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엘리사가 하사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8:12)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안을 열어주셔서 장차 하사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게 될 악한 일들을 바라보게되었는데 그 끔찍한 참상으로 인하여 울음을 터뜨렸다. 성경을 보면 눈물의 선지자로 일컫는 예레미야가 나온다. 한시대를 영적개혁이란 이름으로 풍미했던 위대한 선지자가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가? 하나님을 떠난 유다 백성들의 극심한 타락때문이었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곧 당하게 될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고통당하게 될 나라를 내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사랑하는 백성들을 매로 다스릴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눈물 흘린 선지자였다.
세상은 가짜 눈물로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눈물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진실을 호소하는 도구로 쓰임받는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런 눈물은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닌 심령 깊은 곳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눈물흘린 여인들을 향해 말씀하신것을 기억하자. ‘나를 위해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엘리사가 흘린 눈물처럼 우리의 눈에서도 영적회복을 갈망하는 눈물이 메마르지 않기를 소망해본다.
(12/9-10)
-열왕기하9장을 통해서 세사람의 죽음을 대할수가 있다. 북이스라엘왕 요람, 남유다왕 아하시야, 그리고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다. 하나님은 사악한 왕 아합왕의 가문을 멸절하시기 위해 북 이스라엘의 장군 ‘예후’ 를 들어쓰셨다. 마치 첩보영화처럼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예언을 예후에게 전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비록 악한 사람이긴했지만 예후는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 사용하신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 악한 자도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 움직일때 그를 통해 예언을 성취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예후도 결국 선한 왕으로 살지는 못하게 된다.
악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악한 정치를 했던 요람(이스라엘의 아홉번째왕) 과 이세벨은 그렇게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려 우상을 섬기게 하더니 결국 무서운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말씀은 분명히 성취됨을 기억해야 한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죽음은 뜻 밖이었다. 그는 북 이스라엘이 적대국이었음에도 어머니(아달랴-아합의 딸) 의 영향을 받아 외삼촌이었던 요람과 가까이 지내게 된것이 화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요람이 죽는날 그도 같이 죽음을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살았던 왕이었다. 악인과 짝하면 악인이 당하는 환난에도 섞임을 당한다는것을 교훈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예언은 철저하고 정확하게 성취되는 약속이다. 누구는 축복의 예언을 받지만 누군가는 멸망당할 예언을 얻는다. 이시대에도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축복의 약속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의 삶에 악한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지 말씀가운데 잘 살피고 또 관찰하여 선한 의의 열매를 위해 살아가자.
(12/11-12)
*예후가 여호나답과 함께 사마리아로 가서 한 일과 바알 신전에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10-11장)
-아합의 지지자들을 모두 죽였다. 예후가 갑자기 여호나답(레갑=경건한 사람)을 자신의 수레에 태워준 이유는 그를 존경했다기 보다는 그 당시 경건한 레갑출신의 사람에게 자신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과 열심이란걸 스스로 나타내어 결국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정치적인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또 예후에게 바알 숭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심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멸절하도록 이끄셨다. 북 이스라엘 왕 가운데 보기 드물게 하나님의 명령을 그나마 순종했던 왕이 예후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열심을 내었던 예후가 북 이스라엘의 유일무이한 선한 왕으로 등극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악한 왕 여로보암처럼 그의 ‘금 송아지 사랑’ 때문이었다. 우상들을 열심히 부수고 그 숭배자들까지 처단하며 이스라엘에서 바알 종교를 다 쓸어버리기까지 했었지만, 정작 자신의 우상은 버리지 못한것이 화근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수고와 열심을 보시고 그의 후손을 지키시겠다고 하셨지만, 예후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남들 눈에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게 보여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뭐 굳이 만 천하는 아니더라도 하나님께는 여지없이 가감없이 드러나는것을 막을수가 없다. 오늘 나 홀로 꽤차고 있는 나 만의 금송아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예후가 그것까지 잘라 버렸다면 아마 유일한 북 이스라엘의 선한 왕이 되었을텐데..
