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마태복음15장 “굳센 믿음”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예수님은 들은체도 하지 않으시면서 말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이유를 설명하셨다.
누가 들어도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발언인거 같다. 특히 당사자인 이방여인은 자신을 개로 취급하는 말을 듣고 갑절이나 자존심이 상했을것이다. 왜 예수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정말 예수님도 다른 유대인처럼 가나안 여인을 개로 여기셨던 걸까?
그렇지 않다. 나는 예수님이 갑자기 그 여인에게 간절함이 있는지 시험해 보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정말 유대인들만 케어하시는 사람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분인지 가나안 여인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신거 같다.
그 뜻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것은 지금 그 여인에게는 그런거 따질만한 여유가 없었던거 같다. 유대인, 이방인, 귀하고 천한..그런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자신의 딸을 치료하는것만 생각하였다. 그 여자는 딸이 치료받을수만 있다면, 자신은 개, 돼지처럼 취급당해도 상관이 없다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은 이 말에 감동을 받으신듯하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올바른 믿음은 누구를 믿는가에 달려있고, 굳센 믿음은 믿는분을 얼마나 확신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확신이 있으면 참을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절대로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그 여인에게 만약 되면 좋고 안되도 그만이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애시당초 시험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귀하게 보신것은 그 여인이 이 과정을 통과했기 때문이리라.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다 보시면서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도록 하실때가 있다.
확신과 간절함이 없는 간구는 주님께 열납되지 못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은 마음으로 간구하는 자가 얻게 될것이다. 작은일 한가지도 갈급함이 있는 사람은 얻어내고 만다.
(2/17) 마태복음 16장 “요나의 표적밖에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틈만나면 예수님께 나아와 구한것이 ‘표적’ 이었다. 사실 예수님은 그전까지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는등 수도없이 표적을 보이셨는데도 그들이 계속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직도 그들 마음에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해서든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해 보일려고 자꾸 표적을 보이라고 물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들 앞에서 표적을 보이지 못하면 그것을 미끼로 메시야가 아니라고 둘러댈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훤히 보시는 예수님이 그들의 술수에 넘어가시지 않고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땅에 이미 오신 표적을 그렇게 보여주었음에도 믿지 못하는 자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지칭하셨다. 요나의 표적이라함은 예수님이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나고 나온것처럼 죽음에서 삼일만에 부활하실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것은 표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일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기적과 이적을 쫒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뭔가 신비스럽고 놀라운 것이 보여져야 그것이 진리인것처럼 믿고 따른다. 반면에 그런 현상이 없으면 무시하고 경멸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욕심에 이끌리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표적은 아버지의 뜻에 합한것이다.
이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곳에 표적이 일어날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믿는것이 먼저이다. 믿는 자에게 능치못함이 없다고 하셨지, 표적보기를 원하는 자에게 능치못함이 없다고 하신적이 없다.
눈에 보이는 말씀도 믿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표적만 구하는것이 불신이다. 요나의 표적인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보지않고도 믿을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 믿음이 나 자신도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실것을 믿는다.
(2/18) 마태복음16장 (2)”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들었던 말중에 가장 심한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을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수님께 들었으니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사실 방금 전만해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향해 드린 신앙고백을 통해 큰 칭찬을 받았었다.
한껏 들뜬 심정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린것인가? 왜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토록 심한 말을 듣게 되었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것이란 예언을 들었을때 결단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제자의 입장에서야 섬기는 스승에 대한 예의로 했던 말일수 있었겠지만 그의 말대로 그런 일이 그리스도께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성육신하신 목적이 사라지는 것이 되므로 예수님은 심하게 베드로의 말과 생각을 꾸짖으신것이다.
방금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여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일순간에 사탄이라는 저주스런 말을 듣게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이 되었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라 그가 사탄의 사상에 끌렸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와같은 일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가 가끔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판단할때가 있다. 그러나 그와같은 자신의 모습이 성경적인지를 잘 관찰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생각에 올바르게 보여도 그것이 성경과 다르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이끌림을 받았던 베드로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늘 말씀에 비춰보고 살아갈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사는 신자가 결국 신실한 믿음을 가질수 있다. 언제라도 내 뜻이 말씀인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나가려고 할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며 스스로에게 명령할 수 있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면 물러가리라고 하셨다.
