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 요한복음 16:30 “찐 평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환난이라는 말에 선뜻 동의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무슨의미인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당한 환난을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서 결국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평안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점이며 세상이 줄수 없는 평안인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내 생각대로 내 자아가 원하는데로 일이 계획이 착착 진행이 되다가 결국 자신의 뜻대로 다 갖추어 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평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왔을때 그는 이미 세상적인 평안과 행복을 다 가진사람이었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을 찾아온것은 아무리 다 가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데도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근심이 있는거에요.
그게 뭐지요? ‘이렇게 사는것이 진짜 평안인가? ‘ 행복지수도 높고 종교생활도 문제없이 잘 하고 사는데… 이게 진짜가 아닌거 같았던 거에요.. 그래서 진짜를 찾고 싶어서 예수님께 나온거에요.
하지만, 부자청년은 세상적 평안과 행복이라는 사슬에 너무 강하게 묶여 있어서 결국 그 심령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이 부자청년이 예수님 말을 듣고 한번 순종했더라면 비록 당장은 예전처럼 누리며 살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해결되는 기쁨을 얻게되었을 거라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평안을 얻지 못한겁니다.
세상은 환난이 있으면 그것은 더이상 평안한 삶이 아니라고 정의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평안이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환난이 찾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와 땀을 흘리며 한걸음, 한걸음, 십자가를 지고 담대하게 나아가셨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신자가 누리는 진정한 평안은 이렇게 땀을 닦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할때 임한다는 것입니다.
참 어려워 보이지만 안심하세요. 예수님이 담대하라고 하시는것은 당신이 세상을 이기고 평안을 얻으신것처럼 누구든지 믿고 나아가는 자, 그 에게도 세상을 이기는 그 평안이 주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11/11) 요한복음17:1 “오직 하나님의 영광”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믿는 신자들의 입에서 쉬지않고 쏟아져 나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남발해도 무조건 다 받으실까요?
물론 무엇이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고백하는건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자신이 그 영광을 가로채면서도 주님께 영광,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낼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라는 뜻은 십자가를 담대하게지므로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것을 나타내도록 도와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절대로 꺼지지 않는 영광의 빛이시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누군가의 순종을 통하여서 그 영광이 반사되어 세상에 드러나고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십자가 지고 날마다 자기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면서도 여전히 땅의 영광, 세속적인 일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한다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것은 모두 거짓고백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과 본성의 유혹을 이기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힘과 용기를 얻어 십자가를 담대히 지는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위하여 나의 삶이 거친 세상을 믿음으로 이길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11/16) 요한복음18:20 “드러내 놓고 말해야 하는것”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오늘 예수님의 말씀중에 두 단어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드러내 놓고’ 와 ‘은밀하게’ 입니다.
우리가 흔히 무언가를 드러내 놓을때는 자신이 있거나 그것이 사실일때가 많지만 은밀하게 무언가를 하려고 할때는 거짓이거나 나쁜것일때가 많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말씀을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씀하셨다는것은 그것이 불변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문화와 세대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선진들은 생명에 위협을 받았을때에도 거침없이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 놓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셨다는것은 진리가 아닌것을 진리인것처럼 말씀하신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단을 전파하는 사람이나 악한 문화를 퍼뜨리는 사람은 드러내 놓고 하지 않고 뱀처럼 은밀하게 접근하고 꼬득이는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해보려고 왔을때 솔로몬은 거침없이 대답할수 있었고 그녀는 그의 지혜에 감탄을 합니다. 시바의 여왕은 그 지혜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궁금했고 솔로몬은 그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께 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솔로몬이 자신에게 있는 지혜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드러내 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드러내 놓고 말해야할지 그리고 혹시 은밀히 누군가의 흉을 보거나 헐뜯고 싶은 마음이 들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불은 밝히고 거짓은 성령의 불로 마음속에서 태워버려서 입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십시요.
(11/17) 요한복음18:38 “무엇이 진리냐?”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렇게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의 이름이 주일마다 불명예스럽게 외쳐지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까지 유명하게(?) 불려지게 될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진리는 불변하는 팩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을 주실 그 어떤 이름도 세상에 없다는것이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지키기보다 사람들의 민심에 밀려 거짓판결을 내려 진리를 땅에 묻었습니다.
수천년이 지났지만 그의 악하고 우유부단했던 판결은 그리스도인들의 뇌리에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으로 낙인찍혀 버렸습니다.
진리는 꺼지지않는 횃불과 같습니다. 모세가 보았던 타지않는 떨기나무와도 같습니다. 빌라도에 의해 숨겨지고 묻혀지는듯했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시면서 왜 그가 진리인지를 온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까? 진리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안에 거하십시요. 주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고통속에서 기쁨을, 곤고함속에서 평안을, 우울증에서 소망을 찾는 자유를 주실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보고도 진리를 알아보지 못했던 빌라도의 운명을 보십시요. 악은 진리앞에 분명히 드러나 그 댓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안에서 선을 구하십시요. 진리를 밝히는것이 바로 선입니다. 무엇이든지 예수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십시요. 진리가 당신을 자유케 할 것입니다.
