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마가복음11장 “의심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 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침에 무화과나무옆을 지나가다가 완전히 마른것을 보고 어제 예수님의 저주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신데로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고 당부하셨습니다.
의심없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 속에 그런 모습을 찾을수 있을까요? 아마도 가족과 함께 식사할때 볼수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보고 나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지 의심하는 자녀는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그렇습니다. 엄마를 온전히 사랑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없는 믿음에는 행동이 수반될수 밖에 없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면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순종하게 됩니다. 자신이 구할때 어떤 답을 주시든지 결국 자신에게 가장 좋은 답이란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도 엄마가 사랑으로 만들어 주신 음식을 편식없이 먹으면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맛없어 보여도 꾹 참고 먹으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사랑이 희미해지면 의심이 찾아오게 됩니다. 배우자나 형제, 부모와 자식간에도 의심을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의심이 스며듭니다. 그리고 의심병의 배후에는 악한 마귀가 있습니다. 하와에게 의심병을 심어준것도, 가룟유다의 마음에 불신의 씨앗을 뿌린것도 모두 사탄이었습니다. 아무리 의심이 들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어버리면 의심병이 치료됩니다.
문둥병이든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치료법을 의심했지만 결국 믿어버렸을때 기적이 일어난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는자에게만 임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랑하십시요. 믿음의 역사를 보게 될것입니다.
(5/14) 마가복음 12장 “가이사에게 바쳐선 안되는 것”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가이사를 세상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쉬울거 같네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이사의 것, 즉 세상이 정해놓은 도덕성이나 법 질서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세상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고 선하게 앞서서 지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성과 인격을 갖추어야 하는것이 신자들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넓게 해석하면 이세상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땅도, 하늘도, 바다도,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을 고려해 볼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길 원하시는 것으로서 바로 우리의 경배와 예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경배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는 마음에는 절대로 다른 불순물이 섞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폭넓게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것, 즉 우리가 바쳐야 하는것은 우리의 인생 전부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 원하는 일에 바쳐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왜 신자의 삶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바쳐야 할까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유자이시고 우리의 삶을 세상이 준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자신의 유익이나 휴가를 위해서 타협하거나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것을 세상이 모욕하거나 빼앗으려고 할때는 목숨걸고 하나님의 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는 주는것은 하나님의 법에 금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마음이 부족해 보입니다. 예수는 믿어도 내건 내가 챙긴다는 마음인듯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려놓더라도 세상에서 얻을수 있는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철저히 구별할 수 있는 마음과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생명처럼 여길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나 성도가 세상의 정치나 대세에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고 오직 반석같은 말씀위에 세워져 나갈수 있도록 기도하며 순종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5/17) 마가복음12장 “하나님 사랑이 제일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사람들은 첫째를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소중하게 취급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일것입니다. 성경에서 찾아 볼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그와같은 내용을 읽을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첫째만 이뻐하시고 나머지는 관심이 없다는 오해는 금물입니다. 하나님이 첫째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의미는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을 귀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항목들이 포함이 될것이며 그 항목들을 대하는 인생의 진지한 마음을 눈여겨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첫째를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도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 우리 삶의 첫번째가 되어야 한다고 아주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바칠정도면 아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에 이와같은 전제를 주신거 같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강한 어조로 명령하셨다면 거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은혜의 선물이 어떤것이 될지 기대해 볼만 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 역사나 성경을 봐도 이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은 범상치 않은 대우를 받는것을 발견할 수가 있으며 예수님도 서기관에게 유사한 축복을 말씀하셨는데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이 말씀을 하신것은 서기관이 하나님 사랑이 그 어떤 것보다 먼저요 귀한것임을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은 확실한 구원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하나님만 믿으면 천국가고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정말 믿는지에 대하여 의구심이 들때가 있는데 그들의 고백과는 달리 하나님을 첫째로 여기며 사랑하는 모습이 확연히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자신의 인생의 첫번째로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에서 이 모습은 확연하게 드러나야만 뚜렷한 증거가 될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두 질문을 절대로 떼어놓을수 없는 것이며 분리시킨다면 외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믿음의 삶에 하나님이 첫째로 여김을 받으시는지 영적인 서열(?)을 확고하게 다져보는게 어떨가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뒤로 밀릴때 하나님의 기억속에 우리의 삶도 희미해 지겠지만 주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언제나 먼저요 첫째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늘 합한 자가 될줄로 믿습니다.
