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 요한복음5:30 “아버지의 뜻대로만”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우리가 어린시절에 부모에게 혼난 기억이 있을겁니다. 어떻게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부모 모르게 한 일들이 항상 문제가 되었던 기억이 있죠? 그래서 문제가 터진후에 부모님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죠.
‘너 왜 나에게 말 안했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몰래 하는 일이 늘 문제를 만들어낸다는겁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 몰래 니느웨에 가지않고 다시스로 가는 바람에 혼이 났엇죠. 모세는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화가난다고 마음대로 바위를 지팡이로 내려치는바람에 결국 가나안땅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고 내 판단대로만 성급하게 행동하면 항상 거기서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두 맡기시듯이 믿는 우리들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해 공유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예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우리 믿는자들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의 일이며 예수님의 일이 곧 우리의 일이라는 뜻이며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믿으면 편안히 살다가 천국만 가는것이 아닙니다. 천국시민권을 받은 사람은 천국 시민이 해야할 사명이 있기때문에 그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그 사명이 무엇일까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하나님이 아들에게 맡기신 크신 일이 뭐에요? 죽은자를 살리고 심판하는 권한입니다. 즉 구원과 심판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고 심판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인데 우리가 해야할 일이 과연 있을까요? 당연히 우리가 같은 죄인에게 구원을 베풀수도 없고 그들을 심판할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사명은 구원과 심판의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의 삶이 이런것이라는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고 구원받지 못하는자에게 임하는 심판이 있다는것을 알려주는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생명바쳐 감당해야할 우리의 사명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9/28) 요한복음6:20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오늘 말씀을 간단히 정리하면 예수님이 함께 하실때 우리 인생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제자들의 배는 비록 뱃사람들이 넷이나 있었지만 배를 안전하게 목적지로 이동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가 함께 있었지만 바다가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동행하지 않으신것은 제자들에겐 큰 연단의 시간이었던거 같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다시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삶에는 제자들이 느낀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나름 인생의 경험을 가졌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역풍을 감당하기엔 불가능합니다.
온갖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해 보지만 넘쳐나는 염려와 두려움을 가라앉히기가 어렵습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제자들이 기뻐합니다. 그리고 배로 예수님을 영접하자 허둥대던 배가 놀랍게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목적지를 향해서 항해를 하는 배와같습니다. 나 자신이 키를 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요. 내가 충분히 알고 경험해본 길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모시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변수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이 알지 못하는 길이 없고 해결하지 못하는 변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생명의 줄을 주님께 넘겨 드리세요. 누구든지 자신의 항해를 예수님께 맡겨드린다면 그 인생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명싸개에 쌓여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십시요. 당신의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9/29) 요한복음6:29 “하나님의 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works)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work)이니라.”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사용하신 ‘하나님의 일’ 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works’ 로 물었으나 예수님은 ‘work’ 로 대답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들 즉 그 일의 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 일의 질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그들의 구원론에는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느냐에 있었으나, 예수님의 구원론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신자들 가운데에는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얼마나 일을 많이 하느냐 혹은 얼마나 귀한 일을 하느냐에 집중합니다.
물론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것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구원얻는 통로나 잣대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들을 통해 구원을 허락하신다면 교회는 봉사자들로 미어터질지 모릅니다.(물론 외식적인 헌신뿐이겠지만)
신앙은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내 맘에 모시고 사는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 믿음이요 그 삶이야말로 구원받은 자의 참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넣어주시는 감동으로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이 바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교회일이든, 사회일이든, 가정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것입니다. 기도할때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얼마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깊이 믿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맞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질문해 봅시다.
(9/30) 요한복음6:55 “참된 양식, 참된 음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것은 음식입니다. 먹는것을 너무 좋아하고 중요시하는 사람은 우스갯소리로 ‘먹기 위해서 산다’ 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먹는 일은 절대로 등한시 될수 없는 생명을 위한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 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단지 육체를
위함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것이며, 이 영생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것입니다. 살과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자신의 살과피를 주셨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인간성 전체가 속죄 제물이 되어 주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피를 기념하는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된 생명의 떡임을 믿으며 그것을 먹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늘 거하시며 연합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떡과 음료는 다시 우리에게 배고픔과 갈증을 줄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위한 참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성찬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입니다. 매일의 삶속에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된 양식으로 몸도 마음도 건강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0/5) 요한복음6:68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적어도 떠난 사람들과 다름을 밝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베드로를 위시해 다른 제자들도 아직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예수를 따르는 목적이 떠난 제자들과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던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예수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임을 믿고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나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예수를 떠날수 없습니다.