(11/19) 요한복음19:21 “유대인의 왕”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에는 다른 강도들의 십자가에는 볼수 없는 패가 달려졌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 이라는 글귀가 쓰여있었습니다. 범죄자가 달리는 십자가에는 ‘살인범, 강간범,,,’ 이런 글귀가 있어야 정상인데도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 이라는 패가 달려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예수를 아무리 심문해도 죽일만한 죄를 찾지 못했지만 유대인들의 민심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치고 있었기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로서 책임지지 않기를 원하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야 말았는데요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이 어떤 죄목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유대의 왕격으로 애매히 되었다는 뜻으로 그 패를 십자가에 붙였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유대인의 왕’ 이라는 글을 히브리어 로마어 그리고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모든 이들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것을 사실상 공포한것입니다.
이를본 대제사장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이왕에 달려면 ‘자칭 유대인의 왕’ 이라고 쓰라고 부탁했지만 빌라도는 그들의 요청을 묵살해 버렸습니다. 빌라도가 왜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요?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것일까요?
성령님은 빌라도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헬라인들에게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사실을 죽음을 통해서라도 알리게 하셨을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굳게 하셔서 대제사장들의 청원까지 거절하도록 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사형판결을 내린 장본인임에도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임을 스스로 높이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을 볼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리고 사소한것하나 놓치지 않고 이루어지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절대로 죄인들을 통해 완성하시지 않고 오직 성삼위 하나님의 계획대로 철저하게 집행해 나가신것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과 은혜로 주어지는것임을 기억합시다. 택하신 당신의 양들이라면 불구덩이에서라도 건져내시는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안심하십시요.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평안을 찾으십시요. 천국은 믿는자의 것입니다.
(11/23)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
예수님이 이땅에서의 마지막 호흡을 뱉으시며 하신 말씀은 ‘ 다 이루었다’ 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것이 무엇이며 우리는 왜 그 마지막 한마디에 열광을 하는 것입니까? 그가 이루신것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구속사역의 마지막 퍼즐을 끼워 맞추어 주신것이며, 인류 구원을 위한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세상에 들어와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향해 갈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망이 마치 우리를 다스리는 왕처럼 우리 인생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행복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호화스럽게 살아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그림자처럼 우리 인생을 따라 다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각자 떠나는 시간이 다를뿐 누구나 이 사망이 왕노릇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사람은 이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당신의 보혈의 피를 십자가에서 모두 흘려주심으로 사망의 그늘 아래에서 아무런 소망없던 인생에게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기적” 이 일어난겁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드디어 왕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 의 의미는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고난이 끝나고 기쁨과 안식의 시간이 주님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의 시간이 찾아오고 고통과 아픔, 그리고 환난의 때가 오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런 무서운 고난을 당한 이유는 우리에게 슬픔을 주시려는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질때 고난이 찾아오겠지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 승리를 할수 있다는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누구의 고난보다 크고 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로해줄수 없다고 말하며 근심가운데 좌절하는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고난과 아픔을 쉽게 위로해주고 풀어줄수있는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과 같은 고난속에 있거나 그런 고난을 겪은 사람이 있으면 동질감을 느껴서 서로를 위로해주고 위로를 받는것을 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기지 못할 시험이나 넘지 못할 고난을 주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는 말씀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십자가만을 붙들고 나아갈때 고난은 물러가고 우리의 심령에 평안이 임할것입니다.
(11/24) 요한복음 20:18 “내가 주를 보았나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읽다가 궁금한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왜 부활의 소식을 온 천하에 알리지 않으셨을까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들어오셨을때처럼 많은 군중앞에 부활하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을까 하는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니 부활은 철저하게 그 증인들의 입술을 통해서 전해지고 또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부활의 첫번째 증인이 된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과 달리 아무런 욕심없이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부활의 신앙을 최초로 가진 사람이 되게하셨는데요 이 신앙을 얻은후 이 여인들의 삶에서 더이상 절망을 찾아볼수가 없다는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부활을 증거하며 살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 가운데 직접 몸으로 부딫히고 고통당하고 아픔을 경험해야 하는것이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신앙은 이 고난의 십자가를 소망과 기쁨으로 살며 지고 나갈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쁘지 않고 내 안에 소망이 없는데 무슨수로 부활의 증인이 됩니까?
그렇게 축처져 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제자들을 만나주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제자들도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예수님의 제자로서가 아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게 된것입니다. 그들은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순교하는 그날까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증인은 자신이 본것만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애 모든것을 보았고 그것을 믿고 그 일에 증인이 된 사람입니다. 부활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사는 증인입니다. 부활을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속에서도 소망의 빛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죽어도 사는데 아니 죽어야지 영원히 살수있는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논리일까요? 여러분 기독교인은 그런 논리가 적용이 안되는 존재입니다.
죽음앞에서도 불같은 고난 앞에서도 찬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부활의 능력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