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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구 요셉 & 신 요셉”
마태복음을 펴면 길게 이어지는 예수님의 족보가 펼쳐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내려가다보면 마지막 예수님 이름앞에 놓여진 한 이름을 볼 수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다. 어머니 마리아에 비해서 성경에 그렇게 많이 기록되지도 않고 그다지 중요한 인물로 거론되지 않지만 1장에서 볼 수 있는 요셉의 행실은 어쩌면 마리아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한 것이라고 본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남자였다. 아직 결혼전이었는데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시대적 배경으로 볼때 이와같은 상황은 돌맞아 죽을수 있는 심각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 일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었다. 곧바로 주의 사자를 통해 정확한 자초지종을 듣게되었고 요셉은 아들을 낳기까지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구약의 요셉을 참 좋아한다. 그의 정직과 강직한 믿음을 본받고 싶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오늘 만나는 의로운 남자도 이름이 요셉이다. 그래서 구 요셉 & 신 요셉 이렇게 불러보았다. 심중에 우리 딸들이 이런 요셉같은 남자를 만나기를 소망했다. 구 요셉이든 신 요셉이든 이들이 보여준 순수한 믿음과 의로운 순종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사위감에 부족하지 않는 장인 요셉이 되는게 순서인듯싶다. 믿음에도 의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하나님께 의리를 보이는 신자가 많지 않아 보여 속상하다. 하나님은 더더욱 그러하시리라. 하지만 아직 절망하기는 이른거 같다. 간혹 그런 인물들이 보이기 때문이리라. 성경의 인물들을 부러워만 하지말고 자신이 한번 그와같은 삶에 도전해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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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장 “순종하는 사람들”
2장에는 마치 스파이영화에서나 볼듯한 드라마틱한 장면이 등장한다. 유대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이 그 아기를 찾으려고 하자 하나님은 헤롯의 악한 마음을 아시고 아기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작전을 진행하셨다. 먼저,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 가지말고 곧바로 떠나도록 하셨고, 요셉에게는 애굽땅으로 가서 헤롯이 죽을때까지 머물도록 지시하셨다.
그리고 헤롯이 죽게되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인도해 주셨다. 결국 하나님의 기막힌 작전지시로 말미암아 아기예수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다. 작전은 누구나 만들수 있지만 실패하는 작전도 많은데 그 이유는 작전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작전을 실행하는 사람이 불이행할때일것이다. 하나님의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작전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적이 없으며 이미 창세전에 철저히 계획된것으로서 만약에 한개의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더이상 그 명성을 얻을수 없게 될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이래로 단 한번의 오류도 발견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작전을 실행하는 인생들이 온전히 순종하기만 한다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계산이 바로 나올수가 있겠다.
하나님의 치밀한 작전을 막으려는 마귀의 방해가 있었지만 요셉은 자신의 상황이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지시에만 순응하여 헤롯의 광기적인 행동을 피하여 작전성공을 이룰수가 있었다. 함께 읽고있는 창세기6장에서도 순종의 아이콘이 등장하는데 바로 노아이다.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던 하나님의 방주만들기 작전에 투입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그 엄청난 방주를 수십년에 걸쳐서 완성하였고 구약최초의 순종의 아이콘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빈틈없는 작전계획에 요셉과 노아처럼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 더해져서 하나님의 뜻이 이땅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마음에서만 끝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능력있게 임하는것을 우리모두 경험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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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장 “하나님이 받으신 세례”
3장에는 예수님이 오시기전 죄인들을 향하여 회개를 외쳤던 세례요한의 활약상을 볼수가 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사명을 감당했던 인물이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삶을 피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생활하며 죄를 멀리하였고 그의 가르침에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찾아와 죄에 대한 세례를 받았다.
