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다윗은 왜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소식을 전한 젊은이를 살해했습니까? (1:13-16)
- 아무리 사울의 요청이 있었으나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가슴아파한 사람이다. 아말렉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다윗에게 나와서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는 말을 했겠는가? 아마도 다윗이 기쁘게 자신을 받아주고 상이라도 내릴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다윗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것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결정적 이유이다. 다윗이란 사람 자체가 아부, 아첨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자기 앞에서 자신의 원수 사울을 죽였다고 알리고 보상받기를 원하는 그 모습을 참지 못했던거 같다. 사실 사울의 병기를 든 군인도 사울이 똑같은 요청을 했을때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것을 통해 역시 아말렉 사람의 본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전쟁터에서 한나라의 왕의 목숨까지 끊었을때 그 사람의 마음에는 모든 계획이 수립이 된것이다.
하나님은 기회주의자를 혐오하신다. 늘 진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기회를 틈타는것은 마귀의 행동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기회주의자가 되기보다 순진한 어린아이같은 순수하고 정직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자이어야 한다.
(10/2)
*다윗이 야베스 주민에게 은혜를 베푼 이유는 무엇입니까? (2:5-6)
-그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찾아서 장례를 잘 치러주었다. 이들의 선한 행위에 감동받은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여 주었다.
야베스 주민들이 사울왕에게 이렇게 한 이유는 일찍이 암몬에게 고통당했을때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와서 그들을 위기에서 구하여준 은혜때문이었다. 사울의 생전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아 나라와 백성을 구원한 전쟁이 야베스 백성들을 지켜준 일이었다.
어제 보았던 아말렉 청년과 비교되는 행실을 볼수가 있다. 아말렉 청년은 사울왕의 죽음을 이용해 다윗에게로부터 보상을 받으려고 기회를 엿본 사람이었다면, 야베스 사람들은 누가 알아주던지 않던지 상관없이 지난날에 받은 은혜때문에 자원하여 섬긴 사람들이었다. 전자는 스스로 기회를 엿보다 죽음을 당했으나 후자는 누군가 이 선행을 다윗에게 말하여 다윗왕에게 축복을 약속받았다.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한 야베스 사람들의 선행과 그들을 축복하는 다윗으로 인해 아침부터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나같은 죄인을 악한 마귀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도 아낌없이 거저주고 손을 내민 야베스주민들을 닮아가야 하겠다.
(10/3)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떠나면서 다시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3:10)
-온 이스라엘을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기고 그를 왕으로 세워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는 약속이다. 아브넬이 왜 갑자기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는가? 먼저는 자신이 왕으로 세운 이스보셋과의 관계가 어그러졌기 때문이고 거기다가 현재 대세가 어느쪽으로 기울었는가를 인지했기 때문이다. ‘다윗 집안은 점점 더 강해지고, 사울 집안은 점점 더 약해졌다.’ 아브넬은 자기 살길을 찾겠다고 요리조리 머리를 쓰면서 좌로, 우로 쉽게 치우치는 여우같은 사람이다.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데로 왕으로서의 사명만을 감당해 나가는 용맹스런 사자와 같아보인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굶주릴때가 오지만 여호와를 찾고 의지하는 자는 모든것에 부족함이 없다는것을 다윗이 깨달으며 사람보다 더욱 하나님을 붙좇는 자가 되었다.
인간적인 염려없이 계속 좁은길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의 삶에는 다윗과 같은 주 바라기의 모습이 항상 나타날수 있어야 한다. 다윗이 아브넬과는 다른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를 걸었을때
아브넬을 통해 다시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고 신본주의 국가로 거듭나도록 도우셨다.
하루종일 태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처럼 우리의 모습도 주님만 바라보며 하루를 다 보내는 주 바라기들이길 소망한다.