늘 기도와 말씀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분별력을 얻는 복된 신자가 되자.
(2/19) 마태복음17장 “초막짓기 원하는가?”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오르셔서 변형된 사건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경험한 이야기다.
빛같이 희게 변화되신 예수님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함께 대화하는 모습을 그들이 보았던 것이다. 그냥 넘어가면 베드로가 아니듯이, 베드로는 그 황홀한 광경을 보고 기막힌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다.
그런 아이디어를 낸 이유는 그 산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 모습을 좀 더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초막을 짓고 싶었던 그의 진짜 계획은그곳에 더 오래 머물면서 혹시 자신도 모세와 엘리야와 말해 볼 기회가 생길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막을 하나도 아니고 셋을 지어서 차례로 그분들을 모두 만나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위대한 인물들을 눈앞에서 본것만 해도 무한한 영광인데 그 분들을 붙잡아 놓겠다는것이 얼마나 철없는 인간적인 생각이었던지 예수님은 한 말도 섞지 않으셨고, 오히려 내려가는 길에 지금 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셨다. 즉 ‘잊어버려!’ 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베드로처럼 초막을 짓고 싶을때가 있다. 흔히 어떤 경치가 좋거나, 시설이 너무 좋은 곳이나, 살기가 환상적인 곳을 방문했을때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가 ‘와,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고 말한다.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마음속에 환상의 초막을 짓고 사는 사람은 그냥 환상속에만 살게 되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며 살수가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자신의 배경이라는 초막을 짓고 싶을때가 있습니다. 좋은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자녀, 좋은집… 물론 노력해서 주어지는것은 감사한 것이지만, 그것만을 위해서 살게되면, 자칫 그것들이 자신의 초막이 되어 그속에 갇혀 버릴수가 있다.
베드로는 실제로 그 변화된 주님과 환상속의 두 인물과 함께 초막짓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얼른 그 환상을 깨워 주신것이다.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꿈깨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을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들이 본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받은 은혜와 감동에 치우쳐서 살아서는 안됨을 알려 주신것이다.
신자는 아무리 어제의 은혜가 좋았어도 감사하며 마무리짓고 얼른 오늘 주실 새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제의 감동에만 머물러 있으면 새은혜를 받을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은혜만 그리워하는 이유는 오늘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걸 내려놓아야 오늘 새것이 온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꿈을 깨운것은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것이 사명이 아니라, 변형되신 주님, 즉 부활하실 주님을 세상에 알리고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초막 짓기를 원하는가? 내가 영원히 거할곳에 초막을 지어야 한다. 이 땅에서는 열심히 주신 사명을 감사하며 감당하면 된다. 오늘도 새로운 만나를 기대하며 새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하는 믿음의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2/22) 마태복음18장 “한 영혼의 가치”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성경을 읽으면서 매번 느끼는것 한가지는 하나님의 생각은 세상의 방식과 늘 반대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에 대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수가 있다. 물론 세상에서도 한사람을 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의 구조는 다수에게 맞추어져 있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 희생이 소수의 자발적인 마음에서 나온것이라면 영광스러운것이겠지만 다수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사회의 부조리일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소수를 ‘작은 자’ 로 표현하시면서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하신다. 믿음의 세계는 작은자가 소외되지 않는 구조이다.
양 아흔아홉 마리가 있어도 한마리 길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가 데리고 오는것이 믿음의 세계이며, 그것이 천국의 방식이다. 아흔아홉 마리도 여전히 목자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들을 떠나 한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한 마리에 대한 관심이다. 비록 아흔아홉 마리가 함께 있지만 누구나 길 잃어 버리는 처지가 될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믿음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것이 베스트 삶이지만, 인간인지라 나 자신도 방황할때가 있고 길을 잃을수도 있다. 그때 나를 잊지않고 누군가 열심히 찾아주는이가 있다면 얼마나 반갑겠는가.
반대로 다수만 중요하게 여겨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우리 주님은 길 잃어버린 영혼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끝까지 추적하셔서 찾아 그의 품에 안고 돌아오실 것이다. 교회나 신자들이 예수님 닮아 소수와 한 영혼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수 있어야 하겠다. 교회 공동체에서 마저 소외를 당한다면 정말이지 갈곳이 없어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날마다 자신의 양의 숫자를 헤아리신다. 우리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다.
