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을 시작하며…
역대상은 에스라를 저자로 보고 있으며 내용은 전반적으로 다윗의 생애와 사역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1장에서10장까지는 거의 계보가 진행되기때문에 독자들은 이름의 터널을 지나야하는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담부터 시작되는 계보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주지할수 있을뿐만 아니라 신앙의 연결고리를 발견할수 있다. 역대기 이후론 이런 이름들을 또 볼 기회가 없으니 어려워도 천천히 이름들과 그들의 삶을 머리속에 담아보는것도 좋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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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벨이 한 아들의 이름을 ‘벨렉’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1:19)
-그 때에 세계 인종이 나뉘었다(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표현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까지의 신앙의 계보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절인데 ‘에벨’ 의 이름이 ‘건너가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그는 유브라데 강을 건너온 사람으로서 훗날 아브라함의 조상이되기 때문이다. ‘그 때에 세상이 나뉘어졌다’ 는 의미는 인생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자와 그렇지 않은자로 나뉘어지는것으로 볼수가 있다.
노아홍수이후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 가운데 하나님은 셈 계열을 통해 구속사를 이어가시는데 그의 4대후손인 에벨의 이름을 성경은 수차례 거론하는데 특히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삽입하시며 에벨의 신앙의 삶을 조명해 주고 계신것이다. 에벨로부터 시작된 경건의 물줄기가 5대를 지난후에 아브라함에 이르게 되는것을 보면서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에벨=건너온 자’ 믿음의 여정은 세상적인 모습에서 영적인 모습으로 건너오는것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020 년에는 세상에 머물러 있거나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삶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건너오는 은혜의 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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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어느 지파에 속합니까? (2:3-15)
-다윗은 유다지파에 속한다. 역대상의 저자는 다른 족보는 간단하게 정리해 놓았으나 유다자손의 족보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다자손에서 메시야가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민족들의 족보를 기록한 목적이 구속사적이고 영적인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되는 유다자손은 과연 어떤 자손들이었길래 이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된것일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 메시야가 오시는 지파는 무언가 특출나고 다른 지파나 자손들보다는 아주 월등한 집안일거라고 생각할수가 있지만 족보를 통해 드러난 실체는 솔직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먼저 유다자손의 조상격인 유다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야곱의 장남도 아니고 네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었고 유다는 세아들이 있었으나 모두다 하나님보시기에 악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속이고 그와 동침을 하여 낳은 아들이 베레스인데 유다자손의 계보는 놀랍게도 베레스를 통하여 이어져 다윗에게까지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유다 족속에서 나시게 된것은 그 족속이 거룩하고 경건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하여 된일이다.
하나님이 그 유다지파를 지목하셔서 그 자손에서 다윗이 나왔고 메시야가 오셨다. 메시야가 어느 지파에 오신것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것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메시야는 유다지파를 통해 오셨지만,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것은 하나님의 족보에 오른다는 의미가 아닌가? 금수저니 흙수저니 말들이 많은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야 말로 금수저가운데 비교할수없는 황금수저가 아닌가! 그러니 믿으면서도 환경탓하지 말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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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누구의 족보에 대해 말합니까? (3장)
-유다자손인 다윗의 족보이다. 정확히 다윗으로부터 남유다의 19왕들(아달랴는다윗후손이 아니므로 제외) 과 바벨론 포로후의 스룹바벨까지의 족보이다. 다윗의 족보는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절대로 후손이 끊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끊어져 버리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다윗의 후손의 계보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듯하다. 끊어질듯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무너지는듯하다가 다시 회복을 반복한다. 가장 큰 위기는 단연 7대여왕에 등극한 아달랴때이다. 그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아합의 딸이었다. 그는 남유다 왕족으로 시집을 와서 다윗의 계보를 파괴하려고 그의 후손들을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으나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수 없었다. 그외에도 악한 왕들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나라가 결국 멸망당하는 큰 위기를 당했으나 바벨론 포로귀환이후에 스룹바벨(무너진 성전을 재건한 자로서 다윗의 후손)로 다시 명맥이 이어지는 기막힌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약속을 파괴하려는 마귀가 사람과 우상들을 통해 강력히 나타났으나 하나님의 예언은 더 드라마틱하게 성취됨을 본다. 마치 마귀가 하나님이 예언성취의 조연처럼 등장해서 주연이 되시는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버렸다. 마귀로서는 무척 속이 상할 일일수 밖에 없겠으나 하나님의 언약을 막아설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대하는 성도의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한다. 말씀대로 이행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단연코 응답하실뿐만 아니라 말씀의 성취를 이루어 주심을 기대하시라! 마귀의 공격이 거세어 질수록 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응답은 더욱 어메징하게 전개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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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처음부터 독자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족보와 이름들로 인하여 약간은 성경읽기와 묵상이 시들해지는듯한데 오늘 4장에와서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끄는 한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야베스라는 사람이다.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귀에 익숙한 이름일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유다 자손이지만 앞장에서 나오는 다윗, 솔로몬같은 왕족계보에 등장하지 못하고 유다자손이지만 다윗, 솔로몬에 비해서 천대시하는 계보에 이름이 등장한다. 그래도 성경에 이름이 올라가는것만도 어딘가?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어찌보면 별 볼일 없을거 같은 계보, 그것도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명단가
운데 야베스라는 인물을 부각시키고 있다. 왜 그는 이름의 나열을 중단하면서 야베스란 인물을 드러내고 있을까? 왜냐하면 그의 특이한 탄생의 비밀때문이 아닐까 싶다. 야베스는 그의 어머니가 삶의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서 낳은 아들이라고 기록하면서 그의 삶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밝혀준다. 야베스의 이름이 ‘수고’ 와 ‘고통’ 이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형편을 자신있게 하나님께 아뢰었다.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지경을 넓혀 주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짧은 기도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저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을것이다. 그 기도의 제목들이 모두 응답받기를 소망하는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야베스의 기도처럼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야베스가 가진 영성이다.
