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누가복음15:7 “회개의 삶,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이유로 비방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왜 당신이 그런 행동을 하시는지 차분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누구도 거들떠 보지않고 욕하고 비난하는 세리나 죄인들이지만 그들이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마음에 은혜를 입고 죄의 삶을 회개하는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죄인들을 찾아 회개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이 쇄도 했음에도 기쁘게 당신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한다는것이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인지 그 당사자는 알지 못하지만 하늘에서는 잔치를 벌일만큼 대단한 일이 되는것이라고 예수님은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죄인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죄에 대한 강력한 회개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회개없이 믿음도 구원도 있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기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서라도 기어이 그 한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복음을 통해 죄인이 의인으로 돌아올수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습니다. 회개의 삶, 복음증거의 삶을 사십시요. 천국에서 당신으로 인하여 잔치의 팡파레가 울려 퍼질것입니다.
(8/4) 누가복음 15:31 “무엇이 가장 큰 축복인가?”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 것이로되.”
그 유명한 탕자의비유에서 오리지널 탕자의 역할은 동생이었으나 예수님은 은근히 아버지 곁에 있었고, 집도 나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재산도 탕진하지 않았던 큰 아들이 탕진하고 있는 무언가를 밝혀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아들이 눈에 보이는 물질과 시간 젊음을 탕진했었다면 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한테는 다 퍼주었는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해준게 없었다고 불만과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흥분한 큰 아들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한마디 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요? 그 말을 듣고도 계속 섭섭해할 아들이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 말을 통해 아들은 자신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신뢰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탕진하는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인거 같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부족함과 필요까지 채우심을 늘 믿는 사람은 두말할 필요없이 축복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큰 아들처럼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축복임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때 늘 남과 비교하면서 불평 불만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떠날지라도 자신과 가족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기쁘든지 슬프던지 건강하든지 약하든지 그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동행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자가 누릴수 있는 강력한 축복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도 그 약속은 유효하며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지금까지 받은 복을 세어보며 감사와 기쁨의 날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8/5) 누가복음 16:9 “불의한 재물 사용법”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불의의 재물은 훔치거나 나쁜짓을 해서 가진 돈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worldy wealth 로서 세상에서 얻는 물질을 말합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물질을 이용해 빚을 감해 줌으로서 그들과 가까워졌다는것을 예로 삼아봅시다.
세상의 물질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물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맡겨주셔서 필요한 곳에 올바로 사용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물질을 단지 자신이나 가족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는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보고
물질이 없어 고통받는 곳이나 사람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나중에 혹시 물질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사람은 잃지 않게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여기서 작은것과 큰 것은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세상은 물질을 가장 큰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것이 가장 작은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세상의 물질을 인생의 가장 가치있고 큰것으로 여기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될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성경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물질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에 목숨걸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보람있고 가치있게 사용하는 일에 기쁘게 쓰여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세상의 물질) 에도 충성하지 아니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작게 여기는 세상의 물질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할수 없는 사람은 어떠한 일에도 충성할 수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낙인찍혀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수 있다면 그 사람이 가진 물질관은 올바를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진실한 신앙을 가진 부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부자가 되고 싶으면 이런 신앙부터 가지십시요. 당신은 낙타가 바늘귀 안으로 들어가는 0% 확률을 뚫는 사람이 될것입니다.
(8/6) 누가복음 16:15 “천국을 침입하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고 침입하느니라.”
율법은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의미하고 선지자는 구약의 예언서들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을 가리키며 그 후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구약은 복음에 대하여 예언을 하였고 세례요한은 복음을 예비한 사람이며 그리스도는 자신이 복음이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침입하는 자의 것이란 표현이 눈길을 끄는데 침입이란 말의 뉘앙스처럼 누구나 자신의 인력으로 천국을 얻을수 있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수 있는 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천국을 붙잡을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율법의 영원성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이 담겨있는 신약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구약을 이해함이 필수입니다. 구약없이 신약이 있을수가 없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길잡이이며 복음을 위한 몽학선생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페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창세전부터 예언과 성취를 완벽하게 준비하셨을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이루어 지도록 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의 은혜를 얻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계획이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천국을 가진 자의 모습이 날마다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8/7) 누가복음 16:27-28 “회개의 삶을 무시하지 맙시다.”
