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마태복음22장(2)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고 올무에 빠뜨리게 하려던 바리새인들의 교묘한 질문을 받으셨다. 이 질문은 이렇게도 걸리고 저렇게 해도 걸릴수 밖에 없는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진것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기전에 이들이 에수님을 평가하는 말을 하였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들수 있는 질문을 미리 준비해놓고 예수님은 모든것을 아는 분으로 평가하는 모습은 가히 이들이 독사의 자식임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사람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어 파괴하는 마귀의 전략을 배웠나 보다.
악한 마귀는 늘 이렇게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결국 주저 앉혀 버리거나 포기하도록 만든다. 이와같은 마귀의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도 마치 사면초가에 놓이신것처럼 보인다. 납세를 하라고 하면 유대 애국자들의 반발을 살것이고 납세가 옳지 않다고 말하면 로마의 법에 걸릴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를 골라도 한참 잘못 정했다. 예수님은 동전하나를 보이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고 말끔하게 정리해 주셨다. 이 얼마나 총명한 지혜인가? 가이사의 것이라함은 국민으로서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 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경배를 올리라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은 세상의 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과 충돌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지킬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법을 지키기 위하여 성경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앞에 범죄함이 되므로 생명을 바쳐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이것들이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우리가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할때 세상이 깨닫지 못하는 지혜를 주신다. 마귀가 예수님께 했었던 세번의 시험도 예수님은 말씀의 지혜로 간단히 해결하셨지 않은가! 세상에 살면서 믿음을 지켜 나가려면 말씀을 깊이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마스터 키이기 때문이다.
(3/10) 마태복음 22장(3) “사랑하면 보이기 시작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와서 질문하였다. “선생님, 율법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거 같다. 그의 질문에는 그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계명의 높고 낮음, 즉 귀하고 덜 귀함이 있다고 생각한듯하다.
그의 질문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묻는것과 같다고 본다. 대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주 어릴때는 정말 자기 감정에 의하여 순위를 정할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성숙해지면 “둘 다 좋아” 라며 말하는것을 볼 수가 있다.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의 순위를 매기기전에 해야할 것이 있는데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했다. 전 인격을 다하여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귀를 기울일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는데 그분의 계명에 귀를 기울인다는것은 어불성설이며 그 안에 진실함이 있을수가 없다. 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 이라고 저주를 퍼부으셨나? 그 안에 진실함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진실이 없는 사랑은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사랑을 만든다.
마음, 목숨,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의 진의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고, 입바른 고백도 아니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온전히 깨달아 경험되어지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생명을 다하여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그분이 주신 말씀 하나 하나에 최고의 가치를 둘수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을 첫째 계명이라고 순위에 올려 놓으신것은 그 하나를 철저하게 지킬수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계명을 지키는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기전에 확인하신것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었지 않은가.
오늘 내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지, 말씀에 순종하는가를 보기전에 하나님을 온 마음다해 진실로 사랑하는지를 살펴보는게 순서인거 같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사랑 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이 처음이고 끝이며 우리 신앙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비로소 보이는것이 말씀이며, 사람이며, 자신의 인생이다.
(3/12) 마태복음23장 “일곱가지 화를 받은자들”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가 시작되기전 400년을 중간,혹은 침묵시대라고 부르는데 그 중간시대에 가장 큰 역할을 하며 신약시대라는 무대의 중앙을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사두개인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미국정치의 광화당과 민주당 같은 위치를 차지했던 그룹들이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것 같지 않았던 그들의 완벽주의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을 자신들과 차원이 다른 사람들로 여겼고 그들의 철두철미한 의식과 종교생활에 존경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레이더에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이 포착되었고 재빨리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예수님의 지적은 정말 칼처럼 예리하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나 선하고 지켜 마땅한 말들이었으나 정작 자신들은 지키는 척만하였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믿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것을 무리들에게는 마치 멍에를 지우듯이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짖눌렀던 것이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처음보는 사람들도 한눈에 ‘저 사람은 우리랑 다르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외모를 거룩한척 꾸미고 다닌것이다. 거룩성과 경건성은 절대로 외모를 무엇으로 치장한다고 되는것이 아닙니다 .