(10/4)
*유다 백성들이 다윗을 따르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3:36-37)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요압에게 살인을 당했을때 백성들은 다윗이 배후에 있었을거라고 오해했던것 같다. 그러나, 다윗이 진심으로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까지 선포하자 백성들은 그제서야 아브넬의 죽음과 다윗이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게되었으며 다윗이 하는 모든 일들을 좋게 받아 들였다. 다윗의 모습이 항상 이런식이었으니 무엇을 하든지 죄악을 미워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죄를 가장 싫어하시기때문이었다. 개인감정에 의하여 원수를 갚은 요압의 무분별한 행동을 질책하면서 하나님께 원수갚는 일을 맡기는것이 의로운 행동임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때가되자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오기 시작했고 다윗의 정직하고 의로운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를 모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다윗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거치지 못할때 인간은 늘 자신의 정욕에 이끌릴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0/5)
*다윗은 왜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온 사람들을 강력하게 처벌했습니까? (4:11)
-다윗은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이었던 레갑과 바아나의 행실을 두고 ‘악인’ 이 ‘의인’ 을 죽인것으로 간주하여 그들을 극형에 처한것이다. 사실 이 두사람은 아브넬이 죽자 심적으로 크게 불안을 느끼고 다윗왕에게 붙으려는 아부성이 짙은 살인을 저질렀다는것을 다윗이 모를리 없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섬기던 왕까지 목을 베어버릴수 있다는 생각구조가 무섭게 다가온다.
죄악의 구조가 이렇게 인간을 잔인하고 매정하게 만들수 있음을 다시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죄를 멀리해야 한다. 죄를 멀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 없으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만 한다.
(10/6)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점점 강대해진 다윗이 무엇을 깨달았다고 말합니까? (5:12)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신것과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하시고 번영하도록 하심을 깨닫게 되었다. 사울왕과 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는가? 그렇게 겸손했던 사울은 왕이 되고 권력을 얻자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의 생각과 고집대로 판단하며 교만해진반면에 다윗은 왕이 되자 더더욱 겸손해졌고 오히려 권력과 명예를얻고난후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된것을 볼수 있다. 참 이러기도 쉽지않은데… 이스라엘의 번영을 모두 하나님께로 돌리고 하나님이 이루신것으로 믿고 깨달은것이 다윗이 가진 순진한 신앙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깨달으며 살아야 한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나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높여 올리며 감사드려야 한다. 내가 했다는 생각은 늘 우리를 교만의 자리로 이끌뿐이며 교만은 패망의 선봉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것도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의 모습이다. 믿는 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할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지내온것 주님의 크신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자.
(10/7)
*미갈은 왜 마음속으로 다윗 왕을 업신여겼습니까? (6:16)
-왕이 길에서 사람들과 여인들이 보는 앞에서 뛰면서 춤을 추는것이 왕으로서의 체통을 떨어뜨리고 위신을 지키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러나 미갈도 아버지 사울처럼 다윗에 대하여 여전히 알지 못하는것이 있었는데 다윗이라는 인물은 사람을 의식하기 보다(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미갈이 왕궁으로 돌아온 다윗에게 왜 그렇게 천박하게 행동했냐고 묻자 다윗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것이라,,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뛰며 춤출것이요.’ 그렇다. 다윗은 사람들에게나 왕이었지 하나님에게는 그저 종이자 그의 백성일뿐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실것이 생각나자 자신도 기뻐 춤을 출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갈은 이일로 인하여 무서운 징계를 받는데 죽을때까지 자녀를 얻을수가 없었다.
그가 왜 징계를 받았을까? 다윗을 업신여겨서일까? 그것보다 하나님을 믿는 다윗을 업신여긴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의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시기, 질투 혹은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늘 성령안에서 깨어 자신을 돌볼수 있어야 한다.
(10/8)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어떤 대답을 주셨습니까? (7:12-13)
-다윗이 아닌 그의 자녀를 통하여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진왕이었다. 특히 ‘나는 백향목 궁전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장막에 있다.’ 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위한 성전에 대한 열망이 아주 강했다. 그래서 마음에 결심하고 나단 선지자에게 말했고 나단도 이일을 좋게 여겼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는데 아무리 다윗이 성전을 짓기를 갈망해도 다윗시대에는 지을수 없다는것을 알려주셨다. 그 이유를 역대상에서 찾아볼수가 있는데 다윗이 수많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는것이 이유였다.
아무리 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계획이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으실때도 있다는것을 생각하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특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더더욱 하나님께 기도하고 확실한 뜻을 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10/9)
*나단 선지자로부터 계시를 전해 들은 다윗 왕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7:18)
-말을 듣자마자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내가 다윗의 입장이었다면 성전을 짓게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설득시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더이상 성전에 대한 말은 단연코 꺼내지도 않았다. 다윗의 기도의 내용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내용뿐이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자신에게 말씀하여 주신것에 대한 감사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은 성전을 절대로 지을수 없다는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해가 되는가? 자신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않았는데 다윗은 감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흔치않은 감사라고 생각한다. 대개 기도자들이 기도 응답이 너무나 정확히 되지 않을때 실망하거나 기도를 접든지 원망하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그것이 자신에게 축복이란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데 왜 성전을 못 지어요?’ 라고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다윗의 행동은 우리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것이었는데 초라한 장막이었으나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둔 그곳에서 항상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것이다.
