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 누가복음20: 34-35 “부활을 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내세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의 구조와는 전혀 다른것이 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들과 같이 인간의 차원이 아닌, 고차원의 수준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천사보다 부족한것이 뭘까요?
모든 면에서 부족할수 밖에 없지만, 가장 부족한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명확히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우리의 몸이 새창조되어 천사와 같이 하나님을 볼수 있고 온전히 알뿐만 아니라 천사처럼 하나님앞에서 찬양드리며 영원히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때까지 기다릴수 없기 때문에 지금 비록 천사보다 못한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마치 천사가 흠모할만한 찬양과 경배를 그리고 천사가 질투할 만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수 있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그렇게 살기위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그렇게 부활과 내세의 삶을 믿기 싫었던걸까요?
안 믿어진것이 아니라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냥 지금의 삶을 누리며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루살이가 아무리 내일일은 난 몰라, 난 오늘만 살거야..해도 내일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지구가 그렇게 빨리 태양을 도는데도 느끼지 못해서 난 모르겠다고 해도 지구는 계속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세상에 사두개인들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데로만 삽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마지막 때는 점점 다가오고 있는것입니다.
아무리 부활과 내세의 삶을 부정하고 현세의 삶만이 중요하다고 믿는다고 해도 그날, 즉 내세의 삶의 문은 어제보다 오늘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8/24) 누가복음 21:5-6 “건물보다 사람”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성전의 주인행세하는 사두개인들,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이 계신 그들의 성전은 영원히 무너져 내리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 부유층들의 마음을 얻기위해서 새롭고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했던 제2성전으로서 포로이후에 스룹바벨에 의하여 지어졌던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겉모양과 건축기술은 뛰어났지만 이 성전은 귀족들과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제사와 성전유지를 위해 각종 세금을 걷고 성전에서 장사까지 허용하는등 타락의 원상지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채찍을 휘두르시면서 장사하는 상을 엎으시기까지 하신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의 미려함에 도취되었지만 그 건물을 통해 천국의 영화를 내다보지는 못함을 보고 예수님은 이와 같은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80년이 걸려서 화려하게 세워졌던 헤롯성전은 고작 3년후에 터툴러장군에 의하여 돌하나 남지않고 완벽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성전 혹은 교회는 아무리 거룩하게 아름답게 화려하게 지워져도 그 건물로서는 구원을 얻을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생의 큰 약점이지 싶습니다. 구원의 은혜는 건물이 아닌 성전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하는것도 건물이나 시설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이어야 합니다. 은퇴하신 데이빗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Church is not quantity, but quality’ 교회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이나 외모에 치중하기보다 보이지 않지만 인생의 전부를 판가름하는 영혼의 상태에 집중함이 옳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8/26) 누가복음 21:27 “모든 사람이 보게되리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루살렘 멸망예언과 더불어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땅의 종말은 예루살렘의 심판과 비슷한부분이 많아보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한가지는 더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날에 믿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이미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이 믿을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십니다. 회개할 수 있는 마음과 기회도 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덫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걸려 넘어뜨리게 만듭는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더욱 자신의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의거하여 신앙을 지키며 살아야 하며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날이 다가옴을 깨닫도록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보여졌지만 재림은 완전히 다른 스토리가 될것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걸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믿지 않고 신앙을 가지길 거부하여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세하게 그 사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눈있는 사람은 볼지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강팍한 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림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볼수 있도록 일어날것입니다. 한사람도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날에 환성과 탄식이 동시에 터져나올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해도 울지 않는 세대이지만 믿는 사람은 전하고 또 전해야 합니다.
말씀에 예언된 그날의 징조를 잘 깨달아 알고 그날이 옴을 볼수록 더욱 깨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8/31) 누가복음22:42 “능력의 기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이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하는 마음은 오직 한가지일것 같습니다. ‘무조건 잘되는것’ 누구에게 기도를 하는지 알지 못해도 그 마음은 다르지 않은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도는 자신들의 마음과는 달리 허공을 때리는 기도가 될것입니다.
기도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에 기도를 들으시는 신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무당들이 굿을하고 주술을 외우지만 귀신과 내통할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인 성도들과 교통하시며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된자에게 기도는 일상생활이요 예수님처럼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때나 기도로서 하나님과 교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 마이 갓’ 만 외치지 말고 정말 하나님께 순간 순간 기도로서 도움을 구하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데로 도와주시는걸까?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고 의문점을 가지는거 같은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것보다 더 귀하고 마땅한 길을 주실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때 십자가 고난을 옮겨주시길 원했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자신의 원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내 원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를 통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할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 뜻은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 간구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힘과 도움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그리고 자신의 삶가운데 늘 임하시도록 우리의 기도가 늘 올바른 대상과 하나님의 뜻을 더욱 구하게 될때 능력이 임하며 무엇이든지 응답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나의 욕심을 구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성령께서 지키시길 기도합시다.