그는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이다’ 라는 표현을 보라. 그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무엇이든지 부족하고 가치없는 존재로 태어나고 살았으나 형제들보다 더 존귀한 자로 표현된 이유가 있는데 야베스는 하나님만은 자신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으실것을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기도에 확신이 팍팍 심겨져 있는것이다. 야베스처럼 당당하게 기도하자. 큰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하라. 주가 허락하시리라.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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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 반쪽 지파의 후손이 그 땅의 우상을 섬긴 결과는? (5:25-26)
-그들이 거주하던 곳에서 쫒겨나는 설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므낫세 반쪽 지파를 포함하여 르우벤과 갓 자손은 유일하게 요단강 동쪽에서 정착을 했던 이스라엘 지파였다. 다른 지파들이 요단강 서쪽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하였으나 이들은 요단강을 건너기전에 봐두었던 그 땅에 정착하기로 약속하고 가나안땅 정복전쟁을 했었던 지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세지파반은 요단강 동쪽 땅에 와서 똘똘 뭉쳐 정복전쟁을 하여 승리할수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부르짖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연합되었던 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상숭배를 위해 연합 해 버렸다.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연합하는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지만 무엇에 연합하고 마음을 합칠것인지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것이다.
동쪽 지파들이 왜 우상숭배를 위해 뭉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요단 서쪽과 눈에서 멀어지고 마음에서도 멀어졌기 때문이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곳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서서히 멀어져 갔다는 의미이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은 절기때마다 모이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계속 영위했으나 동쪽으로 자기 살길 찾아 떠난 이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 중심의 삶으로 변질되는 바람에 그토록 원하던 곳에서 억지로 쫒겨남을 당하게 된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편에 서있는 자들을 도우시고 당신께 믿음으로 부르짖는 야베스와 같은 기도를 들으신다. 내 자아가 엉뚱한곳에 연합되지 않도록 늘 하나님께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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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사람(자손)이 맡은 일은 무엇입니까? (6:48)
-성막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맡아서 봉사하였다. 역대상 전반부에 지겹도록 등장하는 이름들을 읽으면서 왜 중요한 성경에 족보와 이름들이 있어야 할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름들이 주는 유익이 많다. 특히 성경의 내용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밝혀주고 있고 각 이름들 중에는 의로운 이름들 혹은 불명예스러운 이름들도 기록함으로 독자들에게 경각심을 준다.
6장에서는 레위의 자손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눈에 띠는 이름들이 등장하고있어 반갑다. 먼저, 아론, 모세, 그리고 미리암이다.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들의 부모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본문은(물론 출애굽기에도 나옴) 이들의 아버지가 ‘아므람’ 이라는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므람의 아내는 요게벳(출애굽기6장)인데 이 부부가 이스라엘 역사에 끼친 영향은 놀랍고 귀하다는것은 그들이 기적적으로 살려낸 모세가 훗날 이뤄낸 이야기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놓쳐서는 안될 귀중한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다윗이 임명한 성전 찬양대의 직무를 맡은 자들이다. 그 중에서 헤만과 그의 형제 아삽, 그리고 에단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찬양만 부른것이 아니라 시편을 기록한 사람들로서 헤만은 시편 88편, 에단은 89편, 그리고 아삽은50, 78-83편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기뻐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레위 자손이 맡은 일은 솔직히 허드렛일이 다수였다. 하지만 이들이 충성되이 그 사명을 감당했을때 그들의 자손가운데 이렇게 귀한 인물들이 배출됨을 본다.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나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는것이 얼마나 귀한 특권인지를 감사하게 되었다. 영적 레위자손인 성도들도 하나님을 섬기는데 충성할때 하나님은 분명히 아므람, 요게벳, 헤만, 아삽, 에단같은 인물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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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지시한 아론 자손의 역할은 무엇인가? (6:49)
-번제단과 분향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과 지성소의 모든일,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치적인 일은 유다자손들(다윗자손) 의 임무였다면 제사적이고 영적인 일은 레위지파의 몫이었다. 신본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의 성향을 생각해본다면 영적인 면이 정치적인면을 리드해 나아갔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왕이라 할지라도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함부로 개입할 수 없었고, 왕을 기름부을때에도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서 기름을 붓도록 하셨다.
그러나 사울같은 왕은 제사장의 임무를 왕의 권력을 앞세워 맡으려다가 큰 징계를 받기도 했으며 모든 악한 왕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죄악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적인 권위를 무시하고 인간적인 권위를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제사장들이 더 타락해서 왕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사례도 많이 있는것이 사실이다. 중세 로마시대에 교황권이 왕권위에 있으므로 발생하는 죄악상을 기억해야 한다.
이시대에도 정치와 종교는 끝없이 분쟁하고 서로의 권위를 앞세우고 서로들 위에 군림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기독교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의 일면에 나서는것이 올바른 일인가? 과연 그들이 정치판의 한자리를 차지한다고 얼마나 영적인 영향력을 끼칠수 있을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기독교 리더들은 사람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임무를 받은것이다. 위로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옆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며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맡은 일군들이다.