쉽지 않은 일인가보다. 그러나 우리는 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걸 제일로 싫어하신다니까…
(12/13)
*요아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1:2)
-요아스의 고모가 되는 여호세바가 그를 주의 성전에 숨겼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여호세바가 칼바람이 부는 왕궁에서 조카 요아스를 구해낸것에는 엄청난 구속사적 배경이 담겨져있다. 아달랴는 성경에서 이세벨과 견줄말큼 악의 한 축을 담당한 여인으로 불린다. 그녀는 유다백성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데 남유다의 왕이된 여호람과 결혼을 하는 바람에 유다에서 살게 되었다. 아합과 이세벨이 유다왕에게 딸을 보낸 이유는 딸을 통해서 유다까지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아달랴는 역시 악녀의 딸답게 본색을 드러내게되었는데 아들 아하시야왕이 죽자, 곧바로 왕의 자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다윗가문의 대를 끊고 유다땅을 바알숭배의 나라로 바꾸기 위함이었다.
아달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개입을 막아낼수는 없었다. 다윗-유다지파를 통해 메시야가 오셔야 하기 때문에 피비린내나는 칼바람속에서 하나님은 한 여인을 통해 다윗의 계보가 이어지도록 하신것이다. 그 택함받은 여인이 여호세바였는데 왜 여호세바였을까? 열왕기하의 참고서격인 역대하 22:11절에 의하면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였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예언을 잘 알고 있었던 여호야다는 아내를 통해 무슨일이 있어도 다윗의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었고 여호세바는 목숨걸고 그 사명을 감당해 낸것이다.
그리고 구사일생한 요아스는 성전에 숨어 지내면서 여호세바의 남편 제사장 여호야다의 신앙교육을 받고 말씀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바알우상을 모조리 파괴하고 성전을 회복한 남유다에 몇 안되는 선한 왕의 계보를 잇게 되었다. 열왕기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섭리, 특히 구속사의 섭리는 소름끼치도록 놀랍기만 하다. 메시야의 길을 곧게 예비한 사람은 비단 세례요한뿐만이 아니었다. 무명의 여인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을 받은것을 보면서 이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곧게 할 인물은 누구일까? 제2의 여호사바를 꿈꾸어 봄은 어떨까?
(12/14)
*요아스가 회계 감사를 진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12:15)
-헌금을 받아 일꾼들에게 주는 감독관들이 정직하게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남유다의 어린 왕이 되었던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신앙교육 덕분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이 되었다.
요아스 왕이 이룬 업적은 성전을 수리하는 개혁이었다. 제사장들이 헌금을 거두어 모아놓고도 성전수리를 등한시하자 개혁의 칼을 꺼내 들었다. 더이상 제사장들이 헌금을 거두지 못하게 했고 궤를 만들어 헌금을 그곳에 넣도록 하였으며 헌금이 모아지면 성전 공사에 필요한 곳에 곧바로 쓰여 지는 체개를 세워서 성전 수리가 완성될수 있도록 하였다. 제사장들이 물질에 마음을 두는것이 하나님의 사역에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 볼수가 있다.
여호야다가 죽은후에 그릇된 길로 빠지긴 했으나 여호야다의 영향 아래 있을때는 신실한 왕의 모습을 보일수가 있었다. 어떤 직분여하를 막론하고 신앙적 영향을 미치는 사람과 긴밀한 교통을 하고 있다는것은 자신의 영적인 삶을 위해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신앙적 멘토링이 없이는 영적성장도 약해질수 밖에없는것이다.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과 더불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교제할 대상을 얻는것은 은과금을 소유함보다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12/15)
*왕은 엘리사의 요구에 따라 화살을 집어 땅을 쳤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3:19)
-여호아하스 왕은 다른 북 이스라엘 왕과 다르게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며 어떤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영성이 계속 성장하지 못하였다.
시리아(아람) 군대의 위협에 늙은 엘리사를 찾아가는것까지 좋았으나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바람에 시리아 군대를 완전히 이길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엘리사를 찾아온 여호아하스에게 두번의 어떤 행동을 요구하였다. 첫째는 동쪽 창문을 열고 거기로 화살을 쏘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화살로 땅을 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둘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려는 상징적인 제안이었음을 엘리사가 첫번째 요구를 통해 이미 밝혀 주었음에도 여호아하스는 두번째 요구를 극히 형식적, 제안적으로 하는 바람에 훗날 시리아 군대를 완전히 이길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것이다.
