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요한복음 1:3 “겸손해야 하는 이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마지막 복음서입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와는 좀 차별화를 두면서 다른 복음서에서 기록하지 않은 내용들을 많이 포함하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신성’ 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참여했음을 밝히며 그 이전에도 무궁하게 계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말씀’ 으로 표현한것은 그리스도가 언제나 하나님의 계시자란 의미입니다.
천지창조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사역을 감당하심을 볼 수 있는데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창조 사역에 동참해 주셨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같은 피조물의 몸을 친히 가지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또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생명의 인도자이십니다.
모든 인류는 그분앞에서 잠잠하며 무엇보다 겸손해져야하는 이유입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없이 우리에게 생명도 구원도 없습니다. 그분의 권능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생은 더더욱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려하기보다 낮아지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호흡을 통하여 나오는 모든 말과 언어에서 자신은 낮추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높이 올리는 겸손한 신자의 삶을 살아갈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기뻐받으시고 보응하실것입니다.
(9/10) 요한복음 1:23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말에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이사야의 말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범상치 않은 모습과 강력한 영성에 압도되어 혹시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적어도 엘리야같은 선지자일거라고 예상을 하고 물었으나 요한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명확하게 알았을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았던 인물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거의 없는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자의 소리로 살았던 것일까요?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도 이와같아야 합니다.
교회든, 성도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복음만을 증거해야하는 도구이어야 하는데 이시대는 그 도구들이 자신들을 너무 드러내는거 같습니다. 도구들이 빛을 발하면 비춰져야할 복음이 빛을 잃는 법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철저히 자신은 감추고 소리(복음)만 들리도록 하였습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붐비는곳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요한은 열심히 소리를 발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누가 듣던지 듣지 않던지 지속적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문을 닫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없다는것입니다. 물론 힘든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상은 사람이 많이 모이고 볼거리가 많고 이익을 얻을수 있는곳에 몰립니다.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더더욱 그런것에 이끌려 살아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사명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세상의 문화와 기준에 맞추어 사는것이 아닙니다.
광야같은 세상에 점점 외치는 자의 소리가 희미해지는것을 느낍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의 삶속에 복음이 힘을 잃으면 그 사람의 삶도 어둠속에 묻힐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주의 길을 곧게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던 세례요한처럼 오직 주의 말씀만을 외치는 또 하나의 소리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9/14) 요한복음 2:9-10 “끊어지지 않는 기쁨”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운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키 포인트는 십자가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위기에서 탈출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얻은 우리의 삶은 마치 혼인잔치처럼 늘 기쁨과 찬양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늘 기쁜일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더 힘든시간도 생기고 눈물나는일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뻐할수 있습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어려운일을 만나도 그 일에 파묻혀 괴로워하기보다 그 어려움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의지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그 어떤 문제도 예수그리스도를 통과하면 눈물이 변하여 찬양이 될수 있고 슬픔이 변하여 희락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얼만큼 만드셨나요? 돌항아리 여섯통에 가득히 채워주셨습니다. 이 돌 항아리하나에 30 gallon 의 물이 들어간다고 하니 180 gallon 의 가장 질좋은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것입니다. 이말은 이제 혼인잔치 동안에 포도주가 떨어질 염려가 아예 없도록 하신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취소되거나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사라질수 없다는 소망이 있는 겁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동안 우리를 기쁘게 할뿐이지 금방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집니다. 새차를 사면 그 기쁨이 얼마나 가던가요? 새 집을 장만하면 새 집에 대한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가던가요?
세상이 주는 기쁨은 절대로 오래가지 않습니다. 금방 내 마음을 떠납니다. 마치 혼인잔치에서 떨어진 포도주와 같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포도주는 마시면 없어지고 허무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만들어 주시는 포도주는 떨어질 염려가 없기 때문에 그 잔치의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손씻는 돌항아리에서 물을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준 하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그냥 시키는데로 하긴하는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 말만 듣고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이 엄치척을 해 준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해버렸더니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기쁨이 넘친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삶속에서 언제나 기뻐하는 삶을 사는것은 구원을 주신 예수님께 드릴수 있는 우리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기쁜일이 없어도 그냥 기뻐하는것입니다. 슬픈일이 있어도 곧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가 주시는 사랑, 기쁨이 내 마음속에 있는이상 우리는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때문입니다.
(9/15) 요한복음3:3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유대인의 지도자이면서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두절미하고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알려주셨는데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리스도를 믿을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듭남은 우리 인생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믿게하며 무엇보다 이세상의 삶이 아닌 천국의 삶을 사모하며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이름만 올린다고 저절로 성도가 되는것이 아니라 거듭난 신자만이 성도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거듭난 성도인지 아닌지를 알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세요.
