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하나님이 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68:1)
-원수들이 흩어지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것이다.
시인은 온갖 종류의 다양한 원수들을 대면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그 원수들의 진로에 대하여 노래한다. 원수들이 득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대적할지라도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역사하시면 그들은 연기같이 날아가 버리게 하시며, 불 앞에서 초가 녹듯이 녹여버리신다.
시인은 의인들이 하나님이 일하셔서 임하게 될 원수들이 맞게될 진로를 깨닫고 원수앞에서 기뻐하고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날마다 주님을 찬양할수 있는 자가 그런 믿음을 가진 자이다. 그는 주님이 자신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은 69장에서 더욱 더 전폭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노래한다. 자신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자들로 인하여 아픔과 고통이 목까지 물이 차듯이 차올라오고 깊고 깊은 수렁에 빠진것같은 마음에 이르렀을때에도 그는 다시 원수의 진로와 의인의 진로를 기억하고
마음을 주님께 열어둔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자신의 믿음과 신뢰가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우리가 늘 입으로 하나님의 자신의 구원자 되심을 간증한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마음에 두고 늘 붙잡을수 있어야 한다. 내가 좀 어렵다고 흔들린다면 그동안 나 자신의 고백과 간증을 들은 사람들은 의심과 배신으로 요동할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내가 당하는 모욕과 아픔을 아시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누군지 더 잘 아시기 때문에 미리 하나님께
감사해 버려야 한다.
다윗은 원수들의 공격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해버렸더니 심령에 평안과 긍휼하심이 하늘로부터 임함을 경험했다. 먼저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며 감사함이 옳다.
(6/2)
*시인은 힘든 상황에서 주님을 어디에 비유합니까? (71:3)
-주님을 반석과 요새에 비유하였는데 특히 그렇게 비유한 이유는 ‘내가 어느 때나 찾아가서 숨을 수 있는 반석이 되어 주시고, 나를 구원하는 견고한 요새가 되어 주시 주시길’ 소망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잘 받았던 인물임을 성경은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언제나 받을수 있기위해서 필요한 행동은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언제나 주님을 찾고 갈망하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시인은 ‘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어려서 부터 주님만을 믿었고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때에 나를 받아 주신 분도 바로 주님이셨기에 내가 늘 주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 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어머니가 신앙을 가진 사람이어서 엄마 뱃속에서 부터 신앙을 얻었다는 사람을 모태신앙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모태신앙이란 모태 안에서 신앙을 받은 경우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이 신앙 유무와 상관없이 자신이 이땅에 태어나게 된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을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섭리에 늘 감사하고 찬양할수 있는 사람이 모태신앙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나는 선천적 모태신앙과 후천적 모태신앙으로 구분하고 싶다.
선천적 모태신앙이라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그러나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후에 신앙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후천적 모태신앙이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하나님을 믿는 깊이가 태어나기전 어머니의 모태에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 1장1절을 믿는 사람이 성경 전체를 믿게되는것처럼 자신을 태어나게 해 주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삶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며 은혜임을 자각할수 있는 사람이 된다.
다윗은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 이라고 고백하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기대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날때에 잠시 눈을 감고 나를 이 땅에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해보자. 하나님은 목적없이 계획없이 창조하시는 분이 아니시므로 나에게 주신 모태신앙을 발동시킨다면 그분에게서 분명히 길을 찾고 답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늘 믿고 간구하자. 나의 반석이시며 요새이신 그분께 늘 가까이 나아가자.
(6/3)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복을 누리는 자세와 행동은 무엇입니까? (73:28)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을 전파하는 것이다. 아삽이라는 사람의 시편이다. 그는 하나님이 마음이 정직하고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심을 알았으나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음을 고백한다. 그 이유는 의인들보다 악인들이 더 잘나가고 평안한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는 악한자들이 만사형통하는것을 보고 그것을 부러워하고 시샘까지 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아삽은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하며 그들의 삶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지금까지 섬기고 사랑했던 주님을 배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깨달았다는 뜻은 그가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질때 곧바로 하나님앞에 나아갔다는 것이다.
불평과 원망이 밀려올때 그 자리에 머물면 연쇄적인 망가짐이 발생하게 된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아 육체와 심령에 타격을 입게될거 같으니까 금방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 않은가? 비록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으나 요셉은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우리는 사람눈치보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아삽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자들에대한 의문을 다 해결한듯하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것이 우리에게 큰 복이요 그만한 축복은 이땅위에선 절대로 대체될수없다.