성경을 온몸에 붙이고 자동차나 사업장에 붙인다고 신실한 사람이 되는것이 아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한가지인데 그들은 아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도 믿지 않고 무리들은 더더욱 믿지 못하도록 가르쳤으니 그들이 아무리 율법에 정통하고 철저히 지킨다고 말해도 그들의 결국은 지옥문에 들어가는것 밖에 없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무덤을 멋지게 화려하게 금으로 치장하고 은으로 겉을 꾸민다고 그 무덤안에 들어간 자가 달라질것이 있는가? 영혼이 떠난 몸은 결국 말라비틀어진 뼈에는 남는것이없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하신 경고를 신자들도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마음과 똑같은 구조를 우리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높아지기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유혹이 누구에게나 있다.
일곱가지 화를 일곱가지 축복으로 바꿀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로 살면 그 지혜를 얻는다. 교만과 부를 좋아하려는 자신의 자아를 그리스도로 덮어 버리고 겸손의 옷을 입고 한 영혼을 귀하게 생각해야한다. 안과 겉이 항상 똑같이 신실하고 경건한 천국사람의 본을 보여서 뭇 영혼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인도하자.
(3/15) 마태복음24장 “그날이 오면”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예수님이 마지막 날 일어나게 될 여러가지 현상에 대하여 예언하신 말씀이다. 마지막 날에 대한 징조로 여러가지 자연재해와 전쟁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불법이 성하게 될것이라고 하신다. 기존에 정해진 법들이 깨어지면서 사람들이 사랑을 잃어버리고 미워하게 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공격과 고난은 불을 보듯 뻔하게 증폭될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사회와 불법을 통하여 고난을 당하게 될것임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고난이 몰려와도 우리의 믿음을 놓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 믿음을 보이지 않으면 고난 받을일도 우리를 괴롭히는 자도 없을 것이다. 소위 속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믿음을 저버리는 댓가는 피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베드로의 깊은 탄식과 가룟유다의 비참한 좌절감이 엄습해 올것이다. 천국이 닫혀지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믿음은 우리의 편한날을 위함이 아니라 고난의 때,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때를 위함이다. 바른 믿음이 있는자만이 고난과 시험을 인식할 수 있을뿐 거짓 믿음은 늘 세상속에서 타협하면서 살기 때문에 실상은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믿음은 불법과 부딫히고 싸우려고 할때 비로소 불과같이 뜨거워지며, 진리를 지키려는 자에게 자신이 깨닫지도 못했던 용기가 솟아나도록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다. 그러므로 한번 싸워보려고 생각도 하지 못하면 그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길이 없겠지만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고 부딫혀 보는자는 분명히 보고 알게 될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를 환난에서 견디게 만드는것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밖에 없다. 내일 일은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나의 삶을 믿음, 또 믿음으로 견디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자.
(3/16) 마태복음24장(2) “환난이 올때”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의 재림전에 심한 환난이 이 땅에 임하게 될것을 예언하고 있으며 환난이 올때 기억해야 할 방침도 기록하고 있는데 환난이 올때 적 그리스도(Anti Christ)가 일어나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임을 알리고 있다. 적 그리스도는 사탄의 권력을 힘입어 믿는 자들을 믿음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존재이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환난이 올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으려는 악한 마귀라는것을 기억해야 한다. 악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손대신 마귀의 손을 잡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그래서 어려운 시기에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법이다.
예수님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라고 방법을 알려주셨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이며 믿는자에게는 도움의 상징이다. 인생에 예상하지 못했던 환난이 올때 우리가 달려가야 할곳은 하나님의 품이다. 그곳만이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줄수 있는 피난처이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
좌로나 우로나 돌아보면 절대로 주님을 볼수가 없다. 그렇게 베드로도 바다위를 걷다가 주님과 아이컨택이 무너지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간 것이다.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불타는 소돔성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앞을 향해 지정된 곳을 향해 도망하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는데 롯의 아내가 그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여호와는 우리의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우리의 출입을 영원토록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과 타협하려던 마음, 손을 다시 거두고 오직 하나님과 타협할때 어떤 환난이라도 넘어가게 된다.
(3/17) 마태복음24장(3) “영원하신 주의 말씀으로 깨어 있자”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지막날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졌지만 재림은 완전히 다른 스토리가 될 것이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리스도의 재림은 한 명이라도 보지 못했다는 변명이 성립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뜻이다. 재림하신 주님은 큰 나팔소리로 재림을 온 땅에 알리시고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신다고 하신다.
