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요한복음11:6 “기다리시는 하나님”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중병에 걸린 나사로의 형편을 들으시고도 서두르지 않고 이틀을 더 계시던곳에 머무르신 까닭이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진리이지만 이 말씀을 듣는 입장에서는 왠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원치않는 신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자신의 질병이 지속되는것을 통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을겁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들의 오빠 나사로가 죽은후에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이라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질병은 누구나 속히 치료받기만을 원하지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원하지는 않을거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것은 항상 결과를 보고 나서야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어떤 상태인지 그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아셨지만 기다리신것은 하나님이 창출하시는 최고의 영광의 때를 위함이었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을 위한것일뿐만 아니라 나사로 자신과 그것을 지켜보는 모든이들에게도 상상할수 없는 은혜의 역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에는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그 때를 기다릴줄 아는 사람에게는 더 깊고 성숙한 믿음의 선물이 주어질것입니다. 병든 나사로를 치료하시는 것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거 같습니까?
비교 불가한 차이가 보이지 않나요? 예수님은 나사로를 지극히 사랑하신것이 맞습니다. 누구보다 나사로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것에 힘들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지금껏 경험했던것과 비교할수 없는 최고의 은혜를 주시기위해 참고 또 참으신것이 그를 사랑하신 증거가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에도 지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수 있을것입니다. 하나님께 하루는 천날이며 천날이 하루와 같습니다. 시 공간을 초월하여 최고의 은혜를 주실것을 기대하며 원망없이 믿음으로 인내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도 가장 좋으신 분이며 또한 사랑이십니다.
(10/21) 요한복음11:25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인생이 영생을 얻는 방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없다는것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것은 같은 의미로서 ‘사는것’ 을 거듭 강조하신 말씀이며 두가지 모두 육적 생명이 아닌 영적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죽었지만 사는것도 영혼이고 영원히 죽지 않는것도 몸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그런데 이 현상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영혼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죽지 않는것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자나 같습니다.
하지만 ‘살아도 사는게 아니다’ 라는 말이 있듯이 영혼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것은
사는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지옥에는 ‘살려달라’ 는 말보다 ‘죽여달라’ 는 울부짖음이 더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지지 않는 고통이 바로 지옥의 형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 되신다고 하신것은 믿고 먼저 죽은 자나 부활때까지 믿으며 사는 사람이나 모두 예수님처럼 부활의 새 옷을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몸으로서 시 공간을 초월하는 몸을 얻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할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4)
요한이 전하는 너무나 소중한 메세지를 들어보십시요.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자만이 이것을 얻게 될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부활의 마인드를 가지고 오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세상의 어떤 시간도 부활의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할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10/22) 요한복음 11:40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무덤의 돌을 옮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자 마르다는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썩는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르다의 깊지 못한 믿음이 만든 말입니다. 그녀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기껏 인간의 오감 표준으로 측량하려는 어리석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믿는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 말이지만 ‘이것은 비상식적이야,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잖아, 어떻게 그런일이 가능해?’ 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하지만 비상식과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 소위 불가능한 것들이 전능자에 의해 초월 당할수 있음을 믿는것이 믿음입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피조물들이 창조주에게 순종하는것이야말로 상식중에 상식이며 그것이 그들 세계의 법칙인것입니다.
일정하게 움직이던 태양이나 달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멈처라’ 하면 그자리에 멈추어 서는것이 그들에게 제일의 법칙입니다. 병마야 물러가라, 귀신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시면 활개치던것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것이 그들의 순리입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때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님의 기도에 당신의 주권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는 말씀이 이제 이해되십니까?
연약한 인생이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에 불가능이 없다는것을 확신한다면 그 인생에게 비상식적인 일이 상식이 되는 은혜가 임할것입니다.
(10/26) 요한복음12:3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가룟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오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왜 마리아와 가룟유다의 생각이 달랐던 것일까요? 왜냐하면 가룟유다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의 눈에는 비이기적인 사람의 행동이 좋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재정을 맡아보았던 가룟유다로서는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을것이 아니라 돈관리를 하는 자신에게 그 향유를 맡겼어야 했다고 판단한것입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보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는 점입니다. 두사람의 생각에는 큰 갭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확실히 보셨고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신것은 마리아가 왜 자신에게 비싼 향유를 부었는지를 정확하게 아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룟유다의 제안도 옳아보였지만 그의 속마음을 보셨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와 가룟유다 모두 향기를 나타내었으나 마리아가 풍긴 향기는 온 집안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하도록했고 가룟유다의 향기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악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헌신하려는 마음은 아주 귀한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게 했던 가룟유다와 같은 모습은 정죄받기 쉽상입니다.
