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누가복음7장 “반응없는 세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요한의 회개선포와 회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롭게 하는 삶을 살게 되었으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세례요한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위의 비유를 들어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자들의 악함을 경고하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질책이 하나님의 율법을 너무 잘 알고 지킨다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향하고 있다는것이 믿는 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질타를 받은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식적으로 믿은 까닭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말씀을 요리조리 이용하고 살았을뿐 정작 율법이 가리키는 복음은 철저하게 외면하는 유치한 모습을 어린 아이들의 장난에 비교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슬픔이 변하여 노래가 되게 하고 근심을 변화시켜 기뻐 춤추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잘못 운반시키다 무서운 징계를 보았던 다윗이 슬픔에 잠겨 있을때 오벧에돔의 집에 모셨던 언약궤를 통해 그 집에 큰 복이 임했음을 듣고 회개한 다윗이 슬픔의 옷을 벗고 춤을 추며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모셔올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과 정욕을 위하여 사는 세대를 향하여 똑같은 비유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회개의 눈물이 마르고 성령이 부어주시는 기쁨이 식어지고 있다면, 놀이에 반응없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이사야는 ‘너희가 여호와를 찾을만 할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때에 찾으라’ 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복이 항상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직 은혜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믿는자가 더욱 마음의 문을 주님께 열어 드려야 합니다.
눈에서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심령에서는 물댄 동산과 같은 은혜가 강같이 흘러 나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의 세대가 되어야지 메마른 세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우리의 심령에 복음을 향한 생수가 흘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의 반응이 일도록 합시다.
(6/30) 누가복음7장 “용서와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어 들어가신 예수님께 그 동네에 죄 지은 한 여인이 다가와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장면은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지만 다른 복음서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향유를 부은 여인이 향유를 낭비했다고 책망하였는데 이 본문에서 보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비난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예수님은 시몬이라고 부르는 이 바리새인과 향유를 부은 여인을 그대로 비교하여 말씀하셨는데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으며 향유를 발에 부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믿음의 삶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섬긴다고 말하면서 과연 우리의 섬김이 바리새인과 같은지 향유부은 여인과 같은지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향유부은 여인의 큰 차이점은 간절함에 있는거 같습니다.
그 여인이 그토록 간절히 예수님께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함이 많았기 때문이었으며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된 까닭은 그녀의 많은 죄를 용서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대하여 봉사하면서도 자신의 들보를 보지도 못하고 여전히 율법으로 죄지은 여인과 예수님에게까지 잣대질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봉사와 헌신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모두 용서하신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와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그 봉사와 헌신을 통해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줄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자존심이라 할수 있는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던 여인의 겸손함과 낮아짐을 본 받아야 합니다. 결국 그 여인의 사랑의 행위가 그의 용서 받은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용서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요. 남의 눈에 티만 보려고 하지마십시요.
일만 달란트의 죄를 탕감받았다면 백 데나리온 정도는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속죄의 사랑을 삶 속에서 몸소 전하는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7/1) 누가복음8장 “경건한 부녀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쫒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는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가장 측근에서 도운 사람들을 기록으로 나타내고 있는데요 열두 제자들외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여러 여자가 주님을 따르며 사역을 서포트했었다고 말합니다.
그시대 상황으로볼때 여성이 앞장서서 어떤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점을 감안해 볼때 이 여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여러 방면으로 도왔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누가는 특히 이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고 기록했는데요
그도 그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떤 직업을 가진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와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나라전파를 위해 물심양면 섬기도록 하신것입니다. 누가는 이 여인들이 저마다 이런 사역을 하게 되었던 배경을 설명해 주었는데 예수님으로부터 귀신들림과 질병에서 놓임을 받고 고침을 얻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병고침 사역을 통해 셀수없이 많은 환자들이 치료함을 얻었지만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거나 돕지는 않았음이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10명의 문둥병자중 한명만이 돌아와 은혜에 감사했던거와 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고도 그것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주님께 맡기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자가 된 사람입니다. 신자는 복음을 받고 그 좋은소식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할뿐만 아니라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경건한 부녀들이 각자의 사정이 다 있었을텐데도 그 어려운 시절 여인의 몸으로 주님의 사역에 동행했었다는것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세대에도 경건한 부녀, 경건한 주의 종들이 은혜를 깨닫고 여기저기서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7/5) 누가복음8장 “겸손하고 갈급한 믿음”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혈루증 치료는 수많은 예수님의 치료사역가운데 유례가 없는 특이한 치유인거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환자를 보시거나 기도해 주신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치료를 받았던 것인데요 무려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며 앓았던 이 여인은 어떻게 치료를 받게 된 것일까요?