(5/18) 마가복음12장 “양이냐 질이냐”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모습을 가장 자세하게 표현한 말씀이 부자와 과부의 헌금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헌금함에 헌금을 어떻게 넣고 있는지를 자세히 보시고 계셨습니다. 여러 부자들은 헌금함에 많이 넣었는데 그에 반해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는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제자들은 누가봐도 부자들이 넣은 헌금이 훨씬 많다는것을 아는데도 예수님의 판단은 참으로 의아했습니다.예수님의 설명을 들어보세요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예수님이 보시는 헌금의 기준은 ‘질’ 이지 ‘양’ 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액수만 보았지만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액수인 헌금의 질, 곧 과부의 마음을 보신것입니다.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것은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자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여러부자들에게 두렙돈만 남게 되었다면 그들은 전부를 과부처럼 드릴수 있었을까요?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이 그들이 드린 많은 헌금을 두렙돈 보다 작게 여긴것을 볼때에 그들의 헌금드리는 마음은 분명히 과부와는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헌금은 신자들의 영적인 삶에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많이 드리는지 적게 드리는지 그 양은 우리가 정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에 많은것도 주님께는 아주 극소량이 될수도 있고, 작아 보이는것도 하나님께는 아주 크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헌금의 기준은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시대에도 헌금함을 대하여 앉아 모든 헌금을 지켜 보실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급하시는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는 신앙으로 항상 질 좋은 헌금을 드리시길 원합니다.
(5/19) 마가복음 13장 “끝까지 성령만 따르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빋으리라”
말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경고는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멸망(주후70년에 멸망)이자 또한 이 세상의 끝에 일어나게 될 멸망에 대한 징조이기도 합니다. 멸망의 징조는 세가지로 분류되는데 전쟁,지진, 기근입니다. 이 세가지 징조로 인하여 발생하는 현상들은 사람들의 배신과 핍박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이와같은 현상들이 지금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나 자신이 이런 일에 연루되지 않더라도 내 이웃가운데 혹은 세상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의 종말에는 자연재해와 인간재해가 분명히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연재해는 인간들의 범죄로 인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며 인간재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전성을 잃어버림으로 나타나는 도덕성과 인격, 그리고 인간성이 무너지게 되는 현상입니다. 지금 지구 곳곳에는 이와같은 현상들이 여기 저기서 발발하고 있다는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과거에 로마군에 에워싸워 고립되었을때 예루살렘 성안에는 끔찍한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었습니다.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이 악한 마귀의 권세에 에워쌈을 당하게 된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게 될것을 무시할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악한 사탄의 공격에 대한 방책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두가지 방편을 잘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말과 행실을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따르는 자가 늘 주의하고 마지막 날에도 끝까지 견딜수 있습니다.
이 땅의 멸망은 분명히 그리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일이 없고 평안하다고 해서 무뎌지면 안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영적인 눈으로 살펴서 믿음을 담대하게 지켜 나가길 기도합니다.
(5/20) 마가복음13장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말세지말에 일어날 현상가운데 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운 환난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여 병들고 타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게 될것이라’ 고 하셨다. 멸망할 가증한 것이란 분명히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서지 못할곳이란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자리입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와 믿는 자들을 미혹하여 믿음에서 떨어지도록 이끌게 될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때에도 온갖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전파하여 유다백성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가증한 우상을 비밀리에 숭배했으며 거룩한 제단을 오염시켰을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바른 신앙에서 떠나도록 이끈 장본인들이다. 이시대는 어떨까요?
원수마귀에게 미혹된 거짓목회자들이 권력을 얻어 기독교 공동체를 타락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태는 말씀을 왜곡하고 부인하며 타 종교와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종교 다원주의의 바람을 타고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외치며 종교통합을 선언하였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가 세상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도 너무나 쉽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더욱 거세게 세상의 문화와 관습을 조장하여 기독교를 공격할것이며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배교하여 헛된 거짓 신앙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함이라’ 는 말씀처럼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믿는 자만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듯이 말씀의 불을 켜서 자신의 영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합시다.
(5/21) 마가복음13장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마지막때에 일어날 징조와 현상들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환난의 끝에 임하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르리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초림때는 아무도 모르게 오셨지만 재림때만큼은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사람도 못봤다고 핑계대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날 모든 인류는 보게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구원받을 인생이 누구인지 말입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의 구원의 결과도 함께 보게 될것입니다. 그날, 바로 그 날에 모든것이 밝히 드러나게 될것입니다.