제사장들이나 레위자손은 세상의 분깃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달라지려고 하는가?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라면서 가이사의 것을 탐하려고 하는걸까? 이것이야 말로 신성모독이며 직무유기가 아닐까?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면서 왜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나서려고 할까? 다른 속셈이 있는건 아닌가? 초대교회에 구제문제, 즉 사회문제로 떠들썩할때 사도들이 그 일을 전담할 일군을 세우고 자신들은 거기서 손을떼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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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사갈 종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7:5)
-용감한 군인들이 많았으며 그 숫자는 무려 87,000명에 달했다 . 잇사갈의 자손들은 앞서 말한데로 용감한 군인들이 많았고 특히 잇사갈의 아들 중에는 사사도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돌라’ 였다. 이처럼 잇사갈 지파에 사사도 나오고 용감한 군인들이 많이 배출된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예언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잇사갈의 아버지 야곱을 통해서 예언하신바가 있었는데 그 때 잇사갈에게 하신 예언이 재밌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예언의 내용처럼 잇사갈의 자손들은 지도자에게 순종하며 건장한 나귀처럼 두려움이 없는 용사들이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모습이다. 쟁기를 맨 나귀는 주인의 허락없이는 절대로 한눈 팔지 않고 앞만 보고 밭을 갈게 되어있다. 새해에 결심한 마음가짐이 벌써 약해지고 게을러 지고 있지는 않은가? 잇사갈 종족은 용맹했기 때문에 항상 선두에 섰고 근면을 통해서 좋은 땅을 차지 할수 있었다.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것은 충성이니라’ 고 말한다. 무엇을 맡든지 건장한 나귀처럼 묵묵히 주인의 곁에서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것이 성도의 맡은 바 임무요 책임이다. 잇사갈 지파처럼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믿음으로 담대하고 용감한 신자로 성장하여 영적전쟁을 날마다 승리하며 ‘여호와 닛시’ 의 깃발을 꽂는 우리의 삶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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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언급한 족장들은 어디에 거주하였습니까? (8:28)
-이 족장들은 예루살렘에서 살았다. 베냐민 지파의 이름은 이미7장에 기록된 바 있음에도 불국하고 또다시8장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베냐민 지파가 지닌 특징이 이스라엘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먼저 찾아 볼수 있는 이유는 이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이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사울왕이 불순종의 아이콘으로 오점을 남겼고 다윗이 왕이 되면서 베냐민 지파가 왕가가 될수 있었던 기회가 단 1대만에 끊기긴 했지만, 하나님은 사울왕의 족보가 이어지게 하셨다.
그 이유가 될 수 있었던것이 바로 그의 아들 요나단 때문이다. 다윗과 함께 진정한 우정과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요나단을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해 주셨다. 그리고 다윗도 요나단의 뜨거운 우정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을 신뢰했고 존경했었다. 이에 다윗은 요나단과 맺었던 언약을 지켰으며 므비보셋에서 끊어질뻔했던 가문을 계속 이어나갈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비록 사울의 범죄로 말미암아 큰 징벌을 받은 가문이 되었으나 요나단의 진실한 믿음으로 인하여 멸족하지 않고 그 어떤 가문에 못지 않게 번성해졌고 용감한 후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우리가 왕들 이야기를 열왕기서에서 많이 읽었으므로 불순종한 아버지 다음에 선한 아들이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것을 볼수 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기보다 다윗의 여호와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자신또한 다윗에 버금가는 고귀하고 깨끗한 신앙을 가졌다. 요나단이 위대한 인물임이 드러나는 대목은 무엇보다 그가 왕의 욕심까지 버리고 우정과 신앙을 택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왕이 된 사울의 이름보다 믿음과 우정이 무엇인지 보여준 요나단의 이름이 베냐민 지파를 더욱 빛 나도록 하였다
(1/10)
*처음 성읍 소유지로 돌아와서 살림을 시작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9:2)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그리고 성전 막일꾼(느디님사람)들이었다. 오늘 본문은 유다백성들이 범죄함으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만에 예루살렘으로 3차에 걸쳐서 돌아오게 되는데 첫번째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1차 포로귀환을 이끈 사람이 스룹바벨이며 그는 남유다 왕의 후손이다. 1차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의 공통점이 모두 성전과 관련된 자들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성전회복의 성취를 위하여 이들을 먼저 보내셨다.
그리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는 감격적인 사역을 하게된다. 오늘 본문의 이름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이름들이 있는데 바로 성전 문지기의 일을 담당했던 고라 자손들이다.
이들은 광야시대에 모세를 반역했던 고라의 후손들이다. 일제시대의 친일파처럼 불명예스러운 이름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달랐다. 그들은 주변의 조롱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라자손이 맡았던 성막에서의 일을 더욱 충실히 하였다.
그들은 성전 문지기의 일을 했으나 과거 고라처럼 그 일을 하찮게 여겨 리더쉽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 성전에서 거하는것이 얼마나 복되고 기쁜 삶인지를 노래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시편에 기록된 ‘고라자손의 시(42-49,84-85)’ 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내 속에서 낙심하며 불안해하는고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리고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유명한 시편이 바로 고라자손들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모하며 기록한 시이다.
그들은 비록 성전에서 노동을 하는 어찌보면 제사장, 레위인들과 비할바 없는 천한 일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오히려 다윗의 수준 이상이었다. 하나님은 직위보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마음없는 화려하고 수준높은 음악보다 간절하고 진실한 고백을 기뻐하신다.
(1/11)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10:14)
-여호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고 그의 나라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울, 한때 겸손의 아이콘으로 불려질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었는데 도대체 왜 그의 말년은 이토록 처절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성경이 뽑은 그 첫번째 원인이 바로 사울의 채널이 고장났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채널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는 대상인 접신녀에게로 그의 채널을 돌리게 됨으로 선을 넘어버렸다. 결국 사울의 징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고 그런 신앙의 선을 넘어버린것이 사울의 범죄의 최고 정점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채널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되어 있을때 안전하고 인도하심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라도 우리의 안테나가 세상의 전파를 타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의 시그널을 외면하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귀 기울일때만이 순종의 삶을 이어갈수가 있는 것이다. 사울의 범죄가 말씀의 불순종에서부터 오게 되었음을 늘 기억하자.
(1/12-13)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와 다윗과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맺었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예언하셨던 말씀이 성취가 되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미쁘신(faithful)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은 어쩜 그렇게도 한번하신 약속을 완벽하게 이루어 내실수 있으실까?
