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예언서(선지서)를 시작합니다. 구약성서에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음으로 독자들이 읽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예언서입니다. 그러나 예언서를 모르면 신약이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고 긴 예언서들을 한절 한절 읽어 나가면서 집중해야 하는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어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예언은 거짓입니다.
특히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신구약 성경의 권수와 같습니다. 그리고 신비하게도 앞의 39장은 구약과 닮았고, 뒤의 27장은 신약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구약과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누어 진것이라면, 이사야서도 메시야를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전반부에서 끝도 없이 펼쳐지는 심판의 예언과 백성들의 타락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시대와 우리의 삶을 연관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심판의 메세지가 선포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모습이 우리의 삶이 될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눈물의 선포가 우리의 심령에 들려지고 하나님께로 유턴하는 삶의 변화를 기대합니다.
(8/1)
*시온과 회개한 백성이 공의와 정의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1:27)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 유다백성들, 특히 예루살렘에 대하여 메세지를 선포했다.
그러나 죄에 물든 백성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지경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리는 제사, 제물을 역겨워하실 정도였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다..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1:11-1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경외없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외면을 받을수 밖에 없다. 이사야는 주님의 날을 선포하면서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말씀으로 돌아올것을 경고하였다.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그의 숨이 코에 달려 있으니, 수에 셈할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의지해야 할분은 오직 주님뿐이다. 주의 날에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오직 한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오늘도 유턴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8/2)
*그 날이 오면 시온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됩니까? (4:3)
-그들은 모두 ‘거룩하다’ 고 일컬어질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날에(In that day) 라는 표현을 상반되게 사용하고 있는데 멸망과 회복을 일컫는 말이다.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성은 침략을 받아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데 그 무너짐이 심히 강함을 여러가지 비유의 말로 표현하였다.
“예루살렘이 넘어지고 유다는 쓰러진다.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대항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 (3:8)
회개하지 않는 백성에게 그날이 오면 황폐와 절망의 바람이 불어 닥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의지하고 붙잡고 있던 모든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멸망의 예언을 새겨듣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지하던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 소위 남은자들에게는 새로운 그날이 오게될 것이니, 바로 회복의 그날이다.
우리는 이사야서를 보면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그리고 회복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과거나 현재나 하나님의 역사는 동일하게 임하시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하여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늘 관찰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영위할수 있어야 한다.
(8/3)
*이사야는 어떤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고 이야기 합니까? (5:20)
“악한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것을 악하다고 하는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것과 반대로 행하는 사람에게 재앙과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도 열린것이 들포도밖에 없다고 한다. 들을 세상으로 표현해보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너도 거룩하라고 하시는데 우리의 삶에는 세상적인 것들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음에도 그 은혜를 망각하면 교만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다고 하시는것을 악하다고 말하고, 악하다고 하는것을 선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시대에 행해지는 죄악들이 모두 그런 식이다. 한 예로 하나님은 동성애가 악하다고 하는데 세상은 선한 것이라고 한다. 왜 이런일이 발생하는가?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약해졌든지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자기 주장대로 따르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임할 진노가 이런 이유로 임하게 될것을 경고하셨다. 이시대도 다를바가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을 부인하거나 바꾸려고 할때 그곳에 재앙이 임한다.
어떤경우는 개인에게, 어떤 경우는 한도시나 나라 전체에 임하며, 그래도 죄가 관영할때는 이세상 전부를 심판하실것이다.
믿는 사람은 이와같이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할까? 간단하다. 포도나무에서 포도만 나오도록 하면된다. 하나님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 주셨으면 예수라는 열매만 맺으면 된다. 이것이 빛의 삶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을 반대하면서 스스로를 지혜롭다, 슬기롭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게 여긴 댓가를 톡톡히 지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사야는 ‘나의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포로가 될것이다’ 고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마귀의 포로가 될수 밖에 없다.