여호아하스가 그렇게 제한적인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유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하여 너무 소극적인 자세를 가진 탓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제한적이지 않고 unlimited 인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수 있는 요구에limited 할때가 많다. 우리의 행동을 소극적으로 만드는것이 마귀가 주는 시험과 유혹 그리고 자아의 욕심과 정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끊임없이 흘려 보내시길 원하시는 은혜를 스스로 제한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온 마음을 열어 은혜를 갈망하며 사모하는 복된 삶이 되길 소망해본다.
(12/16)
*아마샤는 반역한 신하들의 자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4:6)
-아버지 요아스가 신하들의 반역에 의하여 희생이 되고 아들 아마샤가 왕권을 얻게되었고 아마샤는 왕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다음에, 반역에 가담했던 신하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아마샤는 신하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모세의 율법이 금하고 있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아버지가 자녀 대신에 처형되어서도 안 되고, 또 자녀가 아버지 대신에 처형되어서도 안 됨을 명시하고 있고, 오직 각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에 따라 처형되어야 한다’ 라고 기록되어있었기 때문에 아마샤는 단순하게 믿음으로 그 율법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아마샤가 따랐던 하나님의 율법이 주는 영적교훈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사함과 구원함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가?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 사하여 줄 수없고, 자식이 부모의 죄를 사하여 줄 수도 없다.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본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지옥가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므로 그곳에 가는 것이지 부모나 조상의 죄로 인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도 자신의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누구의 도움으로 갈수가 없는 곳이다.
목사 한사람이 구원받았다고 그 가정이나 교회 모든 성도가 그 목사의 믿음을 통해서 단체로 갈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천국 문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생명책에 있는 자기 이름을 확인해야 들어갈수가 있다. 부모와 자녀가 같은 날 죽어도 같이 데리고 갈 수가 없는곳이 천국이다. 부모는 천국에 들어가는데 자녀가 지옥에 가게되자 부모가 천국 마다하고 지옥에 갈 가능성은 제로이다. 천국은 오직 개인티켓만 유효할뿐 그룹티켓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철저하게 각 개인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과 배우자, 부모,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점검하고 확인해야만 한다. 죽으면 기회가 없다. 죽기 바로 전에는 시간이 부족할수 있다. 마지막 숨 넘어가는데 예수님 옆 강도처럼 ‘너나 믿어라’ 할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오늘 잠자리에 들면 천국에서 깨어날 확신을 가지는것이 바로 이 신앙이다.
(12/17)
*므나헴이 앗시리아 왕에게 은 천 달란트를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15:19)
-므나헴은 북이스라엘 16/19째 왕이며, 아주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을 가졌다. 15번째 왕이었던 살룸을 살인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사람이다. 그의 10년 정치는 계속적인 우상숭배와 범죄로 점철되었으며 앗시리아 왕이 쳐들어 왔을때는 부자들로부터 은을 걷어 무려 은 천 달란트를 앗시리아 왕에게 바쳤는데 결국 앗시리아왕의 도움을 통해 자신의 통치권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하나님보다 이방나라 왕의 권력을 더 의지하는 모습은 하나님께 분명한 범죄였으나 므나헴은 하나님의 시선따위 상관하지 않는 담대함(?) 을 나타내었고 결국 그가 남긴것은 아버지 못지않게 하나님께 범죄한 아들에게 남긴 악의 유산이었다.
북이스라엘 19명의 왕들의 결말이 다 이러하였는데 이 왕들을 소개하는 마지막 멘트에는 항상 이런 말이 붙었다. “그는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대로 본받았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었는데 분열된 나라의 반쪽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우상숭배의 전초기지를 만들었던 장본인이다.
선을 대표하는 다윗왕과는 상반되게 결국 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후대에 거론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남겨야 할것도 이름일거 같다. 후손이나 후대가 그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며 인용하게 될까? 다윗처럼? 혹은 여로보암처럼? 그러나 그런것보다 더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것은 하나님의 기억속에 나는 어떤 이름인가가 아닐까?