먼 훗날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지상 최고의 성전이 있었음에도 다윗의 초라한 장막안에 거하셨던때를 그리워하셨다. 하나님을 아무리 설득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수 없으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감사하고 예배자의 본분을 다할때 하나님께 감동을 드릴수 있다.
(10/10)
*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8:6,14)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기 때문이다. 어제 다윗의 모습을 살펴보았다면 오늘 다윗이 왜 모든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을수 있게 되었는지 분명히 이해할것이다. 오늘 말씀가운데는 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고 지켜주실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 있다. 다윗은 하닷에셀과의 전쟁에서 기마병 천칠백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 의미는 말도 천칠백마리를 얻었다는 결과이다. 그런데 그중에 백마리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조리 다리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그것도 전쟁중에 그 귀한 말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왕의 조건 -말, 아내, 은금을 많이 두지말라) 것을 순종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같은 것들로 하여금 왕이 쉽게 교만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이는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와~’ 이 말 밖에는 할말이 없게 만드는 다윗의 놀라운 순종을 느낄수 있다. 더 놀라운것은 전쟁중에 천육백마리의 말의 힘줄을 끊었음에도 곧바로 전쟁해서 또 승리, 또 승리뿐이었다.
자, 이제 오늘 문제의 답이 이해가 되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시고 다윗이 무섭게 순종하니 이 전쟁의 승패는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난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순종”, 우리도 할수있는 키워드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자의 편이시며 믿는자의 능력이 되어주신다. 나의 상황이 불리해질거 같을때 더 하나님을 바라볼수 있으면 좋겠다.
(10/11)
*므비보셋은 어떻게 예루살렘 성에서 살게 되었습니까? (9:1)
-사울의 집안에 살아남아 있는 자를 찾아 은총을 베풀기 원했던 다윗의 요청때문이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절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아들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를 모두 저는 장애인이었으나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를 왕궁으로 인도하여 죽을때까지 왕자대우를 해주면서 살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다윗의 생명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중하게 여겨주었던 요나단을 위해서 친구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
물질 만능주의시대가 도래하면서 사회여기저기에서 의리가 상실되어가는 모습을 볼때마다 안타까운 심정이다. 믿는 자들은 믿는 도리, 신앙의 의리를 사람과 하나님께 지킬수 있어야 한다.
(10/12)
*다윗이 신하들을 암몬 사람의 땅에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10:2)
-성경은 정확하게 다윗이 암몬왕 나하스에게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그가 비록 이방나라 왕이었지만 다윗이 어려울때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어제 사울의 집안을 보살피기위해서 요나단의 므비보셋을 거둬들인것을 볼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하여 다윗의 영성과 성품을 엿볼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윗도 암몬과 전쟁한 이스라엘의 왕이다. 자신의 직분과 처지로서는 암몬에게 사람을 보낼수 없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고 믿어 행동한것이다.
받은 은혜는 꼭 갚고야마는 다윗의 신실함이 어쩌보면 하나님을 닮은듯하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앞에 나와 기쁘게 즐거이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어떻게든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인생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신다. 빈손으로 왔으나 양손가득 은혜와 사랑의 약속들을 안겨주신다. 그러므로 나의 상황이나 형편에 하나님을 맞추기보다 하나님께 나를 맞추어 드림이 은혜받는 자의 마땅한 삶이되는 것이다.
(10/13)
*우리야는 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도 집으로 돌아가 쉬지 않았습니까? (11:11)
-우리야는 다윗왕을 생각하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그의 군인들을 생각한 나머지 홀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는것이 의리에 어긋나다고 생각한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신하의 모습을 보고서도 다윗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보다 자신이 저지른 간음죄를 숨기기 위하여 또 다른 책략을 꾸미는것을 볼수있다. 다윗이 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원인은 다윗의 영적인 나태함때문이었다. 다윗은 이전까지만해도 전쟁터에 나아가 선두지휘하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더이상 전쟁에 나가지 않고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만 보내고 자신은 성에 남게된다. 무엇이 다윗을 변하게 하였을까? 그 이유를 어리석은 부자에서 살펴볼수가 있다. 어리석은 부자는 큰 창고를 지어놓고 많은 곡식물을 저장한 후에 ‘내 영혼아 이제 편히 쉬고 먹고 마시자’ 라고 독백한다. 다윗도 ‘내 영혼아, 이제 전쟁도 많이했고 승리도 많이 해서 우리가 강해졌으니 편히 쉬자.’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치 그 모든 전쟁을 자신이 스스로 승리한것인냥 의기양양하였던것이다.