(2/24) 마태복음18장 “온전한 용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은 죄를 범한 형제에게 일곱번까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고 말씀하셨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제자에게 쉬운 비유로 가르치셨는데 그 비유가 바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 에 대한 비유이야기이다.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빚진 종이 도저히 그것을 갚을 여력이 없는것을 보고 주인은 그 빚을 탕감해 주기로 결정했다. 상상할수없는 은혜를 입은 종이 기쁜맘으로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백데나리온의 빚을 졌던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함에도 그를 잡아 감옥에 넣어버렸다. 그 소식을 듣게된 주인이 대노하면서 그를 불러 심하게 꾸짖은 말이 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야기는 반전이 되면서 그 종은 모든것을 빼앗기고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비유의 포인트는 용서이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7X70 의 용서’ 의 의미는 무엇일까?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인가? 한 사람에게 490번까지 용서해본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490번은 숫자의 의미라기 보다는 온전히 참고 끝까지 용서해 주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도 상대가 몇번을 용서해주는것을 보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어있다.
용서한 사람은 마음에 엉뚱한 생각품지말고 온전히 용서해야하며,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한 사람의 은혜를 외면하지 않고 자신도 용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신 말씀이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해칠수 있는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지만 원수를 갚지 않고 용서해 주었더니 사울왕이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자신이 팠던 우물을 이유없이 빼았은 사람들을 두번 용서한 이삭에게 그 나라 왕이 찾아와 예의를 갖춘 이야기가 있다.
이 두가지 케이스에서 그들은 다윗과 이삭의 용서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들뒤에 있음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상대할 사람이 아니란것을 깨달은 것이다. 온전한 용서의 힘은 바로 이런것이다. 우리가 용서하면 그 뒤를 봐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아들을 이땅에 보내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 일만달란트라는 영원히 갚을수 없는 죄의 빚을 탕감해주셨다면 우리가 이땅에서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는가? 구원의 기쁨으로 용서를 베풀수 있기를 주님이 원하시지 않을까?
(2/26)마태복음19장 “천국보다 돈이 좋아?”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는이 사람을 ‘큰 부자’ 라고 지칭하였고 마태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돈이 많은 사람인건 분명한거 같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온 이유는 영생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왠만한건 다 가져보고 누려본 사람인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왜 영생에 대하여 궁굼해졌을까? 누군가 그 사람에게 천국에 대하여 알려준걸까?
율법을 지켰다고 말하는것으로 봐서는 유대인인것은 분명하지만 복음에 대하여는 전혀 아는바가 없는 사람인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 사람은 천국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것일까? 이세상의 귀한것을 다 누리고 있으니 천국도 자신이 분명히 소유할 수 있을거라고 확신했을지 모른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그는 천국은 아주 착하고 선한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들어가는곳으로 생각했던거 같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선한일을 해야지 천국에 갈수 있는지가 궁금했던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다 통찰하신 예수님의 한마디가 그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버렸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가 갸우뚱해질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대답은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진짜 방법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신것이다.
‘어떤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예수님의 대답이 놀랍기 그지없다. 만약 그 부자가 예수님 말씀대로 했다면?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된 사람이며 천국의 문을 열수 있는 믿음도 얻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많은 재물로 인하여 근심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할지 이미 알고 계셨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천국과도 바꾸지 않는 무시 무시한 사람이라는것을 보여주신거 같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무작정 돈이 많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영생에 대한 믿음을 얻기가 힘들다는것이 진리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돈을 사랑하며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천국을 얻는다고 해도 돈을 버릴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물질에 빠지는 삶은 천국도 포기하게 만드는 괴물이 될수가 있으니 ‘돈은 일만 악의 뿌리’ 라는 말씀이 옳다.
(3/1) 마태복음20장 “믿음이 순서다”
“이와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예수님은 포도원의 품꾼들 비유를 통해서 천국을 가르치셨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하신다. 포도원 주인은 일꾼을 부르기 전에 그들의 하루 급여를 한 데나리온으로 정했고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포도원으로 들여보낸다.
주인은 정해진 시간에만 나간것이 아니라 수시로 거리로 나가서 놀고있는 사람, 서 있는 사람, 쓰임받지 못한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인도한다. 아무일 없이 하루가 끝나고 급여를 지급하는 시간이 왔을때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렇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이 비유는 천국에 관한 것임을 생각해볼때 포도원은 천국이고, 주인은 하나님이라는것은 알것이다.
