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Ezekiel)-Ezeki:강하게 하다 / El:하나님)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10/18)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어떤 태도로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까? (2: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바로 그 자손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하고 말하여라.”
에스겔 선지자는 남유다가 2차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려갈때 포함되어 70년 포로생활을 한 선지자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사역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리로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나라가 비참하게 무너지고 멸망한 시점에서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것은 오직 목숨을 건 회개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하셨다. 그래서 마음이 바위처럼 굳어버린 백성들을 상대로 사역할 에스겔에게 자신감을 부어주시려고 엄청난 환상을 먼저 보여주셨다.
이 네가지 환상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것들로서 힘든 사역을 감당해야하는 에스겔에게 큰 용기와 도전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보호할것이며, 하나님이 한시도 에스겔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며 지켜 주실것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예레미야때처럼 에스겔에게도 앞뒤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주셨다.
에스겔에게 필요한것은 이제 믿음의 담력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서 전하는 일만 남았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이 이와같은 용기를 주실것이다.
세상과 사람을 보면 연약하고 미약하고 실패할것처럼 보이지만, 천군,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을 의지할때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이제 가릴때가 아닙니다. 신자들의 사명을 뒤로 미룰 시간이 없습니다. 만나는 자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하는것이 우리들의 소명입니다.
(10/19)
*악인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각 누구에게 있습니까? (3:18-19)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할 때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쳐 주지 않거나, 그 악인에게 말로 타일러서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 생명이 구원 받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악인을 개우쳐 주었는데도,그 악인이 그의 악한 행실과 그릇된 길을 버리고 돌아서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악행 때문에 죽을 것이다.”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그것을 혼자만 가지려는것은 최상의 이기심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본질은 복음을 사는것이며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선지자를 잠시동안 벙어리로 지내도록 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전해지기 전에는 아무말도 선포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였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영혼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다. 파수꾼의 임무는 주의를 살피는 일과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신자들도 복음의 파수꾼들이다. 세상을 항상 영적인 눈으로 지켜볼수 있어야 하며 그 세상을 향하여 말을 해야 할때가 오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고 선포할수 있어야 한다.
왕의 명령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느낌을 전한다면 나라는 혼란에 빠질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모른다면 자칫 위험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말해야할때와 말을 말아야 할때를 잘 구별할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얻어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것만큼 위험 천만한 일이 있겠나?
복음의 파수꾼의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명에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말씀을 어두운 세상에 퍼나르는 자가 되어 어둠을 밝혀 영적으로 무지한 생명들이 생명의 길을 찾도록 하자.
(10/20)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6:10)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겠다고 공연히 말한 것이 아님도 알게 될 것이다.”
6장에서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구절이 네번이나 나온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마다 다른 포인트가 있다는것을 알수있다. 어떤이는 평범한 삶속에서 자연스럽게 주님을 만나지만, 어떤 사람은 극심한 고난속에서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이는
죄로 인하여 징계를 당한후에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획은 여러가지 방편을 통하여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하려는 것이다.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깊이 빠지게 되자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은 대개 두 가지 종류로 임하는것을 볼 수가 있는데, 첫째는 여러가지 환경(사람,질병, 사고, 재해,,,)을 통해 삶을 고달프게 하신다. 두번째는 백성들이 마음대로 죄를 짓도록 놔두시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더 무서울까? 당장은 첫째가 힘들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두번째 방법이 훨씬 두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대개 고난을 당하면 급하게 하나님을 찾는 예가 많이 있다. 힘드니까, 괴로우니까 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관심을 끊어버리시면 대개 그것을 당하는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며 그냥 살아간다. 그러다가, 스스로 깜짝 놀라는 때가 오는데 자신의 삶에서 믿는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발견하면 그것이 은혜임)
믿는 흔적이 없다는 뜻은 쉽게 자기 하고싶은데로 그냥 사는 삶을 의미한다. 죄악의 본성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간섭에서 놓이게 될때 어떤 일들을 벌일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갈때까지 갈 수 있는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것을 알게되는 때가 살아 있을때면 그나마 다행이고, 만약 죽은 후에 깨닫게 된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연결이 되어 있는지 항상 확인하며 살아야 한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하고 있는지, 소위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지를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진정한 회개는 한숨이나 한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앞에 올바로 다시 서는 것이다.