이 말씀을 읽다보면 의문점이 생기는데 왜 예수님이 죄인도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가 하는 점이다. 세례요한자신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자 극구 사양하면서 자신이 주님께 받아야지 자신이 어떻게 세례를 베풀수 있냐고 거절하였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나님이시고 당연히 죄가 없이 태어나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인 죄인들을 향한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의 대속물이 되시기위해 성육신하신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의 대표로 모형을 갖추셔야 했기에 굳이 죄인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속죄함은 철저하고 완벽해야 했으므로 인생을 구원하시는데 있어서도 한가지라도 소홀하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순종하며 낮아지셨던 것이다. 죄인의 입장에서야 너무나 기쁘고 환영할 일이지만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너무 기가막힐 노릇이며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깨끗함을 입는 세례를 받는다는것이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말없이 순종하시고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말씀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의 순종을 보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셨음을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관철하시고 그런 수모를 다 참아내시는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신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일에 무조건 순종하시고 인내하셨다. 노아가 그 거대한 방주를 인내함으로 완성하며 순종했을때 노아의 가족을 태운 방주는 죽음의 물심판에서 구원을 얻을수가 있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도 동일하다고 본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처럼, 먼저해야 할일이 무엇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노아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 가운데서 구원받는 삶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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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장 “예수님의 사역”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공생애의 시작이 선포되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첫 사역은 40일 금식기도로 막을 열게 되었다. 예수님이 기도로 포문을 여신것은 그의 공생애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를 가늠케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역에 앞서 늘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악한마귀는 그 틈을 노려 예수님이 하나님과 교통하는것을 막기 위해서 예수님의 관심을 세상의 것으로 돌리려고 시험을 해보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모두 물리치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에 기도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 신자들의 삶에도 기도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자들의 삶은 분명히 힘을 잃게된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했다. 건강한 호흡이 없이는 절대로 건강한 몸을 얻을수 없는것처럼 기도없는 신앙생활도 건강할수가 없다.
예수님은 곧이어 갈릴리에서 고기잡던 4명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면서 당신의 사역의 핵심이 제자삼는 일임을 보여주셨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 네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물과 배 그리고 가족까지 뒤로한채 예수님을 따르는 결단력을 보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신자들이 눈여겨 본받을만한 모습임에 틀림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보다 더 마음을 빼앗기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치않는 모습일 것이다. 이것은 교역자나 일반 신자들 모두 예외가 없다. 제일계명에 기록된것처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좇는 삶에 있는 장애물들을 과감하게 치울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한눈 팔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역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곁눈질 하지 않기 위하여 늘 기도하여 힘을 얻고 말씀을 통하여 방향을 찾을수 있는 신자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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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천국에 들어가는 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구절은 자칫 행함으로 구원얻는다는 생각을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심하게 혼이 났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의로운 일, 즉 선한 일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혼이 났을까? 그들의 선한 행위가 모두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한 일이었으며, 더큰 문제는 외식적인 마음으로 했음을 예수님께서 보셨기 때문이다. 마음은 별로 돕고싶은 마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는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지갑을 열었다는 뜻이다.
성경은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를 가르친다. 무엇이 다른가? 신본주의를 가진 사람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본주의를 가진 사람은 왼손을 불러놓고 오른손이 하는일을 보도록 하는 사람이다. 거기에는 자기만족, 자아도취, 육신의 정욕이 가득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심한 욕설을 하셨던 것이다. 그런 인본주의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있는 모습이 되지못할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는 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보다 더 나은 의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정말 문자그대로 그들보다 더 확장된 의를 하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일순위는 부자들이 될것이다. 이세상과 똑같이 돈만 들이밀면 모든것이 통하는 곳이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어떤 인간의 행위로 들어갈 수도 볼수도 없다. 오직 천국에 합당한 의의 옷을 입은 사람만 들어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나은 의’ 는 그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의를 말하는 것으로서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지는 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로 칭함을 받은 사람이 보여줄수 있는 의로운 행위가 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것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양보한 것,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주려고했던 많은 물질을 거부하면서도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을 챙겨주었던 행동, 무엇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신이 한것인냥 가로채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의가 바로 천국에 합당한 신본주의 신앙인 것이다.
