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주님이 주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16)
“내가 이렇게 내 백성을 심판하는 까닭은, 그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서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숭배하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기록한 예언서 예레미야서를 시작 함을 감사드린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소명받은 후 줄곧 그를 반대하는 거짓 선지자들 500명에게 곤욕을 치른다. 왜냐하면,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상식에 맞는 예언(예루살렘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을 한 반면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망하고 백성은 바벨론 포로가 된다는 상식에 어긋나는 예언을 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들은 예언이 없으니 사람들 귀에 좋게 들리는 말만 하여 인기와 명예를 얻어 예레미야 선지자를 잡아 가두고 온갖 핍박을 자행하였다. 죽음 같은 고통을 당하는 예레미야는 울분을 토하며 끝까지 예루살렘의 회개를 선포했던 의로운 선지자였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시대상황이 비슷하게 예전처럼 전개되는 지금 시기에 선지서가 주는 메세지가 우리의 심령을 찌르는듯하다. 백성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를 선포하기 위해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은 이 어두운 시대에 신자들을 깨우고 회개의 삶을 원하신다. 신자들이 깨어 있지 못하면,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여 소명을 감당할 수가 없다.
신자된 사람은 예레미야가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듯이 날마다 마음을 잡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모습을 통해서 타락한 세상이 주님의 빛을 볼수 있도록 해야 한다.하루 하루 놓치지 않고 말씀을 통해 찔림을 받고 영적인 통찰력을 얻어 주님의 뜻을 따르길 소망한다.
(9/12)
*주님의 백성이 저지른 두 가지의 악은 무엇입니까? (2:13)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게 하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악이 하나님이 아닌 세속의 것으로 자신들의 갈증을 채워 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들을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음에도 무지한 인생들은 그 작품에 딴지를 걸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낸다. 금수저, 흙수저를 거론하면서 스스로를 낙담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너를 종자가 아주 좋은 제일 좋은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어떻게 하여 네가 엉뚱하게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느냐?”
성경이 말하는 가장 심각한 죄는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는것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음에도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면서
오히려 ‘나는 죄가 없다, 하나님께 심판받을 일도 하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게 될것이다.
예레미야가 유다백성들이 의지하는 것들이 그들을 구원해 낼수가 없음을 알렸다. 설사 그것들이 그들을 도와줄지는 몰라도 형통함을 얻지는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신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한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내가 걸어가는 그 길,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이요 삶이기를 소망한다.
(9/13)
*이스라엘 백성이 깨달아야 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3:13)
“너는 너의 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서, 푸른 나무마다 찾아 다니며, 그 밑에서 다른 신들에게 너의 몸을 내맡겼으며,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너는 이것을 깨달아라,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행했던 온갖 죄악을 모두 드러내며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촉구하였다. 예레미야가 바라 본 백성들의 죄악상은 하나 하나 나열할때마다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낯 뜨거운것들이었으며, 더 기막힌 사실은 그들이 저지른것을 죄로 여기지 않거나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세상에 모르고 짓는 죄가 있을까? 그럴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영안이 어두워 자신이 죄인인줄도 모르고 자신의 행위가 죄의 허물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시스템은 죄에 대하여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될때가 많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죄를 짓고 그것도 모자라 죄 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고 사는 영적 마비현상에 빠지게 된다.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변절’ , ‘배신’ 이라고 표현했다.
“너희가 나를 ‘아버지’ 라고 부르며 나만을 따르고, 나를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아! 마치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지 않은 여인처럼, 너희는 나를 배신하였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자신의 죄를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빛이 우리의 죄를 죄다 비춰주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신은 깨끗하다고 말할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맨먼저 터져 나오는것이 ‘주여,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올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이 기막힌 특권으로 우리는 회개를 통해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수 있게 되었다. 죄를 묵혀두지 말라. 방치하지 말라.
하나님께 나와서 해결함을 얻어야 한다. 새옷을 입고 새사람이 되자. 새로운 은혜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해 보길 원한다.
(9/14)
*예루살렘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어떤 것을 씻어내야 합니까? (4:14)
“예루살렘아, 네가 구원을 받으려면, 너의 마음에서 악을 씻어 버려라. 네가 언제까지 흉악한 생각을 너의 속에 품고 있을 작정이냐?”