(9/1) 누가복음22:60 “베드로만 부인하는가?”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를 가리켜 흔히 다혈질이다. 행동보다 말이 앞선다. 고집이 세다. 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사에 베드로가 남긴 발자취는 심히 놀랍고 귀하다는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초대교회에서 기둥같은 역할을 할 인물임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욱하고 급한 성격이 그의 사역에 걸림돌이 될수 있다는것을 간파하시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사건은 예수님이 그의 사역을 위한 선조취로 볼수가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늘 일등을 해야하고 예수님의 오른팔을 자처했지만 예수님은 그가 자신도 몰랐던 인간의 나약함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가장 놀란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것입니다.
특히 고난당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때는 쥐구멍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을 주십니다. 믿음에 빈틈이 없고 신실하다고 장담할때 우리도 베드로처럼 넘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마치 그리스도인이 아닌것처럼 계획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로 인해 심히 통곡하고 자신의 비신앙적인 모습을 회개합니다. 하지만 이시대 신자들은 양심에 찔림도 없이 그냥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항상 지켜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삶을 살때에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것은 왜 모르고 사는지 참 아이러니합니다.
회개가 줄어들고 통곡이 메말라가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지신 예수는 오늘도 눈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두번 세번 십자가에 못박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오늘 베드로의 눈물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나의 삶을 속속들이 바라보고 계심을 믿으며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흔적조차 발생하지 않도록 성령의 코칭을 기쁘게 받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9/3) 누가복음23:26 “구레네가 진 십자가”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허투루 기록된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시몬의 이름도 아무런 의미없이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예수의 피가 묻어 있는 더럽고 징그럽고 무겁고 소름끼치는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에 의해 협박을 받아 억지로, 하는 수 없이 십자가를 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억울하게 십자가를 졌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심히 불쾌해 했을겁니다.
이렇게 골고다 언덕까지 구레네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원치않았던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훗날 구레네 시몬의 삶을 바꾸고 그의 가정까지 변화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경은 그의 이름을 더이상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의 가정에 끼친 영향력이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하는데요 훗날 사도바울이 로마서에 이런 글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시몬의 아내입니다. 아들 루포는 바로 바울이 신뢰하던 초대교회의 일꾼이되었으며 그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는 바울이 어머니로 여길만큼 귀하게 대했던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의 고난이었지만 하나님은 구레네 시몬에게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시는 큰 은헤를 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힘들고 지기 싫은 삶이지만 억지로라도 지어야만 하는것이 또한 십자가의 삶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은혜의 통로가 될것입니다.
무명의 이름 구레네 시몬을 유명한 이름으로 바꾸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를 사모하며 오늘도 나에게 지워진 십자가의 삶을 달게지고 나가길 소망합니다.
(9/7) 누가복음24:25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가장 많은 혼란을 겪은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최측근이었던 제자들 무리였을 것입니다. 돌아가신지가 삼일이나 되었으나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모여 있었으며 그중 어떤 제자들은 살 길을 찾아 나서는 모습도 보입니다.
적어도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음에도 이렇게 혼란 스러워했다는것에 대하여 솔직히 답답함이 생길수가 있습니다. 왜 믿음이 없지? 라는 마음이지만 한편으로 ‘내가 만약에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정말 부활을 기다리며 당당히 믿음위에 서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믿고싶어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믿을수 없는 시스템을 가진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믿기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말하는것은 참믿음이 될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은 반대로 아무리 믿지 못하다가도 마음이 열리면 곧바로 믿음이 생기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곧바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예언에 대한 말씀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고 더디 믿던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인줄 인정하면서도 더디 믿는 모습이 나타나는것은 왜일까요? 말씀을 깊이 사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깊이 사모하는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읽는자의 마음을 뜨겁게하시며 온전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더디 믿는 자에게는 순종하는 삶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찾아올수 있는 이와같은 연약한 모습을 이길수 있도록 말씀을 대하는 마음이 진지해지고 한구절의 말씀이라도 깊이 묵상하여 살아있는 뜨거운 신앙을 얻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9/8) 누가복음24:36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앞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파랗게 질려 버린 그때 예수님이 하신 한마디는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었습니다.
바쁜 일상생활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느낄수 있는 부족함은 마음에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발생하는 인생의 끊이지 않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기다렸다는듯이 문을 두드립니다.
전 세계를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비드19이 사그러질만하니 이제는 변이 바이러스가 바통을 이어받아 인류를 거듭 괴롭히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문제는 끊이지 않고 우리의 삶을 집요하게 파고드는거 같습니다.
그런데 잠시만 생각해보면 언제 우리의 삶에 문제가 없었던때가 있었나요? 아마 그런 기억은 불행하게도 극히 드문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만큼 우리의 인생은 갖가지 문제에 둘려쌓여 있다는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힘든 상황이지만 마음만 고쳐 먹는다면 위기일지라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는 의미일겁니다. 이말을 기독교적으로 바꾼다면 아마 ‘모든걸 주님께 맡겨라’ 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인생을 사는 방법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문제의 짐을 그 앞에 내려놓는자에게는 당신이 평안이 되어주십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것’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인생의 그 어떤 문제라 할지라도 감당하지 못할것이 없으신 그분이 나의 평강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도 평강을 잃지 않았고, 골리앗앞에선 다윗도 그렇게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믿음으로 주와함께 즐겼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강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주님을 더 의지하고 무엇보다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믿으십시요. 주님과 함께라면 능히 이기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