마귀가 틈을 타는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모든 공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순간 비집고 들어온다. 다윗이 이런 마음을 품자 마귀에게 그의 신앙이 무장해제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임을 다시한번 기억하고 겸손하고 또 겸손하자.
(10/14)
*다윗은 전쟁 중인 군사들에게 우리야의 전사 소식을 어떤 말로 전했습니까?(11:25)
-이번 일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였다. 다윗이 보낸 소식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남 걱정할때가 아닌거 같은데’ 그렇다. 다윗은 지금 일생일대 가장 위기의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있다. 곧 닥쳐올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이 보인다. 결국 우리야가 죽자 그의 아내를 데리고 와서 자신의 아내로 삼아버렸다.
성경기자는 이렇게 그 당시를 기록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이 한 이번 일은 아주 악하였다.’ 혹시 우리도 남의 걱정은 많이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뒷전일때가 있지 않은가?
믿는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말씀의 거울을 통해 비춰볼수 있어야 한다.
(10/15)
*다윗과 밧새바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었을 때, 다윗이 더 이상 금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12:22-23)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윗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그저 순종하기로 이미 결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의 신앙이다. 내 뜻대로 되길 원하며 기도하지만,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소위 그리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며 불순종하지 않는다는 신앙이다.
주시는 자도 여호와,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이시므로 영광을 받으실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기도했음에도 아이가 죽게된것을 보고 신하들은 다윗이 미쳐버리거나 최악의 경우 자해할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윗이 그들이 상상했던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을수 있었던것도 이런 이유때문이었다.
놀라운것은 이 사건으로 하여금 다윗은 완전히 떨어졌던 영성과 믿음을 다시 찾게된다.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무섭게 징계하신 하나님 그리고 공의를 나타내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자 다윗은 예전의 영성을 회복하게되었다. 약해지고 떨어진 신앙과 영성의 회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우리의 모습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의 권위에 소망을 두는것뿐이다.
(10/16)
*다말이 집으로 돌아온 후 다윗과 압살롬의 반응은 각각 어떠했습니까? (13:20-21)
-다윗은 심히 노하였으나 그것뿐이었다. 암논에게 징계를 내리거나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만약 다윗이 강력하게 이 사건에 대하여 암논의 범죄를 징계했었더라면 이후의 압살롬을 통해 일어난 재앙들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다윗의 잠잠함으로 인해 압살롬은 이복형제 암논을 향해 복수의 칼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동생이 겁탈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오빠가 어디에 있겠는가? 다윗이 압살롬의 행동을 예상하고 개입을 했었다면2차, 3차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것이다.
암논의 욕정이 만들어낸 사건을 살펴보면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죄의 본성이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이기주의로 만들어 버리는지를 다시 심사숙고 하지 않을수 없다. 죄의 본성은 때로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 암논이 누이동생 다말을 향한 마음이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욕망을 가장한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다윗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것도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이었다. 첫째아들을 징계해버리면 아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안에 불명예스러운 일이 일어날것을 두려워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했던 다윗이었지만 그의 죄악을 눈감아주신적이 없으셨다. 회개를 받으셨지만 그 죄의 댓가는 치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랑할수록 칭찬과 징계의 균형을 맞출수 있어야 주님앞에 똑바로 설수가 있다.
(10/17)
*맏아들 암논을 잃고 슬픈 날들을 보낸 다윗은 시간이 지나자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13:39)
-아들을 잃은 충격은 서서히 가라앉은 반면에 형제를 살인한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오히려 간절해졌다. 다윗의 이런 모습은 마치 엘리 제사장(두 아들의 죄악을 방관함)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는듯하다. 암논과 압살롬 두 아들의 범죄를 듣고 다윗이 처한 행동은 그저 분노를 내고 옷을 찢고 땅바닥에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그리움으로 변화된다.