아삽의 노래처럼 믿는자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우리의 삶가운데 행하시고 또 행하실 일들을 간증하고 전파하길 소망한다.
(6/4)
*이 땅에서 억눌린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76:9)
-오직 주님 한분이시다. 아삽은 이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라는 노래를 지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리고 행하실 모든 일들을 통해서 우리 인생이 살아갈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한치의 오차도 실수도 없이 공정하게 판결하셔서 이 세상을 운행해 나가신다.
비록 불의가 일어나 정의를 무너뜨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아삽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선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길 간구한다.
시인은 하나님은 조급한 인간처럼 행동하시지 않으시며 차분히 기다리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들의 죄를 사함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악한 자들을 향한 분노와 진노가 잔에 넘칠때 악인들의 시간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으며 그들은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한다.
‘주님은 악인의 오만한 뿔은 모두 꺽어 부수시고 의인의 자랑스러운 뿔은 높이 들어 올리신다’
아삽은 두가지 대조적인 모습을 노래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뿔은 항상 ‘자존심’ pride 를 의미한다.
악인의 자존심은 항상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소유가 그의 pride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뿔이 아무리 높고 강해도 너무나 간단히 꺽어 부수어 버리실 것이다.
의인의 자랑스러운 뿔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의인의 자존심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다. 인생이 하나님을 자신의 뿔처럼 높이고 의지할때 하나님은 그 뿔과 그 뿔을 가진 인생을 더욱 높이 들어 올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자의 구원의 뿔이심을 날마다 찬양하라. 하나님의 높임을 받으리라.
높임을 받는다는 의미는 의인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그들의 옳음을 세상에서 인정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억울함을 당하여 괴로울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뿔이심을 기억하여 오직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께 나아와 한나처럼 호소하는 믿음을 가지라.
(6/5)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78:22)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의 구원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삽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신 일을 묵상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하였다.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행한 일들은 불신과 의심의 연속이었다. 놀라운 기적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여 주셨음을 알면서도 당장 눈 앞에 등장하는 문제앞에서 또다시 작아지고 연약한 마음을 보이기가 일쑤였다.
‘이 들이 모든 일을 보고서도,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지으며, 그가 보여 주신 기적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생애는 헛되이 끝났으며, 그들은 남은 날을 두려움 속에서 보냈다.’
아삽이 이 시편을 기록한 이유는 후손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믿고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심을 신뢰하도록 하는 반면에 그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에도 끝까지 불신하고 의심하다가 큰 진노를 받아 멸망했던 조상들을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멸망당한 조상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오히려 시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시험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멸하는 인생의 결말을 보게 된것이다. 성경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또 의심하는 자를 말한다. 왜 의심할까?
그것은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스스로 작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것도 하실 수 있을까? 에이,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것만큼은 힘들거야’ 이와같은 마음의 의심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모습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손에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시인은 잘 표현해 주었다.
우리가 만나는 현실이 나를 작게 만들수록 우리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의심하는 순간 하나님을 시험할수 있으니 의심병에 빠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능력의 팔을 의지하는 믿음을 보이길 소망한다.
(6/6)
*아삽은 하나님이 어떻게 해 주시기를 노래합니까? (80:19)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나타내어 달라고 노래하였다.
이 구절을 통해서 시인이 얼마나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갈망하고 있는지 느낄수가 있다. 80편 안에서도 나라를 회복시켜달라는 구절이 여러번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시인이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는것은 이 땅이 하나님의 소유이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나라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비록 범죄하여 진노를 당했으나 분명히 다시 돌아오셔서 새롭게 세워주실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 로 비유하고 있는데 포도나무가 쓰임받는 통로는 오직 열매뿐이다.
열매없는 포도나무는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기때문에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수 있도록 보살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전에 있던 열매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다 빼앗겼기 때문이다.
아삽은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이 이제 다시 하나님의 손길로 가꾸어 져서 주인을 위하여 의의 열매를 맺기를 노래하였다. 신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나라와 땅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범죄하고 있는 나라가 주님을 인정하고 회개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예수를 상징하며 예수의 몸이신 교회를 가리키기 때문에 역시 신자들은 교회의 영적회복과 부흥을 갈망하며 간구할수 있어야 한다. 교회와 신자들이 주님을 떠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높여 부를 수 있는 새 힘을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의 열매가 항상 맺히는 은혜를 간구할수 있기를 소망한다.
