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12/22)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8)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기시고, 너희를 약탈한 민족에게로 나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손대는 자는 곧 주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다.’”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와 함께 귀환한 유다백성들이 중단된 성전을 다시 짓도록하는데 힘을 보탠사람들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오직 성전완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한 학개선지자와 달리 성전건축 중단으로 인해 약해지고 메말라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역에 전념했던 선지자이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약속과 행동이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나비효과가 있음을 아는가?
하나님은 누구든지 당신에게 돌아오는 자에게 ‘나도 너희에게 돌아간다’ 라고 약속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삶에 들어오시면 과연 우리의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행복한 상상을 해보라.
‘너희에게 손대는 자는 곧 주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해지는 말씀인가! 구약성서의 두번째 마지막 성서인 스가랴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점점 교회와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신자들을 다시 일깨우시고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잊혀지고 희미해지지만, 한걸음 한걸음 주님께 다가올수록 환히 불을 밝히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실루엣이 보일것이다.
그 아버지의 품에 온전히 안겨 사랑의 노래를 부를수 있도록 그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계속 이끌어 주시기만을 소망한다.
(12/23)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 스룹바벨에게 필요한것은 무엇입니까? (4:6)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악한 마귀가 부리는 사마리아인들로 인하여 중단된 성전재건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분명히 완성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새성전재건은 인간의 어떤 힘이나 권력(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고 오직 주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이루어 질것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그대로 신약시대에 세워지는 모든 교회에게도 적용이 되어지는데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며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각 지체들이 감동을 받아 세워지고 성장할때만 올바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수가 있다.
많은 교회가 이 공식을 벗어나고 있는거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의 교회가 주인이 바뀌어 인간이 그 자리에 앉아있고 인간의 물질과 권력이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가슴아픈 교회들의 현실을 보며 개혁을 위해 부르짖어야 한다. 인간의 힘이 주도하는 교회가 다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옮겨지도록 기도하며 회개할때인거 같다.
하나님은 오늘 교회시대에도 교회를 상징하는 등잔대 주위에, 거룩한 성도를 상징하는 두 올리브 나무를 세우신것처럼 주님의 교회를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섬기는 귀한 백성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실줄 믿습니다.
(12/25)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서 주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7:11-1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은 듣지 않고, 등을 돌려 거역하였다. 귀를 막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음이 차돌처럼 굳어져서, 만군의 주님께서, 이전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전하게 하신 율법과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만군의 주님께서 크게 노하셨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부류를 크게 두가지로 나눌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한쪽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며 말씀이 기준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쪽은 마치 종교생활처럼 관습에 이끌리고 의식에 치우쳐서 하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하나님은 금식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진정 나를 생각하여서 금식한 적이 있느냐?’ 라고 책망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결국 금식조차도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서 했다는 뜻이다. 신앙의 삶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철저히 하나님을 향한 삶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어떤 순간에서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은 믿음으로 사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물질이나 세상의 대세를 바라보는 거짓 믿음일수 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금식기도’ 는 아무나 할수없는 깊은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성훈련에도 자기 만족, 자기 과시의 모습이 드리우면 영성훈련은 망하게 된다.
헌금을 드릴때에도 자기 과시나 만족을 위하여 했었던 부자들의 헌금생활을 책망하셨지 않은가?
신앙생활이지만 그 신앙의 중심에 자신의 자아가 그 자릴 차지하려고 할수가 있기 때문에 철저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아가 중심이 되는 순간 우리의 심령은 돌처럼 굳어져서 정작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습이 될수 있도록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우리의 행위까지 경건히 하나님을 향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2/26)
*고난의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11-12)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올 때에 나 주가 바다 물결의 기세를 꺽을 것이니, 나일 강이 그 바닥까지 다 마를 것이다. 앗시리아의 교만이 꺽일 것이며, 이집트의 왕권도 사라질 것이다. 내 백성이 나 주를 힘입어서 강해지도록 하겠다. 그들이 내 이름을 앞세우고, 늠름하게 나아갈것이다.”