이것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아니라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수 있는 그릇된 자세이다.
과연 암논과 압살롬이 구원을 받았을까? 다윗 자신은 그런 엄청난 죄를 짓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자 눈물로 침상을 띄울만큼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결국 하나님과 화목함을 회복했던 사람이 아닌가?
다윗이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같이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도록 도왔다면, 과연 이 비극적인 상황까지 이어졌을까? 믿는 사람은 자녀들의 믿음생활을 지켜주고 보살필 의무가 있다.
엘리나 다윗이나 이 문제에 대하여 소홀했음이 더 큰 죄악의 불씨를 지핀것이다.
믿음의 사람 다윗도 가정의 신앙에 대하여 빈약한 사람이었다는것을 보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찾아온다. 우리의 가정, 자녀의 신앙에 대하여 더 민감해져야 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10/18)
*다윗 왕과 압살롬의 재회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4:33)
-전혀 감동적이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마치 등 떠밀려 억지로 만나는 전형적인 모습과 같다. 기본적으로 아름답게 재회하는 관계는 마치 에서와 야곱처럼 혹은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에서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압살롬은 용서를 구하지도 빌지도 않았고 다윗은 그 아들의 잘못된 행실을 꾸짖지도 않고 그렇게 어색한채로 헤어졌다. 결국 이 일은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고 백성들의 민심을 자기에게로 이끌려고 계획하게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아버지 다윗은 아들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지나칠정도로 관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자녀가 어려워지는것을 원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느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의 잘못된 행실은 절대로 묵과해서는 안되는것이 부모가 해야할 바른 교육이다. 다윗이 압살롬을 궁으로 다시 불렀다면 당연히 그를 앉혀놓고 그의 죄악을 묻고 하나님앞에 회개케하도록 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러놓고는2년동안이나 얼굴도 보지 않았다. 후에 이 일이 얼마나 무서운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지 볼수가 있다. 다윗과 압살롬의 재회장면은 거짓화해이었다. 하지 않는것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거짓행위를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을 늘 닮아가야 한다. 죄에 대하여는 불처럼 진노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하여는 항상 용서하고 품어주는 사랑을 겸비할수 있으면 좋겠다.
(10/19)
*다윗 왕은 자신을 따라오려는 가드 사람 잇대를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잇대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15:21)
-“왕이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이 종도 따라가겠습니다.” 가드 사람이라는 출신이 기록된것을 볼때에 잇대는 이방사람이었으며 유다에 귀화한 군인이었다. 귀화하여 다윗과 함께 지내면서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섬긴것이 분명한것이 그의 입술에서’여호와께서 확실이 살아계심을’ 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과 애증의 관계인것만큼은 확실하다. 다윗은 잇대가 자신을 따라와서 어려움 당하는것을 원치 않았고 잇대는 다윗을 내버려두고 자신만 편한길을 택할수 없었다. 잇대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것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행동의 모범을 배웠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가까운곳에 믿음이 좋은 성도를 두고있는것이 바람직하다. 바나바와 바울, 빌립과 나다나엘, 바울과 실라,,,와 같이 서로 믿음으로 이끌어주고 주 안에서 사랑해주는 믿음의 동역자를 두는것이 크나큰 축복이다.
(10/20)
*다윗은 왜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냈습니까? (15:33-36)
-그것이 다윗을 돕는 길이고 아히도벨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후새라는 사람은 다윗의 친구이자 왕에게 조언을 하는 아히도벨과 같은 조언자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다윗이 후새를 얼마나 신뢰했으면 그런 위험 천만한일을 맡길수 있었겠는가? 어려움에 처해보면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거 같다. 다윗이 큰 위기를 당하자 오히려 숨어있던 베일에 가려졌던 의외의 인물들이 속출하면서 다윗을 돕는것을 보면서 다윗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보게되는거 같다.
이에 앞서서 다윗은 사독제사장이 가져온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을 하였다. 이 행동은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올바로 서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왕이라면 더더욱 하나님의 언약궤의 소중함과 위력을 알고 있을터인데 다윗은 언약궤를 자기옆에 두지않고 원래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자신이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종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내가 궁으로 다시 돌아갈것이고 나를 싫어하시면 내가 하나님께 회개하며 빌것이라고 고백한것이다.