그날은 기쁨의 환호와 절망의 비명이 함께 어울려 이 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수 있는 지상 최대의 시펙타클한 장면이 연출될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는 구절을 통해 그날에 분리와 구별의 시간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노아의 시대에도 홍수가 일어나 모든 생명을 멸할때까지도 사람들은 심판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재림때에도 같은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시는데 요즘 세상을 바라보다보면 그러고도 남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세상의 죄악이 넘치고 관영하는것을 보면서 자꾸만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혹시 주님이 오시지 않을까?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신비스러운 구름만 보아도 주님의 재림을 상상하게 된다. 당신은 주님의 오심을 진정 기다리는가? 혹시 자신의 때에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방관하지는 않는가?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정신 차리고 믿음으로 깨어 있어야 할때이다. 세상의 죄가 너무 깊고 어두워지고 있다. 절대로 동요되거나 인정해서는 안된다. 오직 주의 말씀에만 마음과 믿음을 두어야 한다. 천지는 사라져도 계시하신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지며 없어지지 않는다.
(3/18) 마태복음25장 “열처녀 비유”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천국에 대한 비유가운데 유명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흔히 열명중 어리석은 다섯은 무신론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열명은 모두 신자들이다. 모두 신랑(그리스도)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는 천국가고 누구는 가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예수 믿기만 하면 무조건 천국행이라고 맹신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 하지만 그 믿음이 진실일때에만 가능한 스토리임을 잊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소리다. 열명이 하는 행동을 보면 다를바가 없는거 같다. 똑같이 신랑을 사랑해서 등을 들고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섯은 신랑을 만나지 못하고 혼인 잔치(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성경은 열명의 신부의 차이점을 ‘기름’ 에 맞추고 있다. 이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앙에 필요한 여러가지가 될수가 있겠지만 이 이야기의 특성상 기름이 없어서 못 들어간걸보면
기름은 ‘믿음’ 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곧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순종하는 믿음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미련한 처녀들은 껍데기만 가진 신자들을 의미한다고 본다.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은 없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마지막 날 재림 주로 오시는 우리의 신랑되시는 그리스도가 확인하시는것은 오직 순종하는 살아있는 믿음뿐이다. 입으로만, 형식으로만 보여지는건 믿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될것이다. 깨어있는 영성은 게으를 시간이 없다. 자나깨나 말씀만을 의지하고 살며 말씀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며 따라갈때 신랑이 오심을 놓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리라.”
(3/19) 마태복음25장(2) “달란트 비유”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장은 3가지 비유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명하고 있다. 종들에게 소유를 맡긴 주인은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종들은 신자들을 비유하고 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기 다섯, 둘, 한 달란트를 맡긴것은 각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맡은 일도 다름을 의미한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이와같이 그를 믿는자들에게 각각 재능을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그러나 다섯, 두 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즉시로 순종하며 믿음의 삶을 사는 신자가 있는 반면에 오히려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탓하면서 불순종의 삶을 사는 신자도 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주인이 오랜시간이 걸린후에 돌아온것은 도둑같이 임하시는 재림을 의미한다. 그날 모든 인생들은 재림주 앞에서 그들의 삶에 대하여 결산을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다섯,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비록 받은 재능은 달랐지만 똑같은 칭찬을 들었다. 이 땅에서 비록 다른 재능, 일, 직분을 맡았으나 주님이 보시는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얼마나 충성되이 믿으며 살았는지를 보신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큰 책망을 받고 내 쫒김을 당한것은 주인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스스로 비관한 결과였다. 이 종처럼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왜 자신에게는 이런거, 저런거 주시지 않느냐고 하소연하며 원망한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서 원망이 그치지 않는다면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는 고사하고 순종은 더욱 어려워진다.
두달란트 받은 종이 자신보다 두배나 더 받은 종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신것에 만족하고 일한것을 보아야 한다. 만약 한 달란트 받은것을 귀하게 여기고 열심히 일했다면, 그도 주인에게 칭찬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결산하실때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부유하고 고급스럽게 살았는가를 보시는것이 아니라, 얼마나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살았는가를 보신다.
신자라고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것이 아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믿고 실행하고 지켜며 사는 자만이 천국에 초청될 것이다. 주인이 세명의 종에게 똑같이는 아니지만 모두에게 달란트를 준것처럼 주님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이 아니다.
오늘 나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자. 정말 빈 손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히 나에게 공급해 주신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남과 비교하니 작아 보이고 보잘것 없어 보일뿐이다. 그러므로 비교하지 말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만큼 주신것으로 믿으면 된다.
