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느헤미야가 주저앉아 울고 기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1차,2차로 귀환한 사람들이 안정된 삶을 누리지 못하고 그 땅 사람들에게 여전히 능욕을 받고 있으며, 성은 허물어지 고 성문들은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여호와의 위로’ 라는 의미이며 앞으로 볼수 있겠지만 모든일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친동생 ‘하나니’ 가 유다땅에서 다시 바벨론 수산으로 돌아와서 전했던 고국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하였다. 하나니는 2차포로 귀환때 에스라와 함께 유다땅으로 돌아갔으나 유다땅이 극도로 어려워짐으로 이 사실을 형 느헤미야에게 알리기 위해 역경을 무릅쓰고 돌아온 것이다.
이 두 형제가 얼마나 신실하고 유다나라에 대하여 애착심이 있었는지 알수가 있다. 2차와 3차 귀환사이에는 14년의 차이가 나는데 그동안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의 공격과 텃새로 인하여 귀환한 백성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온갖 수모를 겪고 있었다. 삶이 안정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백성들의 신앙도 시들어 지고 메말라 멘탈과 영성이 붕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느헤미야는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돌입하였는데 그 기도내용을 보니 ‘죄 사함을 위한 기도’ 였다.
그는 에스라와 같이 이스라엘이 과거에 하나님께 범죄했던 역사를 기억하며 민족의 범죄를 다시 회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눈물의 금식이 바탕이 되어 그는 3차 귀환 지도자로 세우심을 얻게된다.
성도의 삶은 이렇게 회개로부터 올바른 신앙과 사명이 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늘 깨끗한 그릇이 되기를 원하는 자를 사용하시고 역사와 사역의 도구로 쓰시는 것이다. 온 땅과 나라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진통을 겪고 있다. 믿는 자들의 신앙이 거기에 휘말려 요동하지 말고 기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로 귀환이 오직 답이다.
(3/12)
*느헤미야는 왕에게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2:5)
-유다땅으로 되돌아가서 성읍을 재건할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느헤미야의 귀환결정은 참으로 용기있고 믿음에 대하여 행동하는 올바른 모습이라고 본다. 느헤미야의 이런 결정이 주는 영적인 교훈이 있다. 그는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만큼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을 보여주었다.
하나님께 다 맡기는것은 옳은 신앙이다 그러나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은 도태될수 밖에 없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요청하기전에 이미 구체적인 기간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목록을 준비하고 나아가서 왕의 신뢰를 얻었고 여러가지 도움을 얻을수가 있었다.
느헤미야는 기도를 통해서 본국으로 돌아가는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물었고 믿음에 확신이 서자 계획을 세웠으며 계획이 준비되자 곧바로 왕 앞으로 나아갔다. 이 모습이 신본주의적 신앙관이다.
신본주의는 범사가 하나님 중심이다. 왜 이 신앙관이 중요한가? 하나님을 거치지 않는 모습은 결국 욕심이나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시작하기전에 하나님을 통할때 영적 필터링이 작동하여서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선한 계획을 세우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시끌벅적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고 자신이 귀환한 목적도 함부로 발설하지 않으면서도 홀로 예루살렘 성에 필요한것이 어떤것인지 주도면밀히 관찰하는 겸손하고도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느헤미야의 이런 모습이 마치 예수님을 보는거 같지 않은가? 왕으로 오셨지만 누구보다 겸손하게 이땅에 오셨고 섬김을 받으려 하지않고 섬기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믿는 사람은 느헤미야처럼 겸손히 그러나 면밀히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는 사람이다.
(3/13)
*제사장은 어디부터 성벽재건을 시작했습니까? (3:1)
-함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까지 성벽을 쌓았다. 느헤미야의 격려로 인하여 황폐했던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에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였는데 담당자의 이름뿐만 아니라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기록하였다. 왜 그랬을까? 성벽재건이 얼마나 힘들고 또 귀중한 사역인지를 알림과 동시에 그들의 헌신을 축복하고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여러 종류의 지원자들이 참가했으며 담당했던 장소나 길이도 모두 달랐다. 많이 보수할수 있는 사람은 많은 부분을 담당했고, 자기 집 앞을 담당한 사람도 있었고, 딸들이 나와서 보수한 집도 있었다. 이와같은 백성들의 헌신은 교회의 본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모든 몸의 지체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때 그 공동체는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인 공동체가 될수 있지만, 몸의 지체가운데 오직 한두 지체만 움직인다면 그 몸의 기능은 점점 약해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되신 교회 공동체가 각 지체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건강하게 세워지길 원하신다. 모든 지체들이 저마다 그리스도의 몸됨을 기뻐하며 그 뜻에 따라 자원하고 헌신할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제 기능을 다할뿐만 아니라 날로 날로 강건해 질것이다.