아니 잠시 떠나거나 배신해도 베드로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예수님을 찾게되며 돌아오게 됩니다. 반면에 가룟유다가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를 기억하십시요.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심을 믿지 못하는 자는 결국은 가라지가 알곡에서 갈리어지듯이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물질의 풍요, 육신의 건강, 소위 내가 원하는 만사형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정욕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떠날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영생의 말씀이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결정적인 순간에도 내 편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교훈을 받고 깨달음을 얻으며 무엇보다 말씀과 다른 나의 모습을 회개하며 변화받아 살아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육을 쫒아 사는 삶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무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은 우리의 영을 살리고 생명을 주시는 유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 이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
맛집을 찾듯이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찾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생의 말씀이 생수가 되어 우리의 심령에 흘러넘쳐 우리의 영을 날마다 강건하게 만드실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리이까?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이 세상에 영생의 떡을 주시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10/6) 요한복음 7:38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어른이 하루에 마셔야 할 물의 양은 2리터, 약 8컵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도 하루에 마셔야 할 물을 채우기 위해 우물에 왔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적당한 물을 아무리 채워도 우리 인생이 느끼는 갈증은 채워지지 않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의 갈증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마침내 그 갈증을 해갈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의 이러한 영적이고 내면적인 갈증을 멈출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고 하셨는데 우리는 예수께 나아가 무엇을 마실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생수의 강이라는 물로서 바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고 그분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무한 리필이 가능한 성령을 생수로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배에서’ 라는 의미는 성령께서 신자의 가장 깊은 심령 속에 임하셔서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영혼의 갈증, 내면의 깊은 요구가 메시야를 통해서 해결받은것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영적인 요구또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내 마음에 보실때 충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메시야를 만나 영적갈증이 해소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동안 만나기를 기피했던 마을 사람들을 스스로 찾아간것이 그 치료의 증거입니다.
마음이 변화되고 새로워질때 인생이 변화되는것입니다. 우리의 배는 육신의 건강과 만족을 위해서만 채워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심각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나의 배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요. 예수께 나아오십시요. 주님의 생수가 그 배에서 흘러나오도록 하십시요. 그로인해 은혜를 경험하고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임하도록 하십시요.
(10/7) 요한복음8:7 “죄 없는자가 먼저 치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라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이지만 너무나 지켜지지 않고 있는 말씀일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옛언약(율법)은 지나고 새언약(서로사랑하라)에 근거한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대하라고 가르치지만 신약은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 는 것이며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몸소 실천하시며 그것이 주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보여주셨습니다.
죄지은 여자를 율법으로 정죄하고 돌을 던지기전에 먼저 각기 자기 자신을 심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장담하던 자들이 하나 둘 씩씩거리며 그 자리를 떠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반응했던 것일까요?
그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그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 그들의 심령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완악하고 어리석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앞에 굴복할 수 밖에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자신의 심령에 떨어지도록 해야합니다. 말씀이 들리면 순종할수가 있습니다. 들리는데도 돌을 던진다면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왜 신자들이 오직 말씀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나고 들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듣는자에게 임하는 영적인 파급효과가 바로 우리를 살리고 의의 길, 좁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말씀 듣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에 순종하셔서 귀머거리 독사같은 세상에서 늘 하나님과 소통하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길 원합니다.
(10/12) 요한복음 8:55 “하나님을 부인하는것이 거짓말”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 들린 것이라고 공격한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신앙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택하심을 얻어 구원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의 눈에 비쳐진 그들의 삶은 위선과 형식뿐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정죄하지 않고 모른척해 주었다면 그들도 예수님에 대하여 그런 흉칙한 말을 쏟아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모른척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른척하시려고 이 땅에 성육신하신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빛이십니다. 눈이 어두워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기 원하십니다.
