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27) 마태복음 10장 “무엇을 두려워할것인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12제자들을 세우시고 복음 전파를 위해 보내셨는데 그들에게 미리 당부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신자들의 삶 가운데 언제나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어야 한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신자들의 신앙을 미련한것으로 여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로인하여 발생하는 일은 견디기 힘든 일일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세상은 물어뜯는 이리처럼 교회를 신자를 해하고자 할것이지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 될수있는것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핍박하는 세상에 유익을 끼칠수가 있을까?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어라고 하셨다. 세상이 억압하고 조롱한다고 거기에 동화되어 같이 싸우고 부딫히지 말라는 말씀이다.
검을 든자는 검으로 망하니니 검을 도로 집에 넣으라고 하셨다. 신자가 세상의 핍박에도 끝까지 참고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할 생각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하신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하신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나도 알지 못하는 머리털 숫자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신 하나님이 나에게 닥치는 고난을 모를리 없으시고 또한 의를 위하여 당하는 어려운 시험들을 능히 이기게 하실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자는 하나님앞에서 그 사람을 인정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좁은길을 가는것, 반석위에 집을 짓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못할일은 아니다. 노아에게 방주짓는 법을 가르쳐주신것처럼 신자에게도 그 길을 말씀을 통해 성령을 통해 늘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염려는 세상이 하는것이지 신자가 하는것이 아니다. 오늘 주님이 보내신 곳에서 의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인내하고 버틸수 있기를 소망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1/28) 마태복음10장(2) “검을 들려 주신 이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쉽게 납득이 가지않는 말씀가운데 한 구절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려고 오신분이 아닌가? 평화의 왕이 아니신가? 그렇다. 그러나 이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 임하는 화평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자와 불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할수가 있는가?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심히 부딫힘이 있을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자는 불신자 가족들과 화평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는게 하나님의 뜻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핍박을 받을 지언정 신앙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불신자 가족들과 검을 들고 싸우라는 뜻일까? 그것도 아니다.
믿는 자는 불신자 가족들에게 할 수 있다면 더욱 친절하게 그리고 신앙을 가진 옳은 삶을 보일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이렇다. 신자들은 성령의 검인 말씀을 들고 불신자 가족과 영적으로 싸우며 신앙을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그리고 삶 가운데서 온 가족이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맛볼수 있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분의 어머니는 자녀가 예수를 믿는 것을 목숨을 잃는것보다 싫어하여 정말 칼을 들고 못믿게할 정도로 불신자였는데 끈질긴 기도와 노력으로 어머니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그 이후로는 오히려 자녀의 신앙이 느슨해짐을 용서치 못하는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지만 또한 택하신 백성들을 사탄의 손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마귀와 타협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그를 파멸하신다.
그리고 그 능력과 권세를 믿는 신자에게도 주셔서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도록 하신 것이다. 검을 우리에게 들려 주신 이유는 마귀와 싸우게 하시기 위함이다. 영적인 싸움은 어디에서나 일어날수가 있다. 교회에도, 가정에도, 우정의 관계속에서도 악한 마귀가 싸움을 걸어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마다 성령의 검, 말씀의 검을 집어 들어야 한다. 악한 마귀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신 예수님처럼 신자들도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말씀의 검으로 마귀를 물리치는 삶을 날마다 살아가기를 원한다.
(1/29) 마태복음 11장 “거꾸로 가는 세상”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에덴동산에서 죄가 시작된 이래로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대로 가득차게 되었다.
노아시대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일부러 말씀과 반대로 행동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지고 재앙이 덮치면 잠시 그들의 역행을 올바로 고치는듯 하다가 또다시 말씀과 반대로 주행하기 시작한다.
요한처럼 올바른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뒷걸음질 친다. 천국을 말하면 지루해 하며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인류에게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은 잊혀진지 오래되었다.
세상은 오늘 말씀의 비유처럼 진리에 대하여 무반응을 보인다. 천국이 열려있음에도 침노하기는 커녕 지옥에 매력을 느끼고 사는 사람도 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물었을때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예수가 하신 일들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사명받은 자들은 먼저 자신들이 예수의 행하신 일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자신도 믿지 않는 일을 전하는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것과 같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세상이라는 광야로 나가 세례요한처럼 다시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거꾸로 가고 있는 세대를 향해 멈추지 않고 진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세상이 들을때까지, 오직 한 영혼이라도 자신의 길이 잘못된 길임을 깨닫고 그 길을 멈추고 가슴을 치고 주님께 회개하는 때가 임하도록 울며 부르짖어야 한다.
