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1:2-3)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왕위에 오른 첫 해에 유다백성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도록 하였다.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예레미야의 예언(25:11)대로 70년을 바벨론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였고 포로생활 중에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시켰으며 이사야의 예언(44:28)대로 왕위에 오른 고레스왕이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인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된 것이다.
에스라는 이 놀라운 사건의 배경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인간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불가능이란 단어는 적용되지 않는다.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그 무엇도 다 사용하실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일을 즉흥적으로 하시지 않고 철저한 계획을 통해 이루어 나가시는데 그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 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는 한 치의 오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일어난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구멍이 뚫리는 오명을 받을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실수가 없기 때문에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당신의 전능하심을 언약성취를 위해 가감없이 사용하시는 것이다. 때로는 악한왕을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자연을 움직이시기도 하신다.
이시대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이땅의 역사가운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뭇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땅 가운데 이루어 나가신다. 성전재건축을 위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자원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섭리를 나타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이루시는 도구로 쓰임 받는 신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함이 옳다.
(3/2)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건축 기금을 마련하는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2:68-69)
-유다땅으로 다시 돌아온 백성들이 기쁘게 그리고 저마다 힘 자라는 대로 무너진 성전 재건축을 위하여 금, 은,등 귀한 예물들을 바쳤다. 스룹바벨을 필두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유다백성들이 제일 먼저 관심을 둔것이 무너진 성전 재건축이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고레스 왕의 칙령이 있었지만 본국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예물을 드리고 자원한것을 볼때에 그들이 포로기간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했으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을지 연상이 된다.
회개없는 은혜는 없다. 믿는 자들의 회복과 축복은 항상 진정한 회개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차 귀환자들중에는 과거 유다에 있을때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했던 ‘바스홀’ 이라는 제사장의 자손들이 1,247명이나 포함되어있는것을 볼수 있고, 사사시대에 범죄하여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던 베냐민 자손들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었는데 성전건축을 위한 포로귀환에 자원한 사람들 가운데 그들의 숫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이들의 이름과 숫자를 정확히 기록한 것은 이들이 포로기간동안 얼마나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황무지가 된 유다 베들레헴성에 돌아가면 막노동과 궁핍함이 있을것이 뻔한데도 그들이 자원한것은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받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것임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과 숫자를 자세히 기록한것은 분명 그들을 칭찬하시기 위함이다.
솔로몬의 성전때와 다르게 두번째 성전건축에는 회개와 은혜의 사연이 합해져 더욱 감동적인 사역이 임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감사할줄 아는 인생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주님의 일에 자원하며 기쁘게 헌신함을 볼수가 있다. 하나님은 인색함과 형식적인 헌신은 철저히 외면하시지만 기쁨으로 스스로 자원하여 섬기는 자를 기억하시며 복 내리신다.
(3/3)
*성전 기초가 놓인 후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3:12)
-통곡과 환성이 뒤섞였다. 포로귀환자들은 두 부류로 나눌수가 있는데 한 부류는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쪽이고 한 부류는 이번이 그들 인생에 첫 성전인 젊은 무리들이다.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쪽은 영원할줄 알았던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됨을 보았던 세대였기에 그날의 아픔과 아울러 새롭게 건축되어질 새성전의 터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을것이다.
오늘의 통곡이 내일에는 환호로 바뀌는것이 신앙생활이 아닐까?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자들이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잘못과 죄를 오늘도 짊어져서는 안된다. 주님께 회개하고 내려 놓아야 한다.
진심으로 회개한 죄는 다시 묻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죄사함의 용서와 그로 인한 은혜가 임하게 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항상 깨어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며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께 오늘도 간구함이 옳다.
위기 가운데 있는 이 땅과 교회를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할 때이다. 지금 울지 못하면 내일 기쁨을 만나지 못할 수 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3/4)
*대적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4:24)
-성전건축이 중단되었다. 고레스왕의 칙령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백성들의 첫번째 임무는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일이었는데 그당시 그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사마리아 인들로서 이들을 성경은 ‘대적’ 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의 이 땅의 신으로 섬기며 살았기 때문이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경건한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자원한 백성들에게 과연 이들의 연합 성전건축 제안이 어떻게 보였을까? 남유다가 일찍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자들이 바로 그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만약 그들에게 건축동참을 허락한다면, 훗날 그들이 성전출입을 당연시 여길것이고 또다시 성전이 더럽혀지고 귀환한 백성들의 타락은 불보듯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제안에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발견되었는데 자신들이 건축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작정 방해공작을 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정말 진실한 신앙과 마음으로 새성전건축에 동참하길 원했다면 이렇게 자신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방해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자숙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자신들이 과거의 그런 무리들이 아니란것을 먼저 증명해 보였어야 했다.