첫째, 이 여인의 겸손함때문입니다. 그 당신 유대 사회에서 혈루증은 불결한 병으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종교적 의식을 생명처럼 여기던 시절에 혈루증환자는 사람앞에 나설수도 없었으며 당연히 공동체에서도 소외당할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질병을 치료받는데 종교의식이니, 불결함이니, 이런거 따지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이 여인은 예수님앞에 나서서 자신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방법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저 예수님뒤에서 그 옷자락만 만졌던 것입니다. 자신의 질병치료에 앞서 자신의 처지와 율법의 규율을 어기지 않았던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둘째, 갈급함때문입니다. 참믿음에는 두가지가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의심없는 온전한 확신입니다. 이여인의 행동이 참 믿음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반응인데 예수님은 결국 자신의 옷을 만진 자가 그 여인이었다는것을 그녀의 자백을 통해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구하는자가 얻고 찾는자가 찾으며 두드리는자에게 열릴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저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져서 자신을 부인하는 겸손한 믿음과 의심없는 갈급한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혈루증 앓은 여인은 그렇게 치료함을 얻었던 것이며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유일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나 공로로 구원받을수 없는것처럼 주님앞에 나와 간구하는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영과 육의 수 많은 문제들도 오직 믿음으로 평안함을 얻을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7/6) 누가복음9장 “감사의 기적”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먹고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예수님의 기적 흔히 ‘오병이어의 기적’ 이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의 포인트는 무엇일까요? 작은 음식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능력일것입니다. 이 기적을 보면서 자신의 삶에서도 이와같은 기적을 경험하길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전에 같이 신앙생활하는 사람가운데 로또를 사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데 이런 행운에 당첨되는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일까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갈망하는 ‘로또의 기적’ 과는 차원이 다른것이며 로또의 확률도 무너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핵심 포인트는 감사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로부터 배달된 이 음식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는데 ‘축사’ 의 원어의 의미가 ‘감사하다’ 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한 이 작은 음식에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곧바로 능력으로 나타났으며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는 잔치의 은혜로 이어진것입니다. 감사에는 제한이 없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신것에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해 보십시요. 범사에 감사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기가막힐 은혜를 경험하십시요.
(7/8) 누가복음9장 “주의 말씀을 듣는 삶”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돌연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것도 잠시 변화된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더불어 말하는 환상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이 나타난걸까요? 이 두사람은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특히 모세는 율법을 그리고 엘리야는 예언을 대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실분으로 묘사하도록 하기위해 이 두 사람들과 예수님이 조우하신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라는 질문을 합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무슨말을 하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는데 횡설수설이었지만 베드로의 간절한 인간적인 바램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바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머물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땅에서의 사명이 남았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 믿는자가 예수님과 성경의 인물들을 만나볼수 있는 날은 분명히 오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날을 눈으로 보게될 방법은 믿는자가 이땅에서 예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것입니다. 하나님은 환상이나 계시를 보고 듣는것보다 이미 계시된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는것이 훨씬 귀한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만났다고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고싶은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차피 천국에서 만나게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오직 주의 말씀만을 붙들고 지키며 사는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목표이어야 합니다.
(7/12) 누가복음9장 “누가 큰 사람인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제자들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남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모든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 따르기로 작정했던 사람들임에도 12명의 작은 소그룹에서도 크고 높아지려는 야망을 버리지 못하는것을 봅니다.
이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죄의 본능을 가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신앙과 배치됩니다. 왜냐하면 높아지고 크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교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 이라는 말씀처럼 악한 마귀는 우리 안에 숨어있는 교만의 문을 계속 두드려서 우리로 하여금 그 문을 열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실 경쟁사회인 세상에서 높아지고 커지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무수한 경쟁과 치열한 싸움을 거쳐야 하는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상위1%에 드는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높아지는것은 어렵다는 뜻이며 그만큼 높은 자리가 많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높아지려면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높아지는 방법이 낮아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솔직히 낮아지려고 마음만 먹으면 낮아질 수 있는 자리는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겸손해 질수 있는 길은 수천가지도 더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천국에서 아무런 상도, 의미도 없는 세상에서의 높아짐을 내려놓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는 예수님의 음성을 귀담아 들어봅시다. 낮아지는 전문가가 되도록 주님은 우리가 시선의 각도를 낮추길 원하십니다.