(10/21)
*이스라엘 장로들은 섬기는 우상의 방에서 무엇을 외치고 있습니까? (8:12)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자기가 섬기는 우상의 방에서, 그 컴컴한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보았느냐?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있지 않으시며, 주님께서 이 나라를 버리셨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왜 예루살렘이 더이상 축복의 장소가 아니라 저주받아 멸망할 장소가 될것인지 그 증거들을 보여 주셨다. 예루살렘의 타락은 놀랍게도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볼수가 있다.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할 거룩한 성전에서 온갖 우상을 그려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숭배하도록 하였다.
제사장, 장로들이 성전에서 해괴망칙한 짓을 한것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재물을 모으려는 욕심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더이상 우리를 돌보시지 않기때문에 이제 다른 신을 섬겨서 예루살렘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백성들은 별 거리낌없이 열심히 새로운 신을 섬겼다.
우상숭배의 목적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물질을 위한것이다. 지도자도 백성들도 모두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행위가 주는 결말을 미리 예고하셨다.
“내가 진노하는 날에 ,은과 금이 그들을 건져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던 아름다운 보석으로, 역겹고도 보기 싫은 우상들을 만들었으므로, 내가 보석을 오물이 되게 하겠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으로 삶의 평안을 얻으려고 하지만, 돈을 쫒는 자는 돈으로 망할것이요, 검을 든자는 검으로 쓰러질것이다. 신자들은 아굴의 기도(잠언30:7-9)에서 처럼 ‘너무 부하게도 너무 가난하게도 마옵소서’ 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너무 가난하면 없어서 주를 떠나고, 너무 부유하면 그거 지켜려다 주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만큼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자가 평안함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날에
물질을 쫒았던 자와 주님의 평안을 따랐던 자들의 극명한 대조를 보게 될것이다.
거룩을 빙자한 탐욕스러운 물질숭배가 교회를 망치고 신앙도 무너뜨릴 수 있다. 교회가 교회되고 성도가 성도되도록 하나님께 회개하며 모두 올바른 길을 갈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10/22)
*주님의 영광은 어디로 이동합니까? (10:18-19)
“주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로 가서 머물렀다. 그룹들이 ‘내가 보는 데서 날개를 펴고 땅에서 떠올라 가는데, 그들이 떠날 때에,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 “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려는 너무나도 위태한 광경을 보게된다. 하나님이 떠나시는것은 이스라엘에도 성전에도 아무런 희망이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은 허공만 치는 기도소리와 공허한 노래만 남을뿐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보다 성전을 더 존중시한것이었다. 하나님이 계시든 말든 그것보다 성전자체를 섬긴거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성전은 또 하나의 우상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남유다를 심판하시는데 놀랍게도 성전으로부터 심판이 시작될것이라고 하셨다.
성전, 즉 교회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주목적이다. 친교, 구제,교육과 같은 내용들이 절대로 예배를 대신할 수 없다. 예배가 등한시되고 뒷전이 되는 교회와 성도의삶은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공허한 모임과 삶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디서나 예배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기며 예배에 소홀하지 않는 곳이나 사람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여 주시고, 교통하시고, 간섭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얻는 스위치와 같다. 오늘 당신의 스위치는 켜져 있습니까? 혹시 꺼진 채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제 그 예배의 스위치를 켜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도록 간절히 예배하시길 바랍니다. 다윗때처럼 예배가 회복되어야 교회가 살고 삶 또한 주의 영광으로 빛이 납니다.
(10/23)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영을 넣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은 어떻게 변합니까? (11:19-20)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전도서 기자는 모든 범사에 다 때가 있다고 하였다. 아플때가 있으면 나을때가 있고, 죽을때가 있으면 살때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때를 아시고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범죄한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비록 포로로 끌려가있지만 그곳 성소에 잠시 거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곳에서 영원히 계시는것이 아니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하신다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데 한가지 조건을 제시 하셨다.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려 버릴지라”
그들이 죄악을 만드는 모든것들을 버릴때 하나님은 그들을 새롭게 하실것이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가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갈수 있는 정확한 루트이며 방법이다. 먼저 우리가 죄짓는것에서 떠나야한다.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의 우상숭배는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예전에 의지하던 것들을 버릴때, 하나님이 우리의 돌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새 마음을 주신다. 이세상은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내가 있는곳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만약 그곳이 내가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모실수도 없는 곳이라면 절대로 안전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곳만이 이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10/24)
*예언자들이 책망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3:3)
“내가 보여 준 환상을 보지도 못하고 저희들의 생각을 따라서 예언하는, 어리석은 예언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때 가장 무서운 책망을 받는 존재는 거짓 선지자, 예언자들일 것이다.