우리의 삶의 중심을 잡아주시는분이 하나님이시므로 당연히 믿는 사람은 그 중심을 축으로 이동할수 있어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수 있다. 자기가 필요할때만 찾는 행운의 상징처럼 하나님을 대우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주시는 자도, 취하시는 자도 오직 하나님이시다.
(10/21)
*사람들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16:23)
-사람들은 아히도벨이 베푸는 모략은, 무엇이든지, 마치 하나님께 여쭈어서 받은 말씀과 꼭같이 여겼다. 아히도벨은 원래 후새와 함께 다윗왕에게 많은 조언을 하면서 나라를 올바르게 인도하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중에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압살롬이 정권을 차지하려고 하고 그 세력이 강해지는걸 보고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을 지지하며 간신배같이 변질되었다. 다윗왕과 함께 있을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정치를 서포트했다면 압살롬과 같이 있으면서는 ‘악한정치’를 도모하였다. 사람들이 그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말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말씀처럼 여겼다고 했으니 얼마나 그 영향력이 대단했을까? 그러나 아무리 지식과 언변의 은사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지식과 말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얻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자신과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이나 말을 전할때가 있다. 내가 전하는 것을 통하여 상대방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수 있도록 한다면 너무나 옳은것이나 혹 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통하여 다툼을 유발하고 마음에 악이 심겨진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를 얻게된다.
유명한 젊은 연예인이 악플로 인하여 자살을 하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악한 마귀는 얼굴없이 손가락으로 살인을 저지를수 있는 시대를 이끌고 있는 주범이다. 말도 조심해야하지만 손가락도 충분히 악한일을 범할수 있음에 믿는 사람들은 더욱 더 유의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수 있어야 한다.
(10/22)
*소비, 마길, 바르실래는 다윗을 찾아와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17:27-29)
-침대, 질그릇, 각종 음식을 가져와 다윗과 지친 백성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압살롬의 사람들은 자살하거나 흩어지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다윗에게는 하나 둘씩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 세사람은 모두 예전에 다윗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진심으로 선을 베푸는 자에게는 그 선함으로 인하여 반드시 은혜의 손길이 임하게 되어있다. 그중에 마길이라는 사람은 요나단의 아들 절름발이 므비보셋이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그를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내주며 그를 도와준 친구였는데 다윗이 자신의 친구 므비보셋이 사울집안 사람이었으나 왕궁으로 데려가 왕자처럼 지낼수 있도록 한 사실을 듣고 감동을 받아 다윗편에 스스로 서게된 사람이다.
다윗이 이 세사람의 도움을 받은곳의 이름은 ‘마하나님’ 이다. 이곳은 공교롭게도 과거에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전에 천사들의 무리를 만난곳이다. 야곱이 처음으로 그곳이름을 ‘마하나님’ 으로 불렀다. 그 뜻은 하나님의 두 군대 (two camps) 라는 뜻이다. 압살롬의 공격을 받고있던 다윗이 하필 그 마하나님에서 세사람의 위로자들을 만나게 하신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이었던것이다. 위급한 처지에 만난 이들을 통해 다윗은 큰 힘을 얻어 적과싸워 승리하게된다.
마하나임의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하늘의 천사와 지상의 천사들을 통해 도우신다.
(10/23)
*요압에게 소식을 전한 사람이 압살롬을 해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18:12-13)
-왕의 아들을 직접 칠수없었고 또한 다윗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압은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 반역자요 불의한 아들을 처단해 버렸다.
이로인해 다윗은 전쟁의 승리보다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더 강한 반응을 나타내며 극심한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다윗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요압이 나무에 메달린 압살롬을 인정사정없이 죽인것은 결국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함이었고 압살롬의 반역에 자신도 일조했다는 자책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도망갔던 압살롬을 왕궁으로 데려온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서는 죽여야하고 다윗을 위해서는 살려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서 요압이 내린 결단은 옳았다. 압살롬은 사울이나 다윗처럼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운 왕이 아니라 아버지를 대항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했던 반란군의 우두머리일뿐이다. 그리고 다윗왕이 아들로 인하여 또다시 분별력이 흐려진것을 다시 바로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사람이 바로 요압이었다.
리더의 위기는 곧 공동체의 위기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리더가 흔들릴때 그 리더가 옮은 분별력을 가질수 있도록 정의롭게 행동할수 있는 요압과 같은 존재가 나라, 교회, 가정에서 세워져야한다.