(7/13) 누가복음10장2절 “일꾼이 되게 하소서”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분하는 잣대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입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메시야로 나누어 집니다. 구약의 성도는 오실 메시야를 기대하며 바라보는 신앙을 가졌다면
신약성도는 오셔서 예언을 성취하신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신약을 살아가는 현대 성도들에게 주신 사명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동안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갚는일입니다. 무엇으로도 갚을길이 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마치 당연한 것인냥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므나를 수건에 싸서 가만히 둔 종과 같은 사람입니다. 무슨의미? 훗날에 책망받을 종이란 뜻입니다.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느 특별한 종에게 주신 사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 즉 구원을 받고 말씀을 받은 모든 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함께 모든 의를 이루자고 제안하신것처럼 믿는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자야, 함께 가자’ 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것을 ‘추수하는 일’ 이라고 하십니다. 신천지 이단이 이단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추수하는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많아도 그 구원의 은혜를 기뻐하여 전하는 사람은 심히 적습니다.
오지로 날아가고 길거리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삶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 향기가 풍기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절대로 맡을수 없는 천국의 향기를 열심히 풍겨서 세상의 꽃에 취해있는 벌들이 샤론의 꽃인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에 이끌리도록 해야 합니다.
믿는 자의 삶을 통해서 입술을 통해서 복음이 흘러가도록 하는것이 추수꾼의 사명입니다.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거스리지 마시고 지금 나의 눈 앞에 보이는 밭을 향하여 두팔 걷고 허리를 동이고 땀흘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시길 기도합니다.
(7/15) 누가복음10:41-42 “빼앗기지 않는것을 택하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지극정성으로 도왔던 자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짧은 내용으로 모든것을 알수는 없지만 성경은 특징되는 포인트를 기록한다는것을 감안해 볼때 두 자매가 보여준 열심이 조금 달라 보입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방문하시자 두 사람이 각자 집중하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마르다였다는것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마르다가 이것저것 많은것을 준비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장면이 보이는데요. 마르다가 왜 마리아에게 불평하지 않고 예수님께 불평을 한걸까요?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마르다는 자신만 주님께 많은것을 준비하고 있고 마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거 같습니다. 마르다의 본심을 모를리 없는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의 열심을 칭찬하셨고 그 열심이 ‘빼앗기지 않는 좋은 편’ 이라는 말씀까지 덧붙이셨습니다.
대접하고 섬기는 일은 너무나 귀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불평하면서까지 대접하는것은 주님 보시기에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즐겁게 준비하며 대접했었다면 과연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 불평하기 시작하면 그 일이 아무리 귀한 일이라도 빼앗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기쁨을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그 귀한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고 거기에는 원망과 비난만 남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주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은사대로 주신일을 기쁨과 감사,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감당하는 자에게 빼앗기지 않는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7/16) 누가복음11:13 “좋으신 하나님”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호흡과도 같다고 말합니다. 호흡이 있는동안 끊임없이 해야하는것이 기도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또한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소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직통으로 대화할순 없지만 성령이 내주하시는 우리의 영을 통하여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은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이냐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는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깊이 이해해야하는데 내 쪽에서 볼때 좋은것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편에서 보실때 좋은것만 주신다는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보기엔 좋지않고 아프고 힘든일인데도 하나님편에서는 그것이 나의 삶에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은 가장 베스트의 길이라는것을 의심하지 않는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욥처럼 ‘주신자도 취하신자도 오직 하나님’ 이시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지는 현상에만 집중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펼쳐놓고 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그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불신앙적인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자들이 기대하고 받아야 하는것이 인간적인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도록 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앉든지, 일어서든지 모든것이 은혜의 역사임을 고백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기는 것만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다. 때로는 질때도 찾아옵니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실패하고 넘어졌을때 더 신중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분명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기도응답에 대한 우리의 눈이 좁아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것을 아시고 분명히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7/20) 누가복음11:39 “영혼의 내시경”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은 율법에 능통하고 완벽할정도로 올바르게 사는 종교지도자로 유대인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영적인 스승으로 존경을 받고 경건한 삶으로 백성들의 감탄을 자아내었던 바리새인들의 명성이 산산조각나는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오랫동안 이어졌던 그들의 외식적인 삶을 들춰내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눈과 귀를 깜쪽같이 속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천국이 아닌 지옥의 문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책망에 그들은 발끈하였으나 현미경처럼 자신들의 감추었던 내면을 들여다 보시니 반박조차 할수가 없었고 그저 예수를 죽일 증오심만 키웠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죄악이 다른 죄인들과 달리 심각했던 이유는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도 속은 다 썩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두면 결말이 뻔히 보이는 그들의 상태를 예수님이 손대신것은 그들또한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도 천국의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내리신 처방은 내시경을 통해서 몸안을 들여다 보듯이 그들의 오염된 내면을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속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했으나 겉은 거룩과 경건으로 마치 아름답게 회칠을 한무덤처럼 살고 있었던 그들의 현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 하셨느냐”
예수님은 속은 죽은 뼈들만 가득했지만 겉모습만 뻔지르하게 치장했던 그들의 이중성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보시는것은 외모가 아니라 속사람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이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심각한 삶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삶을 증오하시며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외식하는 자의 삶은 이땅에서 상을 다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서 그들을 위한 상은 없습니다. 외식하는 삶은 천국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는 최악의 삶이라는것을 늘 기억합시다.