유다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엉망인 근본적인 이유는 외식적인 삶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당연히 구원 받을것을 믿고 있었다. 믿는것은 자유이지만 문제는 구원에 합당한 삶은 전혀 살지 못했었다는 점이다.
믿음따로 삶따로였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과 삶이 동일한 모습이다. 안식일 제사를 지낼때에는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경외하는것처럼 온갖 미사어구와 거룩한 제스처로 제사를 드리지만, 그 마음은 악으로 가득했다. 당연히 그런 마음으로 사는 나머지 날들은 말하지 않아도
계산이 될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치를 떨며 이렇게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였다.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아라. 묵은 땅을 갈아엎고서 씨를 뿌려라.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하나님의 구원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지금 행하고 있는 모든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종교행위와 더럽고 오염된 삶(마음)을 모두 갈아 엎는것이 순서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가? 혹시 종교생활,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이진 않는가?
방송에서 빠질수 없는 잘 숙련된 청중과 같이 교회시스템, 예배 시스템에 잘 숙련된 청중이 아닌가?
‘주여, 아멘, 할렐루야’ 는 기막히게 외쳐대지만 삶은 전혀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는 그런 예배에만 숙련된 청중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면 그 진노가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온다고 하였다. 지금 나 자신의 묵은땅, 가시밭과 같은 마음을 말씀으로 갈아 엎자. 기도의 눈물을 뿌리자. 하나님의 양육을 받아 우리의 영혼이 새로와 지며 강건하기를 축복한다.
(9/15)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어떤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5:31)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5장은 남유다백성들의 하늘 높이 쌓인 죄를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성중에서 옳은 일을 하는 사람, 참되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이 성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다. 마치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지만 실상은 그들보다 더 타락하고 부패한곳이 예루살렘 성이었다.
거룩했던 성, The Holy City, 예루살렘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이 성의 죄가 만연하도록 만든 총체적 책임을 예언자와 제사장 무리에게 물으셨다. 하나님과 전혀 교통이 없었던 예언자들이 쏟아내는 예언은 모두 거짓일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은 절대로 예루살렘을 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말들만 지껄였다.
당연히 백성들은 그 예언을 싫어할리 만무했으며 진실을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하고 미치광이 취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신지 오래고 그들의 제사를 역겨워하셨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렸고 예언자, 제사장무리들은 백성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고 이익을 취하였다.
귀에 달콤하게 들리는 말씀이 부담없고 듣기 편할지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 신자의 영혼은 가뭄에 갈라진 땅과 같이 메마르고 그런 말씀만 듣기를 원하는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을 경외할수 없다.
교회는 주고받는 비지니스가 아니다. 영혼을 살리는 믿음 공동체이며, 생명 공동체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들음은 오직 주의 말씀만이 심령에 떨어질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올바로 볼수 있게 된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비춰주는 이유는 고치고 변화시키는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기위함이다.
웃음과 재미와 감동을 주는 설교보다 찌르고 탄식하고 회개하게 만드는 말씀이 강단에서 더욱 선포되기를 간구한다.
(9/16)
*주님이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19)
“땅아, 너도 들어라. 내가 지금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린다. 그들이 이처럼 사악한 생각을 하였으니, 이것은 그들이 받아 마땅한 벌이다. 그들이 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며, 나의 율법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백성들 가운데 한번이라도 하나님께 귀 기울이거나 하나님께 주목한 사람이 없어서 그들은 마치 귀머거리며 눈을 뜬 장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가 표현한것은 백성들 가운데 그 누구도 예레미야의 예언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예 그들은 그 말조차 싫어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안하다. 괜찮다. 모두 다 잘될거야’ 라고 서로 격려하고 있었다. 이 모습은 마치 큰 질병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도 그냥 반창고나 붙이면 괜찮아 질거야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반창고를 붙여서 치료될 일이 아닌걸 아시기 때문에 강제로 그들을 수술대위에 올려 놓으시려고 하신것이다.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최선의 선택을 하신 하나님이 보이는가? 사랑한다고 그냥 놔두면 영원히 멸망될 수 밖에 없는 자녀를 그냥 바라만 보는 부모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너무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심판의 메스를 들으신것이다. 지금 그들의 상태는 반창고 붙여서 될 상처가 아니다.