첫째는, 하나님은 언약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약속한것을 한번이라도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셨다면 그때로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약속이라도 하나님 마음에 접수(?)가 된것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때때로 우리는 왜 하나님이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가 원망할때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것이 아니라 그 약속이 하나님께 접수가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접수하시는 약속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 약속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 마음에 합한것만 생각하고 하나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나 홀로 약속을 맺는 경우가 있지싶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협박하기도 한다. 밥도 몇일씩 굶기도 하고 스스로 날을 정해놓고 40일이고 100이고 정성을 다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그것을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께 접수되지 않은것이라면 성취를 기대할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접수된 약속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이루실 능력이 있으시다. 사울과 그의 집안이 망하자 마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도록 하셨다. 그리고 다윗을 보좌할 용사들을 여기 저기서 보내주셔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재건하고 다스리는데 힘이 되도록 하셨다.
예수믿는 사람은 모두 언약의 백성들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늘 약속을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속을 들으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재미를 참 좋아하신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약속을 하고 그 약속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면되는 것이다. 기쁘게 약속하고 즐겁게 하나님의 이루심을 맛보는 인생이 복 있는 자이다.
(1/14)
*이스라엘 군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헤브론에 모였습니까? (12:38)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충성된 마음으로 헤브론으로 모였다. 각 지파에서 다윗을 따른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역대기 기자는 ‘날마다 다윗을 도우려는 사람이 몰려 들어 하나님 군대와 같은 큰 군대를 이루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한 사울왕과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을 향한 백성들의 지지가 천지차이와 같다.
사울에게서는 사람이 떠나간 반면에 다윗은 사울에 쫒겨 동굴에 숨었을때에도 사람들이 찾아왔었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과 절친이 될 정도로 다윗은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는듯하다. 다윗은 어떻게 그토록 사람들이 잘 따랐을까? 그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온전히 잘 따랐기 때문이다. 사람을 잘 만나는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사울의 아들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는 제사장, 용사,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수십만명이 다윗을 위해 자원하여 마치 하나님 군대와 같은 큰 군대를 이루었는데, 왜 하나님의 군대와 비교했을까? 하나님의 군대는 ‘마하나임’ 으로서 강력한 두 그룹의 천사들이다. 이 천사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므로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강력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 다윗을 따르는 온 지파에서 온 군대의 모습이 마치 ‘마하나임’ 처럼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우수하고 충성스런 군인들이 성심과 한 마음으로 마치 천사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듯이 그들도 다윗에게 모든 충성을 다바칠 준비가 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야곱도 에서를 만나기전에 ‘마하나임’ 을 경험한적이 있다.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 은 이렇게 다윗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을 돕고 지원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의 무리들보다 더 파워풀하고 믿음직한 하나님의 군대가 휴식없이 믿는 자를 지키고 보호함을 기억한다면, 비록 사람의 도움이 없고 오히려 외로운 형편에 처하더라도 믿음을 잃지않고 용기백배하여 신앙의 삶을 이어갈수 있으리라.
(1/15)
*다윗이 백성의 추대를 받고 가장 먼저 하고자 한 일은 무엇입니까? (13:1-3)
-하나님의 언약궤(the ark of God) 를 다윗성으로 모셔오는 일이었다. “사울 시대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하나님께 물을수가 없지 않았는가?” 다윗이 분산되어있던 제사장, 레위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한 후에 했던 말이다. 이 말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 제일 주의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셔오기 위해 엄청난 준비를 하는데 수백명의 최고의 찬양대와 악기 연주자들을 세웠고 그들은 온 힘을 다하여 찬양을 올려 드렸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은혜롭고 놀라운 순간이 갑자기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으로 바뀐일이 터지고 말았는데 바로 언약궤를 실고 오던 웃사가 수레위에서 흔들리던 언약궤를 잡으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 기막힌 사건을 성경독자들은 어떻게 이해할수가 있을까? 다윗처럼 화를 낼까? 하나님을 원망할까? 누가봐도 이 장면은 하나님이 너무 하신것 아닌가? 하나님은 찬양과 경배를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 아닌가? 그런데 왜 하나님이 스스로 그것을 엎어 버리신걸까? 성경은 ‘하나님이 웃사의 일로 진노하셨다’ 라고 실마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다시 언약궤를 모시지 않을것 같았던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언약궤를 그곳에서 메고 다윗성으로 돌아오게 된다. 왜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하며 경배 드릴때는 진노하셨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복을 내리신걸까? 하나님은 다윗이 ‘율법대로’ 언약궤를 모시는 일보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찬양과 연주에 더 관심을 가진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결국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이 모여 드린 찬양과 제사보다 한 사람의 섬김을 더 귀하게 받으신것이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말씀에 더욱 충실하는)를 새롭게 다지게된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은 겉만 화려하게 치중하는것이 아니라 오벧에돔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서있는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1/16)
*다윗이 전쟁을 앞두고 먼저 한 일은 무엇입니까? (14:10)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 자신이 블레셋을 치러 올라가도 될지, 올라가면 자신의 손에 그들을 넘겨주실지를 물었을때 하나님은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너의 손에 넘겨 주겠다’ 고 응답하셨다. 사울왕가를 철저하게 무너뜨렸던 블레셋이 전쟁을 통하여 이제 왕이 된 다윗을 단숨에 기선제압을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1, 2차에 걸친 블레셋의 강력한 공격에도 왠지 사울처럼 부담을 가지지 않은거 같다.
사울은 블레셋에게 둘러 쌓였을때 조바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고 말았으나, 다윗은 침착하게 원래 하던데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으니’ 의 카드를 꺼내들었고 하나님은 세밀하게 전쟁의 승리노트를 다윗에게 보여주셨다. 특히 2차 전쟁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이 용기백배할 수 있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뽕나무 밭 위쪽에서 행군하는 소리가 나거든, 너는 곧 나가서 싸워라.’ 하지만 숫자적으로 열세였던 이스라엘 군인들이 엄청난 숫자의 블레셋 군대의 행진 소리를 들으면 더 무서워하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은 위쪽에서 행군하는 소리가 나면 나가서 싸우라고 하셨을까?
분명히 두려움을 이기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작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다윗은 믿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서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때문이었다.