심은데로 거두는 것이 천국의 상식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입었다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신자의 삶에서 의롭게 나타나는 것이 우리 믿는자들의 상식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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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2) “바보에서 형님으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중에 이 말씀은나에게 좀 특별하다. 어쩌면 말씀의 능력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구절이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시절(아마 9-10살) 나는 어린 사촌동생에게 조롱(?)아닌 조롱을 당한적이 있었다. 외동아들로 자란 이 친구는 개구쟁이에다가 말을 함부로 하는 조금은 버릇없는 행동을 곧잘하곤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나만보면 ‘바보니’ 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 말에 화도내고 혼도내었지만 나의 그런 반응이 재밌었는지 어린 동생은 멈출줄 몰랐다. 그렇게 알게모르게 스트레스를 받던 어느 주일에 나는 설교시간에 들었던 이 구절에 마음이 전율하는듯한 흥분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형제에게 라가(바보), 미련한 놈(바보)이라고 부르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을 듣고는 어린마음이었지만 강한 무언가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예수님의 명령처럼 가서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그날 예배에 참석했던 그 녀석을 불러서 한적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너 성경을 믿니? 너 하나님을 믿어?” 그랬더니 “응, 믿지” 그리고 나의 인생 첫 설교는 그렇게 불을 뿜기 시작했다. 성경을 펴서 오늘 들었던 그 구절을 목소리에 힘을 주어 읽어주었다.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것을 보면서 놀랐으며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때문에 나는 또한번 놀랐다. “형,미안해 다신 안그럴께”
정말 놀라고 또 놀랐다. 그날 이후로 그 아이의 입에서는 한번도 ‘바보니’ 라는 말이 나온적이 없었다. 할렐루야~ 그 친구는 그 날 일을 기억할까? 못해도 상관없다. 나는 분명히 말씀의 능력이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아이의 마음도 변화시킬수 있다는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구절에 나온 말씀은 신자들의 언어생활이 신앙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우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다시 주워담기란 어렵기 때문에 나오기 전에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님도 그런 말로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있다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전에 먼저 사과하고 관계를 회복하는게 순서라고 하셨다.
주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화를 멈출수 있고 노를 발하지 않을수 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이 말씀을 담아 말로서 범죄하지 않는 주의 자녀들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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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3) “미션 임파서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 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빛이라 하시며 성도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 사명이 적용 되어져야할때가 언제인지 알려주셨다. 소금은 녹아져야하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하는 희생이 있는것처럼 성도의 사명에도 희생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시는거 같다.
그런데 그 희생이 나 자신의 유익을 얻기위함이거나 나의 행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한참 벗어난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도의 사명인 희생은 나를 위함도 아니요 상대를 위함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나의 오른뺨을 치는자, 나를 고발하는자, 나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자들에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수 있으며 그 미션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이거야 말로 미션 임파서블하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미션이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입이 딱 벌어진다.
나의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신다. 나를 고발하여 속 옷을 얻고자 하는자에게 겉옷도 주라신다. 나로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 리를 동행해 주라고 하신다. 솔직히 한숨이 나오는 미션임에 틀림없다. 과연 몇%의 신자들이 이 미션을 수행할 수 있는가?
아마 0에 다가 소수점을 찍은 정도의 극히 낮은 가능성이 나올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현장에서 듣고 있었던 제자들과 무리들은 기가막혀 입도 다물어 지지 않았을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말도 안될것 같은 미션을 바보같이 해버리는 사람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제서야 이 미션이 성공할때 나타나는 핵폭탄급에 비길만한 은혜의 파장을 보게된다.
그리고 그들도 용기를 얻어 저마다 불가능할거 같은 이 미션에 도전장을 내어민다. 이 말도 안될거같은 미션을 바보같이 수행한 사람은 바로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유월절 제단위에서 태워 없어지던 어린양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치고, 고발하고, 생명을 뺏으려는 자들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 예수님은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며 그 희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알리셨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을 제일 먼저 지키시며 본을 보이시자 줄줄이 그 뒤를 따르는 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미션을 우리에게 주신적이 없다. 다만 그것이 세상의 이치와 다르고 자신의 자아가 승낙하지 않아서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을뿐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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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6장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랑하는 사람들은 유독 대중적인 만남보다는 은밀한 만남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상대가 나에게 혹은 내가 상대방에게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만의 여행을 통해 가정 공동체의 끈끈한 정을 돈독히 한다. 부부만의 시간을 통해서 서로를 깊이있게 이해하고 보듬어 줄수가 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은 은밀히(in secret) 보시고 갚으시는(reward) 주님이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은밀한 모임을 갖는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만 집중하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모든 관심을 은밀한 중에 있는 자녀에게 쏟아 부으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못하는 하늘의 은밀한 일을 보이시리라”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밀한 하늘의 일을 알려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세상의 문제를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므로 이땅에 속한 어떤 문제도 풀리지 않는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갚으심(Reward)이다.