살을 도려내야하고 썩어진 부분을 모조리 잘라 내야 살수 있다.
우리의 삶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데도 우리 눈으로 보기에 ‘뭐, 아직은 괜찮은거 같은데, 아무일 없는데.’ 라고 안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영적인 상태를 구별해내지 못하게 된다.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이 종이 듣겠나이다’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쫑긋 세웠다.
말씀에 더 집중하는 인생이 되어 하나님의 기침소리에도 심각하게 반응할수 있는 영성을 얻기를 소망한다.
(9/17)
*주님이 허락하신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7:5-6)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말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성전 문 앞에 서서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였다.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행들을 낱낱히 들추어 내었다.
‘도둑질, 살인, 음행, 거짓, 우상숭배,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죄악은 힌놈 골짜기에서 자녀들을 인신제사로 불에 태워 우상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극악무도한 살인 우상숭배에 하나님은 그들이 복받을 것으로 여기는 ‘힌놈골짜기’ 를 ‘살육 골짜기’ 로 만들겠다고 예언하며 우상숭배자들이 그곳에서 복대신 죽음을 면치 못할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유다백성들의 죄악이 그들의 선조들보다 훨씬 악하다고 콕 집어서 언급하실만큼 그들의 죄상은 소돔과 고모라의 만행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변질되었을까? 힌놈 골짜기 사건을 보더라도 알수 있는것이 그들이 비진리를 진리보다 더 믿기 때문이 아닐까? 진리앞에서는 소와 양을 바치지만 비진리앞에서는 자녀까지 바치는걸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거 같다.
이시대는 어떨까? 이시대의 죄악상은 그 시대보다 더할까 부족할까? 각자의 의견이 다르겠지만 결단코 과거보다 뒤지지는 않을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세상은 그때보다 비진리적인 요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는 제1계명을 어기는것이 비진리를 붙드는 삶이다.
오늘 자신의 삶에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비진리가 무엇인지 찾아보길 바란다. 비진리를 찾고 소유하려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을 교육받지 못했거나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답은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눈을 돌리는것 뿐이다.
(9/18)
*백성이 주의 법규를 지키지 않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8:7-8)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내 백성은 주의 법규를 알지 못한다.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 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시기인거 같다.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안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듣고 배운 율법은 알고보니 가르치는 자들의 무지함이 만들어낸 거짓이었던 것이다.
사공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선장을 잘못 만나면 배는 엉뚱한 곳으로 가는 법이다. 뛰어나고 유능한 선장은 노련하고 경험히 풍부하여 뱃길을 잘 안다. 하늘의 날씨만 봐도 어떻게 준비하고 배를 어떻게 운행해야하는지 기막히게 알아낸다.
유다백성들을 영적으로 인도해야할 선지자 제사장들은 모두 거짓말로 백성들을 죄악으로 이끈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현재 유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 전혀 구별해내지도 못했고 당연히 회개의 자리고 백성들을 이끌지 못한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이 인간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본능일것이다. 특히 새들은 그들이 계절에 따라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수천마일을 이동하며 하나님께 순종한다.
지진이 일어나기전에 동물과 새들이 먼저 감지하고 대피를 하는것을 보면 정말 그들의 본능이란것이 놀랍기 그지없다.
적어도 동물들은 그들에게 닥칠 재앙을 느끼고 피하기까지 하는데 죄악에 빠진 인간은 그렇게 불순종하며 살아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심판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것이 안타까울따름이다.
유다백성들은 거짓율법사들의 말만 듣고 참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아서 결국 화를 자초하게 된 것이다.
신자들은 영적인 귀와 눈이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의 눈과 귀가 오직 진리의 말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때 우리는 느끼고 깨달을수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재난과 사고들을 보면서 예레미야와 같이 엎드려 탄식할수 있는 영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운행해 나가시는 선장이 그리스도이신지 잘 확인하며 살아야 할때이다.