“아버지여 구하오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는 안타깝게도 지옥에 와서야 드디어 깨달은것이 있어요. 자신처럼 믿어서는 절대로 천국에 갈수 없다는것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기야 이미 늦었으니 기회가 없지만 이 사실을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는 알려야 할것같다는 생각이 든거에요. 그것은 즉 그의 다섯 형제들도 부자처럼 똑같이 살고 있다는 말이지요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기만 해도 부자처럼 지옥에 오지는 않을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하지만 부자는 더욱더 완강하게 부탁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지금 자신의 형제들에게도 말씀이 필요한게 아니라 그들을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고 부탁합니다.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어 지옥에 왔지만 자기 형제들은 분명히 정신 차릴것이라고 믿은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의외의 말을 듣게 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근본적이고 분명한 이유는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적같은 신비한 경험이 사람을 회개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회개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회개합니까? 꼭 무엇인가 큰 잘못을 했을때만 합니까? 그마저도 하면 다행이지만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을때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어두운 나의 마음과 생각을 말씀의 빛으로 비춰주실때 나의 숨겨졌던 더러운 욕심, 정욕, 탐욕이 드러납니다. 그걸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회개를 모르는 사람은 자칫 오늘 비유속의 부자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회개의 삶을 무시하지 마십시요. 마음에 찔림이 올때 즉시 회개하여 당신의 삶을 말씀의 길로 바로 인도하십요.
(8/10) 누가복음17:19 “몸의 치료보다 더 귀한 영의 구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 간구하여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치료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하여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그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만져주시지도 않고 그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는데 아마 그들 가운데 이 일로 인하여 논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섭섭해 하지 않았고 곧바로 제사장에게로 발걸음을 옮겼고 가는 길 도중에 깨끗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는 이처럼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때로는 비록 우리가 이해할 수없을때도 있지만 그것이 말씀이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순종을 통하여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기쁨으로 마무리 되지 않습니다. 순종과 응답의 기쁨은 있었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책망이 이어졌습니다. 열 명가운데 주님께 돌아와 감사한 자는 한명뿐이었는데 이 수치는 믿는 자들 가운데 감사하는자의 숫자가 그만큼 부족함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아홉명은 그냥 가버렸을까요? 아마도 치료의 기쁨에 도취되어 정상적인 삶으로 속히 돌아가고 싶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명은 무엇이 먼저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정상인의 삶으로 돌아가기전에 자신을 치료하신 분에게 나와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사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한 행동을 믿음으로 칭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아홉명은 그저 세상으로 돌아가 건강한 삶을 원했지만 한 명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몸의 치료보다 더 귀한것이 영혼의 치료이며 영혼의 구원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상황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십시요. 구원의 기쁨이 배가 되며 구원의 삶의 깊은 은혜를 누리게 될것입니다.
(8/11) 누가복음17:20 “천국을 사는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는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이 존재함을 말한다고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는 그 사람의 삶을 통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삶 속에서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죄악 많은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늘 동행하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므로 그 사람은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믿으면서도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과연 죽어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바리새인들이 천국을 믿었지만 자신들 앞에 서계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절대로 가까와 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수록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생길수록 자신의 현재의 삶이 천국에 합당한 자의 모습인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하여 이미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예수 안에 살면서 천국의 맛을 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지극히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일 천국을 사는 사람입니다. 천국의 언어, 천국의 행동이 우리의 삶에서 뿜어져 나올 수 있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성화되어 천국을 사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다시 오셔서 이루실 완전한 천국의 삶을 기다리며 오늘도 이 세상에서 그 나라의 삶을 풍기며 살아 봅시다.
(8/12) 누가복음 18:13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한 세리의 기도를 비교해 주시면서 기도자의 마음상태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신뢰함보다 자기 자신을 더 높이는 교만이 가득했습니다.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앞에서 교만함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는내내 ‘나는 이것도하고, 저것도 하고,, 다 자신이 한것만 드러내는것으로 기도를 채워나갔습니다. 반면에 세리도 자신을 드러내긴 했지만 좀 달라보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두 사람이 똑같이 자신을 드러내었지만 그 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다른 기도였습니다. 세리의 ‘나’ 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었으므로 겸손하고 진실된 기도였으므로 바리새인의 ‘나’ 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기도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의인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지은 죄를 진실로 하나님앞에 아뢰며 회개하는 자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낮아져 회개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주의 백성되시길 소망합니다.