이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거짓이 있고 보이지 않는 거짓이 있다. 눈에 보이는 거짓을 일삼는 자들은 무당이나 점괘를 보며 하나님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우상으로 섬기는 거짓이다.
보이지 않는 거짓을 일삼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고 알려 주시지도 않은 것들인데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며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것은 그런 거짓을 듣고도 분별하지 못하여 미혹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선처를 베풀지 않으신다. 미혹한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심판에서 제외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불행하게도 눈에 보이는 거짓도 분별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 믿으면서도 점쟁이를 찾아가고 점을 치는 곳을 찾는 신자들도 적지 않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해바라기가 태양만 하루종일 쳐다보듯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만 의지하고 따르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예배, 우리의 삶이 거짓된 것에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진짜이신 하나님만을 갈급한 마음으로 찾기를 원합니다.
(10/25)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을 무엇에 비유하십니까? (15:1-6)
“그 포도나무가 온전할 때에도 무슨 물건을 만드는 데 쓰일 수 없었거늘, 하물며 그것이 불에 타고 그을었으니, 무슨 쓸모가 더 있겠느냐?”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하여 아주 약한 비주얼을 가지고 있다. 넝쿨도 징그럽게 생겼고, 줄기도 가늘어서 어디에 쓸데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 보잘것 없는 비주얼을 가진 포도나무가 귀하게 쓰임을 받는것은 기가막힌 열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수 있다고 하셨지 않은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것도 기억하는가? 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불에 탄 이유는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의 열매가 없으니 더이상 쓸모가 없어진 포도나무같은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천국은 절대로 그룹으로 갈수가 없다. 오로지 개인의 믿음으로만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부모의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자녀가 따라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이 천국의 룰이며 구원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신앙고백은 참으로 중요하다. 진실한 고백만이 신실한 삶으로 이어질수 있다.
오늘 나는 열매를 위하여 사는가? 혹시 열매는 관심없는 비주얼에만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섬겨야 할때이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라는 포도나무를 심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가지된 우리가 열심히 의의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날마다 주님께 영양분을 공급받기를 소망합니다.
(10/26)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태생을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16:3)
“너의 고향, 네가 태어난 땅은 가나안이고,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다.”
16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미천하게 시작된 나라이었는지를 상징적인 비유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본래 거룩한 백성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형성하기전까지 애굽에서 얼마나 비천하고 모욕을 당했는가? 마치 갓난 아이가 출생했으나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던 형편과 같았다.
이스라엘 민족 자체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을 아무런 요건을 갖춘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민족을 이루고 수많은 이방나라들이 넘볼수 없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두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를 목욕을 시켜서 네 몸에 묻은 피를 씻어 내고,기름을 발라 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고 하나님이 부어주신 많은 유익과 부를 마치 자신들이 이룬것인냥 스스로 자랑했고 그것을 통해 교만하여 세상의 쾌락을 쫒는데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패역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된것이다.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이 것이 되도다.”
오늘 말씀은 왠지 위기 가운데 처한 미국이나 한국을 보는거 같다. 전세계에서 교회가 제일 많고 믿는자의 숫자도 많고 선교사도 제일 많이 파송하는 나라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심각하게 부패되어져 가는 상황을 막을길이 없다. 그 부패의 중심에 교회들이 있고, 목회자들이 서 있다.
기독교인들이 타락하니 신본주의는 급격히 인본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린지 오래고 교회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있다. 오늘 말씀처럼 나라가 부강해지고 교회들이 부유해지자 교만의 선봉이 되어 은혜를 잊어버렸고 마치 자신들이 스스로 이루어낸 쾌거임을 자찬하고 있다.
더 늦기전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징계를 당해서라도 현실을 깨닫는것만이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길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지 않도록 교회마다 성도마다 성결케 되어 새로운 화평과 은혜가 임하길 쉬지않고 기도합시다.