(9/19)
*주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것들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까? (9:24)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드디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탄식이 시작되었다. 그는 산들을 보고 울며, 광야의 초원을 바라보고, 슬픈 노래를 읊조린다. 그처럼 무성했던 곳들이 모두 황무지가 되었고, 가축떼의 울음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예레미야는 풍족했던 유다땅이 황무지가 될것을 예언하며 그의 백성들이 맞이해야할 형편을 생각해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하나님께 심판받아 마땅함을 토로할 수 박에 없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조상이 섬기라고 가르쳐 준 바알만 섬기는 백성들에게는 오직 심판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의지하며 자랑하는 죄악에서 떠날 것을 요구한다.
사람이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는 심리를 가지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믿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법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을 대적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에 벗어나서 좋은게 있을리 만무하다. 하나님은 패역한 백성들에게 그들이 살 길을 제시하셨는데 그들 자신들의 자랑을 멈추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긍휼과 공의와 공평하심으로 세상을 다스리심을 자랑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약한자를 강하게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셔서 스스로 강한체하는자, 부자인척하는자들을 심판하신다. 이세상 사람들은 ‘적자생존’ 이라고 하여 강한 것을 자랑하고 주장하나,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들을 통해 고요히 역사하심을 믿어야 한다.
(9/20)
*주님이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선포하신 언약은 무엇입니까?(11:4-5)
“나에게 순종하고, 내가 명하는 모든 것을 실천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
성경은 하나님을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이라고 표현한다.
다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로서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좋아하시고 그 약속을 끝까지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이다. 약속은 자기 자신에게 하기도 하지만 대개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부모와 자녀, 배우자, 친구와 같은 관계안에서 크고 작은 약속체계가 이루어지는거 같다.
그리고 일을 통해서 직장과 지켜야할 약속도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참 많은 약속이라는 시스템 안에 살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사람들은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이행하는 사람을 신뢰하지만 약속을 어기고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불신의 딱지를 붙여버린다. 비록 그곳이 가족 공동체안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흔히 거짓말쟁이라고 호칭하는데 성경은 마귀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른다.
그는 사람들과 많은 약속의 관계를 맺는다. 내 말대로 하면 성공하고 행복과 쾌락을 얻는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약속은 거짓말임이 탄로났고, 이후에도 그의 약속을 따른 수 많은 인생들이 타락과 멸망의 길로 떨어진것을 본다.
성경은 마귀와 절대로 약속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속이는 자요, 꾀이는 자이다.
유다백성들을 속여서 약속을 체결했다. 우상을 숭배하면 큰 복을 누릴것이라고 했다. 마귀와의 약속은 곧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시키는 단계로 들어서게 된다는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한것이 화근이 되었다.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깡통을 차듯이 차버리자 하나님은 언약하신 그대로 행동하시기 시작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은 복에 관한약속뿐만 아니라 저주와 심판에 대한 약속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복과 저주에 대한 언약모두를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분이심을 늘 마음에 간직하되 나의 삶을 통해 저주와 심판을 이행하시지 않도록 늘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9/21)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베 띠를 가지고 유프라테스 강에 두고 후에 가져오게 하신 이유는 무엇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까? (13:9-10)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겠다. 이 악한 백성은 나의 말 듣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아가고, 다른 신들을 쫒아가서 그것들을 섬기며 경배하므로, 이제 이 백성은 전혀 쓸모가 없는 이 띠와 같이 되고 말 것이다.”
이 환상은 예레미야서의 주제와도 같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허리에 두를 베띠를 띠고 물에 적시는 일이 없도록 지시하셨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 띠를 유프라테스 강 가 바위틈에 숨겨 두라고 지시하셨다. 후에 다시 거기로 가서 베 띠를 꺼내보니 썩어서 쓸모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띠가 허리에 매여지듯이 유다백성이 하나님에게 붙어 있을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었으나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을때는 썩어져버린 띠와 같은 존재로 전락됨을 알려 주셨다.