거꾸로 걸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는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 절대 모르며 걷는 다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꾸로 살면 살수록 그들은 방향을 잃어버린 배와같이 방황하다 침몰하게 될것이다. 신자는 거꾸로 가는 세상을 따라가면 안되며 뒤를 돌아보지도 말고
앞에 보이는 푯대인 천국을 향해서만 나아가야 한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
(1/30) 마태복음 11장 (2) “네 짐을 주께 맡기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신자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두가지 모두 우리에게는 짐처럼 느껴질수 있다. 각 사람마다 저마다 져야할 십자가가 다르지만, 아마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무거운 짐일 것이다. 자신을 부인하는 삶, 즉 자신을 내려놓는 삶만해도 얼마나 무거운 짐이되겠는가!
어느것하나 쉬운일이 없는것이 사실인거 같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대책없이 무조건 내려놓으라고만 하신것이 아니다. 그 짐을 주님께 내려놓고 배우라고 하신다. 짐을 주님께 내려놓을수 있는 자에게 주시는 맘에 쉼과 평안을 주실것이라는 것이다.
야곱은 형에서를 만나기전날 주의 사자들을 영적인 눈을 떠서 보게된다. 야곱은 천사들의 모습이 ‘군대’ 와 같아 보여서 ‘마하나임’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람나라 군대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본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두려워하자 엘리야는 기도하여 그의 영적인 눈을 뜨게 했고, 게하시는 순간 숨이 멎을듯한 광경을 보게된다. 아람군대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불병거, 불마차들을 본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자신의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는 자에게 ‘마하나임’ 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을 지키고, 둘러싸고 있는 주의 마하나임으로 인하여 그 마음에 쉼과 평안을 허락해 주신다.
그러나 수고만하고 그 짐을 자신이 짊어지고 있으면, 그 짐의 무게에 눌려서 ‘마하나임’ 을 볼 겨를도 없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했다. 이제 그 짐을 나에게 다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이들 놀이에 ‘두껍아 두껍아 헌 집줄께 새 집다오.’ 라는 놀이가 있다. 영적으로 표현해보면, ‘주님, 나의 무거운 짐을 드릴테니 새 은혜, 새 평안을 주옵소서’ 이다. 나의 인생의 모든 짐을 맡아주실이는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 맡겨라, 주가 맡아 주시며 마하나임을 볼수 있도록 하실것이다.
(2/1-2/2) 마태복음 12장 “안식일 VS 인간”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사역현장을 쫒아다니며 예의주시한것은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유일한 길은 율법을 통한 꼬투리잡기밖에 없었는지 정말 유치한 명목(배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은일) 을 내세워 흠을 잡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안식일’ 의 원뜻을 조근조근 설명해 주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의를 올바로 깨닫도록 도와주셨다. 예수님은 안식일과 인간중에 하나님이 더 귀하게 여기시는것이 무엇인지를 그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유도하시면서 ‘인자(예수님)가 안식일의 주인’ 이라고 하셨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제정하신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을 창조하신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로 지켜야 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도록 법을 제정하신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생각하신 안식일이 왜 달랐던 걸까?
바리새인들의 머리속엔 안식일을 통해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한 마음(자신들은 철저히 지킨다고 생각함) 이 다분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을 축복하는 날이라고 여기시며 인간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 마른 병을 가진 사람의 질병을 안식일에 치료하여 주시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안식일이 지금의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뀐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날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날을 ‘주일’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일에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지만, 거룩한 그날, 주일예배드리는 중에 밖에서 어떤 사고가 나서 도움을 구한다면, 신자들은 예배를 잠시 중단해서라도 나가서 사람을 도울수 있는것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진의를 깨닫는 행동이라고 본다. 예배는 다시 드릴수 있지만 그때 지키지 못하는 사람의 생명은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진정으로 지키는 사람은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안식일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얻은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상한갈대를 꺽고 꺼져가는 등불마저 꺼버리는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자가 아니라 안식일 파괴자일 수 밖에 없다.
제사보다 자비와 인애를 구하시는 하나님께 구하여 먼저 안식일의 주인되신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본받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다.
(2/3) 마태복음 12장(2)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자 사람들은 놀라 다윗의 자손(메시야)이 아닌가 라며 기대했으나 바리새인들은 그가 바알세블(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었다고 억지 주장을 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은 소위 많이 배웠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답지 않은 무식한 이론이라고 하셨다.