(12/18)
아하스 왕은 앗시리아 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16:18)
-아하스왕은 남 유다의12/20 번째 왕이었으나 실망스러운 정치를 했던 사람이었다. 성경은 그가 조상 다윗이 한 대로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당시 이방제사에서 행하던 인신제사를 거행하면서 자기 아들을 제물로 불에 태우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는 앗시리아 왕에게 갖은 아부와 아첨을 늘어놓았고 성전과 왕궁의 금과 은을 모두 꺼내어 그에게 바쳤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제사의식을 자기 멋대로 바꾸고 마음대로 제단을 설치하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이방제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사장 우리야가 왕의 곁에 있어서나 그 또한 하나님보다는 왕의 눈치를 살피면서 권력을 탐하던 사람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왕에게 앗시리아나 다른 나라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경고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렇게 회개없이 사악한 범죄만 저지르고 죽음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죄악가운데 용서받지 못할죄는 성령훼방죄인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간 스스로 차단하고 가로막는 행위이다. 쉬운예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하던지, 혹은 예배의 목적을 상실하여 예배의 의미를 파괴하는 행위들이다.
아하스왕의 범죄가 그토록 심각했던 이유도 이와같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귀신을 숭배하는 장소처럼 바꾸었고 모든 의식과 형식도 이방제사를 모방하여 하나님께 큰 진로를 얻게되었다. 하나님은 이시대에도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드리길 가장 원하신다. 그리고 그 예배를 축복의 통로로 허락하신다. 아벨의 거룩하고 진실한 제물과 제사를 기뻐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다. 왜? 가인의 마음에 형식만 있었고 진실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무너지면 신앙은 간단히 좌초되는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것이며 주일도 하나님의 날이다. 자칫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을 망령되이 섬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2/19)
*이스라엘 백성이 거절한 것과 따라간 것은 각각 무엇입니까? (17:15)
-본문은 북 이스라엘의 흑역사의 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북 이스라엘의 끝이없는 죄악의 중심에 는 하나님을 배역했던 19명의 왕들이 있었다. 한 명의 선한 왕도 나오지 못한것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흩어짐을 당한 명백한 이유이다. 악한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붙잡았던 것이 우상숭배와 강퍅함이었고 왕의 영향을 받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나 나나 할것없이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 대신에 우상들에게 전심을 다하였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들을 거절하였고 하나님 보시기에 헛된것들을 열심히 쫒았다. 그로인하여 이스라엘은 세상의 헛된것에 미혹되었다.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에게 멸망당하거나 내쫒김을 당한 이유가 극심한 우상숭배였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우상주의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자 하나님은 이방나라를 강하게 일으켜서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다.
이렇게 우상주의는 빠지게되면 감당해 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완전히 뿌리 뽑기까지 힘든 시간들로 인하여 고통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우상주의의 원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혹은 말씀에 해당되지도 않는 말로 옷 입은 결과” 이다. 이뜻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자기 뜻대로 변경하였다는 말로써 그들이 버릴수 없었던 우상을 아예 하나님인 것처럼 여기고 섬겼다는 말이다.
분명히 이 시대에도 믿는 사람들에게서 우상주의가 나타난다. 하나님, 예배도 우상화할수 있다. 방법이 뭘까? 자신이 중심이 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마음대로 변경하거나 변질시켜버린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도 하셨다.
이 땅에서 온전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회복을 위하여 ‘나’ 라는 우상주의를 버려야만 한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재물로 바치는것을 본후에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고 말씀하신 장면이 떠오른다. 온전한 신앙은 철저하게 ‘나 중심’ 에서 ‘하나님 중심’ 으로 이동될때만 가능함을 명심해야 한다.
(12/20)
*사마리아로 잡혀 온 이주민의 신앙생활은 어떠했습니까? (17:33)
-하나님께 대하여 끝까지 불순종했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흩어짐을 당하고 사마리아땅에는 다른곳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자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로 인하여 물려죽는 일이 일어났다. 앗시리아 왕은 그 원인이 이스라엘 신이 노한것이라 판단하고 제사장을 세워서 주님을 경외하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각 민족은 제각기 자기들의 신들(닭, 꿩, 숫염소, 개, 공작..)을 만들어 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도 경외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사마리아에는 사람들만 섞인게 아니라 온갖 잡신들로 가득한 나라가 되어버린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유다백성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로 여기게 된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교훈받을수 있는것이 있다. 그 이주민들이 자기가 스스로 만든 잡신들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했던것 이유는 하나님이란 신에 대한 두려움때문이었다. 안 믿으면 또 사자가 나올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재앙이 내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혹시 교회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에 이런 유의 사람들은 없을까? 주일에 교회 안나가면 하나님께 벌 받을거 같아서 할수없이 교회에 눈도장을 찍는 그런 사람. 혹은 그 반대로 하나님을 자신의 복 주머니처럼 여기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싶다. 정작 자신이 마음을 두는곳은 자신이 아끼는 잡신과 같은 세상것이면서 교회 안나가면 혹시나… 하면서 마지못해 출석만 한다면,,,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닐뿐만 아니라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비밀을 꽤뚫어 보신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셨다. 우리의 예배의 모습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불 일듯한 뜨거운 마음으로 드려지길 소망한다.