알자, 알자, 하나님을 힘써 알자. 읽자, 읽자, 그분의 말씀을 힘써 읽자!
(8/4)
*주님은 언제까지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십니까? (6:11-12)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이 말씀은 이사야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할 첫 미션이었다. 앞 구절을 좀더 보면 이렇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깨닫지 못한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는 못한다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다는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요, 특권이다. 기뻐하기도 잠시 이사야에게 내려진 선포 계획은 숨이 막힐것 같은 내용임에 틀림이 없다. 자기 백성(스스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는) 에게 멸망의 메세지를 전해야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겠는가?
“너는 가서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라” 는 명령은 상당히 역설적인 문장이다. 왜냐하면 범죄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돌아오게 하는것이 사명일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이 선지자의 소명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순종해야하는 사람이 선지자이므로 전해야 하는것이 그들의 사명인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무서운 예언을 선포하도록 하시는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노아때처럼 그들의 완악해질데로 완악해진 죄악을 징계하시기로 작정하신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없는 지경에 빠진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회복불능에 도달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하시면서 소망의 메세지를 전하도록 하셨다. 비록 그들의 죄로 인해 징계를 당하겠지만 남은자를 통해 나라가 회복 될것을 전하였다.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맡은 자에게 구할것은 충성이라고 했듯이 입을 열어 선포해야 한다.
죄에 대하여 심판이 있음을 선포하는것은 모든 성도된 자들의 사명이다. 자녀의 죄를 보고도 모른체 하는 부모는 자녀를 멸망의 길로 내어놓는것과 같다. 비록 징계가 있을지라도 죄가 완악해지지 않도록 속히 회개를 선포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얻기를 소망한다.
(8/5)
*주님이 계속해서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 하시려 손을 들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17)
“그들은 모두가 불경건하여 악한 일을 하고, 입으로는 어리석은 말만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하나님은 ‘마헬살랄하스바스 Maher-Shalal-hash-baz’ 탈취를 급히, 약탈은 속히라는 뜻의 이름을 이사야의 아들에게 주셨는데 이유는 남유다가 북이스라엘과 아람연합군의 공격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더 믿고 따른것에 대한 징계가 임하겠다는것을 선포 하기 위해서이다.
“이 백성이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물은 싫어하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좋아하니, 나 주가, 저 세차게 넘쳐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물 곧 앗시리아 왕과 그의 모든 위력을, 이 백성 위에 뒤덮이게 하겠다.”
여기서 ‘실로아’ 물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세차게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물’ 은 앗시리아왕을 상징한다. 남유다왕 ‘아하스’ 는 공교롭게도 그들이 의지했던 앗수르를 통해 탈취와 약탈을 당하게 된다. 이 말씀이 주시는 질문이 있다.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올때 우리가 의지하고 붙잡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보다 더 강하고 능력있는 존재를 의지하게 마련인데도, 왜 사람보다, 세상보다 광대하시고 능력있으신 하나님은 외면하는걸까? 남유다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앗수르왕을 더 믿고 의지한걸까?
하나님은 ‘잔잔한 물’ 처럼 보이고, 앗수르왕은 ‘세차게 넘치는 물’ 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뜻인가? 일단 눈에 보이는 강한것을 의지하겠다는 뜻이다. 거기에 항상 함정이 있고 덫이 있음을 잊지말자.
아무리 급하고 어려운 삶에서도 눈앞에 보이는 이득될거 같은 그 무엇에 관심을 두기보다, 비록 눈에 잔잔한 물처럼 능력없어 보여도 인생의 그 어떤 계획도 폐하실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임마누엘되시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라. 그가 당신의 범사에 동행하시며 앞길을 지켜 주시리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결코 죽일 수 없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인생의 모든 삶과 죽음을 통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앞에 무릎꿇어 순종해야 한다.
