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비둘기)
(12/09)
*요나는 사흘 밤낮을 어디에서 지냈습니까? (1:17)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하여 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밤낮을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
어렵고 해석하기도 쉽지않은 예언서들 가운데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는 한 줄기 빛(?)과 같다.
어린아이도 좋아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요나 선지자는 앗수르의 도시 니느웨에 가서 ‘회개’ 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그당시 이스라엘이 원수처럼 여기는 나라에 가서 사역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요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니느웨와 정반대 그리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다시스(스페인)로 가는 배에 올라타면서 요나와 하나님 사이의 밀당이 시작된다.
그냥 싫다고 하면 될텐데… 요나는 무슨 마음으로 다시스까지 가려고 했을까? 정말 요나는 자기가 그곳으로 가면 하나님이 계획을 포기하실줄 알았을까? 내 생각에는 요나가 그냥 그 일을 하기 싫다는 뜻을 온 몸으로 표출한거 같다. ‘싫어요, 싫다구요, 절대로 못한다구요. 이번일은 하나님이라도 저를 막을수 없을거에요!’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하는데 어떤 말씀은 순종하기가 죽기보다 싫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과연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꺽을 수 있을까? 창세 이래로 그런일이 없었던걸로 봐서 불가능하지싶다. 왜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의 뜻을 꺽고 우리에게 져 주시지 않으시는 걸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보다 언제나 옳으시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럴것이기 때문에 이 사실에는 이변이 일어나지는 않을거 같다. 그럼에도 요나는 그 이변을 만들려고 했었던 인물이라 조명을 받는듯하다. 과연 그의 시도는 성공했는가?
그의 계획은 완벽했을지 모르지만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배의 아래로 갔고, 바다 깊은 속으로, 그리고 심지어 물고기 뱃속아래에 까지 들어가 버렸다. 거기서 요나도 결국 뜻을 돌이키고 만다.
피할수 없다면 즐겨라고 한다. 하나님께 붙들린 신자의 삶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순종을 즐기면 된다. 아무리 싫어도 하나님이 맞다고 하시면 내 뜻을 접는게 옳다. 지금까지 틀린적이 없으시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이 틀리실일은 없을 것이다.
(12/10)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4:11)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12만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불평이 많았던 선지자 요나는 결국 니느웨성이 회개하는것을 보고 또다시 분통을 터트리면서 하나님께 불평을 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는것이 죽는것보다 싫다고 말하였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한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요나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된듯하다.
아무리 회개를 선포했으나 싦은건 싫은거다. 뭐 이런 생각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싫어도 나는 좋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좋아할때 나는 싫어! 하실수도 있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데 싫다고 하실때는 그것이 우리에게 결국 좋은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우리가 싫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좋다고 하시는 것은,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한마디 표현하자면 ‘한없는 사랑 Steadfast love’ 라고 말할수가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래서 비록 인간이 죄에 물들었지만, 다시 선한 삶으로 돌아오는것을 언제나 환영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악하게 행동했던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때 그들을 조건없이 받아 들이실수 있는 대장부 같으신 분이시다.
우리 인생은 요나와 같이 소인배같은 모습으로 살아갈때가 흔한거 같다. 속이 좁디 좁아 터져서 이해하지 못하는것도 많고 불만은 거의 요나급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한없는 사랑’ 을 보이신다는 것이 그저 감사하지 않은가! 힘들지만 하나님의 더 넓은 사랑과 마음을 닮아갈 수 있도록 대장부의 가슴을 주시길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