(12/21-22)
열왕기하 18장을 읽으면서 남유다의 13번째 왕, 히스기야의 신앙을 관찰할수가 있다. 히스기야의 부친은 아하스 왕으로서 남유다왕들 가운데 유독 악한 왕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히스기야가 아하스의 악한 영향을 받지 않고 여호와 신앙을 올바르게 가진 이유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 요 스가리야의 딸이었는데 그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하나님의 진실한 두 증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히스기야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진실한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아 결국 왕이 된 아들에게 다시 그 신앙을 전수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리고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부친의 악한성향을 따라하지 않고 모친의 참신한 신앙을 본받게 하셔서 남유다를 그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도록 섭리해 주셨다.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부모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으니만큼 신앙을 가진 부모가 영적으로 어두운 이시대에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영적으로 잘 성장한 히스기야는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고,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의 왕의 공격과 협박에도 전혀 흔들림없는 신앙정신을 보여 주었다. 앗시리아 왕이 보낸 강력한 신하 랍사게가 마치 마귀처럼 남유다의 언어로 백성들을 미혹했으나, 히스기야에 의해 영적으로 잘 무장된 백성들과 정치인들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잠잠했다.
악한 마귀는 마치 랍사게처럼 믿는 자들의 귀에다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대의 길로 이끌려고 한다. 그러나 고라자손이 쓴 시편 46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되심을 알지어다’ 의 말씀과 같이 많은 유혹과 미혹속에서 섣불리 따라 나서거나 반응하기보다 가만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달아 진리의 길로 흔들림없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12/23-24)
-히스기야왕은 랍사게의 말을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둘렀는데 이 행동은 극도의 원통함을 드러낼때 쓰이는 것으로서 히스기야는 특히 랍사게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여느 왕들과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 분을 삭히는데 사자에게서 받은 그 분통터지는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기도한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이와같은 분통터지는 일을 당할때 먼저 행동해야 할 행동지침서 No.1 이 바로 히스기야의 ‘하나님께 고자질하기’ 이다. 죠지뮬러가 고아원들을 먹일 빵이 없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하자 그 다음날 아침에 빵공장에서 팔고 남은빵을 고아원에 갖다준 일화가 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가 가난해서 렌트비를 내야할 돈도 없자 렌트비 독촉편지를 가지고 예배당에 가서 강대상위에 올려놓고 기도했다고 한다. 어떤 달은 누군가 정확히 그 렌트비 액수의 수표를 보내왔고, 어떤 달은 집 주인이 불쌍해서 렌트비를 받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히스기야의 ‘하나님께 고자질 하기’ 를 들으신 하나님의 반응을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나님은 구체적인 기도를 좋아하신다. 말 돌리는거 싫어하신다. 있는 그대로를 고백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전지하신분이신데 우리가 말하지 않는다고 모르시겠는가?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나와서 말해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습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이 되니 하나님은 그 날밤 (히스기야가 편지 올려놓고 고자질했던 밤) 천사를 앗수르진영에 보내어185.000 명의 군사들을 송장으로 만들어 놓으셨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산혜립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산혜립은 입 때문에 멸망당한 왕이었지만 히스기야는 입 때문에 은혜받은 왕이었다.
