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누가복음1장 “벙어리가 되어도”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누가복음의 시작은 예수의 출생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출생의 비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느 한 사람의 출생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것은 그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나타내시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며 흠이 없는 신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의인들에게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맡길 요한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았던 두사람은 천사의 예언이었지만 솔직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가브리엘천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사가랴가 벙어리가 될것을 말했고 그 즉시로 사가랴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요 하나님은 왜 사가랴를 벙어리가 되게 하셨을까요?
사가랴가 회개하고 교만하지 못하도록 하시기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천사에게 태어날 아기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이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나와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이런 예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동네방네 소문내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을 자랑하기에 바쁠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면 부모의 어깨가 올라간다는 말처럼 경건하고 겸손하고 의로운 사람이 하루아침에 교만한 사람이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벙어리가 된곳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기보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오히려 회개합니다. 그리고 더욱 낮아져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사가랴를 본받아 우리의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특히 자신의 혀를 잘 지키길 바랍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사람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소서” 시편141:3-4
(6/4) 누가복음1장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세례요한의 출생의 비밀에 이어 오늘 말씀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출생의 비밀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를 방문한 천사는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는 메세지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예언한 미래의 그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인물이 될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의 이 고백은 어쩌면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기독론의 기초가 되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도 고백하는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마리아의 이 고백이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천사의 방문과 예언을 들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결혼을 한 후에 주실것으로 생각할수도 있었고,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를 이을 자가 된다는 소식에 더 놀랄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인데 어떻게 자신이 아이를 출산할수 있는지를 먼저 물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질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거짓이 아닌 성령을 통해 진실로 이루어졌음이 입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에게 그런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다는것을 수치스럽게 여길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설명을 자세히 듣게된후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가 자신이 이후에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모욕과 수치심만 생각하여 천사의 말을 거절했었다면 예수님의 구속사는 처음부터 삐거덕거릴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용기가 어디서 나온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나온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으로는 석연치 않게 보이는 말씀일지라도 그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라면 아멘으로 받는 사람이 복있는 자이며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6/7) 누가복음1장 “믿음의 유산”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세례 요한이 출생한 후 두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짓는 상황에서 벌어졌습니다. 유대인의 전통대로 친족들은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 라고 부를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엄마 엘리사벳은 ‘요한’ 이라 부르겠다고 합니다.
친족들은 그런 전통이 없고 집안에 요한이라는 이름도 없기 때문에 당혹스러워했습니다. 그리고 벙어리가된 사가랴에게 몸짓으로 아기의 이름을 뭘로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사가랴가 아기의 이름을 쓰는데 똑같이 ‘요한’ 이라고 쓴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이 부부가 똑같이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은것은 천사의 지시때문이었습니다. 이 부모는 집안의 전통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더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은 전통, 지식, 경험에 앞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이 두번째로 내려가는 순간 그 순위는 뒤로 계속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놀라운일은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빈 들에서 지내게 된것입니다. 빈 들은 사람이 없는곳입니다. 그래서 세속에 더럽혀지지 않는 곳입니다. 요한은 사역을 시작하기전까지 줄곧 빈 들에서 지냈습니다. 누구의 심령이 강해지는 걸까요?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물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요한이 빈 들에서 나와 사역을 시작할때 세상으로 나왔으니 세속적으로 물들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령이 강한사람이 되면 세속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오히려 더 조심할수가 있습니다.
신자의 신앙이 약해지고 메말라지는 이유는 세속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혹시 자신이 그런 상황이라면 세상적인 것들을 잠시 멀리하고 영적인 삶에 집중해 보십시요.
보는것, 듣는것, 느끼는것까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믿음이 요한이 인물이 되도록 도왔다고 믿습니다. 자녀를 말씀안에서 올바르고 곧게 설수 있도록 하는것이 믿음의 유산이며 세상에서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6/8) 누가복음2장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메시아의 탄생을 제일 먼저 듣게된 사람들은 다름아닌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왜 하필 목자들이었을까요? 공교롭게도 양들을 치는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리신것은 그가 이 땅에 길 잃은 양들을 찾으러 오셨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선포라고 봅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를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입니다.