“소리가 나거든 너는 곧 나가서 싸워라 그러면 나 하나님이 너보다 먼저 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겠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다윗에게 아마 뽕나무 밭 위쪽에서 행군하는 소리는 두려움의 소리가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천군들의 행군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블레셋 군대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도우실것을 확신한 것이다.
믿음없는 자에게 그 소리는 공포와 두려움을 증가시키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소리요 승리의 소리인것이다. 결국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다윗의 명성이 퍼졌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들이 다윗을 두려워하게 만드셨다. 진짜 성도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한다. 왜냐하면 진짜 성도는 늘 하나님의 능력의 팔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1/17)
*주님의 궤를 옮기는데 실패했던 원인은 무엇입니까? (15:13)
-사무엘하 6장과 역대상3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궤 이동사건의 비극에 대한 비밀이 여기서 풀리는것을 본다. 다윗은 율법에 준수하여 언약궤를 메지 않고 새 수레에 싣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했던 사실을 상기 시키며 이번에는 철저하게 그리고 더욱 성결하게 언약궤를 메는 사람들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다윗은 헤만, 아삽, 에단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의 리더로 세우며 각기 악기 다루는 자들을 선별하여 하나님을 노래하는 자들로 세웠다. 다윗이 이들을 세우고 지시한 사항이 있다.
‘노래하는 자들과 악기 연주하는 자들이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이것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명심하고 기억해야 할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색함으로 드리는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으시고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 찬양은 성가대나 연주자들만 하는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앞에 드리는 것이다. 즐거운 소리를 내는 방법이 무엇일까?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일까?
다윗은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고 했다. 이 의미는 온 마음이 담겨진 기쁜 소리를 말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가진 소리이므로 크게 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찬양은 곡조있는 기도라고 말한다. 믿음없는 기도가 응답이 없는것과같이 믿음없는 찬양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수준높게 연주해도 하나님의 귀에는 시끄럽게만 들릴 뿐이다.
다윗의 아내 미갈이 남편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업신여겼다. 미갈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쁨보다 왕인 남편의 체면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나아가서는 다윗이 사람들앞에서 체통없이 행동한것을 업신 여긴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되어 미갈은 죽을때까지 자녀를 얻지 못했다.
찬양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져야 한다. 누군가의 찬양을 잣대질하지도 말아야 하고 당연히 찬양하는 사람은 두 말할 필요없이 다윗의 영성을 본받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 It was before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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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언약궤를 옮긴 후 어떤 일들을 했습니까? (16:1-4)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했고, 각 사람에게 떡 한덩이와 고기 한 점과 건포도 과자 한 개씩을 나누어 주였으며, 레위 사람들을 임명하여, 주님의 궤 앞에서 섬기며, 하나님을 기리며(칭송),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다.
다윗이 행한 이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것이다. 번제사는 헌신하는 뜻을 담고 있는 제사로서 이 제사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삶을 거룩하게 살겠다고 헌신하며 다짐하는 의미였다. 그리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이 화평을 이루는 것으로서 어떻게 사람이 감히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방편을 허락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화목제사인것이다.
이 제사법은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림을 통하여 성립 되었고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을 이룰수 있게 된것이다. 다윗은 레위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궤앞에서 하나님을 기리도록했는데 이 의미는 ‘칭송하다’ 라는 뜻으로서 ‘기억하다’ 라는 의미이다. 무엇을 기억하도록 했을까? 하나님이 베푸신 과거의 은혜들을 잊지 않고 상기하라는 뜻이다.
이시대에는 번제, 화목제같은 제사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으로 인하여 사라졌지만
그 의미는 우리의 예배가운데 늘 회복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고 하신 말씀처럼 예배를 통해서 늘 우리의 거룩성이 회복되어야 하며, 찬양과 경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스런 교제를 이어나갈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에 늘 찬송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찬양의 제사드리며 하나님께 꾸준히 그리고 활발히 나아가서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우리에게 주시는 화평을 받아 누리는 예배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1/19)
*주님의 성전을 짓게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17:11-12)
-다윗의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완전 예상 밖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것이 마땅하고 또 안성 맞춤일것이라고 보았다. 다윗의 곁에서 다윗의 모든 면모를 보았던 나단 선지자도 당연히 다윗왕이 성전을 지어야 하고 그가 가장 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아마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들은후에 더 흥분되어 마음이 들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날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불러서 하신 말씀이 가히 충격적이었는데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수 없다는 메세지였다. 다윗이 얼마나 성전건축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었는지 나단 선지자는 알고 있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라고 고백할 정도로 다윗의 성전에 대한 마음은 무엇과도 비교될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성전건축에 반기를 들고 나오신것이다.
사람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일이 아무리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계획일지라도 성취되지 못한다. 다윗은 나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듣게되는데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 이제 주의 종과 그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것을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소서” 무척 섭섭했을만도 한데,, 아니 분명히 섭섭하고 어쩌면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윗은 섭섭함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지금까지 지내온것에 대한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고 또 감사를 드렸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기막힌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명히 기뻐하시고 도와주실것이라고 확신할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때도 있으시며 우리의 계획을 막으실때도 있다. 낙심하거나 원망하기보다 나보다 더 귀한 계획고 최고의 스토리를 알고계신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하며 그분의 결정을 신뢰하며 영광올려드릴 수 있는 다윗의 영성을 갖기를 간구해야 한다.