(12/25)
*히스기야가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궁을 모두 보여준 결과는 무엇입니까? (20:17)
-히스기야왕은 남유다20명의 왕들 가운데 선한 기도의 왕으로 알고있다. 앗수르의 공격에도 기도했고, 병들었을때 이사야 선지자가 죽음까지 선포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벽을 보고 기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히스기야는 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믿음으로 나라도 지키고 자신의 질병도 회복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마무리 되었으면 참 좋았을뻔했지만 안타깝게도 히스기야 왕에게 불명예스런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 당시만해도 초강대국 앗수르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바빌로니아에서 병 문안겸 사신들이 오게되는데 히스기야는 갑자기 나라의 보물 창고는 물론 무기창고와 자신의 창고까지 싹 다 열어 그들에게 보여주는 행동을 하게된다. 보여주는거 까지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행동을 옳게 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 댓가로 바빌로니아가 훗날에 그 날 본것들을 모두 그들의 나라로 가져가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될 무서운 예언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은 왜 히스기야의 행동을 옳지 않은 행실로 받아 들였을까? 그것은 히스기야의 자기자랑으로 인함이었으니 히스기야는 왕궁에 있는 모든 귀한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마치 그 모든것을 자신이 이룬것인것처럼 스스로를 높이기에 급급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유다와 자신에게 하신 일들과 기적들을 한마디도 간증하지 않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자기자랑의 교만함은 늘 하나님의 은혜를 져버리게 만들어 우리를 범죄하도록 이끈다. 우리의 삶가운데 자신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모습이 없도록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또 감사하는자가 되어야 한다.
(12/26)
*히스기야와 아들 므낫세가 한 일은 어떻게 다릅니까? (21:3)
-남유다의 14/20 번째 왕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일을 전부 반대로 행한 아주 악한 왕이었다. 그는 무려55년동안 유다를 통치하면서 아버지 히스기야가 개혁한 여호와 신앙을 철저하게 남유다에서 제거해 나간 왕이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아세라 목상을 만들정도로 강력한 우상주의자였다. 하나님의 성전에 자신이 만든 우상을 세워놓을정도로 그는 하나님을 아예 우상보다 못한 신으로 여기며 이방나라에서 행하던 온갖 끔찍한 관습들을 일삼았으며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만든 악한 왕이었다.
므낫세는 그렇게 악한 왕이었음에 불구하고 55년이라는 가장 긴 시간동안 남유다를 통치하게된다.
왜 악한 자가 이렇게 장수하고 생명을 부지하는가? 하나님은 그가 다윗처럼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려 주셨는데 기적과 같이 그가 환난중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라의 우상들을 다 성밖에 내다 버리고 제단을 보수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역대하33장에서 볼수가 있다.
범죄가 아무리 길어도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신것을 보고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되었고 그 후로 자신이 망쳐놓은 나라를 다시 신앙으로 재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비록 산당을 완전히 제하지는 못하였으나 유다왕들 가운데 특이하게 범죄하다가 회개하고 선을 행한 왕으로 남게 되었다.
(12/27)
남유다의 역사를 살펴보면 요시야가 어떻게 이런 선한 왕이 될수 있었는지가 의문점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아몬이나, 특히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왕은 남북39명의 왕들중에서 가장 오랜시간 악한 통치를 했던것으로 유명한 왕이었고 그의 아들 아몬왕도 아버지를 따라 악한 정치를 했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왕이 일찍 죽는 바람에 무려 8세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어린 왕이 훗날에 그토록 신실하고 깊은 신앙을 가진 왕이 될수 있었을까?
성경은 그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겨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마리는 찾을수 있도록 했다.
남유다 왕들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함께 등장하는 이름이 있는데 바로 왕의 어머니의 이름이다.
왜 어머니의 이름들을 기록했느냐 하면, 분명히 아버지는 선한왕이었는데 아들은 악한 왕이 되고, 그 반대로 아버지는 악한 왕이었는데 아들은 또 선한 왕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바로 그시대 왕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이 거의 어머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나이에 왕이된 경우는 더더욱 영향이 크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여디다는 시아버지 므낫세의 통치때와 남편 아몬의 통치시기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신앙이 없었다면 분명히 어린 요시야왕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했을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의 자녀들이 말씀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이와같다. 어린시절에 말씀이 잘 심겨진 아이는 혹시 자라면서 잠깐 빗나가더라도 결국 말씀을 다시 접하는순간 하나님께 돌아오게될 소망이 있다. ‘나의 사랑하는책 비록헤어졌지만 어머님의 무릎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말 그때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기억속에 성경이야기의 추억을 가득 넣어주어야 한다.