그렇다면,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꾼들은 천국에 갈수도 못갈수도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한 데나리온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으로 볼수가 있겠다.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이라면 구별없이 한 데나리온만 지급된것처럼 천국에 들어가는데에도 한 데나리온으로 충분한데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으로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불평한 이유는 늦게온 사람들보다 더 받을줄 짐작했었기 때문인데 이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는것 자체를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자신들만 선택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불평은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자 반발이므로 천국에 합당치 않다. 과연 그들이 다음날에도 포도원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물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주인과 맺은 약속을 따른다면 문제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라서 나중 되리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셨다. 첫번째 타깃은 유대인들의 교만함이지만 교회에서 주인행세하는 사람들도 그 대상이다.
소위 교회에서 갑질하는 사람들을 말함이다. 오래 다녔다고 먼저 왔다고 직분을 가졌다고 대우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들도 한 데나리온에 불평하던 자들과 다를바가 없다.
천국은 한 데나리온의 정해진 믿음으로만 들어갈수 있으며 그 외에는 없는데도 여전히 배경, 전통, 의식,형식,조건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다. 더 착하고 더 선해야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예수가 정해놓으신 말씀만 따라 순종하는 자가 들어가는곳이 천국이다.
나의 마음이 한 데나리온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 한 데나리온이 되신 예수로 만족하게 될때 겸손히 낮아지고 늘 감사와 기쁨이 마르지 않는다.
(3/2) 마태복음 20장(2) “거꾸로 가는 삶”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베대의 아들, 즉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와 자기의 두 아들들을 위해 청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위 치맛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당연히 다른 제자들은 이 모습을 분하게 여겼다.
이 일이 벌어진 시점을 보니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때였으니 이미 그들이 거의 3년동안 예수님과 지냈음을 나타내준다.
예수님의 마음이 아마 답답하셨으리라. 이제 곧 그들을 떠나야 하는데 그들은 서로 분히 여기며 자리 차지하는데 골몰하고 있으니 주님의 심정이 참담했을거 같다. 작정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보라.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르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리.”
세상과 거꾸로 가라고 하신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세상은 힘과 권력을 얻으려고 눈에 불을 켜서 찾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눈에 불을 켜고 섬기고 종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하시니 참 막막한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어찌하랴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라고 하시니 하는수 밖에…
주님은 세상과 거꾸로 된 이 길을 위하여 오셨다고 하신다. 만왕의 왕이신데 섬김을 받는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단다. 그리고 그 섬김의 하이라이트는 자신의 생명까지 완전히 대속물로 주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말씀만 하신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하셨기 때문에 뭐라 할말이 없다.
신자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가만보면 그 발자국 따라가는것은 고사하고 그 발자국난 길이 세상의 먼지로 덮일때까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신 길, 예수의 행하심을 따라 사는것만이 의의 길, 좁은 길인데 참 큰일이다.
오늘 곰곰히 이 말씀을 묵상해 보자. 지금 나는 주님이 하신 명령을 생각이라도 하고 살고 있는지, 혹시 티끌만큼이라도 준행하려고 하는지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섬김의 삶은 나를 내려놓고 부인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잊혀지지 않도록 오늘 세상과 거꾸로 한번 살아보는건 어떨까?
(3/3) 마태복음 21장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의 종착지인 예루살렘 사역이 시작되었다. 무리들이 그를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치는것을 볼때에 그들은 아마 예수를 예언된 메시야로 믿었던거 같다. ‘호산나’ 의 의미는 ‘호쉬아’ (구원) 와 ‘나’(지금)가 합쳐져서 ‘지금 구원하소서’ 라는 뜻이다.