예수님을 믿는것은 이세상에서 비교할수 없는 큰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으로 인하여 멸망 받을 인생이 아무런 값 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이 큰 기쁨이 ‘온 백성에게 미칠 좋은 소식’ 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땅의 모든 인류에게 가장 기쁜 일이며 굿 뉴스입니다. 이세상은 가장 귀하고 가장 좋은것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습니다. 비싼 값을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저소득층이나 일반 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물질들을 모두 합쳐도 근접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마치 그의 소식을 가장 천하고 낮은 목자들에게 드러내어 주신것처럼 모든 이에게 값 없이 허락해 주신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치 양처럼 각기 제 갈 길로만 가며 자기 삶을 살기에만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칠 좋은 소식을 외면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불행이 될것입니다. 목자들은 비록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지만 천사의 소식을 기쁘게 듣고 제일 먼저 구세주를 찾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이러해야 합니다. 이천년전 목자들이 들었던것을 그대로 본것처럼 지금 우리가 듣는 말씀들이 믿는 자들에게 그대로 성취됨을 보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도 변함도 없습니다. 직분여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직 듣고 믿는 자에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6/9) 누가복음2장 “예수님을 본받아”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메시아이신 예수가 태어나시고 율법대로 할례를 행하신 사실을 볼수가 있는데 이것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을 지키고 성취하시는 유일한 사람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대개는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리지만 형편이 좋지못한 집을 위해서 비둘기로 대체할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이 가난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것 같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를 위해 드리는 제물인 어린양을 드리진 못했지만 예수님의 가정은 진실하게 율법을 따랐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소를잡고 양을 잡은들 마음이 없는 제사는 죽은 것이며 흠향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단행하면서도 하나님께는 율법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과 제사가 역겹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며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으신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경험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드리는 것과 비교할수 없는 화려한 제사를 이전에 드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이 깨달은것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화려한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마음이 있다는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제사를 기쁘게 받으실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가 드린 두렙돈을 더 많이 드린것이라 말씀하신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양이나 비둘기가 중요한게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수 있는냐에 달려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폐지되었지만 그 정신은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제사를 기억하며 항상 예배해야 하며 예수님이 자신을 산제물로 드린것처럼 예배해야 합니다.
당신은 온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6/10) 누가복음2장 “어린이 예수”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기록한 유일한 흔적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어떻게 알고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이 짧은 기록은 그가 인간으로 오신것을 다시한번 증명할뿐만 아니라 보통 아이들과 똑같은 시절을 지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가 시작되기전까지 마리아와 요셉의 집에서 장남의 책임을 가지고 부모를 도우며 동생들을 돌보았습니다. 아이 예수는 그가 메시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까요?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더 따르고 기도함으로 지혜를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에게 그 은혜가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가 사람에게 악을 베풀수가 없고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리라는 것은 또한 넌센스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늘 삶에 가득하기를 원한다면 계명을 주신대로 지키며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위선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낮아지셨던 예수님처럼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삶에 충만히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6/11) 누가복음 3장 “독사의 자식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세례받기위하여 나오는 무리들에게 세례요한은 ‘독사의 자식들’ 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합니다.
그가 본 무리들중에는 겉은 경건한듯 보이지만 실체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외식하는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빈 들에서 지냈던 요한은 광야에서 살고있는 독사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사를 예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광야에 사는 독사는 ‘잘 속이는것’들입니다. 때로는 마른나무가지처럼 자신을 숨기고 있다가 사람에게 갑자기 달려들어 물고 독을 뿜어 냅니다.
이 독사의 모습이 마치 위선적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는 우리 인간과 비슷한거 같습니다. 사람들중에 기분나쁜소리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은 귀에 듣기 좋은말, 마음에 찔림이 없는 말씀을 듣기를 좋아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기약 정도로 암을 치료할수 없다는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것처럼 말씀은 영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약과 같습니다. 더러운 그릇은 아무리 금그릇이라도 주인에게 쓰임받지 못합니다. 세례받기위해서 나온 무리중에서 요한의 독설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 사람은 씻음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의 세례를 받은자들은 씻음을 얻었습니다.
올바른 믿음생활은 항상 찔림을 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사맞기 정말 싫지만 그 찌름이 있을때 병든 사람들이 치료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찔림을 주시는것은 거룩한 주사를 맞는것과 같습니다.