귀신이 귀신을 물리치면 동업자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주장을 일축해 버리셨다. 그러나 그와같은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나온것이며,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임한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통치자인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혼란스럽게 괴롭히는 마귀의 역사는 예수님의 이름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떠나리라’ 는 말씀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강력하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면 그 능력을 힘입어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얼마든지 이길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 것이다. 그 능력이 믿는 자에게 있으므로 신자는 마귀의 무리들을 쫒아 낼 수 있고, 유혹을 이기고 죄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열매로 말미암아 그 나무를 알수 있겠다고 하셨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면 그는 항상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뜻은 무조건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하고 악한것을 구별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므로 성령께 늘 순종한다면, 나쁜 가지들을 쳐내고 선한 열매를 맺는 가지를 건강하게 자라게 할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 있는가? 염려가 있는가? 유혹을 참기가 어려운가? 예수의 이름을 불러보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 보라.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영으로는 모든 연약함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할렐루야!
(2/5) 마태복음 13장 “말씀을 쟁취하라”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씨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길가는 인간의 마음중 하나이며 새는 악한것이다. 씨는 창조세계에서 생명을 의미하듯이 말씀은 모든 믿는자의 생명을 의미한다. 들어도 되고 안들어도 되는것이 아니라 무조건 듣고 가져야지 살수가 있다.
하지만 말씀을 가지는데 방해하는것이있는데 길 가와 같은 마음과 새와같은 악한자이다.
길가에는 무엇이 있는가? 주로 사람이다. 오고가는사람, 만나서서 이야기 하는 사람, 물건을 팔고사는 사람, 한마디로 길가는 복잡하다. 복잡한 길에서 사고가 많다. 소매치기들은 사람많은 복잡한 길에서 훔친다. 왜? 사람들이 정신을 집중하지 않기때문이다.
말씀을 들을때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자기의 것이 안되면 거의 다 빼앗긴다고 보면된다. 마치 새가 물어가듯이 말씀이 자신에게서 날아가 버린다. 나의 삶의 유익과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자리와 시간을 배려하지만 주님과 대화하는 말씀묵상의 시간과 자리는 좀처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나의 마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떨어지는 말씀의 뜻과 의미를 다 놓치게 된다. 보석은 길 가에서 주을수 있는것이 아니다. 보석은 땅 속에 깊이 파뭍혀 있기때문에 그걸 가지려면 집중해서 땅을 파야한다.
나는 말씀은 보물찾기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마치 보물을 찾는 사람이 열심히 찾고 찾듯이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는 사람이 결국 얻게되는 것이다. 말씀도 찾는자가 찾고, 구하는 자가 얻게되고, 두드리는자에게 열리는 은혜가 주어진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갈수 있고, 그 믿음은 말씀으로 얻을수가 있다.
그러므로 천국의 열쇠가 되는 귀중한 말씀을 꼭 붙잡고 빼앗기지 않는 천국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
(2/6) 마태복음 13장(2) “천국”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예수님이 천국을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신것은 천국을 향한 복음 전파의 능력도 이와 같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 알의 겨자씨는 보이지 않을만큼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잘 심겨지면 훗날 자연계에 큰 파급효과를 낸다.
복음도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영혼의 열매를 맺게 된다. 복음증거의 목적은 천국이다. 세상은 복음증거나, 천국에 대하여 마치 겨자씨 하나를 우습게보듯이 조롱하며 경멸한다. 그러나 그 복음의 씨앗이 한 영혼에 떨어지게 되면 점진적으로 복음의 확산을 이룬다.
결국 세상과 천국의 간격은 점점 벌어질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에 천국의 씨앗인 복음이 떨어지게 되면 그의 마음속에 세상을 향한 마음은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커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만나는 어떤 일도 그 믿음을 이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천국의 크기는 어떨까? 세상의 힘과 지식을 압도하고 있는가? 혹시 그 반대는 아닌가? 겨자씨는 떨어졌는데 여전히 자라고 있지 않다면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말씀과 기도의 물을 줄수 있어야 한다. 결국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큰 나무처럼 성장한 모습을 볼수 있을 것이다.
(2/8) 마태복음13장(3) “천국의 가치를 잊지말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세상은 발달하는 과학과 지식으로 인하여 거듭 편리해지고 각종 보고,먹고, 즐기는 문화생활로 인하여 삶의 수준이 올라가고 있다. 그로인해 사람들의 마음에서 천국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이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신자들의 모습이라면 너무 과장된 이야기일까?