자신이 이렇게 누명을 쓰고 가시돋힌 말폭을 당해도 개의치 않고 진리만을 비추셨습니다.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숨기고 가리는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내가 믿는 말씀을 최고로 여기며 그것을 알리고 전하는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신실한 성도인지는 결국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 알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예수님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믿는것을 자신있게 전하고 드러내는것도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협하는 것도 신앙이 아닙니다. 자신이 올바로 믿지 않는데도 모른척하는것은 죄입니다. 거짓말하는것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요.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정해 주실것입니다.
(10/13) 요한복음9:3 “하나님이 하시는 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그렇게 태어난것이 누구의 죄이냐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는 사람의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죄성이 담겨져있고 외적인 환경만 보고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인간의 치졸한 본성이 들어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누구의 죄도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기대하는것과 같지 않습니다. 인간은 불행스러울거 같은건 일단 무시하거나 회피하기 일수이지만 하나님은 다행한 일들만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불행처럼 생각하는 일이나 환경을 오히려 복이 되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평안하고 평탄할때보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아플때 그리고 외로울때 더 강하게 임할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을 가리키는것일까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 할수 없느니라’ 제자들은 ‘그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를 물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시길 원하십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빛은 그 어떤 불행과 아픔도 능히 치료하시는 빛입니다. 성도는 그 빛의 일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행스러운것을 피하고 무시할때 빛의 성도는 따뜻한 말과 행실로 그것을 감싸안아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어두워 보지 못하는 자에게 보게하는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되는데 그에게 굳이 진흙을 눈에 바르시는 행동을 하신 이유가 뭘까요? 우리도 말만하지말고 행동하고 움직이라는것입니다. 더 어두운 밤이 오기전에 우리를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길 바랍니다.
(10/15) 요한복음9:39 “눈을 떳으면 주를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실로암의 기적입니다. 바리새인들 눈에 가시와도 같았던 예수가 일으킨 기적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우연이나 거짓으로 탈바꿈시키려했고 무슨일을 해서라도 예수가 가짜요 신이 아님을 밝히려고 했었다. 급기야 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번이나 불러 이 사실을 주입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 맞서는 맹인이었던 사람의 반박을 들어보세요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거듭되는 협박과 심문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명백한 기적이며 그 일을 행하신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결국 맹인되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유대인 사회에서 쫒겨남을 당합니다.
이후 예수님이 그를 다시 찾아오셔서 그의 믿음이 곤고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육적인 눈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뜨게 되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구원의 믿음까지 얻게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마귀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 여기게 하려고 온갖 술수를 다 써보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비록 공동체에서 소외받고 내몰림을 당할지라도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이심이 절대 흔들리지 않는것. 그것이 영적인 눈을 뜬 성도입니다.
믿음에는 절대로 타협이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주를 믿고 본다면, 타협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로 뜨게 된 눈을 세상과 타협하여 스스로 맹인이 되려는 어리석음을 범치 맙시다.
(10/19) 요한복음10:27 “그리스도의 양된 증거”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얼마나 복된 소식이요, 이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 약속인가! 믿는 자를 절대로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을것이라는 말씀이 이 아침 우리에게 과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참목자로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자에게는 영생이라는 불멸의 약속이 주어졌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게임,영화, 이단등을 통해 ‘영생, 불멸’ 이라는 거룩하고 고귀한 단어들이 상당히 왜곡되는 바람에 이 단어들에 대한 시선이 시큰둥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너무나 중요한 진리입니다.
멸망하고 영생하지 않는 기독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주신것도 이 진리를 믿는자에게 각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시며 주신것을 믿는자들이 등한시하거나 삶의 뒷전으로 밀어낸다면 그 사람은 일생 일대의 큰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이 진리를 외면한 이유는 이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신앙으로는 결단코 영생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므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생의 삶, 불멸의 길은 최첨단화된 과학이나 최고조로 발달된 의학과 문명의 이익을 누릴때 얻어지는것이 아닙니다. 그 복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양의 소리를 듣고 양의 상태를 늘 체크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늘 목자의 음성에 귀기울일때 길을 잃어버리거나 짐승에 붙잡힐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내 귀에 목자의 음성이 들려야 양입니다. 혹시 잘 들리지 않는다면 양이 아니거나 양인데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것입니다. 목자는 항상 우리의 영과 교통하시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스피커를 끄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든든하고 선한 목자의 음성만 듣도록 순종의 안테나를 세우고 말씀 스피커의 볼륨을 올려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