(6/7)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들 고집대로 내버려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81:1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따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은 ‘내버려두심’ 이다. 내버려둔다는 의미는 무관심을 뜻하며, 하나님의 무관심을 받는 인생이나 피조물이 있다면 그 자체가 가장 큰 저주이고 징계일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욥에게 창조주가 피조물을 어떻게 다스리고 지키고 보호하시는가를 일일히 설명해 주신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의 무관심은 인류에게 크나큰 재앙이 될것임은 기정사실이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라는 찬송가사처럼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는 길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혹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나라나 백성이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부인하진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인생의 비참한 최후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노래로 피력한다.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내 말을 듣기만 했어도 내가 가라는 길로 가기만 했어도, 나는 당장 그들의 원수를 굴복시키고, 내가 손을 들어서 그 대적을 쳤을 것이다.” 하나님이 믿는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이 말씀과 동일하다.
열심히 주의 말씀을 읽고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주의 음성을 듣는자가 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간섭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임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인생을 망치는 셈이 된다. ‘나를 주 앞에서 쫒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간곡히 간구했던 다윗처럼 주님과 늘 동행함을 인생의 최고의 기쁨과 행복으로 삼기를 소망한다.
(6/8)
*어떤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84:12)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84편은 고라자손의 시편이다. 고라자손의 시편의 특징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과 하나님의 집에 거하길 원하는 소망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한다. 주님이 계신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내 영혼이 주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하였다.
고라자손은 다윗을 통해서 성전 문지기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다. 문지기라는 호칭때문인지 사람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다른 직책에 비해서 관심을 받지 못하고 비중이 약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성전 문을 지키는 임무는 제사를 인도하는것만큼 중요한 사역이다.
성전 문지기는 그 문에서 악한자, 범죄한 자들을 분별해 내는 역할도 해야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충성스럽고, 주를 신뢰 하는 자가 맡게되는 일이다. 다윗이 고라자손을 그만큼 믿고 신뢰했다는 뜻이된다. 고라자손은 그들이 반역자의 후손임에도 그들을 믿고 귀한 사역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집에 머무를수 있는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주의 집 뜰 안네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신약성도들은 모두 성전 문지기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이 성전을 더럽히고 오염시킬수 있는 생각들을 막아 낼수 있어야 한다. 골키퍼가 있음에도 계속 골이 들어간다면 아무리 좋은 팀이라도 경기를 이기는건 불가능하다.
교회만 다닌다고 천국백성이 되는것도 아니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것도 아니다. 날마다 성전 문지기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는 자가 그런 삶을 살아갈수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신의 성전 문지기로 세우셨음을 깨닫자 그리고 오늘도 그 사명 충성되이 감당하여 모든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소망한다.
(6/10)
*주님의 구원은 어떤 사람에게 가까이 있습니까? (85:9)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님의 구원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던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였을까?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달아 항상 그에게 피하는 자였으며 하나님께 피할때마다 모든 좋은것에 부족함이 없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고라자손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듣고 따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아의 충동과 세상의 유혹에 반응하기전에 하나님께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은 가난하고 궁핍한 인생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살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기때문에 하나님께 길을 알려 달라고 매 순간 간구하였다.
또 한명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을 뽑으라면 나는 아브라함을 들고 싶다.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거리낌없이 하나님께 산제물로 바칠수 있었던 인물이 아닌가? 그의 이와같은 행동을 히브리서 기자가 분석하기를 ‘하나님이 명령하신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 는 온전한 믿음이 배경이라고 하였다.
하나님도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 말씀하신 구절이 떠오른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때로는 너무나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너무 약하고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누구든지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한없이 베푸신다고 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하는 기도자가 되어 매 순간 나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따라 나아가길 소망한다.
(6/10)
*시인이 주님께 부르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8:6)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 기도와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였다.
왜 그는 이런 비통함에 빠지게 되었는가?
이 또한 그의 고백가운데서 발견할 수가 있는데 ‘버림을 받아서 주님의 기억에서 사라진자와 같으며, 주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와도 같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믿는 자가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할때가 있다. 언제 이것을 느끼게 되냐하면 기도를 하면 마치 벽에 가로 막혀있는것같이 다 튕겨져 나온다. 이것을 허공을 치는 기도라고 하는데 고라자손이 하나님과 단절된 이유가 바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간섭함을 피하여 자유롭게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사는것이 세상에서의 천 날 보다 좋다고 고백했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성경은 서 있는자는 넘어질것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 잠시 세상의 자유를 누리려다가 하나님과 단절이 되면 회복되기가 쉽지 않음을 고라 자손의 부르짖음의 내용을 보아 알수 있다.