(1/20)
*다윗이 가져온 전리품들은 후에 어떻게 쓰였습니까? (18:8)
-솔로몬이 그것으로 놋대야와 기둥과 놋 그릇들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성전건축 자제로 사용된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는 장면을 볼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다윗이 자신의 성전계획이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삶 가운데 허락하신 축복을 감사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섭섭해할수 있는 다윗을 위로해 주기라고 하듯이 블레셋, 모압, 소바와의 전쟁에 연달아 승리를 허락해 주신것을 볼수가 있다. 다윗은 정말 전쟁의 신이라 불릴정도로 신바람나게 전쟁했고 모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특히 소바왕 하닷에셀과의 전쟁에서는 빼앗은 병 거의 기병대의 말들 중에서 백마리만 남겨두고 모든 말의 힘줄을 끊어 버리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다윗의 이같은 행동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앞으로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것임을 보여준 신앙적인 행동이었다. 마치 하나님과 다윗이 춤을 추는거 같아 보인다. 성전짓겠다는 다윗에게 ‘No’ 하시자 다윗은Okay 했고, 전쟁에서 이기고 다윗이 믿음의 행동을 보이자 하나님이 Good하셨다. 올바른 신앙은 이렇게 하나님과 춤을 추듯이 서로의 호흡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눈치를 보는게 아니라 마음을 읽는것이다. 다윗은 비록 자신이 성전건축은 할수 없었지만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 대에서 성전을 지을수 있도록 모든 자제들을 준비하게 되는데 많은 물품들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들이었으니 이것 또한 다윗이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 다시 영광 올려드리는 삶을 보여준것이 아닌가!
신앙생활은 혼자하는것이 아니라 마치 춤을 추듯이 파트너가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의 춤을 리드해 가시는 하나님의 뜻에 기뻐하며 자신의 몸을 맡기는것이 하나님과 기쁘게 교통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by 다윗.
(1/21)
*조문단을 보낸 다윗의 뜻과 암몬의 신하들의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19:2-3)
-일전에 암몬의 왕 나하스가 다윗에게 호의를 베푼 기록은 없지만 다윗이 신하들을 보내며 그의 죽음에 문상을 하고 예의를 지키는것으로 봐서 그러한 일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암몬의 방백들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다윗이 그 땅을 염탐하기 위해서 보낸 사람들이라고 오해하여 그들의 수염을 깍고 옷을 잘라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는 수치를 당하게 해서 돌려 보냈다.
성도가 아무리 선한일을 하여도 세상은 오히려 믿는자를 핍박하며 멸시하기도 한다. 선을 악으로 갚는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시로다.” 다윗은 문상간 신하들이 당한 수치심을 백성들이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며 그들이 회복될 수 있도록 방편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은 믿음 공동체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모습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곧이어 시작된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악인들로 하여금 심판을 견디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들과의 전쟁을 통해 다윗의 군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악한자들과의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같이 하게 된다.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기를 원하노라.’
결국 다윗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었으며 이 또한 하나님이 내리신 예언의 성취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행할때 세상은 성도들을 깔보고 무시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통하여 낙심할것이 아니라 믿음의 연합을 이룬다면 악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삶가운데 나타내실 것이다.
(1/22)
*가드에서 벌어진 전쟁에 거인이 나타났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20:6)
-가드는 일찍이 어린 목동 다윗의 손에 죽었던 골리앗의 고향이며 이 곳에서는 대대로 거인 장수들이 많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가드에서 나타난 거인도 다윗의 조카 요나단의 손에 죽게되었고 다른 거인들도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한다. 성경은 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블레셋 가드에 사는 거인장수 이야기를 담았을까?
고대전쟁에서 몸이 크고 장대하다는것은 분명히 큰 능력이었다. 그 시대의 전쟁의 승패는 하드웨어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윗의 소프트웨어에 골리앗의 하드웨어가 무너졌다.
어떻게 이 말도 안되는 일이 가능했는가? 다윗의 소프트웨어에 하나님의 하드웨어가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강대한 민족이나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함을 단번에 꺽으시는데 하나님이 스스로 하실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보이신다.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일지라도 그가 가진 믿음의 소프트 웨어가 잘 작동한다면 골리앗의 동생 혹은 더 강한 상대라 할지라도 능히 쓰러뜨릴 수 있는것이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는 소프트 웨어가 있는가? 산을 옮기시는 하나님의 하드웨어의 강력함을 보게 될 것이다.
(1/23)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21:1)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게 된 이유는 전쟁을 대비하여 군인들의 숫자를 파악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품게 된 동기에 대하여 성경은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총동하여’ 라고 말하고 있다. 다윗은 나라의 왕으로서 충분히 전쟁준비를 위하여 인구조사를 실시 할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대하여 마귀가 그를 충동질한것으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하여 다윗의 군대장과 요압이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이 본문은 사무엘하24장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어찌하여 이런일을 기뻐하시나이까?’ 라고 되어있다. 지금 다윗은 그의 인생끝자락에 있다. 요압은 다윗의 결정이 과거의 다윗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중에도 군대의 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말 발의 힘줄을 끊어버리던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요압이 바라본 다윗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왕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이렇게 요압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요압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다윗은 결국 이 일을 진행시켰고 그로인해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이 들어 무려 7만의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다윗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에 빠진 사실을 크게 뉘우치게 된다. 이 사건은 다윗의 인생 말년에 일어난 마지막 사건이지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큰 교훈을 준다. 우리의 결정, 판단,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볼 수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고 말씀의 교훈을 따를수가 있어야 하며 적어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함을 느끼게 한다.
(1/24)
*다윗이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2:8)
다윗이 전쟁을 통하여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했다. 하나님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자격으로 ‘평화’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겠다고 하셨고 그가 성전을 건축하게 될것이라고 예언하셨다.
하나님은 왜 성전 건축을 지을 수 있는 자격을 ‘평온’ 에 두었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바로 화평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그곳에서 화해하며 평화의 연합을 이루는 곳이 성전의 성격이었므로 하나님은 주변국들과 피의 전쟁을 수도없이 했었던 다윗보다는 전쟁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았던 솔로몬 시대에 평화스러운 성전을 건축하시길 원하신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집이신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라고 선포해 주셨다. 기도를 통해 죄인들이 하나님께 죄사함을 얻고 마음에 짐을 내려놓고 평안과 위로를 얻는 곳이 성전이다.
그 곳에서 성도들은 찬란한 영광의 빛 아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화평의 은혜를 얻을수가 있다.