(10/27)
*본문에서 알 수 있는 새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16:62-63)
“이렇게 내가 직접 너와 언약을 세우면, 그 때에야 비로소 너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네가 저지른 모든 악한 일을 용서받은 다음에, 네가 지난 일들을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도 열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이유는 그 약속을 이루셔서 그가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그들의 하나님 이심을 알게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통해 100세때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같은 아들 이삭을 주신것이며, 그를 통해 믿음의 후손들을 하늘의 별과같이 바다의 모래처럼 주신것이다.
인생은 약속을 쉽사리 어기기도, 버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과 차원이 다르시는 분(Promise keeper )이시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은 대부분 서로의 유익을 위한것이 많지만,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며 그것또한 오직 우리 인생을 위한것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을 주셨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언약을 이루어 주셨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천부가 되어주시며 영원히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믿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모두 십자가밑에 내려놓을때 언약 성취의 고귀한 수혜자가 될수 있다.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는 그 죄과를 묻지 않으실뿐만 아니라 온전히 씻으셔서 그 죄가 자신의 구원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
새 언약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늘도 죄의 짐을 내려놓고 화평한 삶을 영위합시다.
(10/28)
*이스라엘 백성에게 멸망이 선포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7:19-20)
“그는 나의 이름을 두고 한 맹세를 업신여겼으며, 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깨뜨렸으므로, 내가 벌을 주어서, 그 죄를 그의 머리로 돌리겠다. 내가 그물을 쳐서 그를 망으로 옭아 바빌로니아로 끌고 가서, 거기에서 내가 나를 반역한 그의 반역을 심판하겠다.”
이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것이 너무나 많다. 먼저는 모든 자연 만물이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라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옷을 바꿔 입으며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들을 뽐내느라고 바쁘다. 잠깐만 하던일을 멈추고 바뀌는 계절을 바라보면 창조의 신비가 확연히 드러남을 볼수가 있다.
너무나 많은 증거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 글을 읽으면 읽어볼수록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약속들을 들여다 볼수가 있다.
하나님은 한번 맺으신 약속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정확히 이행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들은 그 약속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당장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는거 같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언약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분명히 성취하실것이다.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곁을 떠난 자녀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찾고 계신다. 방황이 길어지면 점점 창조주를 잊어버리게 될것이다. 그리고 그 망각의 댓가는 누구도 막아줄수 없다.
창조주와의 약속을 태연하게 따르는 자연의 순종을 바라보며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봄이 어떨까?
(10/29)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의 어떤 결과를 기뻐하십니까? (18:21-23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서, 나의 율례를 다 지키고 법의 의를 실천하면,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지은 모든 죄악을, 내가 다시는 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악인이 죽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모든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내가 참으로 기뻐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사랑은 의인이 의롭게 살때뿐만 아니라 죄인이 죄로부터 돌이켜 의로운 삶을 살아갈때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타나게 된다. 믿음으로 행하다가 믿음에 실족하는 일이 일어날수가 있다. 하지만 그때에도 믿음으로 회개의 자리에 나올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좋지않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부모가 권력이 있는 사람이면 자녀가 올바르지 않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덮어버리거나 없애버려서 자녀가 부모의 권력을 이어받도록 만든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어서 이젠 그다지 당황스럽지도 않을 정도이다.
하나님은 비록 의인의 아들이라도 계명을 범하면 죽을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의 부모가 의인이라고 해서 그가 삶의 혜택을 거쳐 누리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녀가 의로운 부모의 덕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하지만 그 악한 자녀가 부모의 권유와 기도로 변화되어 하나님께 회개의 삶을 살게되면 그 아들의 죄악은 벌하시겠지만 용서하시고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 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는 무조건적으로 죄사함을 주실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영생으로 인도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악한 자가 의로운 행실때문에 새롭게 하시는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온것으로 인하여 새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을 잊어 버리고 살지 않도록 날마다 회개의 삶을 찾는자는 결단코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을 것이다.
(10/30)
*하나님은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길 원하십니까? (20:41)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너희를 데리고 나오며, 너희가 흩어져 살던 그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 올 때에, 나는 아름다운 향기로 너희를 기쁘게 맞이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를 통하여 나의 거룩함을 드러낼 것이다.”