한쪽에서는 환성과 찬양이 그리고 한쪽에서는 절망과 절규의 소리가 대조를 이룰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은 분명히 옵니다. 지혜로운 신자는 그 날을 기대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영적인 잠에 빠진 자가 있다면 정신 차리고 깨어나야 합니다. 비록 그 날,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없지만 나는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땅에서 사는동안 후회없이 주님만을 믿고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나의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5/24) 마가복음14장 “유월절과 성찬”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월절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게 하심을 감사하여 드리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의 중심은 열재앙의 마지막 장자재앙이 그들에게서 피해간(Pass over) 사건이며, 이 재앙을 통해서 바로는 하나님께 항복을 하였고 이스라엘은 약400년만에 포로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 유월절을 지내시며 아주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떡과 포도주를 자신의 몸과 피로 간주하시며 언약이라는 말씀을 하신것입니다. 이 선포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유월절을 신약의 성찬으로 교체하신다는 놀랍고도 거룩한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키는것처럼, 이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기념하여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유월절만 기억하며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과거에만 얽매여 있습니다. 그 유월절의 진짜 주인공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믿지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인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옛언약을 지나 새언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세상의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포도 나무에서 난 것(이세상의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성찬식을 통해 성도는 이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쾌락과 행복은 모두 사라질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천국의 행복은 영원합니다.
(5/25) 마가복음14장 “말보다는 순종”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나마 뒤에라도 행동이 따라와 주면 괜찮을텐데 말따로 행동따로가 문제가 되는거 같습니다. 베드로는 두번이나 예수님께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그리하지 않겠노라고 힘주어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공교롭게도 닭이 두번 울기전에 세번이나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말보다 행동은 파급효과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곧바로 성취될 조짐을 보였는데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 고난의 잔이 너무 힘들어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해 줄것을 또 두번 부탁했으나 제자들은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적어도 베드로라면 깨어서 예수님 옆을 지켰어야 언행이 일치가 되는건데 안타깝게도 그의 행동은 두번이나 내뱉은 그의 말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말은 언제든지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올바로 믿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것이 순서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조금만 깊이 읇조려 보았다면 깨어서 주님 곁을 지켜 드렸을뿐만 아니라 부인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인 말씀을 힘써 지키지 못하게 하는것은 악한 마귀입니다. 마귀의 속삭임은 달콤하고 듣기에 참 좋습니다. 왠만해선 그 소리에 넘어가게 되는거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부터 넘어갔으니 지금은 얼마나 더 노련하게 유혹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마귀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꿀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귀한 말씀을 먹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마귀의 유혹은 물리치고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의 삶을 사는 복된 날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말은 조심하게 순종은 자신있게 합시다!
(5/26) 마가복음14장 “흩어지는 믿음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베드로를 위시하여 나머지 제자들의 고백(절대로 주를 떠나지 않겠다)은 하루도 지켜지지 못하고 마치 땅에 떨어진 물컵에 있던 물처럼 이리저리 쏟아져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붙잡힘을 지켜주지 못했고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붙잡힌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해 버렸습니다. 그 가운데 마가는 한 청년의 행동을 굳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배 홀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배 홀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두가지를 추정해 볼수가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이 붙잡히시는순간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붙잡히셨다는 소식을 도망친 제자들에게 듣고 급하게 예수를 따라가기 위해서 벗은몸에 이불하나 뒤집어쓰고 나왔습니다.
이 청년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열정을 볼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지만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붙잡히자 뱀이 허물벗듯이 알몸으로 도망쳐 버린것입니다.
그의 열정도 현실앞에서는 약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열정을 가지고 살더라도 분명히 그 열정을 식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고난의 두려움같은 시험으로 우리에게 찾아올것입니다. 제자들과 이 청년에게는 붙잡히는 두려움이 믿음까지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참 믿음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실에 맞설수 있을때 비로소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믿음이나 미래의 믿음도 현실을 사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신자는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뿌리 내리지 못하는 씨는 새가 물어가거나 말라죽거나 바람에 날아가 버릴것입니다.
오늘을 위해 믿음을 주신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찾아오는 현실들과 맞서기 위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거나 치우치지 않도록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작은 바람에 맞서는 자가 큰 바람에도 버틸수가 있는 뿌리깊은 나무로 자랄수가 있습니다.
이시대 여러가지 상황에 맞서기 보다 흩어져 버리는 믿음들 속에서 한가닥의 믿음의 뿌리라도 내릴수 있도록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말씀가운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5/27) 마가복음14장 “불신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겟세마네에서 붙잡히신 예수님을 계속 심문했으나 아무말도 없으시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신 말씀이 바로 자신이 메시아 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선포하신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믿을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셨지만 제사장무리들은 되려 흥분하였고 그들 마음에 예수님을 죽일수 있는 명분을 확실히 얻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위시하여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뿐 아니라 절대적인 신, 여호와 한분외에는 믿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는 이단인 셈인것입니다. 오직 한분이신 성부 하나님외에 어떤 하나님도 존재할수 없다고 믿으며 철저하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합니다.