그는 관계회복을 위하여 밤낮으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으나 단절의 벽이 무너지지 않았던거 같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열어주시지 않으시는 이유가 고라 자손의 이전 고백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살아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그렇게 살지 못했을때 배신감이 드는쪽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통로는 기도와 새로운 삶밖에 없다. 믿음의 고백과 삶이 별개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를 매 순간 받을 수 있도록 성령충만을 위하여 기도하자.
(6/11)
*주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89:27)
-그의 자손을 길이길이 이어주며, 그의 왕위를 하늘이 다할 때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성실하시고 미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 미쁘다는 믿음직스럽고 미덥다는 의미로서 한번 하신 약속은 끝까지 지키시는 Promise keeper 이심을 가리킨다. 이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이 가는 표현인가!
하지만 기억해야할 한가지는 이 미쁘신 하나님의 속성이 벌을 내리실때에도 동일하시다는 점이다.
다윗의 집안을 하늘이 다할 때까지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나 만약 그 후손이 다위의 믿음을 져버리고 하나님을 떠날때에는 벌을 내리시고 죄에 대하여는반드시 댓가를 치르게 하시는데도 신실하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망이 되는 말씀은 그 가운데에서도 처음하신 약속만큼은 불변하다. 즉, 죄악가운데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 약속을 계속 실행해 나가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된 사람들은 이 약속이 변하지 않음을 신뢰하고 징계 가운데서도 기도하며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윗과 맺으신 그 언약이 상징하는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하심이다. 한번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백성은 결단코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미쁘신 하나님 이심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것을 이기며, 참으며, 견디게 하실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며 세상이 주는 유혹을 물리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을 믿고 우리도 promise keeper 가 되자.
(6/12)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어디에 머물게 됩니까? (91:1)
-시편기자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아래에 사는 자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지존자, 전능자는 하나님을 수식하는 단어이다. 그분의 은밀한 곳과 그늘아래는 어떤 곳일까? 인간의 능력으로 절대로 침범할수 없는 곳이며 세상의 환난과 재앙이 일어나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안전이 보장된 유일한 곳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딜까? 다들 밖에 나갈때는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다. 어디나 안전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서도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집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러나, 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일까? 만약 집안에서 가족들끼리 다툼이 나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아무리 집이지만 그곳만큼 불편한 곳이 있겠는가? 배우자끼리 서로 싸우고 나면 두사람 사이에 가장 어색한 곳이 집안일것이다.
그러므로 이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어느 곳이라 판단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가 하는것이 더 근접한 대답이 아닌가 싶다. 동물의 새끼들이 어미와 함께 있을때 극도의 안전감을 누리는것과 어린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있을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안전을 느낄수 있는 방편은 오직 하나님안에 머물러 있을때이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케게 하심이라”
(6/13)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벌하십니까? (94:21,23)
-의인의 생명을 노리고 무죄한 사람에게 죄를 씌워 처형하려는 자들을 벌하신다. 시인은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복수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한다. 특히 의인을 시기하여 악을 행하려는 자들을 반드시 찾아내어 징계하신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의인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행위와 마음까지도 꿰뚫고 계신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음을 믿고 당신의 소유된 백성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라
‘주님께서 나를 돕지 아니하셨다면, 내 목숨은 벌써 적막한 곳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
시인은 비록 자신의 생각이 연약하며 쓰러지려고 할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을 붙들어 주심을 믿었고 자신의 마음이 번뇌하고 번거로울 때에도 주님의 위로가 자신을 달래 주었음을 노래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렸다면 우리의 농부되신 하나님이 일일이 간섭하시고 보호하셔서 번성하게 하실것이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름을 나타내는 인생을 살아 갈수 있다.
갈렙이 85세가 될때까지 마음과 건강이 시들어지지 않도록 한것은 그가 40년전에 약속하셨던 하나님을 항상 기다리며 의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메말라져야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의 약속만을 굳게 믿고 몸과 영혼을 날마다 훈련되어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 오늘도 하나님의 눈이 쉬지 않고 우리를 추적해 주실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