마리아의 향유가 비싸고 좋은것이라서 받으신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린 마리아의 진실한 믿음을 기쁘게 받아 주신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올바른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의 헌신은 어떤 향기를 풍기고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10/27) 요한복음 12:21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뱃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유대인의 명절에 예배를 위해 헬라에서 온 사람들이 빌립에게 요청한 질문은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이들은 예배의 목적과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수많은 예배자들이 있지만 그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예배의 목적이 예수를 만나는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떤이는 사람이, 어떤이는 찬양이, 어떤이는 봉사가, 어떤이는 강단이 그들의 예배 목적이거나 예배에 참석하는 이유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것들이 예배의 중심, 목적, 이유가 된다면 그 예배자는 가인처럼 실패한 예배를 드릴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헬라인들의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세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를 따르고 예수가 있는곳에 어디든 있는자가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과 목적이 될때 예배가 살아나고 예배자가 변화될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게 된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배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부활의 주체가 되신 예수를 뵈옵는것이 우리의 모든 예배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을 하든, 봉사를 하든, 말씀을 증거하든 그 목적은 절대적으로 예수여야 합니다. 그렇게 될때 모든 예배행위에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굳이 다투고 싸우는 원인이 뭘까요? 예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삶 가운데 불평과 절망이 일어나는 이유도 예수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삶에 구심점이 되도록 해보십시요. 예수때문에 보는것, 듣는것, 말하는것, 행동까지 정화가 될것입니다.
‘예수를 뵙기 원합니다.’ 오늘도 당신을 사랑하시는 그 이름을 사랑하며 섬기며 우리의 시선을 그 이름에 고정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귀하여 여기셔서 의로운 길로 인도하실것입니다.
(10/28) 요한복음12:47 “온전한 순종”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심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 계획이시라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는 자들을 찾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대상자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함부로 정죄를 해서도 안되고 스스로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다만 열매를 보고 그 나무의 정체를 볼 뿐입니다.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수도 있습니다. 양인줄 알았는데 염소였고 염소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양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땅에서의 사역은 철저한 순종 (Total obedience) 이셨습니다. 어떤 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신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심한 핍박이나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죄하려던 유대인들의 사악한 율법주의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에게는 죄를 짓지않는 길을 제시해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방식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밟아가야 합니다. 정죄나 심판의 일은 하나님의 영역이므로 맡겨드려야 하는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인 한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수 있도록 무던히 의의 삶을 보여주는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온전한 순종입니다. 오늘도 나의 말과 행동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리스도의 순종하시던 모습이 아름답게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10/29) 요한복음13:8 “날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법”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발을 씻기시는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흔쾌히 자신의 발을 내밀수 밖에 없었습니다. 항상 열정이 넘치는 베드로는 또 앞서가기 시작합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엉뚱하기 짝이없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원인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나보다 남을 나보다 낫게여기라는 말씀을 손수 실행하시며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두번째는 영적인 의미로 볼수있는데요 ‘목욕한자’ 는 그리스도를 믿어 속죄함을 받은 사람을 의미하므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구원함을 얻은자도 날마다 자범죄를 범하므로 그 죄를 회개하여 씻음받는 삶이 반드시 필요함을 말씀하신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회개가 없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깊어질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겸손히 고백하며 용서함을 얻을때 예수님과의 동행이 이어질뿐만 아니라 진실된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필 발을 씻겨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발은 유일하게 세상과 항상 접촉하는 지체이기때문입니다. 신자이지만 날마다 세상과 접촉하면서 더러워질수 있는 자신의 심령의 새척을 주님께 맡겨드리는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매일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우리가 발을 내밀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발을 내밀지 않으면 주님은 베드로에게 하신말을 똑같이 하실겁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11/2) 요한복음 14:1 “근심병의 주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앞으로 있어야할 몇가지 일을 알려주시자 제자들은 당황하며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근심의 본질인 믿음에 대하여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근심이 우리의것과 비슷한거 같습니다. 근심하는것이 무조건 사라지길 원하는 마음일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정말 우리가 안고있는 문제가 내 생각대로 깨끗히 정리되는것이 맞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우리는 내가 염려하는 그것이 깨끗히 해결되는것이 응답이라고 믿는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가 근심할때 기도하면 염려와 근심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근심은 마음이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근심할때 마음을 지켜주시겠다고 하신것입니다. 우리가 근심하며 흔들리다가도 다시 마음에 믿음이 생기면 담대해 지고 근심하던 문제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17:22)
하나님을 믿는것이 우리의 마음에 즐거움을 주어 마음의 근심병을 치료하는 약이되는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근심은 영육간에 뼈를 마르게 하며 번민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근심없는 존재로 창조 되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로 인하여 근심이라는 터널속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근심많은 이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근심하기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을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며 믿음이 근심을 늘 이기며 이 땅위에서 아버지의 집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맞습니다. 근심하지 마십시요. 근심의 반대는 근심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굳게 믿는것입니다.