예수의 소문이 온성에 들려 성 전체가 소동하여 들썩였다. 무리들은 모든 일을 멈추고 오직 예수의 입성에 관심을 모으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를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이제 메시야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를 줄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기쁜일이 아닐수 없다. 하나님이 이땅에 성육신하신 이래로 이와같은 대접을 받아본적이 있었던가? 만왕의 왕으로 오셨을때에 세상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너무 반갑고 가슴 뜨거워지는 모습임에 틀림없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지심으로 죄인들의 죄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는 다시 이 땅에 재림하게 되실것이다. 하지만 재림때의 모습은 초림때의 모습과 확연히 달라진다. 초림때에는 첩보작전처럼 비밀리에 오셨지만 재림때에는 온 세상이 모두 볼수 있도록 오신다. 한사람도 못봤다고 변명하지 못하도록 온 세상 모든 눈들이 다 볼수 있도록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을 믿는 신자라면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손꼽아 기다려야 한다. 이천년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메시야를 보며 무리들은 고작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만을 해방 시켜 주실줄 알고 그를 환영했지만, 다시오실 그리스도는 온 땅을 심판하시며 믿는 모든 자를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밧모섬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환상을 보았던 요한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두손모아 간구한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오심이 속히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의 재림을 간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롯의 아내는 그렇게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소금기둥이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당신의 기도에 ‘호산나 호산나’ 의 간구가 더하여지며 다시오실 주님을 향한 갈망이 불일듯 일어나기를…
(3/4) 마태복음21장(2) “무화과 나무의 운명”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고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 나무가 곧 마른지라.”
배가 고프셨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리고 가신 이유는 당연히 열매가 있을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것을 보시자 저주를 하셨다. 말못하는 나무에게 왜 그렇게 하셨을까? 왜냐하면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을 속였기 때문이다.
무화과 나무는 열매를 먼저 맺고 그다음에 잎이 맺히는 특이한 식물이다. 무화과나무를 만드신 창조주께서 그걸 모를리 없기 때문에 잎이 무성한것을 보시고 당연히 열매가 있을줄로 아셨다.
하지만 창조질서를 거스른 무화과나무에게 속은걸 아시고 말라 버리도록 징계하신것이다.
무화과 나무사건을 통해 속이는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볼수 있겠다. 첫째, 겉과 속이 다른 삶은 사람과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가 된다. 겉은 좋은 신앙인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는 열매없는 나무처럼 속이 텅 비어있는 자는 무화과나무가 받은 징계를 피하지 못할것이다.
세상은 잎만 무성해도(겉모습만 잘 꾸미면) 열광할지모르지만 그런 모습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나님에게는 모두 질그릇일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질그릇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눈여겨 보신다. 질그릇에 보배(그리스도)를 담고 있다면 그 보배로 인하여 질그릇이 영광을 얻도록 하실것이다.
둘째,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지 않은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얻게하시고 찾게하시며 열리도록 하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의심한다면 그 기도의 샘은 메말라지게 될것이며 그 사람의 기도는 그저 종교의식일 뿐, 아무런 능력을 얻지 못하게 된다.
창조의 질서(말씀)를 거스르는 행위는 피조물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게하시지만, 그 질서를 기쁘게 따르는 자는 물댄 동산 같은 은혜가 임할 것이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할것이니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될것이다.
(3/8) 마태복음22장 “영접할 예복이 있는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수님은 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 청한 사람들을 잔치에 오라고 했으나 사람들은 오기를 싫어하였다. 사람들마다 핑계거리가 가지가지였다. 일때문에, 사업때문에, 어떤이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에 임금은 다시 종들을 보내어 길에 나가 사람을 만나는 대로 데려오도록 했다. 악한 자나 선한자나 가리지 않았고 닥치는데로 잔치에 불러 들였다. 손님이 가득하자 임금이 나왔고 임금의 눈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보였다. 혼인 잔치에 입을 예복이 준비되어 있었음에도 입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둠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천국을 전하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는 대개 무관심이 이유이다. 더 큰 문제는 교회를 다니는데도 예수를 믿는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소위 예복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게으르고 무관심하여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마지막날 세상이 심판을 당할때 교회도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양과 염소가 나누어 지듯이 교회안에서도 예복을 입은자와 입지 않은자들로 나누어 지게 될것이다.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이 될 것이다. 양과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모습이 밝혀질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입는자는 적을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천국의 문턱에서 지옥으로 내 던져지는 원통함을 당할수도 있다. 택함을 입은자는 혼인 잔치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으며 그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 받은 사람이다.
유니폼을 입으면 소속감과 책임감이 생기기 마련인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는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다. 이 옷은 천국시민이라는 고귀한 책임감을 주기때문에 예복에 걸맞는 삶을 살고 예복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해 줄것이다. 당신에게 지금 그 예복이 있는가? 예복에 합당한 모습으로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