그리고 주신것에 감사하며 순종해보라. 항상 순종할때 자신이 받은 재능이 어떤것인지 나타나는 법이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가진 기막힌 재능을 아시고 하나만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제발 주님주신 귀한 재능과 인생을 땅에 묻어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3/2) 마태복음26장 “낭비일까, 헌신일까?”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다른 복음서를 참고하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여자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임을 알수가 있다. 마리아의 돌발적인 행동에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상당히 당황해 한거 같다.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제자들의 분노를 이끈 사람이 가룟유다인것을 볼수가 있는데 요한은 이미 가룟유다의 행실이 제자로서 올바르지 못한 사실을 깨달은거 같다. 그래서 그를 향해 ‘도적’ 이라는 말을 서스럼없이 한것이다.
아무튼 가룟유다에게 선동된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엄청난 낭비라고 비난하였는데 그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이 그들의 항변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의 생각을 꾸짖으시며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해 주셨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기회가 늘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섬길수 있는 기회나 시간이 올때 정성을 다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기름부은 사실을 몇일 있으면 찾아올 당신의 장례를 위함이라고 하셨다. 물론 마리아가 그걸 알고 한것은 아니다. 마리아에게 주님께 헌신하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했을 뿐이었고 그 간절한 때를 놓치지 않은것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뜨겁고 간절했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가룟유다의 눈에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물질만 본것이 엄청난 차이를 낸것이다. 성도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은 절대로 쉽지 않다. 그냥 그리스도만 생각한다고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지진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해도 지금 마리아와 같은 심령의 상태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나 시간이 오지 않는다는 법도 없기 때문에 항상 주님을 향한 마음이 간절한 상태가 지속될 수 있도록 영성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마리아와 같은 심령의 뜨거움이 있어 무언가 주를 위해 하려고 할때 마귀는 가룟유다에게 한것처럼 우리에게도 그것을 ‘낭비’로 보게 만들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해야 하며 헌신의 때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헌신하는 영광을 누릴수 있어야 한다.
(3/23)마태복음26장(2) “회개의 기회를 놓친 유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유월절을 위한 식사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최후의 만찬이었으므로 제자들의 발도 씻어 주시고 떡과 포도주를 통해 성찬식의 의미도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제자들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폭탄발언을 하셨고 제자들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그 가운데 이미 예수를 은 삼십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던 가룟유다의 심장박동수는 순식간에 최고치를 찍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시면서도 그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에게 기회를 주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의 화법은 점차 강도를 높여갔으며 이 말씀을 알아듣는 한 사람의 마음에 큰 찔림을 주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은 다른 제자들처럼 똑같이 ‘나는 아니지요?’ 라는 아쉬운 질문만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 유다가 이실직고를 하고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다면 좋았을텐데… 안타까운 시간만 흘러버렸다.
헌신에는 시간과 때가 있는것처럼 회개도 기회가 올때 잡아야 한다. 마음에 찔림이 오고 양심이 요동침을 볼때 즉시 주님앞에 무릎꿇는 자가 용기있는 사람이며 용서받는 자이다. 죄된 마음을 우슬초로 정결케 하여 씻음 받았던 다윗처럼 나를 주 앞에서 쫒아내지 말아 달라고 엎드려 부르짖는 자가 용서받을수 있다.
예수님의 눈치를 매번 피하던 가룟유다는 끝내 성령의 찌르심을 벗어나 악을 행하여 버린다. 그리고 최악의 선택을 해서 예수님의 예언대로 되고 말았다. 기회 있을때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그릇된 결단을 만들게 된다. 회개는 천국문 앞에서 하는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만 할 수 있고 그것만이 유효하다. 지금 당신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예수님의 시선을 피하지 말기를…
(3/24) 마태복음26장(3) “마음따로 몸따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제자들에게 닥쳐올 시험은 무엇인가? 아마 예수님이 붙잡히자 모두 주님을 떠나게 되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제자들은 비록 잠은 자고 있었으나 그들이 그런 시험을 당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자신에게 다가올 시험을 미리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깨어 있는것이 필요한 것이다. 원수 마귀는 신자들이 잠잘때 가라지를 뿌려놓고 간다. 기도는 우리가 영적으로 잠에 빠지지 않도록 만드는 능력이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붙잡히지 않고 이겨내는 것이다.