(11/3) 요한복음14:16 “진리의 영이 있습니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에 근심에 빠졌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키는 말씀인데요. 왜 그를 가리켜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을까요?
보혜사는 상담자, 위로자, 대언자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상담하고 위로하고 대언하시지만 그 후에는 성령께서 오셔서 그 일을 대신해 주실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리의 영이므로 누구든지 그의 음성을 듣는자는 진리를 알고 믿고 따를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할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인 메시야도 십자가에 못박을 정도였는데 보이지도 않는 보혜사를 믿는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일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세상이 그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육적인것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소위 내가 가질수 있는것만 선호하는 세속적인 마인드로 인함입니다.
성령을 믿으면서도 그와의 상담을 거부하고, 그의 위로를 외면하고, 진리를 대언하시는 음성에 귀를 막고 있다면 그 사람도 세상에 속한사람과 같습니다. 육적인것으로 꽉 막혀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영적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으로 예배하는자가 하나님을 볼수 있듯이 성령과의 교통도 영으로 언제나 가능한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시고 보혜사로 오신 성령은 믿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며 언제나 진리의 길을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진리를 통해 육적인 자신을 변화시키고 개혁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자신의 모습을 진리의 말씀에 비춰보십시요. 당신의 삶을 보혜사에게 맡겨보십시요. 여전히 가시돋혀있고, 울퉁불퉁 거친 나의 자아를 보혜사 성령께 의탁하십시요.
진리의 영이 나의 삶을 어떻게 바로 잡아가시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11/5) 요한복음15:4 “포도나무와 그의 가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법칙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연결이 됩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기위해선 그에게서 나온 가지에서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원나무없이 가지가 열매를 맺을수가 없는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도 예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는건 불가능한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가 의미하는것은 포도나무가 존재하는 목적과 일치합니다. 포도나무는 꽃을 위한 나무가 아니라 열매를 위한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때 비로소 존재 가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이렇게 포도나무의 존재를 가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신것입니다.
그냥 맡기기만 하시는것이 아니라 원나무에서 가지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셔서 가지가 열매 맺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지가 해야할 역할은 그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일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붙어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까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신자의 삶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것은 그 사람의 배경이나 외모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을 믿고 지키는것이며 이것만이 포도나무가 공급하는 영적인 영양분이되는 것입니다. 가지 그 자체로는 보잘것 없는 막대기에 불과하고 불에 던져져도 무방할 뿐인데 그리스도는 친히 보잘것없는 가지들의 참포도나무가 되어주셔서 가지의 존재가 땔깜에서 열매맺는 존재로 격상된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지가 열매를 품고 있을때 가지라고 부르지 않고 비로소 포도나무라는 호칭으로 불러주지만 열매가 없는 가지를 볼때는 무슨 나무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그 믿는 증거 역시 열매입니다. 열매를 봐야 그 나무의 이름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우리의 존재가치와 목적 모든것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위하여 가지인 신자가 할수 있는것은 가만히 원나무에 붙어서 그가 주시는 영양분을 감사하게 받으며 열매를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위드(with) 그리스도만이 가지가 살 길입니다.
(11/9) 요한복음 16:21 “해산의 고통을 잊게하는것”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나는 여자가 되어보지 않아서 엄마들이 아이를 낳을때 받는 엄청난 고통에 대하여 아무리 말해줘도 온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것은 그런 고통을 경험했음에도 또다시 아이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를 출산할때 얻는 고통을 자신의 아이를 만나는 기쁨이 압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이를 출산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들만 가진 이중성을 똑똑히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어느새 환한 미소와 탄성을 만들어 내는것을 보면서 최고의 연기자도 흉내낼수 없는 엄마들의 아름다운 본성에 감탄합니다.
나는 이것이 모든 엄마들에게 주신 ‘망각의 은혜’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엄마들은 상상할 수없는 아픔과 고통이 온다는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자신의 몸에서 나오게될 어린 생명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죽음과 같은 고통의 시간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떠나가심은 설명할수없는 근심과 아픔이었지만 예수님이 떠나셔야지 영원한 기쁨의 소망이 그들에게 찾아오게 될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하루 하루 이세상에서 살아가는것이 근심되고 두려움이 몰려오지만 세상에 빠지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베푸시는 따스한 평강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은혜와도 같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되고 고난을 통하여 새생명과 새은혜를 보게 하십니다.
피할수없는 어려운시간이 찾아올지라도 성령께서 주실 은혜는 그 어려운 날들을 잊어 버리게 할 정도로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의 삶가운데 기도했던 야베스를 존귀하게 여기신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지켜주실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