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
*주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무엇이라고 칭하고 계십니까? (43:10)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이렇게 한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고, 오직 나만이 하나님임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속하셨고 지명하여 불러주셨다. 지명하여 불러주신다는 의미는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명하여 이 땅가운데서 불러주신 하나님을 알고 믿는자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것이 있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보라 이제 내가 새 일을 하려고 한다.”
믿음을 갉아먹는 한가지 원인이 바로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소위 ‘왕년병’ 에 걸리면 현재가 위태로울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왔음에도 과거에 집착하자 결국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프로젝트’ 가나안 입성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가나안 세대는 달랐다. 그들은 과거 부모세대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말에 순종하며 오직 하나님이 행하실 약속 ‘새 일’ 을 기대하며 요단강을 건넜으며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지명하여 불르시고 가장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자. 그런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과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소망을 두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두고 오늘 수고하며 감사하는 사람이다.
광야세대를 본받지 말고 가나안세대를 본받아 우리 앞에 ‘새 일’ 을 행하시는 주님만을 의지하자.
(8/29)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기억하며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44:21-22)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지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 내거 너의 죄를, 짙은 구름을 거두둣 없애 버렸으며, 너의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였으니,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죄로 인하여 심판을 당해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가지를 예언하도록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구원자이시라는 것이다.
남유다 백성들이 세상의 우상에 눈이 멀고 귀가 닫혀서 이 진리를 잊어 버린것을 책망하신다.
“백성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할때 남유다 백성들과 같이 세상의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시선을 도난당할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물결이 거세고 바람만 조금 일어도 정신을 못차리고 마치 베드로처럼 조금전까지 걸었던 바다속으로 빠져 들고 마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이신 하나님,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언제나 시선을 그분께만 맞추는 사람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신것을 기억하며 늘 삶의 시작과 끝을 모두 하나님께 두는 사람이 의로운 자녀인것이다.
오늘도 예배의 은혜를 사모한다면, 그분앞에 나아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두자.
(8/30)
*주님이 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45:4)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함이었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고레스는 남유다를 정복하고 멸망시킨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멸망시켰던 페르시아의 왕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왕을 부르신 이유는 바벨론 포로로 있었던 남유다 백성들을 본국 유다 땅으로 되돌려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영광스러운 직위와 이름을 주셨는데 그 이유를 그에게 정확하게 알게 하셨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하나님의 계획은 놀랍기 그지없다. 하나님의 자녀 사랑은 신비스러울 만큼 아름답고 눈부시다.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것은 무조건 지키시는 신실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멘!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들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으신다. 우리가 물가운데 혹은 불가운데로 지나갈때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이 보유하신 주권적인 능력이다. 이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지 않는것은 있을수가 없다.
뭘 얘기하는 건가? 이래도 두려워할건가? 이렇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데도 주님만 믿지 않을것인가?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나는 왜 이다지도 마음이 든든해지는지 모르겠다. 물불 가리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때문에 정말이지 몸 둘바를 모를 정도로 황홀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손을 꼭 잡고 계심을 느낄수 있는가?
그렇다면 하루에 한번 만이라도 아버지와 눈 마주치며 한마디만 해보는건 어떨까?
“아버지때문에 오늘도 든든합니다!”
(8/31)
*백성들이 사막으로 갔음에도 전혀 목마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48:21)
“주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을 내셔서 그들로 마시게 하셨고, 바위를 쪼개셔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하시는 계획은 정말 언빌리버블 놀랍기 그지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답게 스케일이 우리와 차원이 다르시다. 인간이 아무리 바위를 갈라보아도 그곳에서 물이 솟아나오도록 하는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바위안에서는 물이 제공될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와 공간을 초월하시고 그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으시다. 만약 능치못할일이 한가지라도 나온다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더이상 전능하시지 않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따르기만 한다면 어떤일이 일어날까?