(10/24)
*다윗 왕이 돌아올때에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19:15)
-유다 사람들이 왕을 맞이하여 요단 강을 건너게 하려고, 길갈에 와 있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죽음을 당하자 그를 따랐던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온 이스라엘이 하는 말이 다윗에게 들리자 다윗은 갑자기 유다 장로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골육지친’ 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며 유다 백성들이 이스라엘보다 먼저나와서 자신을 왕의 자리로 다시 귀환시켜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것이 유다백성들이 요단강으로 먼저나온 이유였다. 다윗의 행동이 적절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행동은 옳지 않았다.
양쪽 모든 백성들이 다 나오든지 혹은 왕궁으로 돌아가서 다 모이게 하든지 둘중 하나를 택했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군대장관 요압대신에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마스를 그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이것도 요압의 불만을 더하기에 충분한 결정이었다. 다윗은 압살롬을 죽였고, 자신에게 훈계를 했었던 요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윗의 처신은 나라와 백성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데 적당하지 못했다.
다윗의 주관적인 감상주의와 편가르기식 결정이 훗날 또 다른 분쟁을 만들어 내는것을 보게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16:32)
(10/25)
*이스라엘 사람과 유다 사람이 언쟁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19:42-43)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이 자신들과 의논없이 다윗왕을 모시고 요단강을 건넌사실을 비난했고 유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윗왕과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하여 다툼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읽노라니 왠지 어린시절 동네에서 놀던 유치한 아이들 장난같은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은 자기 지파가 10지파이기 때문에 한 지파인 유다보다 무엇을 하든지 다윗왕에 대하여 더 많은 관여를 해야한다고 말하며 싸움을 복돋우었다. 이에 대해 유다는 자신들은 왕의 종친이라고 되받아친다. 이 두 지파들간의 언쟁의 문제점이 보이는가? 바로 자만심이다. 절대로 양보없고 물러서지 않으려하고 자신들이 최고인양 우쭐대는 모습이 남북간의 대결양상으로 번지게 된것이다.
자만심보다 더 인간 관계를 손상시키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인간의 자만심이 꺽이지 않을때 당연히 하나님앞에서까지 자만하는것이 인생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앞에서 겸손한데 오직 인간만이 창조주 앞에서도 목이 뻣뻣하다. 겸손히 이세상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사함을 얻었다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자만을 버리고 낮아지고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리라.
(10/26)
*성읍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슬기로운 여인은 어떻게 요압을 설득했습니까? (20:18-21)
-요압의 군대가 성읍을 파괴하려는 원인을 대화로 풀어내어 결국 성을 지킬수 있었다.
이 여인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치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무서 나서지 않고 성이 멸망당할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용기있게 나서서 요압과 대화를 시도하여 성읍 사람들을 살리려는 한 여인의 눈물나는 절개를 볼수 있다.
성이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상대 장군이 평화로운 해결방법을 찾지않고 있다고 책망함으로 오히려 요압이 당황할정도로 여인의 언변은 논리적이고 차분했다. 결국 한 여인의 지혜로운 말로 인하여 한 성읍을 파멸에서 건져 구원하게되었다.
(10/27)
*다윗은 이스비브놉에 의해 죽을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21:17)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다윗왕을 보호하였다. 전쟁의 영웅, 백전백승의 장군 다윗이 죽을 위기를 당하는것을 보면서 나이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거인 골리앗을 단숨에 쓰러뜨린 용감무쌍했던 다윗의 전성기가 지나는듯하다. 과거 사울이 기브아 거민들을 학살했던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비가오지 않는 재앙이 닥쳤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하는 전쟁마다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특히 눈에 띄는것은 블레셋의 수많은 거인장군들이 이스라엘의 무명의 용사들에게 패하는 모습이다. 이들의 용맹스런 행동은 마치 과거의 다윗을 보는것과같다. 다윗이 자신의 능력으로 골리앗을 이긴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굳게 의지함으로 이긴것처럼 비록 무명의 사람이었으나 다윗처럼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갈때 블레셋의 거인 장수들을 손쉽게 이길수가 있었다.
이와같은 승전보는 믿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이라면 골리앗이나 거인같은 문제앞에서도 절대로 주눅들거나 무서워하지 않을것이다.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의지하고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찬양하며 나아가야한다.
(10/28)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있어 어떤 분으로 묘사합니까? (22:2-3)
-나의 반석, 요새,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피난처, 구원자이시라고 묘사하였다.