다윗은 비록 자격을 얻지는 못했으나 더욱 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갈급한 사람이 되었다. 자격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됨을 성도들은 늘 감사하며 예배드려야 한다. 복된 주일이 다가온다. 평강의 왕께 소리높여 찬양드리며 흔들리고 요동치는 심령이 평안을 누리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1/25)
*레위 사람의 역할은 어떻게 나뉩니까? (23:4-5)
-계수된 레위 사람의 숫자는 총 38.000이며 그들을 각각 성전의 일을 보살피고(24,000), 서기관과 재판관(6,000), 문지기(4,000)와 악기로 찬송하는 자들(4,000)로 나뉘었다.
다윗이 비록 성전 건축을 하지는 못했지만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 두었고, 성전에서 일할 사람들을 분업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각각 재능대로 봉사할수 있도록 배치했으며 온 마음을 다하여 재능을 헌신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자신들이 잘 할수있는 일을 분담해 줌으로써 성전 사역, 특히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에 헌신하는 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그리고 깊이 감당하도록 한 것이다.
교회마다 일꾼들은 정해져 있는것을 볼 때가 많다. 교회의 사이즈를 떠나서 이와같은 현상은 거의 모든 교회에 일반화 된듯하다. 그러나 자칫 일 인이 너무 많은 파트를 담당하게 되는 역효과가 일어 날수도 있으므로 교회는 일꾼들을 그들의 재능에 맞게 분업화 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분업화가 더디게 되면 일꾼들에게 과부하가 걸리게 되며 그것은 곧바로 영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일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교회는 부지런히 일꾼들을 양육하고 그들이 가진 재능을 사역의 현장에서 꽃 피울수 있도록 도우는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사역이 레위 자손들에게 오직 국한된 사역이었으나 신약시대에는 봉사하기를 원하는 자라면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고라 자손들처럼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성전에서의 하루가 더 귀함을 깨달아 주님의 교회에서 아름답게 헌신하는 이들로 인하여 하나님께는 크신 영광 그리고 예배하는 자에게는 기쁨과 감격의 예배가 임하길 소망한다.
(1/26)
*다윗은 아론 자손을 총 몇 갈래로 나누었습니까? (24:3-5)
-엘르아살 자손은 열여섯 족장 그리고 이다말 자손은 여덟명의 족장으로 나누어 총 24 갈래로 나누었다. 24장에서 29장까지 또다시 수없이 많은 이름들이 나열되고 있어서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 하나 하나가 참으로 소중한 이유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없는 것을 있는 듯이 기록한 상상 문학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기록한 책이다.
성경안에 기록된 이름들로 하여금 역사를 볼수도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 His Story= History 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의 한 면에 누군가의 이름이 기록된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아론의 자손 엘리아살과 이다말의 자손중 뽑혀진24명을 흔히 “24반열 제사장” 이라고 명칭한다.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아론과 모세는 형제지간이며 그들은 모두 레위자손이었다. 그런데 아론의 자손에 비해 모세의 자손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자손은 외면하신걸까?
출애굽기 18장을 근거로 유추해보면 모세의 아들들은 애굽에서의 10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전에 모세가 아들들과 아내를 장인에게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모세의 아들들은 힘든 고난의 시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고 외할아버지 아래에서 편히 자라난것이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반면 아론의 자녀들은 모든 고난과 기적을 경험하였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인물이 나온다는 말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이미 성경은 다 완성되어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만큼 우리의 삶의 모습도 분명히 그분의 역사안에서 조명될것이다. 나와 나의 자녀들의 삶이 그분의 역사에 믿음에 충실한 사람으로 기록되길 원하는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을 통해 믿음의 성숙을 이루는 가정으로 준비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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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군대 지도자들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에게 맡긴 직무는 무엇입니까? (25:1)
-수금과 거문고와 심벌즈로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단어가 등장한다. ‘신령한 노래’ 영어로는 prophesying 인데 직역하면 ‘예언하다’ 이다. 그럼 이것이 노래일까, 말일까?
이것은 성령의 영감을 얻어 부르는 노래이면서 예언이기도 하다. 노래로 예언을 한다고 보면 좋겠다.
아삽과 헤만의 신령한 노래들이 시편에 수록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도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가 있을까? 그렇다. 그런데 구약시대와는 다른 모습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언, 계시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언, 계시는 성경이 완성되면서 끝이났으므로 이 시대의 신령한 노래는 예언이나 계시를 목적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5:19) 에베소서의 신령한 노래는 영어로 ‘Spiritual songs’ 으로서 구약의 prophesying 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성도는 어떻게 신령한 노래를 부를수가 있을까? 영적인 노래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것은 마음과 가사이다.
바울은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라고 하였다.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 노래는 열납되지 못한다. 그리고 구약의 노래가 ‘예언’ 이었던것처럼 이시대 영적인 노래에도 가사가 너무나 중요하다. 시편의 노래들을 보라. 끊임없이 여호와를 찬양한다.
하나님께 신령한 노래를 올려 드리기 위해 전심으로 부르되 진실하고 영적인 가사를 담아야 한다. 다윗은 아삽, 헤만, 여두둔을 통해서 찬양을 하거나 연주를 하는 후손들을 엄선해서 철저하게 연습을 시킨것을 보며 회개가 나온다. 한 곡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부으심이 있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림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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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못과 그 가족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26:26-27)
-성물(전쟁에서 승리하여 하나님께 바친 전리품)들을 보관하는 곳간을 관리하였다.
26장에는 꽤나 흥미로운 이름들이 등장한다. 먼저 1절에 나오는 ‘아삽’ 은 고라자손으로서 시편을 기록한 ‘아삽’ 과는 동명이인이다. 시편을 기록한 아삽은 고라의 삼촌인 게르손의 자손이다. 참고로 다윗이 임명한3명의 찬양 지도자는 아삽, 헤만, 에단(여두둔)이었는데 에단은 고라의 다른 삼촌인 므라리의 자손이다.