(3/14-15)
-총독 느헤미야의 주도로 성벽재건이 시작되어 백성들이 기뻐했으나 여러가지 예기치 못했던 문제들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특히 산발랏과 도비야 무리들이 주위 세력들과 합력하여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방해하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귀환한 백성들은 귀족들과 관리들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와같은 위기 가운데 느헤미야가 두가지 방침을 세웠다. 첫째는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였으며 하나님의 온전히 의지하되 자신들이 해야할 일은 게으르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한 손으로 삽을 잡고 일하였다. 나팔을 준비하여 위험시 나팔을 불면 주위에서 몰려들어 힘을 합치도록 지시했다.
귀족들과 관리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그들의 행실을 꾸짖었고 그들로 하여금 받았던 높이 이자를 다 되돌려 주도록 하였고 자신과 가족 친척들은 녹의 혜택도 받지 않고 자원해서 성벽재건에만 전념하였다. 느헤미야는 ‘이방인 원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한다’ 며 위기 가운데서 백성들이 신앙의 중심을 잡도록 인도하였다.
전세계적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모든 기관들이 문을 닫고 있는것을 보며 사람들은 앞으로의 삶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나님이 바람을 세게 부시는거 같다. 이런때에 믿는 자들은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할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위기가운데 신앙이 더 빛이 나는 법이다. 쭉정이 같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신자가 아니라 알곡처럼 믿음으로 중심을 잡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자는 모든 좋은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34:10>
“주님, 이 땅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들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3/16)
*스마야가 느헤미야에게 성소 안으로 피하라고 전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6:13)
-느헤미야가 성소를 범하게 하는 죄를 범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벽재건이 거의 마무리 되고 있는 시점에서 산발랏과 도비야 무리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어떻게 해서든지 성벽완공을 막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급기야는 지도자 느헤미야를 꾀어서 직접 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느헤이먀는 지혜롭게 위기를 모면하였다. 악한 마귀의 속셈은 늘 성도를 훼방하고 특히 성도의 성공을 무너뜨리는데 온갖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두번의 위기를 하나님의 지혜로 슬기롭게 헤쳐나갈수가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늘 하나님과 가깝게 교제하고 소통한다면 영적인 사리분별 뿐만 아니라
넓은 길과 좁은 길을 어렵지 않게 구분할수 있는것이다.
성벽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사업을 망치려했던 방해가 극심했으나 성벽은 52일만에 기적적으로 완성이 되었다. 그 이 후에야 원수들은 이 역사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이렇게 승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야 마는 것이다.
이삭의 우물을 두번이나 빼앗아갔던 그랄 목자들이 결국 이삭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도 이와같다.
악한마귀가 믿는 자를 흔들려고 여러모로 공격을 시도하지만 거기에 반응하거나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인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뿐만 아니라 원수들 조차 하나님을 인정하고
물러나는것을 볼수가 있다.
세상 풍조가 아무리 거세어 몰아쳐도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꿋꿋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낼수가 있다.
(3/17)
*성벽 건축을 마치고 느헤미야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7:5)
-1차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을 찾아내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명단을 기록한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이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이 일을 하도록 이끄신 이유가 무엇일까?
성전과 성벽도 재건되었는데 정작 예루살렘 성안에 머물 백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만 세워지면 무엇하겠는가 성도가 있어야 교회가 역할을 하듯이 유다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1차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을 통해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살수 있도록 권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감동시켜서 포로귀환자들을 예루살렘성안으로 이주 시키시는 것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구원받을 자들을 무조건 새 예루살렘인 천국으로 이주시키신다. 이것은 마치 노아의 방주에 선택된 자들이 들어간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된다.
노아가 동물들 하나 하나 일일이 다 확인하여 방주에 들인것과 같이 느헤미야가 발견한 1차 포로귀환자들을 예루살렘성으로 인도하여 하나님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 공동체를 강하게 세워나가기를 원하셨다.
신약시대인 지금도 하나님은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복음전파를 통해서 영적 예루살렘이자 시온성인 교회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기억하고 때를 얻든지 못하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에 앞장서는 교회와 신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3/18)
*율법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은 울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어떻게 위로했습니까? (8:9-10)
-이 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날이니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긴다고 위로하였다. 왜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을까?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셨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서 눈물이 나는것은 회개하는 마음과 은혜로 인한 것이며 성령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날, 즉 주의 성일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날” 이란 뜻이다. 이스라엘의 성일은 지금의 주일이다. 신자들은 주일에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임을 기억해야 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한 모임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되기 때문이다.