모두가 주를 떠나도 자신들은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제자들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주를 떠나 버린 이유도 그들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까지 희생했던 순교자들은 다가올 시험을 위해 기도했던 기도의 용사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시험이지만 기도하여 깨어있었더니 시험이 찾아왔지만 주를 부인하지 않았고 고귀한 생명을 바치며 순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몸따로 마음따로의 신자가 되는 이유는 기도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자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이끄심을 얻기때문에 피곤하고 연약한 몸을 이길수 있도록 도움을 얻을수가 있다. 그러나 기도없는 삶은 도움을 얻을수가 없어서 육신이 버티지도 못하고 시험에 빠지거나 넘어진다.
예수님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것을 왜 모르는가? 주님이 그 무서운 십자가를 지실수 있었던것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모두 맡겨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결단이며 몸을 이기는 용기를 얻는 통로가 됨을 기억하자.
기도를 제쳐놓고 염려하는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기도할수 있는데 왜 하지 못하는가? 기도하면 성령의 인도와 도움을 얻는다.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움직이는 것이다. 나의 몸이 주의 뜻대로 나아갈수 있도록 기도의 골방으로 나아가자.
(3/26) 마태복음26장(4) “칼을 드는자는 생각해야 할 것”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
칼을 가진다고 다 칼로 망하는것이 아니다. 칼을 가지고 남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 혹은 칼을 이용해 자신의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록 칼이 아니라도 그 손에 누군가를 해치려는 목적이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들려진 것이라면 다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것이 물질이 될수도, 지식이 될수도, 말씀이 될수도 있다.
어리석은 부자나, 영생 얻기위해 찾아온 젊은 부자청년도 결국 돈을 놓지 못하여 망했다.
세상의 학문과 철학만을 손에 쥐었던 수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결국 그 지식에 갇혀서 망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말씀을 가지고도 말씀을 멋대로 사용하다 망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반대에도 베드로가 칼을 들어 행동을 한것은 예수님을 보호하겠다는 뜻보다 자신이 제자들중에서 가장 용기있게 주님을 지키는 사람임을 나타내려는 의지가 더 강했지 싶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사건이 곧이어 베드로에게 나타나게 된다.
베드로는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져 내렸다. 주님을 향한 자신의 모든 행동과 말들이 실제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더 드러나게 보이게 하려는 말과 행동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로인해 베드로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도 지키지 못한채 초라하게 퇴장하였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위한 칼, 지식, 명예로부터 다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예수님도 칼을 잡을수 있으셨다. 천사라는 엄청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그것을 들지 않으셨다. 왜?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오직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시며 생명까지 희생하신 것이다.
칼을 든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결국 그 칼의 댓가를 치를수 밖에 없다. 칼로 말고의 귀를 잘랐으나 예수님이 즉시 베드로의 행동을 꾸짖으시고 말고의 귀를 치료해 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말고는 평생 한쪽 귀가 없는 삶을 살았을테고, 그 복수를 위하여 베드로를 끝까지 따르지 않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혹은 말고의 아들이나 가족중 누구라도 베드로를 원수로 삼지 않았겠는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정당방위까지도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해 본다면, 피를 흘리고, 원수를 만드는 상황에서 피할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어떤 상황에서 내가 꺼내 들고 있는 칼이 주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함인지 혹은 나 자신만을 위함인지 깊이 생각하며 오직 주님의 뜻만 바라보자.
(3/29) 마태복음27장 “책임 전가”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참으로 황당하며 어처구니가 없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가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았음에도 무죄로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로마에 더 위험한 죄수 바라바를 놓아주었다. 백성들은 불과 얼마전에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그들의 겉옷까지 바닥에 깔며 환영했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다.
빌라도는 돌아선 민심때문에 완벽한 오점을 남긴 역사적인 재판을 남겼다. 그는 스스로 그 판결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었으나, 지금까지 교회는 그리스도가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으니 그의 판단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었던가!
손을 씻는 다고 죄가 사라지는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히 하신다.
대제사장에 의하여 미혹되어 돌아선 민심은 어리석은 빌라도의 판결을 격하게 환영하며 빌라도의 저주를 자신들의 후손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결정을 내리고 만다.
책임전가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인류에게 전염이 되었다. 책임회피, 책임전가로 인해 사회가 병들고 가정이 무너져 내린다. 부모가 자녀를 낳은 책임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친다. 한나라의 지도자는 국민들의 생명따윈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 오히려 죽음으로 내몰아 버린다. 책임지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거 같다. 사공없는 배는 정처없이 흘러간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맡기신 구속의 책임을 다하셨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가운데서 누구에게도 십자가를 넘기지 않으셨고 스스로 오르셨고 죽음으로 책임을 완수해 주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넘겨주신 책임이다.