이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천국은 얼마나 큰 가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제일 가고싶은곳 일순위가 천국이 맞을까? 아무리 좋고 가고싶은 천국이지만 이세상에 속해있고 소유하고 있는것들로 인하여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거 같다.
천국의 기쁨과 소망이 식어지고 잊혀질때 신자는 세상의 일로 인하여 믿음은 사라지고 물질로 인하여 욕심과 교만함이 생길것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거나 약한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신자에게 있는 믿음이 예외를 만들어 낼수 있고 그 믿음이 바로 천국에 대한 소망이다. 그렇게 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앞에 주눅들지 않고 찬양하며 기쁨하며 오히려 죽음을 환영할 수 있었던것이 그 믿음의 가치를 증명해 주지 않는가!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이세상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것을 가지는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천국이지 싶다. 천국의 가치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생명보다 높고 귀하다. 물론 죽은후에야 그 가치를 온전히 알수 있겠지만 예수를 진실하고 신실하게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 가치가 이 땅에서도 떨어지거나 희미해지지 않는다.
신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의 가치를 늘 생각하며 그곳을 기대하며 소망을 가져야만 한다. 이 세상은 잠시 피었다지는 꽃과 같고,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천국의 삶을 모든것이 한정된 이 땅의 삶과 비교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천국의 가치를 잊지말자. 그곳의 존재를 확신하며 기대하는 믿음이 가장 귀하다.
“세상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2/9) 마태복음13장(4) “천국의 제자된 자의 임무”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천국에 대하여 여러가지 비유로 말씀해 주신 예수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서기관은 율법 해석자이며, 율법을 필사하는 역할을 하였던 사람으로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율법을 깊이 그리고 자세히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쉽게 그리고 빨리 찾아내어 가르칠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천국의 서기관이 되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제자는 제일먼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달아야 하고 그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전한다는것은 어불성설이며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앞으로 복음을 전파해야할 제자들이 주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 즉 옛것과 새것을 모두 잘 습득하고 묵상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어야 참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수 있다고 하신것이다. 마치 온갖 물건이 가득한 보물창고를 가진 주인처럼 그때 그때 필요하고 적절한 물건을 찾아 내어오는 솜씨를 갖추란 이야기이다.
무조건 말씀을 암기한다고 되는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여 자신의 마음에 저장하는 사람이 그 말씀의 능력을 올바로 사용할수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충만함을 얻은 후에
시시때때로 말씀들을 인용하는것을 볼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한 말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억도 하지 못한다면 어찌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으며 또한 자신의 삶도 바른길로 인도할수가 있겠는가? 열심히 부지런히 말씀을 먹는 수밖에 없다.
매일 탄수화물을 섭취하듯이 주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육신을 위한 양식은 과식하면 탈이 나지만, 영을 위한 하늘의 양식은 과식할수록 영적으로 더욱 건강해 진다. 이세상에 먹을것은 풍부하나 영의 양식부족으로 영혼들이 피폐해져가고 있다.
영혼이 먼저 잘되어야 범사가 강건하고 잘될수가 있다. 신자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이다.
그 본연의 임무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먼저 우리 자신의 영혼이 잘 되기를 간구하며 힘쓰자.
(2/10) 마태복음14장 “청렴결백한 신앙”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은 로마제국에서 파송되어 이스라엘 유대를 통치했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동생의 아내(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던 비도덕적이고 패륜적인 기질을 가졌던 사람이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비윤리적인 행실을 묵인하지 않고 들춰내었고 결국 헤롯부부의 공분을 사서 참수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세례요한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지막 선지자의 죽음치고는 너무 허탈하고 허무해 보이는거 같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삶과 죽음이 예언대로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이사야,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통하여 이 땅에 와서 그 예언대로 살았고(짧은 시간) 자신의 고백과 약속(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을 지키고 하나님께로 돌아간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요, 신약시대의 첫번째 순교자이다.
그 위대한 선지자가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도 한 춤추는 아이의 말도 안되는 소원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운명을 달리한것이 못 마땅한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그 죽음을 막으셨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그의 사역이 크고 위대한 탓이리라.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죽음을 허락하신것은 분명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보내신’ 세례요한이 그 사명을 완수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자의 삶은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어야 한다. 요한은 짧은 생이었지만 임팩트있는 사역을 이루어 내었다.