1.성경이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임을 믿는가 2.그 성경 전체가 사실이고 진리임을 믿는가 3. 나의 죄를 사하시기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내가 구원받게 됨을 믿는가 4. 나는 천국과 지옥을 믿으며 지금 죽어도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심을 믿는가
기독교의 핵심인 위의 질문들에 대하여 그저 지식으로가 아닌 마음에 거리낌없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당신은 거듭난 성도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위의 질문들은 이해되는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어야 하기때문에 사람의 가르침이아닌 오직 성령의 역사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거듭난 증거는 자신의 삶속에서 쉽게 발견할수가 있는데 나의 마음과 생각속에 성령의 지시와 권면이 있는 여부와 그 지시에 순종할때 기쁨이 있고, 불순종했을때 마음에 찔림이 있는지를 살펴보아 알수가 있습니다. 열매를 봐야 그 나무를 알수 있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떤 사람은 거듭남에 대하여 신비롭고 환상적인 체험을 기대하면서 그런것이 없어서 거듭남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바람이 임의로 부는것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소리’ 에 가장 민감한 사람입니다. 이글을 읽으면서도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당신의 마음에 의심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요. 죄의 본성에서부터 불어오는 소리를 차단하고 오직 성령의 음성을 따르도록 간구하십시요.
(9/16) 요한복음3:19 “믿지 않는 죄”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에게 임하게될 미래를 각각 영생과 멸망으로 확정지어 놓았습니다. 요한은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는데요 ‘그리스도(빛) 가 오셨지만 어둠(세상)’ 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바로 악한 자아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이 자아는 의로운것이 아닙니다. 죄악의 본성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아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오직 육적인 삶을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와 같은 생각에 자신의 삶을 집중할뿐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삶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악한 행위’ 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행위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자칫 마음이 없는 행위 위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을만큼 겸손하고 신실했던 사람이었으나 그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는 계기가 되었던것이 있습니다.
사울이 어느순간부터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는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의 마음, 소위 민심에 더 반응하고 그것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던것입니다. 사울은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것을 진멸하라고 하셨음에도 소와 양들중 좋은것은 남기고 상태가 나쁜것들만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로부터 나오는 악한 행위입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며 듣는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라며 믿지 않는 사울을 강하게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즉 자신의 자아의 행위를 회개하고 말씀만을 경청하는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삶은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까? 혹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없는데도 그저 행위만 드러내려는것은 아닌지 각자 자신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9/18) 토요새벽말씀 - 요한복음3:30 “흥하는자와 쇠하는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미국의 한 신학교 도서관에는 이런글이 적혀 있습니다. “If you can God will not, but if you can’t God will” 내가 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시지만 내가 할수없다고 할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말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에가서 그 아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합니다. 사무엘은 일곱아들을 먼저 보게되었는데 그중 맏아들 엘리압을 보자마자 거의 기름을 부을뻔했습니다. 누가봐도 그가 왕이될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그를 버렸노라고 사무엘의 섣부른 행동을 책망하셨습니다.
당대 최고의 선지자였던 사무엘도 하나님보다 앞서가려다가 큰 낭패를 당할뻔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를수 있는 죄가 바로 이와같은 모습이라고 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것만 보고 먼저 판단하거나 행동할때 자칫 실수를 저지르거나 관계를 깨어 버리는 잘못을 할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셀수없이 많이 경고하는 말씀이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보이는데 집착하고 보이는데로 판단할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왜 이와같은 상황이 우리의 삶에서 자주 일어나는 걸까요?
그것은 마귀가 우리의 눈을 통해 마음과 생각을 흐려놓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매일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선악과였지만 마귀의 유혹을 받고 다시보니 정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게 보여서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거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것을 보는거야 어쩔수 없는것이지만 눈에 보이는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선과 악이 나누어 질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요한의 제자들이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을 요한에게 전하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6
무슨 말입니까? 속된말로 사람들 다 빼앗긴다는 뜻이지요?
요한의 제자들의 눈에 보기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 예수께로 향하는것이 불안했던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하는거 아니냐는 뜻으로 요한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봅니다.
요한이 제자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면 신자 숫자에 목숨을 거는 어떤 목회자들처럼 무슨 방편을 마련해서 예수께로 쏠린 민심을 다시 돌아오게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보이는것을 보이는데로만 보지 않고 이와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은 그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을 경쟁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가는것을 합당한것으로 보았으며 자신에게 그것이 큰 기쁨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더욱 기막힌 고백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의 이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줍니다. 앞전에 말한것처럼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려고 하면 그저 눈에 보이는데로 판단하고 행동하여 얻을수 있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단물 정도는 맛보겠지요. 하지만 그정도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수없는 하나님의 은혜, 섭리, 축복을 이리저리 다 놓치게 될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세례요한이었기에 보이는것에 흔들리거나 인간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며 기뻐할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욥기 마지막에 보면 폭풍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앞에 그가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42:2-3)
엄청난 고난앞에서 당당하게 믿음으로 나섰던 욥이었지만 친구들과 변론하는 과정에 점점 눈에 보이는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원망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하나님께 불평했었던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욥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을 들어보세요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이제 욥은 눈에 보이는 모습에 이끌려 함부로 말하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구하여 그 뜻을 먼저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요한이 말한것이 바로 이와같은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 나라가 나의 마음속에서 항상 흥해야 합니다. 나의 뜻 나의 생각은 철저히 그 앞에 내려놓는 쇠함이 있을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보이는것은 나타난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라’ 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보는것을 조심할뿐만 아니라 보이는것만 보고 판단하여 하나님의 뜻을 쇠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삶에 오직 하나님의 뜻이 흥하고 나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합해지는 은혜가 임하길 축복합니다.