반대로 하나님과 은밀한 만남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똑같은 문제를 만나지만 그것이 짐이 되어 고민과 염려로 갈등하게 된다. 홍해라는 큰 문제에 봉착했을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 한사람의 모습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들은 절망했으나 모세는 살 길을 찾았다.
늘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통해 답을 얻은 경험이 있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은밀한 일을 받아서 홍해를 가르는 비상식적인 일을 만들어내었다. 하루 세 번 항상 하나님과 은밀히 교통했던 다니엘은 그 일(은밀히 하나님께 기도하는)이 이제 자신을 죽일수 있다는것을 알았음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도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났다.
신자는 상식만이 통하는 세상에서 비상식적인 삶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있는 사람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일은 비상식적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런데 그 일을 해낼수 있다면
하나님이 그에게 갚으시는 은혜를 부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상받기를 원하는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 길을 당신에게 보여 주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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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2) “주시는 자도,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헌금을 강요하는 말씀으로 본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진의를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인생의 목적이 물질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인데 만약 물질에 두는 사람이 있다면, 그 물질로 인하여 결국 진정한 삶의 목적을 놓치게 될수 있다는 경고이다.
진정한 삶의 목적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의미는 헌금을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니라 물질이 들어오고 나가는것을 오직 하나님께 맡겨 두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물질은 우리 인생을 위해 너무 필요하지만 거기에 집착하는 삶은 결국 물질에 얽매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소돔왕이 제공하는 엄청난 전리품을 가질 기회가 있었으나 단숨에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을 소유함으로 자신이 드러나고, 소돔왕이 드러나는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을때 아브라함은 그의 시선을 물질에 두지 않았고 오직 천지의 주재이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둘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땅의 보물에 우리의 마음을 둔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곳이 작아지고 급기야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내가 네 영혼을 가져가면 이 물질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이 온 땅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라. 하나님은 주시는 이시요 또한 취하시는 이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자.
영적인 눈을 떠야지 우리의 눈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것을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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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3) “염려하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인생에게 있어서 특히 주를 믿는 자에게 가장 쓸모없는것이 ‘염려, 근심’ 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라도 더 할수 있느냐?’ 다른 피조물들은 절대로 염려하지 않는데 왜 유독 너희 인생들만 염려를 하며 걱정 근심에 빠져서 사느냐? 라고 책망하신다.
그렇다. 왜 우리 인생들만 염려하면서 사는걸까? 염려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먼저 염려함으로 발생하는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왕이 두려워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다시 속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또 그런 생각을 가진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라”
하나님보다 앞서서 생각하게 된것이 그를 더 큰 염려의 구덩이로 몰아넣은 계기가 된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먼저 경외하고 바라보았다면, 비록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실것을 믿고 또다시 거짓으로 하나님을 속이지 않게 되었지 않았을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에서부터 염려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염려속에 빠져있는 인생들에게 ‘너희는 먼저’ 라는 우선순위를 매겨주신것이다. ‘너희는 먼저, 즉 염려하기전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것 (염려하는것들) 들이 염려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있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것보다 항상 하나님을 먼저 찾고 경외한다면 염려가 우리의 삶에 접근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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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7장 “황금률보다 금 같은 삶”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The Golden Rule 흔히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말씀이 바로 7:12절이다. 왜 황금률이 되었냐하면 3세기 로마의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이 구절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거실에 금으로 글씨를 새겨놓은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구절을 ‘황금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율법이요 선지자’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은 황금판에 새겨놓고 보라는 뜻이 아니라 듣고 읽은 후에는 행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씀이 좋아서 액자에 담고, 성경에 빨간줄을 그어도 지키지 못하면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선지자는 율법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기막히게 말씀을 증거해서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준다고 해도 자신이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도 영향도 끼칠수가 없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행함이 없는 황금률도 그림의 떡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행동해야 할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싶어서 내가 남을 대접하라는 뜻일까?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남을 대접할 수 있다면 나쁘진 않겠지만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전에 먼저 섬김수 있는 모습이다. 예수님도 내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고 하셨지 않은가!