그리고 오벳에돔과 그의 자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오벳에돔은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던 중 잘못된 언약궤 운반으로 인하여 웃사가 죽자 언약궤(벌을 내리신)를 자신의 집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3개월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집안에 큰 축복을 내리셨는데 그 복이 무엇이었는지 성경은 기록해 놓았다.
오벳에돔은 성전 문을 지키는 고라 자손이었으나, 그의 자손은 용맹스러운 지도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유능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솔직히 오벳에돔이란 인물이 영향력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려워하지 않고 잘 모신것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이 성경에 의롭게 기록이 되었고 그의 자손들이 큰 축복을 받게되었는데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이 있다.
하나님을 모신 참 성도의 가정은 축복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축복은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질, 학벌, 권력만 축복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가장 큰 축복은 자손 대대로 오직 하나님만을 온 힘을 다해 믿고 섬기는 자손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오벳에돔이 받은 축복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함이 옳고도 옳다. 자녀들을 위하여 무엇을 기도하는가? 세상적인 거품을 다 걷어내고 무조건 올바른 신앙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녀들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부모들이 인도자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 주는것이다.
오벳에돔은 다른 레위 자손들이 언약궤를 모시기를 꺼려 했을때 혹시 자원하여 자기의 집에 모시지 않았을까? 축복의 기회는 늘 있는것이 아니다. 언제나 축복받을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받을수 있다. 그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삶이며 그런 삶은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삶 속에 기쁘게 모시게 되며 그런한 삶에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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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조사 결과가 다윗 왕의 실록에 기록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7:24)
-요압이 인구 조사를 모두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인구 조사를 실시 하려고 하자 그는 왕의 명령을 좋지 않게 여겨서 레위와 베냐민 지파의 인구 조사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4장에 나오는 인구 조사 통계는 완전하지 못한 숫자이었기에 다윗 왕은 이 일을 그의 실록에 기록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다윗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모습이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다윗이 가진 마음이 마귀로 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역대상 21:1). 다윗의 계획에 요압이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밀어부쳐 인구조사를 실행했으나 역대기 기자는 인구 조사후 다윗이 곧바로 하나님께 자신이 인구조사로 인하여 큰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한 모습을 기록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으나 그로 인한 징계는 피할 수가 없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실행했던 장면이 주는 교훈이 있다. 하나님을 그토록 신뢰하던 삶이라 할지라도 이생의 자랑에 눈이 어두워지면 자신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의 것인지 마귀의 것인지 분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상기 시켜주고 있다. 히스기야 왕도 기도로 질병을 치료함 받았으나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남 유다의 보물창고를 모조리 열어 보여주며 은근히 자신이 이루어 놓은것인냥 자랑하다가 그것들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공동체 지도자의 교만과 이생의 자랑으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환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영적 공동체에서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수가 있는지를 깨닫기를 바란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직분자 그리고 가정에서는 부모들의 책임이 막중함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지 않도록 특히 리더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마귀의 충동을 구분해 낼 수 있을때 그 공동체가 건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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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솔로몬에게 전해 준 설계도는 어디에 관한 것입니까? (28:11-19)
-성전 건축에 관한 모든 양식이 포함된 설계도였다. 많은 성경 독자들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으나 그는 건축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다윗이 성전을 설계 했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다윗은 어떻게 성전을 설계할 수 있었을까?
그가 건축에서 재능이 있었을까? 글쎄 다윗이 건축에 은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배와 전혀 상관이 없었던 노아에게 방주 제작에 대한 설계도를 주신것과 모세에게 성막 설계도를 알려 주신 것처럼 다윗에게도 성전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를 알려 주셨다면 건축에 대하여 재능이 없었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하나님의 발판 the footstool of God’ 이라고 표현한 구절이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오셔서 백성들을 만나신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다윗의 시적 표현이 마음에 든다. 성막이나 성전을 짓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시는 것인데 항상 이동을 했던 성막이 아니라 영구히 봉안할 목적으로 성전을 지으려고 것이다.
결국 언제나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찾고 또 찾기 원하는 다윗의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다.다윗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보시고 하나님은 비록 그가 건축을 직접 하지는 못하게 하셨지만 성전 구석 구석에 대한 설계도를 보여 주셨음을 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창조적인 마인드를 주셔서 동물의 이름들을 모두 짓도록 하신 것처럼 믿는 이들에게도 창조적인 마인드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므로 악한 일에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주시진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대한 설계를 오직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즉 하나님의 뜻대로 그려 나가기를 원할때 공부, 사업, 등등, 우리의 삶 전반에 대한 인생 설계도를 그려 나갈수 있도록 영감을 주신다. 비록 그것이 나의 전공 분야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비전과 열정이 넘칠때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그 일도 감당하도록 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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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성전 건축을 준비했습니까? (29:2-3)
-다윗은 온 힘을 기울이고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다. 다윗의 간증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온 백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물을 바쳤으며 그렇게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 지게 되었다.
다윗은 솔선수범하여 하나님께 성전건축을 위하여 예물을 헌신했으며 그 헌신의 기쁨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그의 감사 기도와 찬양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성도들이 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또 감사드려야 하는지를 찾을수가 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던 가장 주 된 마음은 바로 그것이 사람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짓는 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라. 개미들이 우리를 위해 집을 짓는다는것이 상상이 되는가? 혹은 그렇게 아끼는 애완동물이 그렇게 한다면 말이 되는 것인가? ‘말이 안됨’ 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것은 우리가 어떤 피조물이 가질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인데 이로 인하여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며 인간의 부와 존귀,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것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이란 자신에게 주신것을 그 무엇이라도 아까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때 조금이라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때 그것은 온전한 예물이나 헌신이 될 수가 없다.
다윗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님께 바쳤을 뿐이라며 그 헌신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렸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언제 까지나 계속되도록 지켜 주시고 그 마음이 항상 주님을 향하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영적인 갈망과 열정이 그로 하여금 무엇이든지 드리고 헌신케 함을 기억하며 진실한 마음과 믿음으로 주 하나님을 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