예수님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때는 많은 열매를 맺지만 나무로부터 떨어졌을때는 말라 불에 던지우리라’ 고 하셨다. 꽃꽂이의 꽃들은 눈에 보기에 이쁘고 아름다울수 있다. 수분을 공급해주면 최대 일주일 정도는 그 비주얼을 유지할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결국 시들고 메말라 버린다.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그 인생이 꽃을 피우듯이 잘나가고 자유롭고 좋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영혼아 이제 평안히 쉬자’ 라고 스스로를 위로할지라도 그 뜻을 이룰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명줄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은 소유주가 하나님이시다. 내 안에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면 곧바로 소유주에게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늘 붙어 있는 인생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것이다. 이시대가 마치 하나님의 허리에서 떨어져 나간 베 띠와 같아 보인다. 신자들은 예레미야 처럼 눈물로 기도해야 할때이다.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박대하지 마옵소서. 우리는 주님께만 희망을 걸고 소망을 두겠습니다.’
(9/22)
*주님이 초상집에 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6:5)
“너는 초상집에 가지 말아라. 가서 곡하지도 말고, 유가족을 위로하여 주지도 말아라. 이것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평화와 사랑과 자비를 다시 거두어들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당하게 된 자들의 죽음보다 그들이 죽게 된 원인과 이유를 깨달아 명심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다시 가져가시자 그들의 삶은 무섭게 요동치며 침몰하는 배처럼 파손되었다. 유다백성들은 교만하여 자신들의 미래가 항상 평안할것이라고 믿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그런 확신을 가졌다는것이다.
이와같은 확신은 선지자들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것으로서 그들은 백성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과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듯한 말을 하였다. 정작 하나님께는 아무런 예언도 환상도 듣고 보지 못하여 완전히 단절되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 받은 것인냥 백성들에게 거짓 메세지를 전한 것이었다.
“너는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잔칫집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흥겨워 하는 소리와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를, 너희 시대에 사라지게 하리라.”
신자들의 삶은 영혼이 중심이 되는 위주의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육신이 기쁘고 건강하고 만족한다고 해도 인생의 중심인 영혼이 만족을 얻지 못하고 평강을 누리지 못하면, 모든것이 헛되고 헛된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살아가는 중심을 영혼에 맞추는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얻을수가 있다.
“내가 너를 튼튼한 놋쇠 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백성과 맞서게 하겠다.”
작은 다윗이었지만 거인 골리앗이 상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다윗은 사울의 갑옷도 입지 않고 맨몸으로 나아갔지만 신앙의 갑옷을 입으니 천하무적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예수로 옷 입고 그의 아름다우심을 이 땅에서 드러내는 삶이 되길 기대합시다.
(9/23)
*주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17:22)
“안식일에는 너희의 집에서 짐도 내가지 말아라.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가 얼마나 추악한지 마치 금강석에 새겨진 글씨처럼 여기저기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예언한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그 새겨진 조상들의 죄악상을 알게 되고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나라가 멸망하고 알지 못하는 나라에 끌려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유다의 죄악의 시작은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거짓되고 썩어 있어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신령한 복을 바라보기 보다 마치 자고새와 같이 내것, 남의 것 가리지 않고 일단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고새가 아무리 자기알과 남의 알까지 품는다고 해도 때가 되면 모두 알에서 깨어나와 날아가 버리듯이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것들도 때가 되면 모두 자신의 손을 떠나게 된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그들의 회개와 뉘우침을 선포한다. 그리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철저히 지킬것을 선포하였다. 신약시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구약의 안식일 개념이 사라지고 주님의 부활의 날을 주님의날, 즉 주일로 정하여 지키기 시작했다.
날짜는 달라졌어도 안식일의 정신인 ‘거룩하게 지키라’ 는 명령은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며 본분인것이다. 이것이 성전중심, 예배중심의 삶이며, 곧 하나님 중심의 삶이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나머지 날들을 더 거룩히 지킬수가 있어야 한다. 비록 몸은 성전과 떨어져 살더라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지 않으시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사람의 마음을 스스로 거룩하게 지키기는 불가능하므로 날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코칭에 따라야 한다.