어떻게 그런일이 가능할까?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면 먼저 섬길수 있고 대접할 수 있다. 나이, 성별, 국적, 직업과 상관없이 허리를 숙일 수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것도 놀라울 따름인데 하나님이 인간을 직접 섬기시는 본을 보이셨으니 바로 그분의 말씀이 진리인 것이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삶이 금과같은 인생이다. 주의 말씀은 7:12뿐만 아니라 모든 말씀이 다 황금률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그 룰을 금으로 멋지게 장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지켜서 금과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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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7장(2) “반석 Realtor”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집을 짓는것으로 비유하셨는데 마치 Realtor (부동산)이 좋은 집을 소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집과 예수님이 소개하는 집은 좀 차이가 있어 보인다. 굳이 장황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집은 편안하고 살기 안락한 공간을 선호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집은 튼튼하고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집이다. 전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까지 고려하여 짓는 반면에, 후자의 집은 오직 하나님의 시선에만 집중하여 지어지는 집이다.
세상의 집도 견고하게 지어져 왠만한 비바람에도 끄덕이지 않는다. 그러나, 쓰나미급의 물이 닥치면 존재가능한 집은 없을 것이다. 노아시대에 사람들이 자신만의 집을 열심히 짓고 폼나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홍수에 괴멸하고 말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노아가 만든 방주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에도 파괴되지도 무너지지도 않고 끝까지 버틸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노아가 지은 집이 생명을 지키는 방주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집은 반석위에 짓는 집으로서 반석과 같은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위에 세워지는 집이다.
영생을 위한 집이 아니라 이세상을 위한 집을 아무리 세련되고 강하게 지어보아도 마지막날에 모두 날아가 없어질것이다. 이땅에서 세운 공력도 모두 붙타 재가 되어 버릴것이니 바로 이것이 모래위에 지어진 집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반석 Realtor 가 되셔서 지금도 사람들이 반석같은 집을 찾도록 홍보하신다. 반면에 마귀는 모래 Realtor 이다. 온갖 사탕발림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모래성을 지어나가도록 하고 선전하고있다. 절대로 현옥되지 말자.
반석이신 그리스도위에 느려도 하나 하나 우리의 영생을 위한 집을 지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집은 노아의 방주와 같이 마지막날에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는 영원한 피난처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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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8장 “볼 필요도 없는 믿음”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백부장은 이방인이며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군인이다. 한국 군대로 따지면 중대장급 되지싶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직책임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멋진 훈장을 하나 달아주셨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에 대한 훈장이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 믿는 사람에게 훈장은 예수님의 칭찬인데 우리의 믿음을 향한 칭찬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상이다. 예수님이 백부장이 보인 믿음에 놀라신 이유는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의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위해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집에 갔을때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리브가를 만날수 있었고 리브가가 하나님이 택하신 이삭의 베필임을 리브가의 아버지와 오빠에게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의 반응이 이랬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들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이 반응은 이와같은 기묘한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했음을 온전히 신뢰하겠다는 고백이다. 이들은 이삭을 본적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깨닫게 되자 볼 필요도 없이 승낙을 하였다.
우리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훈장(상)은 바로 응답이다. 아브라함의 종도 백부장도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상황과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볼 필요도 없이 믿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실것이라고 믿는다. 믿는다고 하면서 좌로 우로 치우치고 이것 저것 자신의 유익과 따져보다보면 응답받을 기회를 놓치게 될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기도에 항상 능력이 임하고 역사가 나타나는 법이다. 기도하는가? 기도하기전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온전히 소망하라. 볼 필요도 없는 믿음은 믿는데로 말하고 행동하는것이다. 볼 필요도 없이 믿는 자에게 주님도 볼 필요도 없이 응답하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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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2)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이야기이다. 가다라지방은 요단강 동쪽편에 위치한 도시로서 그당시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로마가 통치하던 도시였다. 심각한 우상숭배가 자행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접근을 꺼려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이 만류하는 그곳까지 굳이 가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쫒아버린곳은 바로 돼지떼안이었다. 귀신들린 돼지떼는 바다로 뛰어들어 몰살해 버렸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소문은 삽시간에 가다라 지방에 퍼졌고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하신 예수를 만나려고 찾아왔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해졌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떠나도록 만들고 말았다.
무슨일일까? 귀신을 쫒아내신 예수님을 왜 그곳에서 떠나기를 요구했을까? 그곳은 이방사람들이 우상숭배 비지니스를 하는 지방이다. 그들에게 돼지는 중요한 제물이었으므로 돼지를 양육하며 살던 주민들에게 예수님은 자칫 자신들의 사업을 망치게 만드는 존재가 될것이라 생각했던거 같다.