“네가 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였어도, 네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네 공의가 바다의 파도같이 넘쳤을 것이다. “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아낌없이 당신의 전능의 보따리를 풀어 주신다. 그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며, 그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그저 자기의 뜻만을 쫒아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워 하신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께 안타까운 심정을 드리는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세상에 알리는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그 소리를 통해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비록 이땅의 교회가 세상으로 비난을 당하고 있지만 신자들은 더욱 올바른 믿음으로 주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기만을 간구하며 그 뜻대로만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
(9/1)
*주님은 땅 끝까지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무엇으로 삼으셨습니까? (49:6)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 으로 삼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빛으로 삼으시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시겠다고 말한다. 이 예언은 메시야가 오시면서 신약시대에 정확하게 성취가 되었다.
하나님은 남유다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결국 그들을 통해 온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려는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언도 하나님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 교회와 성도의 사명은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일깨워 주신다. 이 중차대한 사명에 우리는 적합한가? 용기가 있는가? 준비가 되어있는가? 글쎄,,, 어려운 질문이지 싶다. 분명히 쉽지않은 사명이지만 하나님이 누구신가? 모든 일을 계획안에 행하시는 분이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의 계획이 보이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과 영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의 입술에 말씀을 넣어주셔서 말하게 하신다. 우리 입술의 말을 사용하셔서 곤고한 자를 도우시도록 하시고
절망에 빠져있는 자에게 소망의 메세지를 전하게 하신다.
우리가 오늘도 말씀을 읽는 이유가 바로 주님의 사명을 받들기 위한 준비이며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말씀을 나의 입술에 넣으시기를 기도하며 내가 서 있는곳에서 세상의 빛이 되자.
(9/2)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에게 함성을 터트리고 함께 기뻐 외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2:9)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하나님은 포로된 예루살렘 유다백성을 다시 구원해 주실것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유다백성의 각성을 요구하셨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소망을 잃어버리고 마치 영적으로 혼수상태에 빠져있지만 반드시 돌아올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동할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반드시 나의 백성은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과 내가 그들에게 말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 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라고 예언을 선포한다.
이 예언은 남유다의 포로생활이 끝나고 유다땅으로의 귀환을 전하고 있지만, 신약시대에 오실 메시야를 또한 예언하고 있다.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곧게하라’ 는 사명으로 이 땅에 희소식을 전한것처럼 신자들도 온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다.
남유다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권력자를 더 두려워하여 멸망당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세상의 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의 삶가운데 팬데믹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를 두려워하기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그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때이다.
세상이 줄 수없는 오직 하늘로 부터 임하는 평화가 있음을 믿을뿐만 아니라, 이 복된 소식을 전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누리는 자가 복이 있다.
(9/3)
*그가 찔리고 상처를 받은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53:5)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53장은 이사야서에서도 가장 뚜렷하고 정확하게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곳이다. 특히 이 예언에는 메시야가 오셔서 당하게 될 무서운 고난을 말하고 있다.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메시야가 영광을 받지 못하고 고난을 당한 까닭이 무엇인가?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우리는 다’ 라는 의미는 인류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한사람도 예외가 될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지셨다는 뜻은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명백한 메시야에 대한 대속의 예언이 기록되었음에도 정작 메시야가 오셨을때는 다수가 믿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도 여전히 불신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메시야 예언을 믿고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결국 인간의 어떤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믿게하시는 은혜임을 감사해야 한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된 사람은 이제 적극적으로 불신자들에게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전하고 전하세 모두 증인되리라~’ 는 찬송처럼 먼저 믿은 축복을 자신만 누릴것이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나타내고 전하는것이 신자들의 가장 큰 사명이다.
(9/4)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56:2)
“공평을 지키고 공의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안식일을 지켜서 더럽히지 않는 사람, 그 어떤 악행에도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사야의 예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면서 그들의 삶이 이렇게 변화되기를 선포하였다.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비결은 그의 말씀을 일시적으로 듣는데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철저히 지키고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혈통, 신분, 건강상태는 결정적인 제약이 되던시절이었다. 즉, 이방인, 종, 불결하다고 판명되는 질병에 걸리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수 조차도 없었던 것이 율법이었다.