(12/28)
요시야왕이 남유다왕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된 주 된 원인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게된 것이었다. 말씀을 읽어본 요시야왕은 마음에 큰 찔림을 얻었고 신약시대 용어로 표현하자면 ‘회심conversion’ 을 하게된다. 그리고 모든 남유다백성들에게 발견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들을 크게 읽어 들려주게된다. 그는 온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주님을 따르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킬것을 맹세하는 언약을 세우게 되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셈이다. 이제 요시야왕은 하나님께 맹세한데로 행동을 개시하게 된다. 므낫세, 아몬왕이 망쳐놓은 나라를 하나씩, 하나씩 손보며 재건하였다. 그동안 하나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모든 악한 우상숭배와 그와 관련된 모든 관습들을 개혁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왕들이 선한 왕이었음에도 실패했었던 산당들을 모조리 헐어버렸다.
요시야왕의 개혁을 읽으면서 감동받은 장면은 개혁을 하며 우상을 헐고, 악습을 없애며, 산당들을 제거하는 자리에 그가 함께 있어 진두지휘했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보아야 하고 고칠것은 개혁하고 나쁜 습관들은 끊어버리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한 해를 되돌아보며 하나님앞에 불순종하고 게을렀던 모습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었던 내 인생의 우상들을 제거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12/29)
-요시야의 노력에도 하나님께서 분노를 거두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3:26)
-요시야왕이 전무후무한 영적개혁을 단행하고 우상을 허물고 산당을 제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유다에 대한 분노를 거두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 배경을 알기위해서는 요시야왕 시대에 예언자로 사역했던 스바냐 선지자의 기록인 스바냐를 읽어보면 쉽게 답을 발견할수가 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요시야왕의 개혁 의지와는 달리 여전히 므낫세가 심어놓은 우상 숭배 사상이 백성들 사이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죄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형별을 돌이키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몰래 몰래 열심히 우상을 섬겼다. 결국 하나님의 예언대로 훗날 남유다는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바벨론 이라는 나라에게 멸망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우상숭배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섬긴 백성들은 비록 포로로 끌려가게되지만 다시 귀환하는 은혜를 얻게되는데 그들이 소위 ‘남은 자’ 들이다. 이시대도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않는 인생들이 즐비하다.
교회에 이름을 두고 있음에도 이와같은 삶의 연속이라면 하나님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를것이다.
성경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드셨을때는 죄가 ‘관영’ 했을때이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이유는 한 영혼이라도 속히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놀랍게도 의인10명이 없어서 멸망당했고, 훨씬 이전인 노아시대는 노아식구외에는 의인이 정말이지 말도안될지 모르지만 한 명도 없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재앙이나 징계를 통해 그저 하나님을 원망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분노와 징계에는 다 이유가 있으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즐거이 찾고 구하고 따르길…
(12/30,31)
2019년 마지막에 읽은 마지막 성경은 공교롭게도 남유다왕국의 멸망소식이다. 북이스라엘의 멸망(B.C 722) 총19개의 왕조가209년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나 단 한명의 선한 왕이 없이 격렬히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떠났고 그들은 앗수르에 의하여 흩어짐을 당하였다. 그에 반해 남유다는 총20명의 왕이 345년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몇 명의 선한 왕을 배출하기도 했으나 나라의 멸망(B.C 586)을 막지는 못하였다.
북이스라엘왕국은 멸망을 받아야 할만큼 극심한 죄악에 빠진 나라이지만, 남유다의 멸망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요시야같은 왕의 영적각성과 개혁이 있었고 이사야, 스바냐,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의 회개촉구가 있었다는 점이다. 남유다 백성들이나 요시야 이후의 왕들이 조금만 선지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특히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 세 왕들은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애굽이라는 나라를 의지하였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보게된 왕들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귀담아 듣기못한 결과는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라는 초유사태를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열왕기는 두 나라의 완전한 멸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던 신본주의 국가가 어처구니없이 무너져 내린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
교만이 패망의 선봉임을 자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나라이기 때문에 무슨일이 있어도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성전이 있기때문에 바벨론이 절대로 우릴 무너뜨릴수 없을것이다.’ 라는 생각이 그들을 패망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은 맞는 생각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 있었을뿐 실제로 그들의 삶과 예배가운데에도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그들의 교만함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늘 자신을 지켜보시는것을 믿고 행동하는것이다. 2020년 새해에 성도들의 각오는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 의 신앙으로 마음과 생각을 바로잡는것이며 하루 하루를 하나님께 자신을 철저하게 나타내 드리길 소망해 본다.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