(8/6)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0:21)
“남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남은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예언서에는 유독 남은 자 (Remnant)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그 남은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스라엘이 죄악으로인해 심판을 당하지만 결국 하나님께 회개하고 여호와 신앙을 지켜낸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아,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다고 하여도,그들 가운데서 오직 남은 사람들만이 돌아올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택함을 받은 민족이 되었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처럼 모래알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아졌으나 그들 모두가 구원을 얻지는 못했다. 오직 끝까지 믿음을 순결하게 지킨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을수가 있었다.
마지막날까지 남는 렘넌트들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인생 마지막날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세상은 점점 믿음을 지켜나가기 힘들어 지고 있다. 교회도 변질되고 신앙도 회색이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데로 가감하며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오직 말씀밖에 없는데도 말씀 이외에서 믿음을 얻으려 한다. 남유다가 하나님보다 앗수르왕에게서 믿음을 얻으려다가 심판을 당하게 되는것을 보라. 믿음을 지키려는 사람은 믿음을 주실뿐만 아니라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바르게 하고 의에 교육하시는 말씀을 항상 읽고 묵상하며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의인이라 칭하시는 것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8/7)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엄중한 책망과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있은후에 들려지는 예언은 깊은 위로와 소망의 소식이었다. 그것은 메시야의 도래와 그의 왕국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맺는것처럼 메시야는 그렇게 사람들이 주목하지도 않고 오히려 절망적인 환경에서 이 땅에 오신다는 예언이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이땅에 오셨지만 아무도 알아주지도 찾지도 않는 베들레헴의 허름한 마굿간의 구유에 탄생하셨다. 그러나, 미래에 그가 영원히 다스릴 그의 왕국은 상상만 해도 기쁨이 넘치는 곳이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한다.”
그리스도가 다스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와같은 곳이다. 타락으로 인하여 형성된 온갖 무질서와 양육 강식의 혼란이 제거되고, 온전한 평화가 넘치는 곳으로 소개되었다. 세상에서는 상극으로 여겨질 수 밖에없는 천적의 동물들이 메시아 왕국에서는 서로 친구가 된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창조때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자연이 모두 회복될뿐만 아니라 불의와 불공평이 난무하고 상처를 주고 받으며 속이고 갈등하는 현 세상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메시야의 왕국은 기쁨과 행복만이 존재하는 평화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하나님을 아는것이 마치 안개낀것처럼 뿌옇게 느껴지는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놀랍고 신비로운 곳에 들어갈 사람은 오직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세상에서의 힘들고 외롭고 고달픈 시간이 있더라도 그날이 오면 모두 회복되고 새롭게 될것을 소망하며 하루 하루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마음에 쌓아가길 소망한다.
(8/8)
*주님이 팔을 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4:26)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려고 팔을 펴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이 무색할정도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예언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선 안되는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마저도 택하신 백성들을 향하신 당신의 사랑으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가 그릇된 길로 나갈때 징계할수 밖에 없는 부모의 심정과 같고, 말을 전혀듣지 않는 양의 다리를 일부러 꺽어야 하는 목자의 마음과 같다고 할수 있다. 목자는 다리를 부러뜨린후에 극진히 치료하고 보살펴서 양으로 하여금 목자를 신뢰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죄로 인함이요 그들의 교만함 때문이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라고 하시지 않는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불가능하지만) 하나님 자리에 자신이 앉으려고 하는 자는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바벨론의 왕이 온 천하에 자신의 이름을 세우고 온 땅이 주인이 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바닥까지 떨어뜨리실뿐만 아니라 모든이들의 조롱거리가 되도록 하시겠다고 하셨다. 12절부터 나오는 ‘아침의 아들, 새벽별 혹은 계명성’ 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탄을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새벽별을 라틴어로 ‘루시퍼’ 라고 하기 때문에 사탄을 루시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 하더니 그렇게 말하던 네가 스올로, 땅 밑 구덩이에서도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숭배하게 만드는 사탄의 미래는 이미 정해져있다. 그리고 그에게 포로된 이 땅의 모든 악한 존재들과 인생들의 미래도 그와 같을 것이다. 하나님은 대적하고 도전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고 믿고 의지해야하는 대상이다. 인생의 교만을 내려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앞에 겸손히 무릎꿇자!