하지만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면 제일 큰 변화가 일어나는 부분이 구별없이 하나님께 나아올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방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온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차별하신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고자(the eunch)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들만을 구원하시려했던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오시도록 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시기 위한 선택이셨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착각속에 있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고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께 범죄하였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주님을 찾고 나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과 다르며 그의 계획은 우리의 것보다 휠씬 크고 넓다. 그러므로 나의 계획과 생각은 한계에 다다를것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한계란게 없다. 우리의 계획과 생각을 하나님께 두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다.
(9/5)
*주님은 어떤 금식을 기뻐하십니까? (58:6-7)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꺽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께 저지른 죄악가운데는 외식하는 행위가 많았다. 남에게 보이기식의 신앙은 능력이 없다. 하나님이 그 신앙에 역사하지도 않고 능력을 부어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전통과 율법에 의하여 금식을 했지만 식만 금지했을뿐 삶은 여전히 세상과 내통하는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금식하며 기도하는것을 기쁘게 받으신다. 금식을 결심하고 기도하려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잠시 내려놓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식하며 기도하길 원하는 사람은
금식하는 동안의 자신의 삶을 더 유의하여 금식이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금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하신다.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금식기도는 일반적인 기도보다 더 희생과 겸손을 요구한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말씀대로 믿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의 기도와 삶을 빛과같이 물 댄동산처럼 축복하실것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위기가 찾아올때 급하게 금식기도를 할때가 많지만, 평소에도 자신의 삶을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할때 금식을 작정하고 삶을 개혁시킬수가 있어야 한다.
(9/6)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억압을 당하고 고통받는것이 모두 하나님 탓이라고 비난하였다. 자신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지키며 살았는데 왜 그런 고난이 자기들에게 찾아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리기를 모두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더 논리적인 말을 전개해 나가시는데, 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는것도 아니고 나의 귀가 어두워서 너희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환난과 억압속에 내버려두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들의 회개없는 범죄, 즉 그들의 손으로 저지르고, 입술로 내뱉는 온갖 거짓과 외식적인 행위들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히려 떠나도록 한것이다.
“그들의 발은 나쁜 일을 하는 데 빠르고,,,그들의 생각이란 죄악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며, 그들은 안전한 길을 알지 못하며, 스스로 길을 굽게 만드니, 그 길을 걷는 모든 사람에게 안전이 없다.”
이시대에도 여전히 유다백성들같은 마인드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셔서 새 삶을 시작한 신자들이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 안에서 늘 기뻐하며 살아가길 원하신다.
하지만 신자들, 소위 신앙생활을 한다는 자들은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뵙는 시간이 거의 없다. 뭐가 그리 바쁜지…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한다. 신앙생활을 한정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주일에 교회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종교생활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전부를 지켜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전능자의 그늘 아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다. 거기에 물댄 동산같은 채워짐이 있다.
멀리 떠나는 자녀에게 아버지는 성경을 주면서 매일 한장씩 꼭 읽어라 하나님이 매일 너를 지켜 주실거라고 당부했다. 길을 떠나는 자녀는 자신에게 돈을쥐어줄줄 알았는데 성경한권만 주는 아버지가 싫었다.
당연히 아버지가 준 성경은 던져버리고 자기가 원하는데로 살았는데 어느날 너무 삶이 힘들고 괴로워지자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서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화를 내다가 문득 구석에 떨어진 성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아버지 생각이 나서 더 화가나 그 책을 버리려고 집어 들었는데 그 안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그 글에는 “얘야,매일 한장씩 성경을 꼭 읽어라 하나님이 널 지켜주실거야.
(9/7)
*하나님이 백성을 구원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은 어떻게 불리게 됩니까? (62:11-12)
“사람들은 그들을 ‘거룩한 분의 백성’ 이라 부르며 ‘주님께서 속량하신 백성’ 이라 부를 것이다. 사람들은 너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사랑한 도성’ 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은 도성’ 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섭리로 예루살렘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될 백성들에게 불려지게되는 호칭
은 보니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요 사랑하시는 민족임을 인정받게 됨을 볼수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갈 땅도 역시 하나님이 거하시고 돌보시는 곳으로 인정받음을 보게된다.