신자에게 죽음은 곧 축복이므로 언제 어떻게 죽는것보다 그 죽음까지 하나님의 뜻으로 믿으며 가치있게 세상을 떠나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청렴결백한 신앙이다. 요한은 그와 같은 신앙을 보여준 우리의 선배이므로 우리도 그와같이 주님은 언제나 흥하고 나 자신은 쇠하여지는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강한자에게 굽신거리고 약한자에게 포악한 인생을 살지말고, 누구에게나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할수 있는 신앙으로 살아가는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청렴결백한 신앙임을 잊지 말자.
(2/11) 마태복음14장(2) “합리적으로는 신앙이 자랄수 없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것을 주라.”
배고픈 군중들을 위하여 제시한 제자들의 의견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 당신은 어느쪽이 더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제자들의 의견이 논리적이고 그 당시 상황에 맞는 아주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의견은 제자들이 보기에 비논리적, 비합리적이다.
그런데 믿음이라는것은 인간적인 논리와 합리적 이치를 초월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현재 그곳(빈들)에는 적어도 만명이상이 먹을것이 없어 굶고 있었고 그 상황에 가장 논리적인 계산은 그들이 각자 사먹는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그 논리적인 계산을 뛰어 넘는것이어서 제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에게는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개밖에 없다고 하소연하였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여 그 음식으로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양으로 부풀려 주셨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며 믿는자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좀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 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작은 것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오묘한 능력이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자세이다. 제자들의 논리와 합리적인 의견이 예수님을 통하니 초합리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게되는것을 보게 된다.
과학만 믿는 사람은 절대로 신앙을 가질수가 없다. 왜냐하면 말씀은 초과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실험과 결과로 판단할 수 있다면 나 같아도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실험하여 알수 있다는 자체가 비논리적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무조건 믿으라는 소리는 아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깊이 알아가야 한다. 제자들도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신앙이 자라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말씀과 믿음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당신의 삶 속에서 신묘막측한(Wonderful thing)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2/12) 마태복음14장(3)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새벽녁에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귀신을 본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제자들의 공포를 인지하신 예수님이 즉시 자신임을 알리시고 그들의 두려움을 물리쳐 주셨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경험하게되는 두려움과 공포심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히 극복할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으리라.
공포심에서 해방되자마자 베드로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예수님의 허락을 받고 보트위에서 뛰어 내리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귀신을 본줄알고 놀랐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좌충우돌하는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서 또 한번 경악하게 되었다. 아무리 예수님이 오라고 하셨다고 자신이 예수님도 아닌데 파도치는 물속으로 망설임없이 뛰어드는 베드로가 얼마나 기가막혔을까?
그런데 더 기가막힐 장면은 베드로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탁했었다면 베드로처럼 물위를 걸어보는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던걸까, 아니면 믿음이 없었던걸까? 용기있는 사람이 먼저 나서는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다로 뛰어들었고 예수님이 연출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에 가담하는 가슴 떨리는 경험을 하게된 것이다.
믿음에는 늘 용기가 필요한거 같다. 아무리 믿는다고 말해도 행동까지 접근하지 못하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말하기가 창피하지 않은가? 칼을 꺼냈다면 무우라도 잘라야 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믿음을 장착했다면 한번 행동해보는 용기도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믿음으로 바다위를 걸었다. 그의 믿음이 너무나 대단해 보일뿐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믿음이 한계에 다달았다. 더 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을 보자 두려운 마음이 들어 자신을 초자연적인 세계로 인도하시는 예수님과의 컨택을 잃어버린것이다. 그순간 베드로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며 물속으로 급격하게 빠져들어가 버렸다. 순발력있는 예수님의 행동으로 구출되었으나, 예수님께 책망을 듣게되었다.
“믿음이 작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으로 바다를 걸었는데 믿음이 없다고 책망받았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연약함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영원할수 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온다. 예수님께 언제나 접붙인바된 가지처럼 연결되어 있을때 우리의 믿음은 안전할수 있지만, 베드로처럼 잠시라도 시선을 돌리게 될때 세상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예수님이 이미 ‘나니 안심하라’ 고 하신 말씀이 뇌리를 스친다. 그렇다. 제자들도 베드로도 안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앞에 계시는데도 여전히 바람과 파도를 의식하였고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주님은 팬데믹안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나니 안심하라’ 고 거듭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 그 두려움과 염려를 내려놓는것은 어떨까? 먹이시고 입히시고 우리 인생의 영혼까지 책임지고 계신 주님으로 인하여 평안함과 기쁨을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