(8/9)
*백성을 신실과 사랑으로 다스릴 왕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16:5)
“다윗의 가문에서 왕이 나와 신실과 사랑으로 그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
모압에게 갑자기 임한 심판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 지금 하나님은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과 같이 하나같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힘과 경제력을 의지하는 강대국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이어가고 계신다.
그중에서 모압에 대한 심판예언은 이사야가 듣고 잠시 가슴 아파하며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이유는 다른 국가와 달리 모압은 이스라엘의 형제 국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두딸의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민족이지만 피가 섞인 형제이기 때문에 심판소식을 듣자 먼저 그 민족을 불쌍히 여기며 애통한것이다.
이사야선지자의 탄식과 애통함을 보셨는지 하나님은 다른 국가들과 달리 모압민족에게 심판에서 구원될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셨다. 그것은 남유다왕국에 조공을 바치고, 앗수르의 압박때문에 모압땅으로 피신한 백성들을 숨기고 지켜달라는 요청에 응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방도의 영적인 의미는 모압의 진정한 구원과 안전이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므로 하나님께 나아오고 피하라는 것이다.
“다윗의 가문에서 왕이 나와 신실과 사랑으로 그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옳은 일이면 지체하지 않고 하고,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이와같은 예언에도 불구하고 모압은 결국 스스로 교만하여 이 제안을 거부하여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 모압에 대한 심판은 참 아쉬운마음이 든다. 심판을 피할 길이 열렸음에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교만은 스스로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메시야를 보내주셔서 멸망을 피할길을 주셨음에도 인생들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데로 행하며 주님을 외면하고 있다. 그들을 향해 성도들은 이사야처럼 탄식하며 애통할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해야 한다. 한 영혼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와 심판을 피할수 있도록 중보기도 해야 한다.
(8/10)
*그때 강대국 백성은 만군의 주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어느 곳으로 오게 됩니까? (18:7)
“강대국 백성의 만군의 주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곳 시온 산으로 올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시대 주요 강대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성경에는 ‘구스’ 라고 기록된 에디오피아를 향한 심판을 예언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준다.
그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앗수르가 결국 남유다에 의하여 무너질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물을 준비하여 시온(예루살렘) 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이 세상 사람들아, 땅에 사는 주민들아, 산 위에 깃발이 세워지면 너희가 보게 되고, 또 나팔 소리가 나면 너희가 듣게 될 것이다.”
아무리 초강대국일지라도 만군의 하나님앞에서는 추풍낙엽같이 쓰러질수 밖에 없다. 그당시 초강대국들의 심판 예언이 이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될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 어떤 나라도 그저 하나님의 심판아래 무릎꿇게 될것이다.
구스왕이 예언을 믿고 시온에 찾아와 하나님께 복종한것처럼, 급변하는 시대와 문화에 섞이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그럴때일수록 더욱 다시오실 메시야의 재림을 소망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이시대 초강대국인 미국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도된 자들은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기다렸던 신부들처럼 지혜롭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겉사람은 후패할수밖에 없지만,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인생이야말로 다가올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존귀한 사람이다.
(8/11)
*주님이 이집트를 치신 후에 바로 하시는 행동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납니까?(19:22)
“주님께서 이집트를 치시겠으나, 치시고 나서는 곧바로 어루만져 낫게 하실 것이므로,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실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한시대를 호령했던 강대국들의심판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는 전통적인 강호이자 이스라엘과는 요셉을 통해 우호적이었다가 그가 죽은 이후로 적대국이 되었다. 400년동안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려먹은 나라이다.