무너져 가고있는 사회와 가정의 질서를 바로 잡는 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임을 온전히 깨닫고 맡는 길 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 주셨음을 믿는다면, 두려움을 이길수 있다. 세상의 민심은 더 악하게 기울고 있지만 믿는자의 마음은 오직 십자가로 인하여 더욱 용기를 얻어
믿음의 책임을 다하기를 소망합니다.
(3/30) 마태복음 27장 “무지로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치며 영접했던 메시아를 그들은 기어코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그를 모욕하며 조롱섞인 말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것도 불과 몇일만에 일어난 반전이다. 왜 무리들은 영웅시하던 예수를 그토록 저주하며 욕하게 되었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런 힘도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잡혀서 매달렸으니 더더욱 그를 조롱하게 된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제라도 이전의 신적인 능력을 나타내어 조롱하는 무리들 앞에서 불을 내려 분노를 표출하셨다면 상황은 또 다르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묵묵히 십자가에 오르셨고 죽음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것만이 이땅에서의 구속사역을 이루시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점하나라도 선하나라도 달라지면 구속에 오점을 남길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렇게 철저하게 예언된 말씀대로 오셨고 사셨고 이제 끝마치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언된 말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왜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건가? 무지때문이다. 말씀을 제쳐두고 눈에 보이는 현상만 고집했던 인간의 어리석은 무지때문이다.
이시대도 크게 다를바 없다고 본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지해서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믿는 사람중에는 신비한 능력만 쫒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환상을 들어야 되고, 보아야 하고, 뭔가 예사롭지 않은 현상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좌우에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둘이 있었다. 결론만 말하면 한사람은 극적으로 구원받았고 한사람은 지옥에 떨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 강도는 그리스도라면 이적을 보여보라고 했지만 한 강도는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기 때문이다. 무지했던 강도의 마음이 열리며 예수를 믿은것이 기적이 아니고 뭐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다. 말씀을 제쳐두고 믿는것은 불가능하며 말씀없는 삶은 믿음을 약화시키고 병들게 만든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만이 능력과 지혜가 됨을 믿으며 사는자가 복있는 사람이다. 말씀을 모르는 무지에서 벗어나자.
(3/31) 마태복음27장 “자기 몸을 찢으신 예수님”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마지막 소리를 지르시고 죽으시자 일어난 첫번째 기이한 현상은 성소의 휘장이 스스로 찢어졌다는 것이다. 성소의 휘장이란 성전안에있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었던 두꺼운 커튼을 말한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으로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가 하나님께 죄를 속죄받을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손수 그 휘장을 찢어주셨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냐하면 이제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나올수 있는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이제 일년에 한번 그것도 대제사장만이 출입할수 있었던 구약의 제사법이 완전히 폐지되었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린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성전 제사가 아닌 지구 어디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할수 있는 길도 열렸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찢으시면서까지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셨음을 깊이 상고하시길…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믿는 자에게 예배의 자유, 기도의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찾고 만날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길 원합니다.
(4/1) 마태복음28장 “부활의 증인”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그리스도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오르심으로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 내셨다. ‘다 이루었다’ 고 외치신 그 음성이 마음에 사무치는 듯하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보다 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길래…이다.
친구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것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다고 하신 말씀처럼 그대로 순종하시고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수가 없다. 나는 그분처럼 살수 있을까? 를 생각해 보지만 고개가 숙여짐은 어쩔수 없다. 세례요한의 고백처럼 나는 그분의 신발의 끈을 매기조차 부족한 인생인거 같다.
하지만 오늘도 주의 말씀에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나 홀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이 함께하시면 가능하게 하신다는것을 믿는다. 그렇게 제자들은 새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성령안에서 능력과 지혜를 얻어 목숨을 다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든가!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 땅에서 잘사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삶을 통해 전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신자가 이 땅에서 잘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를 위하여 하라는 명령을 기억해야 한다.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과 듀엣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솔로는 자신을 빛나게 하지만 듀엣은 상대를 더 빛나게 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날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주님께서 나의 삶에 은혜의 빛을 비춰 주실것이다. 구속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듀엣의 약속도 능히 감당해 주신다.
그러므로 나 자신만 정신 차리면 주신 사명 이룰수 있을것이다.
주여! 오늘도 나와 동행하시고 나의 모든 계획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나타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