이 예언은 메시야가 오심으로 인하여 임하게 될 신약교회와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다. 세상이 여전히 믿는 자들을 픽박하고 교회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도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대신 싸워 주셔서 택하신 교회와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것이다.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고,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고,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결국 마지막 날 세상은 이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진짜 하나님의 나라와 자녀들이었음을 인정하게 되는 기쁜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에게 성도들에게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이미 교회와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을 통해 승리 했음을 믿고 그 날이 다가옴을 기뻐하며 항상 찬송하며 나아가야 하겠다.
(9/8)
*주님은 어떤 사람을 만나 주십니까? (64:5)
“주님께서는,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주님의 정의(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 그 길을 기억하며 그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길이 물 가운데로 가고 불 가운데로 지나는 길이라 할지라도 담대하게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이와같은 삶을 선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쁘게 이 선을 행하는 자에게 함께하시는 복을 더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킨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해 주시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성경적인 악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성경적인 악은 하지 말아야 할 일, 즉 성경이 금지하는 일을 하는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다른 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것도 포함하고 있다. 소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를 말한다. 왜 이와같은 죄를 저지르게 될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인간의 의는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길이 아닌 세상의 길로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간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 공의로 통치하시는것보다는 자신의 의를 더 쫒아가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하였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진흙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무엇인가 굉장한 것을 이루어 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토기장이의 눈에는 좀 더 나은 진흙(?) 정도가 아닐까. 진흙이 가진 의로서는 진흙이라는 존재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하지만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질때는 무엇인가 목적에 맞게 만들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이렇게 흙과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목적대로 빚어 가시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의를 믿으며 순종하는 것이다.
(9/9)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백성들은 어떤 삶을 누리게 됩니까? (65:18)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즉 메시야 시대에 대하여 구약과 완전히 다른 삶이 될것을 예언하였다. 신약시대는 구약시대와 달리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때가 도래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예전과는 완전히 차원히 다른 세상이 된다. 이방인이든, 아이든, 여자든, 환자 소위 구약시대에 존재감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소유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은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
그리스도의 구원과 부활에 동참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계시록에 예언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워무궁한 삶을 얻게 된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또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이와 같이 변화된다.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지키시고 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는 아예 눈에서 눈으로 하나님을 마주하며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구약시대에 신약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것을 보면서 신약 마지막 예언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손 꼽아 기다려야 하는 이유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는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리와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을 것이다.’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믿는 신자들은 부지런히 이 땅에서 천국 시민의 모습을 앞당겨 살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자가 누구인가?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먹이사슬,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 해치거나 상해하지 않고 누구와도 화평을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땅은 신자들에게 천국을 미리 경험해 보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다가올 천국의 삶을 기대하는가? 성령 안에 거하며 늘 내가 걸어가는 길이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길, 뜻이 될수 있도록 진리 안에 거하자.
(9/10)
*주님은 모든 사람이 매달 어느 때에 주님 앞에 경배하러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66:23)
“매달 초하루와 안식일마다 모든 사람이 내 앞에 경배하려고 나올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대한 구약식 표현이다. 모든 혈육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모두 다 포함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유롭게 하나님앞에 나오게 된다. 구약의 이 예언은 신약시대에 걸쳐 성취된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믿는자가 일어나 예배의 자리로 나오게 되었다. 아무런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복음은 전해질수 가 있게 되었고 복음을 받은 자는 환경과 형편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가 있게 되었다.
“그들이 나가서 나를 거약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다.”
무섭고 소름끼치는 예언이다. 하지만 이 또한 그대로 성취가 될 것이다.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이 찾아오게 될 수 밖에 없다.
구원의 문은 열려있고, 은혜의 시대는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 있다. 신자들이 주님의 가까이 옴을 느낄수록 더욱 더 세상을 향하여 불신자를 향하여 경종을 울리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