사실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인데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점점 더 멀리 스스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것이 가장 큰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믿을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세상이나 다른 신을 신뢰할뿐 이땅의 죄인들을 구속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합니다.
그러나 이제 곧 그 불신의 삶이 얼마나 치명적인 미래를 보게될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구약을 같이 공유하면서도 율법에만 얽매여 수천년을 지내온 유대인들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대 설화나 전설정도로 치부하는 이시대 불신자들에게
여전히 예수님만이 소망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솔루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실 구세주가 맞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의 구심점이 되도록 하십시요.
(5/31) 마가복음15장 “당돌한 믿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마가는 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행동을 ‘당돌한’ 것이라고 기록하였을까? 영어 성경은 ‘took courage’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당돌함은 곧 담대함이라고 볼수가 있겠습니다. 마가가 요셉을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그가 존경받는 공회원이라는말에 힌트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결정한 공동체가 바로 산헤드린 공회였으며 그는 그 공회의 멤버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공회원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나아간것을 볼때에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려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사람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것일까요? 그것은 그저 예수라는 사람을 불쌍히 여긴 마음이 아니라 공회가 못박아 죽인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믿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아리마대 요셉이 생전에 예수님께 받았던 사랑과 약속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리고 없었으며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할 엄두도 내지 못할때에 나서서 예수님을 장사지낸 그의 용기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당돌한 결정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성취를 위한 귀중한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사도신경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인 이 구절의 첫 단추를 그가 감당하게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당돌한 행동을 할수 있었던 더 중요한 한가지는 오직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성령의 음성에 요셉이 온전히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공회에서 어떤 고난과 핍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그의 마음에 임한 뜨거운 이끄심을 외면하지 않았던 요셉의 행동을 하나님은 ‘당돌한 믿음’ 으로 칭찬하며 높여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실때 우리도 상황을 두려워하지말고 순종하는 당돌한 신앙을 가집시다.
(6/1) 마가복음 16장 “보지 않고 믿는것이 진짜 믿음”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성경의 많은 예언대로 예수님은 장사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유일무이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그의 부활을 믿는지 믿지 못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는 사람일지라도 부활을 믿을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삶이 될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것은 신앙과 구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 귀하고 놀라운 부활이 곧 있을것이라고 믿고 들었던 제자들도 처음의 반응은 의심이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분명히 말씀하신대로 부활이 진행되었음에도 온전히 믿지 못했던 것일까요? 두가지를 유추해 볼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들의 눈으로 보기전에는 확신할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한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는것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에 내심 예수님께 섭섭했을수 있습니다. 제일먼저 자신들에게 보여주셔야지 맞는거 아닌가? 왜 우리가 부활의 소식을 마리아에게 들어야 하나? 이와같은 마음이 그들에게 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도록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부활은 너무나 예민하고 특이한 사건이라 제자들은 먼저 자신들이 확인한 후에 온전히 전파하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장은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불신임이 틀림없습니다.
성경은 주의 말씀을 더디믿는자를 책망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는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하셨고 들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것입니다. 듣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보여 주어도 믿음이 생겨날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끝까지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더 깊은 신앙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눈으로 보면 무조건 믿을것이라고 장담할지 모르지만 보게되면 딴 마음을 품는 것이 죄악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믿을수 있는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쳐두고 무조건 믿는다고 하는것은 맹신이며 맹목적인 신앙은 언제 넘어져도 이상할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목적있는 신앙 (무엇을 믿고 또 왜 믿는지) 을 얻는것이 귀한 믿음입니다.
(6/2) 마가복음16장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드디어 제자들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그 기쁜 자리에서 제자들은 책망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먼저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지 못하는 모습이 그들의 완악한 마음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으려는 마음에는 이유가 없지만 믿지 않으려는 마음에는 참 이유와 변명이 많은거 같습니다. 이래서 혹은 저래서 못믿겠다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는 믿고싶은 마음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마음이 완악하다고 하신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생전 다 알려주시고 그들 눈앞에서 수많은 기적도 경험하게 하시며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는데도 정작 예수님의 부활을 그들이 믿지 못했으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다고 하신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믿으려고 하고 정말 믿기를 원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배우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런 시간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믿음이 자랄수가 없습니다.
혼쭐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목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한가지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로도 전하지만 우리의 삶을 통해 믿는자의 모습,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야 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얻게되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의심하고 불신하는 모습 따위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이시대 그리스도인도 항상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약한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능력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간구하는 자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영적인 일이지만 육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성령이 발끝부터 머리까지 채워진 사람은 믿는대로 살고 믿는것을 전하며 무엇보다 믿음을 인생의 가장 큰 가치로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