신자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때 피할 수 없는 상대가 있다면 바로 고난과 환난일것이다. ‘너희에게 고난이 없으면 내 자녀가 아니라’ 고 하셨을 정도로 신자들에게 있어서 고난의 시간은 필연적인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데도 늘 편안하다는 사람이 있다면, 두가지 이유 때문일것이다. 하나는 바울처럼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고 믿어서 실제로 고난이 왔음에도 그것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오히려 평안을 누리기 때문일것이고, 다른 이유는 예수를 올바로 믿지 않으니 고난을 만날 기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후자가 되면 나중에 큰일남)
주님은 고난이 오는것이 믿음을 더 강하게 깊이있게 만들수 있는 방편이라고 하셨다. 고난이 없으면 눈물도 없고 기도도 사라진다. 신자는 고난의 바다를 헤엄쳐 나가야 하기 때문에 늘 대비하고 준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수만가지도 있으니 고난을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가 신자들을 시험하고 괴롭히는것을 허용하시는 이유를 잘 깨달아야 한다. 어미 독수리가 사랑하는 새끼 독수리를 둥지 밖으로 밀어 내는것은 결국 새끼 독수리가 가진 날개가 강해지도록 연단하는 것이며, 자신이 강한 날개를 가진 사실을 인지시켜 주려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고난을 달게 받을수 있는 사람도 주님이 주신 믿음의 날개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거친파도 날 향해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를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열심히 연단의 시간을 지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2/27)
*지팡이 두 개의 이름은 각각 무엇입니까? (11:7)
“나는 지팡이 두 개를 가져다가, 하나는 ‘은총’ 이라고 이름을 짓고, 다른 하나는 ‘연합’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도래할 메시야의 사역을 예언하셨다. 메시야는 잡혀 죽을 양 떼같이 가련한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잘 되게 하려고 목자가 되셨고 지팡이 둘을 취하셨는데 ‘은총’, 과 ‘연합’ 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목자와 양의 관계 사이에 의미를 부여하셨다.
하지만 다른 목자들이 그를 싫어했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하자 은총이라는 지팡이를 꺽어 버리셨고 그들에게 베푸시던 은혜를 닫아 버리시자, 이방인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큰 재앙을 입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인생에게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갈팡질팡하는 양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되며, 결국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며 마지막 날에 애통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모든 양들이 목자에 대하여 불평하는 중에도 어떤 양들은 목자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서 무언가 말씀하고 계시다는것으로 여겼다. 이들이 바로 남은자로서 주의 말씀을 경외한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을 깨닫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양들은 언제나 보살핌을 받을 것이며, 마지막 날에 복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것이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은 순서가 없다.
지금 올바로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다. 과거에 아무리 좋았던 신앙도 현재 엉터리로 살고 있다면 그것또한 가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목자의 손에 들려진 은혜의 지팡이를 바라보며 감사하며 목자를 따르길 소망합니다.
(12/28)
*샘이 터져서 흘러넘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3;1)
“그 날이 오면, 샘 하나가 터져서,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 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라는 문장은 참으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인거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을 기다릴것이다. 어떤이에게 그 날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시작하는 날일지도 모른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그 날’ 은 어떤 날일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치명적인 죄가 ‘샘’ 으로 예언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깨끗히 씻음 받을수 있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샘에서 죄의 더러움을 씻는 사람은 오직 그 샘에 나오는 사람뿐이다.
샘이 열렸지만 그 샘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나오지 못하는 자는 절대로 씻을수가 없다.
하지만,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마음을 열고 그 보혈의 샘에 기꺼이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씻음을 받을수가 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미천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인생일지라도 이 샘에 초청받을 자유가 있다. 그렇게 거지 나사로나, 문둥병자, 삭개오가 씻음을 받은 것이다.
이제 그 샘에서 씻음을 받은자, 즉 구원을 얻은자가 살아가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구원을 받은자는 씻음받은 삶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의 연단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그 연단과 시험은 결국 믿는자를 정금같이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임을 증명해 줄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찾아오는 연단과 시험을 은과같고 금과같은 것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씻음 받았는가? 이제 그 씻음받은 귀한 삶이 금과같이 빛나도록 단련하시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