(8/14) 누가복음18:24-25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방법”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가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돈이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신이 가진 돈이 길을 막자 뒤로 돌아보지 않고 돈을 택한 부자는 그렇게 씁쓸한 퇴장을 하고 말았습니다.
도망치듯 예수님을 떠나가는 부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의 말씀이 참으로 기가막힙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가는것보다 쉽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고개를 저으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의 질문속에는 ‘돈에 약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는가’ 라는 의미도 담겨있는듯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답변입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수 있느니라.”
한 인생이 구원을 얻는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관이시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야하는 어려운 일이지만 방법이 아예없는것이 아닙니다.
돈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란걸 증명하며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이 그걸 증명하려면 살이 깍여나가는듯한 희생이 불가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고 답을 주신겁니다. 사람이 바꿀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은 바꾸실 수 있으므로 삭개오처럼 예수를 만나는것이 유일한 방법이란 의미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지금까지 그가 남을 속여 먹은것을 계산해사 네배로 갚겠다는 그의 고백이 현실화되면 아마 삭개오의 수중에 얼마나 남겠습니까? 그만큼 삭개오의 마음이 돈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께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구원과 바꿀수 있는것은 이세상에 없습니다. 바꿀려고 하는것을 찾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일뿐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에 그리고 가정에 구원이 있습니까? 있다고 믿는다면 그 구원이 당신의 전부임을 모든 삶 속에서 늘 증명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8/18) 누가복음 18:30-32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이 구절은 그당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인기와 유명새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메시야의 출현으로 그 열기가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어느 곳이든지 예수의 이름만 대면 무엇이든지 통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화려한 백마를 택하시기보다 천한 나귀 새끼를 선호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약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는 메시야이시며 유대의 왕이셨지만 백성들이 소망하고 원하던 메시야나 왕이 아니셨음을 보여주신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확실하게 백성들의 욕망을 꺽고 그들의 이익과 배를 채워주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메시야로서의 행동을 과감하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면 모든것이 통과되고 허락이 되는 순간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메인사역을 잃어 버리지 않으셨고 철저하게 예언된 말씀을 하나하나 성취해 주셨습니다.
권력과 물질이 아무리 많거나 혹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제일 비싸고 화려한 말이 아니라 어린 나귀새끼에 두신것처럼 신앙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항상 겸손한자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을 쓰시겠다 하시면 이세상에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것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귀하고 비싼 그릇이 많아도 주인이 쓰는 그릇은 항상 깨끗한 그릇뿐입니다. 겸손하게 낮아져 주님의 손에 쓰임받도록 오늘도 성령 안에서 자신의 삶을 분별하여 성결케 되기를 원합니다.
(8/19) 누가복음20:13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끝이 온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불의한 농부 비유는 포도원 주인으로 등장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하나님 중심인 나라)를 세우시고 그의 사자(선지자)들을 보내어 진리를 선포하도록 했지만 그 땅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자들을 때리고 능욕합니다.
하나님은 더 많은 그의 종들을 이 땅에 보내셨지만 그들의 말도 듣지 않았고 역시 핍박하며 내 쫒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의 보내신 아들까지 죽일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세상은 그렇게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세상의 악이 대립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인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셔서 이제 곧 이땅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이 시대를 바라볼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이 세대가 변화되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냥 기다리시지 않고 많은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멈추지 않으시는것처럼 세상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의 종들을 싫어하고 무시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한계에 다다른듯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당겨놓으신 진노의 화살이 쏘아지기 일보직전인거 같습니다. 여러가지 자연재해가 지구상에 끊임없이 터지고 있으며 원인을 알수없는 질병이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창세이래로 자연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대변해주는 도구로 사용되어왔습니다. 믿는 사람은 영안을 열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계시된 말씀을 기준삼아 세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깨어 나야합니다. 깨어서 진심으로 믿음안에 살아야 합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모퉁이 돌이 되시도록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모래위에 세운 집은 바람과 비에 처절하게 무너지겠으나 그리스도가 반석이 된집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