(9/24)
*예루살렘의 집들과 유다 왕궁들이 도벳의 터처럼 불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9:13)
“이는 집집마다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온갖 천체에게 향을 피워 올리고, 이방신들에게 술을 부어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다 땅에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선포하셨다. 이에 예레미야는 유다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 무리의 어른들을 데리고 도벳이라고 불리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유다 백성이 토기가 깨어지듯 완전히 깨어질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는 유다 백성들이 온갖 우상을 섬기던 곳이고 바알에게 자기의 아들들을 번제로 불사른 곳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를 통하여 만사형통의 복을 누릴것이라고 그 끔찍한 인신제사를 드렸지만, 극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사악한 만사형통의 복을 짖밟아 완전히 부숴버리겠다고 예언하신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는 유다백성들의 범죄의 소굴을 하나님은 티끌도 남기지 않고 날려 버릴것을 다짐하셨다. 거기에는 회개도 용서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재앙만이 그들의 악한 행실을 판단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혐오하시며 극렬히 반대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하여 미약한 인생을 부추기고 유혹하여 우상을 섬기게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상이 한낱 무생물체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재앙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무지함을 만방에 보이시면서 헛된 우상숭배를 중지하며 오직 한분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길 바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운 용사처럼’ 인간이 만들어내는 우상들과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하실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자연을 만들어 주셨는데 어리석은 인간이 자연을 섬기는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해 보일까?
인간이 하나님외에 그 어떤 대상을 섬기고 경배하는것은 무서운 죄악임을 명심하며, 아울러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수가 없음도 반드시 기억하자.
(9/25)
*주님의 명령을 지킬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결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22:3-5)
“너희가 이 명령을 철저히 실천하면, 다윗의 보좌에 앉는 왕들이 병거와 군마를 타고,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이 왕궁의 대문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 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바로 이 왕궁은 페허가 될 것이다.”
오늘 말씀은 유다 왕실에 대한 예언선포이다. 다윗의 왕좌를 이어받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다윗의 신본주의를 재확립하기를 요구하셨다. 위로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옆으로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특히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외국인, 고아, 과부를 도와주되 학대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유다왕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경우 다윗왕조를 재건시키겠지만, 순종하지 못할 경우는 아무도 살지 않는 왕실로 만들어 버릴것을 강력히 경고하시면서, 현재의 왕과 앞으로의 왕들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셨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참혹하기 그지 없을만큼 비참하였다. 백성이 하나님보다 왕의 권위에 순종하고, 왕들이 하나님보다 자신의 왕권을 의지할때 그 나라, 그 백성에게 임할 미래는 암울하다
북 이스라엘의 19명의 왕들모두가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여 죽고 나라는 멸망해 버렸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해야할뿐만 아니라, 아예 완전히 압도를 당해버려야 한다. 말씀이 등불과 빛이 되어 자신의 삶을 비추도록 해야 살아가야 할 길을 찾을수가 있다. 매일 한장내지 두장씩 읽는 바이블 타임도 결국 말씀의 권위에 압도당하기 위한 신자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지시하고 가리키는 방향을 시간을 가지고 묵상하면 길이 보인다. 세상이 쳐놓은 수백, 수천개의 길 사이로 밝은 빛이 있는 길이 보이게 될것이다. 그 길이 좁은길이다.
예레미야처럼 말씀을 읽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불이 붙는것 같은 체험이 일어나서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앞에 무릎꿇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9/26)
*주님이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23:36)
“누구든지 그런 말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그에게 정말 부담이 될 것이라고 하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만군의 주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자자, 제사장들이 예레미야가 선포한 ‘심판’ 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였다. ‘자기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주신적이 없는데 왜 너만 그런 헛소리를 말씀이라고 지껄이느냐.’ 이렇게 그들은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말씀을 주신 하나님까지 모욕을 하게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환상을 말하기 때문이다.
선지자, 예언자들은 큰 죄악으로 나라가 멸망직전인데도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에게는 어떤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예언을 쏟아 낸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신자들은 듣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삯군들의 메세지는 늘 듣는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들어도 마음에 전혀 찔림이 없는 평화로운 말들뿐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올바로 진리의 말씀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귀가 있어도
그것이 진리의 말씀인지 인간의 말인지 분별할수 없다면, 미혹당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먼저 자신이 말씀을 알아야 하고 말씀대로 말하고 행동할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영적으로 셋업이 되어 있으면, 분별력이 생긴다. 마지막 시대에 정말 부담이 되는 말씀은 ‘아무런 고난없이 그저 만사형통할것이다’ 라는 말이어야 한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수 많은 고난과 핍박이 일어날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이겨내고 마음에는 참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