신흥강국들의 탄생으로 힘이 많이 쇠퇴하였으나 여전히 쉽게 넘볼수 없는 국력을 가졌고 역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던 이유이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치시겠으나, 이 후에 회복시키실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케하심을 통해 그 나라가 하나님을 드디어 신뢰하며 돌아오게 될것이라며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하도록 하셨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 예언은 신약시대가 도래한 후에 복음이 이스라엘을 통해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온 세계에 전파될것을 알려주고 있다. 복음전파를 통해 민족과 민족을 헐고 사람과 사람의 장벽을 허물게 된다. 믿음의 세계는 이처럼 장벽이 있을수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이렇게 모든것을 뛰어넘고 극복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어 믿는 자들을 하나의 띠로 연결지어준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것이 결단코 없다!!!
(8/12)
*주님은 목마른 피난민과 아라비아의 피난민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십니까? (21:14)
“목마른 피난민들에게 마실 물을 주어라 데마 땅에 사는 사람들아, 아라비아의 피난민들에게 먹거리를 가져다 주어라.”
이 예언은 훗날에 아라비아가 앗수르의 침략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것이라는 것이다.
아라비아 또한 남유다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었던 나라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하나님외에 다른 그 무엇을 의지하는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신다.
사람이 의지하는것이 사람이든지, 물질이든지 결국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시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어린아이같이 심플하게 하나님만을 믿어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믿기지 못할 명령을 받게된다.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허리에 두른 베 옷을 벗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3년을 살면서 예언하라고 하신것이다. 남유다가 의지하려는 애굽사람들이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벌겨벗겨져서 끌려가게 될것이므로 애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예언이었다.
놀랍게도 이사야는 3년을 그 명령대로 순종하였다. 얼마나 수치스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그런데 그는 그걸 수치스럽게 여기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똑같이 받고 행동한 것이다. 나는 왜 이사야를 위대한 선지자로 하나님이 사용하셨는지 이유를 찾을수가 있었다.
위대한 선지자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기 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명령이면 그대로 단순하게 따르는 사람인 것이다. 요나선지자와 비교가 되는거 같다. 그리고 나 자신과도 비교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따르는 성도들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할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담대하게 순종하는 삶에 도전하자. 성령께서 도우시리라!
(8/13)
*만군의 주님은 그 날이 오면 단단하게 잘 박힌 못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22:25)
“그 날이 오면, 단단한 곳에 잘 박힌 못이 삭아서 부러져 떨어질 것이니, 그 위에 걸어 둔 것들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이 예언은 엘리아김을 남유다의 국고를 맡을 인물로 세웠으나 그가 부패하여 징계를 받게 될것에 대한 내용이다. 원래 그 자리는’셉나’ 라는 사람이 맡고 있었지만 그가 마치 왕과같이 살려고 하는 교만한 계획을 꾸미자 하나님은 그를 쫒아내시고 엘리아김을 세우셨다.
엘리아김에게 하나님은 셉나가 가졌던 모든것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유다집안의 아버지 같은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을 것이다. 단단한 곳에 잘 박힌 못같이, 내가 그를 견고하게 하겠으니 그가 가문의 영예를 빛낼 것이다.”
이와같은 엄청난 서포트를 하나님께 받은 엘리아김이 하나님께 충성을 하다가 어느 날 교만해 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부와 영예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자 ‘잘 박힌 못이 삭아서 부러져 떨어질 것이다’ 고 예언을 선포하셨다.
그렇게 하나님께 다윗처럼 경건하고 훌륭했던 인물도 변질시켜 버리는것이 세상의 권력이요 물질인 것이다. 남유다의 정치권이 이렇게 전적으로 타락하면서 남유다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신 말씀을 평생 마음에 담아야 한다. 교만의 마귀는 늘 인생을 하나님을 대체할 무언가를 집착하게 만든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간에 믿는 사람은 늘 자신의 삶에 말씀이라는 파숫군을 세워 교만이 활개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