씨를 통해 신자들이 삶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십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날마다 열매맺는 삶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것은 경건의 삶을 연단받는것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삶을 위하여 빼놓을수 없는것이 말씀과 기도의 모습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다듬어 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 즉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는 모습이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신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도록 창조된 인생이 죄로 인하여 자신만을 보게 되었지만 신자된 자는 다시 그리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듣는 삶은 오직 말씀과 기도밖에 없습니다. 힘을 냅시다. 주께서 도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