예수님이 귀신들을 돼지떼에게 보내어 돼지들을 없애버리신것이 우연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그 지방 사람들이 우상숭배하는것을 멈추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우신것이다. 하지만 그 지방사람들은 귀신을 쫒아내고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께 주목하지 못하고 그저 잃어버린 소유만 아까워하고 주목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데 정작 사람들은 한 사람 귀한줄을 모르는거 같다. 먼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할뿐이지 다른 한 사람의 행복따윈 안중에도 없는것이 이세상의 모습이라면, 참 씁쓸해진다. 예수님도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그들이 진정으로 죄짓는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셨는데 당신에게 돌아온것은 자신들의 일에 상관말고 떠나라는 말이었으니…
주여! 영적으로 어두워진 이 세대가 빛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볼수 있는 영안이 열려지기를 소망합니다.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주님닮은 연민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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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9장 “병 고침받는 믿음”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9장은 각종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치료하시는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두가지를 간단히 발견할 수 있는데 치료받기 원하는 환자의 간절함 혹은 아픈자를 위하여 예수님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병을 치유받는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과학과 의학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이다. 그러므로치유함을 받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것은 크나큰 특권이며 기쁨일수 밖에 없다.
열두해 동안 혈루증으로 불규칙적인 출혈을 했던 여인이 기적적으로 치료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여인의 치료방법은 어떤 환자들과 다른 모습이었으니 예수님의 기도로 치료함 받은것이 아니라 예수님 몰래 겉옷자락을 만짐으로 치료함을 받았다. 그곳에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에워싸고 먼저 치유받기를 원해서 예수를 붙잡은 사람이 한두사람이었겠는가?
그러나, 주의 옷자락을 만져서 병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 여인 한명뿐이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의 옷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것이 아니라 병낫기를 간절히 사모하여 예수님을 전심으로 의지했던 여인의 믿음의 결과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의 손길 가운데 어떻게 이 여인의 터치를 느끼셨을까? 다른 복음서에는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갔음을 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주님께는 못고칠 질병이 없으시다. 육신의 질병, 마음의 상처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 회복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아픔과 누군가의 질병을 위해 기도할때 우리가 영적으로 주의 옷자락을 만지는 심정으로 간구해야 한다. 주께서 돌이켜 보시는 은혜가 임하면 병중에서 구원을 얻게 될것이다. 때로는 질병 그 자체에서 구원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질병은 그대로지만 그 마음이 평안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믿음의 기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씀하신것처럼 언제나 치료의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기도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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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9장 (2) “눈을 뜨게 하소서”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두 사람의 맹인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묵상하면서 문득 떠오른 한가지 생각은 어떻게
이 맹인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데도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본문을 보면 맹인들이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집에까지 쫒아 들어가서 간구한 것을 볼수가 있다.
맹인들은 볼수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일에 대하여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말씀에 의하면 이 두 맹인은 예수님을 향해 거의 자신들의 몸을 던지듯이 나아갔다. 생명을 걸었다는 뜻이 된다. 왜 그렇게까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무모해 보이는 행동을 한 것일까?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맹인은 보이지 않는 대신 청각이 발달되어 있어 소리를 듣고 방향을 잡는데 있어서는 일반 사람보다 탁월하다. 그들이 목자의 음성에 민감한 양과같이 예수님을 따라 간것은 그 음성의 주인이 자신들을 보게 하실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던도중 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꿈에서 깬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의 영적인 눈이 마치 두 맹인들의 눈이 밝아진것처럼 떠졌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이 늘 자신과 함께 하실것을 확신하며 서원기도를 드렸다.
영적인 삶은 보는 삶이 아니라 듣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의 눈은 영적인 하나님을 볼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묵상하는 자는 영적으로 그 음성을 들을수가 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마음에 들리는것을 영적인 눈이 뜨인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자들처럼 남들이 보지 못하는것을 볼려고 애쓰지 말라. 헛것만 보게 될것이다.
보려고 하지 말고 들으려고 하라. 야곱이 꿈에 천사들의 사닥다리를 본 것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신비스러운 현상을 본것때문에 영적인 눈이 열린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열린것이다.
당신도 주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가? 주의 말씀을 읊조려보라 묵상해 보라. 당신도 영적인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영적인 눈을 떠야 세상을 똑바로 볼수 있고 이땅을 향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