결국 이들의 악한 정체가 드러나며 악랄하게 건축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방해를 하는것을 볼수가 있으며 기대와 감동, 환성과 통곡속에 시작된 건축이 이들의 방해로 인하여 무려14년동안 중단이 되는 아픔을 다시 겪어야 했다. 신천지나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들 교회 출입을 막는것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교사나 이단자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병들기 때문에 교회와 성도는 그들을 분별하여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5)
*아무도 성전 재건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5:5)
-하나님께서 유다 장로들을 돌보아 주셨으므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무너진 성전 재건축이 사람들의 계획이었다면, 사람들의 계략으로도 충분히 중단시킬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이고 지금 그것을 이루실 때라면, 사람의 방해나 압력이 있어도 절대로 막을 길이 없다.
비록 14년이란동안 인간의 모략과 질투로 중단되긴 했으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셔서 백성들을 질책하셨고 다시 용기를 얻고 마음을 다스린 유다백성들이 성전재건에 돌입하였다.
이번에도 방해자들을 통해 조사단이 나왔으나 개의치 않자 오히려 그들 스스로 다리오 왕에게 성전건축의 합리성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리게 되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온 성안에 넘치자 위협을 느낀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 가말리엘은 ‘만일 그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절대로 무너뜨릴수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
믿는 신자들은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때 그것이 사람으로부터 온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뜻인지를 깊이 헤아려 볼수 있어야 한다. 물론 결론을 내는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발생한 상황안에 자신의 사리사욕이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하며 그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면 힘이 들고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이 있어도 믿고 순종하는게 맞다.
(3/6)
*성전 봉헌식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6:18)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워서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책망(학개1-2장) 을 들은 유다백성이 다시 성전건축을 재개하였고 하나님은 다리오왕을 통해 그들의 성전건축이 합법한 것이었고 고레스 왕의 칙령이었음을 확인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재 칙령을 내리도록 하셨고 거기다가 성전건축에 필요한 원조를 보장해 주는 기적을 만들어 내셨다.
유다백성들은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봉헌식을 올려 드렸고 앞으로 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제사를 체계적으로 드리도록 하기 위해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을 세워 유다백성들의 영적인 질서를 바로 잡도록 하였다.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의 섬김이 시작되자 귀환후 그들을 통해서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감동이 있었고 백성들은 몹시 기뻐하였다.
봉헌식이란 말 자체가 ‘dedication’ 즉 헌납한다는 의미인데 그들이 즐거이 헌납하는 모습이 예배의 모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기쁘게 즐거이 헌신하는것이 예배자의 모습이다.
지금 한국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예배당에서 드리지 못하고 가정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시행되고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예배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자원하여 즐거이 예배할때 하나님은 그곳에 임재하시며 은혜와 축복을 부어 주신다. 그러나 예배당이든 가정집이든 그저 개인의 편리와 안일함만을 위해서 드려지는 형식적인 예배라면 그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할수 없을 것이다. 가정에서도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드리던 예배자가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다시 드릴때는 분명 유다백성들처럼 더 큰 감격적인 은혜가 예배를 통해 임하게 될줄로 믿는다.
이번일을 통해 가정의 경건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매일 하나님을 찾던 사람이 주일에 교회에 나와 드리는 예배와 한주동안 한번도 주님을 만나지 않던 사람이 드리는 주일예배는 분명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주중에 가정별로 혹은 개인별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의 시간을 더욱 중요하게 여김이 필요하다.
(3/7)
*에스라는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7:10)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학사였다. 에스라서를 기록한 주인공이 드디어 출현하게 되었다. 그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은것에 집중해 보아야 한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된것에 얼마나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이 있으셨는지 살펴보라.
‘하나님이 그를 잘 보살피셨으므로 왕은 에스라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주었다.’ (6절)
하나님은 성전이 완공되면 백성들에게 분명히 율법을 제대로 가르칠 사람이 필요할것을 아시고 미리부터 에스라를 준비시키신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때에 에스라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그를 통해 왕의 마음도 감동시키셔서 에스라와 2차 귀환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신 것이다.
아닥사스다 왕은 총애하는 에스라가 본국에 가서 해야할 일, 즉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모든 백성들이 무조건적으로 따를수 있도록 아예 법을 만들어 보내었다. 하나님은 성전을 완공한 백성들이 건물에만 심취하여 허탄하고 교만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이제 학사 에스라를 등장시키셔서 백성들의 영성을 다듬고 가르치셔서 선민으로서의 모습을 가지도록 인도하셨다.