바벨론 포로가 끌려간 유다백성들이 다시 돌아올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며, 받지 않으셨던 그들이 제물을 받으실 것을 예언하고있다. 신자들이 회개를 하는 경우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죄에 대하여 징계를 받았을때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회개를 하게 된다.
마치 철부지 아들이 그렇게 말을 듣지 않고 살다가 어느날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고 지난날의 잘못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경우가 있는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하는 말이 ‘철이 들었다’ 라는 표현을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철이 드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당연시하며 살아오다가 문득 그 은혜가 얼마나 값진 사랑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되면서 지난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들을 회개하기도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잘못을 그때마다 모두 징계를 내리신다면, 그 징계로 인하여 인류는 이미 멸망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고 말씀하셨다.
무서운 징계를 통해 그제서야 회개하기보다 더러운 죄인임에도 불쌍히 여기셔서 참아주시고 공급하시는 그 은혜를 깨달아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가장 기뻐하시는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이솝우화에서 한 남자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을 하는 구름과 해의 모습에서처럼
하나님은 때로는 강한 구름으로 때로는 뜨거운 태양과 같은 사랑으로 나타나신다.
강한바람에는 옷을 더 강하게 붙잡았으나, 따뜻한 열기에는 스스로 옷을 벗는것처럼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수록 세상의 옷을 벗는 신자가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생이리라.
(10/31)
*멸망 중에 하나님이 찾고자 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2:30)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 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마치 쓸모없는 쇠 찌꺼기를 뜨거운 불에 넣는것처럼 심판의 용광로 안에 넣으셨다. 죄로 인하여 변질된 그들의 모습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얻지 못함을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불을 더 일으키는 불 쏘시게로 쓰임 받아야지 필요없는 패기 처분되는 쇠 찌꺼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판단하신 이유는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멸망을 지키려고 나서는 사람을 찾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고 살았다.
지도자들은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부정한 삶인지 가르치지 않아 직무유기를 나타내었다.
백성들이 안식일을 마음대로 범해도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마음껏 하나님을 모독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지도자들은 먹이를 뜯는 늑대처럼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양들을 돌볼 생각을 아예 버려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서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영적 지도자들이 각성하고 회개할 내용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의 죄를 자신의 것인냥 아파하고 이 땅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창조주를 인식하도록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깨닫도록 해야 한다.
이 땅의 위기 가운데서도 그렇게 애원하며 탄식하며 부르짖는 영혼을 통해 진노를 거두실 것이다.
진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11/1)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각각 무엇을 가리킵니까? (23:4)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이 심판받기에 마땅한 백성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각각 ‘오홀라, 오홀리바’ 라는 이름을 가진 음행하는 자매로 비유하셨다.
이 자매들의 공통적인 죄악은 남자들과 무분별한 관계를 맺으며 음행을 저지른 것인데, 이들은 특히 세상에서 강하고 멋있고 매력적인 남자들에게 접근하여 그들과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는 바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각각 그 당시 가장 강력했던 앗수르, 애굽, 바벨론과 같은 대세적인 나라들을 의지한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강한 나라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으며 무엇보다 이방 나라의 우상들을 열심히 섬겼는데 자녀를 불태워 우상에게 받치는 일을 성전에 들어와서 서슴치않게 행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배교와 우상숭배는 결국 하나님의 불심판이 임할때까지 계속되는것을 볼수가 있다.
마귀가 주는 죄악 가운데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멋진것들을 탐닉하려는 마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과 같은 것이다. 그 맛에 빠지면 나이에 상관없이 헤어나오질 못한다. 문제는 그런 행위를 자신의 신앙생활과 연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비밀리에 이중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에 찔림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에서 징계가 흐르고 있는데도 세상의 쾌락을 즐기느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홀라, 오홀리바 자매의 행음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은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성경은 정확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 때 살았던 백성들과 이시대의 교회들과 신자들의 모습이 별 차이가 없다는것을…
보수적인 교단이라고 지칭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배교가 시작된지 오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거짓 목사들을 강단에 세우며 양무리들을 행음하는 삶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점점 채워져 가고 있음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져 오는거 같다.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열심히 돌아가야 한다. 진실한 믿음이 무엇인지 잘 구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