내시경을 통해 이상있음을 발견한 사람은 치료를 받아 회복하는것이 순서입니다. 주의 말씀으로 영적 내시경을 받았다면 영적인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안과 겉이 같아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안을 청소하는것밖에 없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도록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로 마음의 청소를 시작합시다. 겉사람은 안이 정리되면 자동적으로 외식의 옷을 벗게 됩니다. 사울(가장 높은자)이 바울(가장 낮은자)이 된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스스로 겸손하며 낮아지는 그리스도 닮은자로 변화되길 소망합니다.
(7/21) 누가복음12:5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두려움없이 용감했다는 것이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총이나 칼이 없었고 맨몸이었으나 총과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가진것이 없었지만 있는자에게 주눅들지도 않았습니다. 소위 세상의 권력앞에서 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이렇게 강한 사람으로 탈바꿈 시켜놓은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칼과 총보다 강합니다. 그 믿음안에는 칼과 총을 든 권력자들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원인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줄을 알았다면 인생이 이렇게까지 많은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분’ 이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라는 말씀에는 무서워하라는 의미보다는 그 크신 위엄과 주권앞에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세상의 권력과 물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 지면서도 정작 그 모든 세상의 권력자들과 물질까지도 친히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앞에서는 목이 곧아집니다.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또다른 이유는 그가 우리 인생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떨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우리도 알지 못하는 미미한것까지 일일이 관찰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날개아래 사는것이 가장 복 된 인생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땅히 두려워해야할 분을 두려워하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은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7/22) 누가복음 12:20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요즈음 억만장자들의 우주여행이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수 없는 돈을 투자하여 역시 일반인들이 이룰수 없는 일들을 성취하는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도전이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부자일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자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내 영혼아 이제 편히 먹고 쉬자’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도 자신의 소유인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벌어들인 물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지는 몰라도 자기 몸에 있는 영혼까지 마음대로 할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영혼을 부르시면 그 인생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억만달러를 가진들 동전하나도 더이상 자신의 소유가 아닌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자신이 가진 그 어떤 소유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로 그것을 움직일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삶은 소유의 넉넉한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영혼이 잘되는 길을 찾는 사람이 범사에 강건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지금 안전합니까? 불안전하다고 느낀다면 주님을 붙잡으십시요.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하지 말고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너를 도우시리라.’ 고 고백하며 주님께 맡기시길 원합니다.
(7/23) 누가복음12:29 “나의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염려하며 근심하는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도 세상의 것들로 인하여 낙심하는 모습은 더더욱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것을 줄줄알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된 자들의 필요를 채우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설명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결국 세상의 것들로 인하여 발생하는 염려가 연약한 믿음때문인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은 모든것과 연관이 있고 연결지어져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믿음이 있다면 자신과 연관된 모든것들을 염려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갈렙은 가나안의 강력한 헤브론 산지를 정복하는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지파도 선뜻 나서지 못했지만 85세의 갈렙이 기세등등하였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무려 45년전의 약속이었습니다.
갈렙은 그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질것을 믿었으며 염려가 찾아올때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견디고 참을수가 있었습니다. 갈렙은 언젠가 자신에게 주실 그 땅의 거민들과 싸우기 위하여 45년동안 준비했던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담대하게 탄탄하게 준비하였기때문에 그 약속의 때가 임했을때 앞장설수가 있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되셔서 나의 형편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는것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염려대신 믿음을 가지십시요. 백해무익한 근심대신 하나님을 찬양해 보십시요.
믿음이 이깁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