(9/21) 요한복음4:22 “아는 것을 예배하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이 자신의 과거를 모두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물 한잔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예수님과의 대화가 예배라는 영적인 삶으로 까지 깊어지는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을정도로 자신의 삶을 육적인 삶에 맡기며 살아왔던 여인이 예수를 만나 발견한것은 육적인 삶으로서는 인생의 참 기쁨과 평안을 찾을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삶이 중심을 올바로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였던 이유가 잘못된 예배에 있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예배만 참석한다고 우리의 삶이 바르게 나아가는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예배하고 그 예배가 자신의 삶에 적용되어지느냐에 따라서 삶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사람에게 보이기위함도 자신을 나타내기 위함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예배자는 언제나 사람의 눈을 의식하게 되므로 외식적인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이것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알지 못하는것을 예배하니까 삶은 오로지 육적인 것에만 치우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의 모습은 겉모습이 아닌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예배가 아는 것을 예배하는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자는 외적이고 육적인 삶에 치우치지 않으며 아는 것(복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예배로부터 나오며 예배를 통해 삶의 질이 구분되어집니다. 예배의 주인이신 예수를 만나 예배의 본질을 깨닫게된 여인, 이전까지 사람들을 만나는것조차 두려워했으나 이제 육적인 어둠의 터널을 벗어났습니다.
주일예배는 지났지만 나머지 날들을 예배의 능력, 은혜로 채워가시길 소망합니다.
(9/22) 요한복음 4:48 “보려는믿음은 진짜가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왕의 신하의 아들이 열병에 걸려 거의 죽게되자,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계신 가나까지 약25마일되는 길을 달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주저없이 자신의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지금 당장 자신의 집으로 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실망스러운것이었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표적과 기사를 당장 보지 않더라도 믿을수 있느냐?’ 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는지 자기말만 되풀이합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전에 내려오소서’ 지금 이 남자에게는 두가지만 있습니다. 아들을 살리는것과 아들을 살릴수 있는 자는 예수님밖에 없다는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신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이게 무슨말입니까?
다른 환자들처럼 너의 믿음이 아들을 살렸다던지 지금 그자리에서 기도해주시든지 해야하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작 하신말씀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당연히 아들은 아직 살아있는거 아닙니까?
이런 실망스러운 말을 들은 신하가 화를낼줄 알았는데 그 어정쩡한 답변을 믿고 돌아간것입니다.
분명히 이 신하는 기적의 그림자도 못보고 그냥 예수님 말만 믿고 집으로 급히 내려갑니다. 그런데 내려가던중에 자신의 종들을 만나게 되는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됩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들이 살아있다’ 하거늘.’ 이 말 어디서 들은겁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종들의 말을 듣고 가슴이 뛰기 시작한 그 사람은 정확하게 언제 아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는지 물어보는데 정확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이 시간에 대하여 클로즈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적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에게 기적을 볼수있도록 한다는것입니다.’
지금 이시대는 신비주의 은사주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도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짜성도는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고, 방언을 통하여 영적인 체험을 할수 있어야 한다고 떠듭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시는데 왜 말씀을 읽어야 하냐고 묻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환상을 보고, 몸이 뒤로 쓰러지고, 발의 길이가 다른것을 똑같이 만드는게 기독교 신앙입니까? 아닙니다. 그런것은 무당들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만나 내 인생이 거듭나고 변화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의 뜻대로 살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인 말씀을 찾는 삶을 사는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이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9/23) 요한복음5:7 “베데스다의 문화에서 떠나라”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베데스다 연못에 병자들이 모여듭니다. 쉬기위해서도 아니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때문입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음직일때 제일먼저 연못에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낫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에는 사는 방식이 다 똑같은 사람들만 모여있는듯합니다.
그저 베데스다못으로 나와서 하루종일 물만 쳐다보는 막연한 삶입니다.
거기에는 양보가 없습니다. 자비도 없고, 배려따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은혜와 긍휼대신에 불평과 원망 그리고 낙담과 절망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의 문화입니다. 이 연못의 문화에 38년이나 몸담았던 병자의 말에는 불평과 원망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가운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막연하게 교회만 다닙니다. 교회만 다니면 좋은일이 생길것이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다 그 뜻대로 되지 않을때 38년된 병자처럼 남탓하며 원망을 쏟아냅니다. 다른 하나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목적의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했던 말에 힌트가 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문화에 젖어있던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것이 무엇입니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이것은 그 병자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 아닙니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라는 명령입니다. 38년 동안 베데스다 못에서 살았지만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이었습니다. 이 병자는 예수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소리에 이 병자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이 병자는 예수님의 말을 믿고 일어섰더니 그 말씀대로 걷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말씀 순종이라는 확연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해야합니다. 막연한 믿음, 막연한 기대는 지금 당장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제쳐두는 믿음은 절대로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나를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음성에 늘 민감하게 반응하여 몸을 일으키는 순종의 길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