(6/14) 누가복음3장 “예수님 족보의 비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누가는 예수님의 성령을 통한 동정녀 탄생과 더불어 육신의 족보까지 기록하면서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며 또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유일하게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가지 중에 하나라도 의심하거나 믿지 못하게 되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에 치명적인 혼란이 야기될수 있습니다. 신성만 인정하면 죄인의 대표로 대속의 죽음을 당함이 거짓이 될것이고, 인성만 인정하면 그가 보이신 모든 신적인 사역들을 부인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복음서를 기록했다면 누가는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족보를 기록할때에도 예수님을 가장 위에 두었던 반면에 누가는 예수님을 가장 아래에 두었다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왕으로 그리고 섬기는 종으로오셨음을 두 족보를 통해 깨달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독자들은 복음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신성과 인성을 관찰할수 있어야 하며 그 믿음에 흔들림이 없도록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가장 낮은곳에 오셔서 죄인들을 섬겨주시면서 온전한 섬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믿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도 나를 높이기보다 낮추며 더욱 겸손해지는 삶을 배우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6/15) 누가복음4장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을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앞에 나타난 마귀가 했던 세가지 시험 가운데 마지막 시험입니다. 첫째시험은 예수님 자신의 능력을, 두번째는마귀에게 복종하게하는 시험이었다면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사용한 말은 시편91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앞의 시험이 먹히지 않자 다급해진 마귀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넘어 뜨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적절한 말씀으로 마귀의 도전을 차단하였는데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파악하신 마귀의 시험의도는 이런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충분히 피할수 있는데도 일부러 위험에 빠져서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나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몸이 아프면 약을 먹든지 병원에 가면 금방 나을수 있는데도 일부러 가지않고 하나님이 치료하실거라고 의사의 진료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실제로 신비주의에 빠진 어떤 엄마가 딸을 그렇게 방치해서 죽음에 이르게 했던 사건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방편은 인간의 의도로 절대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스스로 결정하시고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치는 물질이나 정성에 감복해서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세상의 잡신이 아닙니다.
마귀가 인용한 시편91편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천사들을 명령하셔서 믿는자들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의 진의는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지존자이시고 전능자이심을 믿는 자에게 임하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말함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할 생각 자체가 죄악이므로 그런 생각을 하기 보다 온전히 믿는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6/17) 누가복음4장 “귀신도 알아봄”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첫 사역은 귀신을 쫒아내시고 질병을 몰아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존재들인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눌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 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는 이렇게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신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신자가 무엇보다도 말씀을 깊이 상고하고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을 얻을수 없으며 신앙이 자라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고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면서 우리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생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이 없는 자의 신앙생활은 그 깊이가 없고 늘 얋은 물과 같습니다. 깊이가 없기 때문에 내가 가고 싶은데로 가고 하고 싶은 데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면 할수록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게 되며 마치 깊은 물에 들어간 다이버처럼 물 밖에서 볼수 없었던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앞에 드러나지 못하는것이 없습니다.
귀신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밝힐수 밖에 없었던것처럼 깊고 넓으신 하나님의 말씀의 빛앞에 세상의 썩은 모습과 인생의 자아가 갈망하는 모습들이 낱낱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만 살아 가는 신자는 세상에 발을 섞지 않고 자아가 이끄는 정욕의 삶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의 눈을 밝히는 주의 말씀을 더욱 읽고 상고하십시요. 당신의 영안이 열릴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 보며 그 디렉션만 따라 살아가는것은 세상에서는 길을 잃지 않겠지만 당신의 영혼이 찾아야 할 길은 잃어 버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혼의 눈으로만 볼수 있습니다.
(6/18) 누가복음5장 “스펙타클한 부르심”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부르신 장면가운데 가장 스펙타클한 부르심은 베드로와 어부들을 제자 삼으실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와 요한 형제들에게 유독 이와같은 놀라운 경험을 통해 제자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을 앞으로 더 크게 쓰임받게 하시려는것이 이유였을까요? 아니면 이들의 마음이 다른 제자들에 비해 더 강하고 딱딱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상상은 자유지만 예수님이 이 어부들에게 물고기에 관한 경험을 하도록 하신것은 다름아닌 이들에게 주실 사명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기 위함이 아닐까요?
고기잡는 사람들에게 고기잡이보다 더 좋은 시청각 재료가 없듯이 예수님은 이들을 부르시는 이유와 뜻을 자신들이 손에 익숙한 일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어록에 그저 깊은 탄성이 나옵니다.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신자들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어부가 아니더라도 똑같은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각자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 만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일에 최적화된 사람도 훈련받은 사역자도 아님에도 부르십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도 근심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도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스펙타클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길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말씀에 의지하면’ 그곳에도 스펙타클한 부르심이 임하게 될것입니다.
(6/21) 누가복음5장 “율법 à복음“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요한의 제자도,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열심히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 는 공격적이고 질타적인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의 질문이 결국 율법에서부터 온것이기에 예수님은 몇가지 비유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는 각각 율법을 그리고 새 옷과 새 포도주는 그리스도(복음)를 의미합니다.
자칫 오해하면 율법과 복음은 불합치하는것이라고 볼수도 있는데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없이 복음이 올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옛 언약인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구원을 얻는것이 죄있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기에 죄인들에게 구원얻는 새 길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죄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인 말씀은 항상 죄인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신자가 비진리의 길을 간다면 늘 찔림을 받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자가 말씀을 받을때에도 이전의 삶이 헛된 삶이없음을 깨닫고 회개의 자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죄가 무엇인지를 보게 함으로 우리에게 회개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기에 말씀을 알지 못하고는 회개의 자리에 앉는 시간도 거의 없다시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야 새 포도주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새 부대가 되도록 말씀을 통한 회개의 삶이 멈추어 지기 않기를 원합니다.