예루살렘에 귀환했지만 주위에 우상숭배자들이 널려있었던 터라 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은 그래서 아주 중요했었던 것이다. 신자들이 말씀에 무지하면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참여해도 자칫 그릇된 사상이나 세속에 물들기 쉽다. 거짓교사들이 신천지처럼 믿는 자를 미혹하는 이 때에 말씀에 올바로 서지 못하면 그들의 미끼를 물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매일 말씀을 읇조리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신앙체계를 잡아가는자가 성숙한 신앙인이다. ‘알자, 알자, 힘써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알자’
(3/8)
*에스라가 잇도에게 사람을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8:15)
-레위 사람이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스라는 2차 귀환자들을 이끈 사람으로서 아닥사스다 왕에게 총애를 받던 남유다의 율법학사였다. 1차때와는 달리 2차 귀환때에 레위 사람이 한명도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1차와 2차귀환사이에는 80년의 공백이 있는데 그 뜻은 2차 귀환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바벨론에서 태어난 세대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란 것이다.
그들은 굳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까지 같은 사역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이미 삶의 터전이 되어버린 바벨론 땅에서 가족들과 같이 지내면서 그곳에 남아있는 유다백성들을 섬기며 여생을 보내길 원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마음으로 남아있던 레위자손들을 다시 차출하여 2차 귀환에 합류시킨 에스라가 아주 귀중한 모범을 보이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며 귀환이 무사히 이루어 지도록 기도를 한다. 하지만 돌아갈때 발생할 여러가기 위험 상황을 대비해 다시 왕에게 군대를 보내줄것을 요청하자는 의견이 있었는지 에스라가 그 문제에 대하여 근심한 기록이 나온다.
그는 이미 왕에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이 잘 되도록 보살펴 주시기때문에 군대는 필요없다고 거절했는데, 우리가 또다시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군대를 요청하는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할수 없었다고 말했다. 기도하지만 여전히 근심과 두려움이 남아있을때가 있다. 그래서 자칫 하나님보다 인간적인 방편을 마련하는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던 신앙을 와해시키는 근거가 된다.
신자들은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인 마하나임(천사들) 을 믿어야 한다. 야곱의 귀환을 도왔던 그들이 에스라의 귀환도 인도했으며 성도들의 천국을 향한 귀환도 항상 호위할 것임을 믿고 비록 이세상에서 본향 천국으로 가는 여정이 고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맡김이 합당하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바람이 거세지만 기도하고 있다면 두려움도 맡겨드림이 옳다.
(3/9)
*에스라가 통탄하며 기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9:1-3)
-귀환했던 백성들,제사장들, 레위 사람들이 가증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은 80년전에 1차로 귀환했었던 사람들로서 성전을 중건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8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그곳에 머물고 살던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혼인을 맺으며 구별되라는 말씀과 거꾸로 그들과 섞여 살게 된 것이다.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며 그 예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그 거룩성을 회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따른 것이었다.
성전만 짓는다고 유다백성들의 거룩함이 유지되는것이 아닌것처럼 교회만 다닌다고 자동적으로 성도들이 영적으로 경건함을 얻는것 또한 아니다.
믿는 신자들이 항상 거룩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기부인과 돌아봄을 통해서라고 본다. 죄의 본성에 부합된 육적 자아는 끊임없이 인생을 자기욕심, 자기 만족 자리고 이끌기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려놓지 못한다면 아무리 경건했던 사람이라도 그 경건함이 무너지는것은 순식간이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경건한 성도가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무너질려고하면 그야말로 한순간에 와해될수도 있는것이 신앙생활이다. 무너진 신앙을 또다시 회복하려면 다시 시간이 걸릴수도 있지만 시간이 소요되는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에스라가 이 사실을 알고 옷을찢고 수염을 뽑으며 통곡하며 하나님앞에서 얼굴조차 들지 못했던것처럼 나라와 공동체 그리고 개인의 범죄를 위해 중보기도와 애통하는 회개의 삶을 통해 나라와 공동체 그리고 자신의 믿음의 삶이 회복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는 것이다.
(3/10)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10:11)
-이방 백성들과 혼합하여 살던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 그 관계안에는 사업, 혼인관계도 모두 포함이 되었다. 에스라는 이방 여자를 취했던 사람들의 명단, 즉 제사장, 레위사람, 일반 백성포함해서 도합 120명의 이름들을 기록하였다. 왜 굳이 수치스러운 이름들을 기록하였을까?
이 명단안에는 대제사장 가문의 자녀들도 몇 포함되어있었으나 가감없이 모두 기록한 이유는 이들 가문이나 기록된 사람들을 면박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판단되는 까닭은 이들이 모두 회개하고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위나 직분에 따라 상급을 주시지 않으며 대신 우리가 어떤 믿음을 지녔고 또한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주시는 것이다. 이땅에 오신 성령님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실때 자신의 삶과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 볼수있어야 한다.
에스라의 빠른 명령에 소수는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거의 대부분은 힘들고 고통이 따랐으나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죄 사함을 받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성령의 음성이 내 마음에 들릴때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회개하며 순종의 삶으로 돌아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