여호와로 인한 기쁨은 우리에게 일할수 있는 힘을 주시고 고난과 역경을 견딜수 있는 힘이 되시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미국도 주일 예배가 영상예배로 대체되었다. 각 가정에서 드려지는 예배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될수 있도록 더욱 경건하게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이번 기회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신앙을 강하게 연단 받을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3/19)
*이스라엘 백성이 24일에 모여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9:1-3)
-금식을 선포하고 이방 사람과 관계를 끊고 자신들의 죄와 조상의 죄를 회개하였다. 그리고 낮의 사분의 일은 율법책을 읽고 또 사분의 일은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개혁이 일어났다. 그들의 개혁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이 지었던 죄들을 하나님께 자백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세속적인 일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개혁이 시작된것이 바로 율법책을 읽고 깨달은 후였다는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과 말씀의 묵상없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볼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은 백성들이 울며 자복한 이유는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로 인하여 풍족한 삶을 살았음에도 욕심과 탐심에 빠져 목이 뻣뻣하여 거만해져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말씀을 떠났던 삶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셨지만 그들에게 소망은 그래도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시며, 너그러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라도 누구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아오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당신이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읽는 사람일것이며 당신이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늘 기도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만약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영적 불균형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요즘 재택근무가 많아지고 통행에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전하신다.
말씀을 읽어라~ 기도의 골방을 찾으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당신이 이 어려운 시기를 말씀과 기도로 재무장한다면 이 위기와 어려움이 지난후에 더욱 영적으로 단단해지고 성숙해진 당신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
(3/20)
*레위 사람이 열의 하나를 거둘 때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입니까? (10:38)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어야 했고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전 곳간에 두어야 했다. 이렇게 원칙을 만든이유는 정확한 십일조의 양을 확인하기 위함과 혹시나 발생할수 있을 레위인들의 횡령을 막기 위함이다.
이와같은 조치는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영적개혁을 실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혹시 횡령같은 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개혁의 불에 찬물을 끼엊는 상황이 초래할수 있기 때문에 아예 제도를 통하여 그와같은 문제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이와같이 성전완공, 성벽재건이후에 시작된 영적각성을 통하여 유대 사회는 신앙의 개혁이라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언약을 준수하기로 맹세한 사람들을 공개했는데 지도자들과 제사장 레위 사람들은 아예 이름까지 공개하였다. 그 이유는 지도자들의 개혁이 일반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교회나 가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어진다. 교회의 지도자나 부모들이 솔선수범하여 앞장설때 일반 성도들이나 자녀들이 동참한다. 예수님도 말씀으로만 하시지 않으시고 모든 일에
제자들에 앞서서 실천하셨음을 기억하자. 주님께서 섬기러 이땅에 오셨던것처럼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가족과 이웃을 섬기는 심령을 얻기를 소망한다.
(3/21-22)
11장12장에는 자원하여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의 명단과 성벽을 완성한후 하나님께 봉헌 감사를 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성전과 성벽까지 완성되었으나 정작 그 안에서 살아야 할 인구가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를 부탁했었는데 스스로 자원하여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백성들은 이들의 헌신과 자원에 감사하며 복을 빌어 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억하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자원하는 모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심령에 자원하는 마음을 주실때 기뻐하며 자신을 드리는 것이 복받는 자의 모습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성벽을 봉헌하는 제사에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들었고 임무를 맡은 레위 사람들의 찬양을 듣도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특별할 은사를 올바로 드리게 위해서 자신들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예식을 하였다. 이들이 성벽에 올라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찬양을 올려 드렸다. 백성들은 기뻐하며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함께 기뻐하니 그 기뻐하는 소리가 예루살렘에서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전 세계적으로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한 삶이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일을 만나도 기뻐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이 모든일들이 결국 선한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범사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여 그리스도의 평강이 두려운 마음을 몰아내고 기쁨과 희망의 소리가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게 하자.
(3/23)
*느헤미야가 화를 내고 도비야가 쓰는 방의 세간을 치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13:5)
-느헤미야가 왕을 만나러 떠난 사이 엘리아십 제사장은 원수 도비야와 화친하면서 그에게 성전안의 큰 방을 내주는 일이 일어났다. 돌아온 느헤미야가 이 사실을 알고 그 방에 있던 도비야의 물건들을 모두 밖으로 던져 버렸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하였던 이유는 그 방이 제사에 사용되는 도구와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곡물과 포도주 그리고 기름을 모아 두는 방이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엘리아십이 그 방을 도비야에게 내어준 것은 도비야로 하여금 성전봉사자들의 몫을 가로챌수 있도록 한것이었다. 결국 성전봉사자들이 몫을 얻지 못하게 되었고 그들은 성전을 떠나 다른 일을 하게 되었으며 당연히 성전제사는 올바로 드려지기가 만무하였다.
느헤미야는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개혁의 채찍을 들었던것이다. 이와같은 느헤미야를 보면서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는데 바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채찍으로 다 몰아내시고 그들의 물건들을 다 엎어 밖으로 던져버리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느헤미야는 여러모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임을 그의 행동에서 볼수 있다. 느헤미야는 성벽재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영적개혁을 끊임없이 이끌었던 사람이었다. 예수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과 함께 쉬지않고 우리에게 경건의 삶을 요구하신다.
믿는 자의 몸이 성전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며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육적인 일에 미혹당할때 거침없이 스스로에게 채찍을 들수 있어야 날마다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영위할수 있다. 느헤미야서는 여기서 끝나지만 우리 삶의 개혁은 계속 되어지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