(6/22) 누가복음6장 “능력이 주님께로 부터 온다”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손 마른 환자를 일부러 회당에 데리고 와서 예수님 눈에 잘 보이는곳에 앉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지게 만들려는 그들의 술책임을 모를리 없는 주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이 할 바를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은 함정을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진리에 빠지도록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지혜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인지를 보여주는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본의 아니게 이 긴장된 상황의 쟁점이 되어버린 주인공 ‘손 마른 사람’ 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사람들 가운데 서있던 그에게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표정으로 물으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청천병력과도 같은 말씀에 어쩔줄 몰라하던 그 사이 평생 한번도 펴지지 못했던 팔에 난생 처음 느껴보는 에너지의 생성에 당황했지만 그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차게 말랐던 손을 주님께 내밀어 보았습니다. 결과는?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할렐루야~
진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진리가 땅에 떨어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선포하신 말씀에 책임을 지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명령하시는 말씀을 그저 믿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능력도 주시지 않고 불가능한 일을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만약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비록 마른 손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내밀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며 또한 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믿음없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진리선포와 능력행하심을 본받고 악한 세대를 향하여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능력을 얻는 신자의 삶을 살아갑시다.
(6/23) 누가복음6장 “예수님은 절대적인 진리이시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 믿음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욕을 당하고 환난을 받는것이 믿는 자에게는 오히려 크나큰 복이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가 믿는것과 상관없이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로 욕을 당하고 고난을 받는것은 복된 삶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삶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므로 복이 아니라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다가 당하는 고난이 축복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절대 완전하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욕하고 반대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거짓된 것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앞에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다가 욕을 당하는것은 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편에 있음을 증거하는 모습이 되지만 핍박하고 욕하는 자의 삶은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함을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의 삶은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될것이 자명합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믿는 자는 예수의 이름으로만 사는 자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하며, 살고 죽는것도 그 이름안에 있다는 믿음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이 흔들리지 않는자는 복 있는 사람이며 그를 위한 하늘의 상급이 클것입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오직 예수라면, 당신은 복 받은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6/24) 누가복음6장 “하늘의 상급”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이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이 구절을 읽고 자칫 구원이 선한 행실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은 절대로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하여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아니라,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를 마음속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은 마치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180도 달라진 삶을 보인것처럼 약한자, 억눌린자를 보는 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은 이 땅에서 선을 베푼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지만 그 상급도 구원받은 자가 천국에서 받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한사람의 선한 행실은 그저 이 땅에서의 칭찬과 상급일뿐입니다. 자신의 선행을 스스로 알리고 나타냄은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구걸하는 행위가 되므로 예수님도 그들에게는 하늘의 상급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선한 행실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것을 보고 계시고 그 행실을 기록해 놓고 계신다는 것을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정확하게 볼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선한 마음을 열어주셔서 어렵고 소외받는 인생들을 향하여 손을 내 밀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런 마음이 불 일듯 일어날때 거절하지 말고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헤아리고 후히 줄수 있는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늘에서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6/28) 누가복음7장 “백부장의 진실한 겸손”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마태복음에도 등장하는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과 겸손한 모습에 존경심이 우러러 나오는거 같습니다. 마태복음과 조금 다른 전개를 볼수가 있는 장면이 눈에 뜁니다. 마태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의 하인을 고쳐 줄것을 요청한 반면에 누가는 백부장이 직접 나온게 아니라 유대인의 장로를 보내어 요청을 하였습니다.
자칫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나와서 직접 요청하지 않은것으로 인해 기분이 상할수도 있는 분위기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라고 하시며 극찬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괘씸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칭찬하신 이유는 그가 주님앞에 나오지 못했던 까닭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백부장은 유대인의 장로뿐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까지 동원해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오심을 막은 이유를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로 설명했는데 그 의미는 자신같은 이방 죄인의 집에 거룩하신 예수님이 들어오시게 하는것 자체가 예수님께 상당한 누를 끼치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자칫 예수님을 무시하는듯 보였을지 모르는 백부장의 행동이 진실한 겸손이 바탕이된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비춰지게 된 것입니다. 교만해지기 쉬운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극도로 낮은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 백부장의 모습에 예수님이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별거 아닌것에도 괜히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높이고 싶은것이 인생의 마음인데 이방인이었고 상당한 힘과 권력을 가진 그가 보인 순백한 믿음에 고개가 숙여지는거 같습니다. 예수 믿는다는것을 핑계삼아 우리는 예수님을 혹시 너무 안일한 마음으로 하대하는 모습이 있지 않은지 자신을 되돌아 볼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