이 단어들의 공통점이 보인다. 최고의 방어벽이자 어떤 원수도 절대로 정복할수 없는 난공불락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말이다. 다윗은 자신이 당했던 고통과 고난의 시간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죽음의 물결, 파멸의 파도, 스올의 줄, 죽음의 덫’ 뭐 다른 표현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한마디로 죽을 지경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무섭고 두려운 묘사들이 변화되어 소망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을까? 다윗이 찾았던 한가지 비책은 그저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고 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부르짓었다고 말한다. 그랬더니 그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다윗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이 행동하시기 시작하시는데 마치 온 땅을 뒤집어 엎듯이 다윗을 죽음의 상태까지 몰아간 악한 원수같은 존재들을 손보셨고 높은 곳에서 손내밀어 다윗의 손을 잡아 주셨다고 고백한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이 의지할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고백한다.
다윗의 묘사와 고백이 백번지당한 말이다. 이세상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어찌할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가운데서 다윗의 고백이 큰 힘이 될수 있다.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노래이시라고 표현한다. 믿는자는 그 믿음있음을 언제 증명할것인가? 내가 평탄할때보다는 고통당하고 죽을거 같은 때에 증명하는것이 진짜 믿음일뿐아니라 하나님의 개입하시고 믿는자들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 경험할수 있다.
(10/29)
*깨끗한 사람과 간교한 사람에게 보이는 하나님은 어떻게 다릅니까? (22:27)
-깨끗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간교한(사악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교묘하심(거스르심)을 보이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하는 데로 갚으신다. 선한 삶을 살고 마음이 깨끗한 영혼의 삶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나타내어 주셔서 더욱 더 그 삶이 빛이 나게 하시지만, 범사가 사악하고 간교한 사람에게는 그들의 죄악과 행실이 형통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죄악에 대하여 벌을 내리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기쁨을 받는 사람이 있고, 미움을 받는 삶이 있다는 뜻이다.
기쁨을 받다가 불순종함으로 미움을 받게되는 경우도 있지만 미움받는 시간이 지속되지 않도록 돌아서는것이 중요하다. 사울은 기쁨받다가 불순종함으로 미움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미움에서 돌이키지 못하였다. 반면 다윗은 사악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징계를 받아 미운딱지가 붙었을때 거기에서 기쁨받는 삶으로 되돌리려고 목숨걸로 참회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매를 보시고 판단하신다. 사과나무가 다른 열매를 맺을수 없는것처럼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게 마련이다. 선한 포도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접붙인바 되었으니 성령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음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10/30)
*다윗은 자신의 어느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다고 합니까? (23:2)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다윗왕의 마지막 노래를 담고 있는 장이다. 기자는 다윗에 대하여 이런 표현을 하였다. ‘높이 세워진 자,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잘 하는 자.’ 이것은 다윗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미천한 자리에서 왕의 자리에까지 기적적으로 오르게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다윗이 때로는 자신의 생각에 옳은데로 판단했던 때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행동했던 삶을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하였고 어떻해든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모든 삶에 개입하시길 원했던 사람이다.
이것을 증명해주는 말씀이 오늘 질문의 대답이다. ‘주님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니 그의 말씀이 나의 혀에 담겼다.’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이 나타났을때에도 주의영이 말씀하시도록 자신의 주관적이고 자아가 이끄는 말을 삼가하면서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흐르지 않도록 하였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가 불과 같아서 자신이나 상대의 마음에 불을 지를수 있는 도구가 될수 있기때문에 특별한 주의를 요하였다. 그러므로 다윗과 같이 성도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술과 혀에 있도록 해야한다. 그렇지 않을때 우리는 세 치의 혀로 너무나 많은 죄를 범할수가 있는것이다. 성령께서 나의 언어까지 주관하시길 기도하길 바란다.
(10/31)
*다윗은 백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24:17)
-내가 바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요
다윗이 인구조사를 실시한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윗을 책망하셨고 이스라엘은 3일간의 전염병을 통해 무려 7만의 숫자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인구조사를 하라고 하시고는 실제로 실시를 하게되자 무서운 징계를 내리셨을까? 역대상 21:1 은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종합해보면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1절)에게 징계를 결심하셨고 사단의 공격을 허용하신것으로 볼수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의 신앙을 시험해 보셨으나 다윗은 요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단행함을 통해 다윗의 영적인 삶에도 빨간불이 켜져있었음을 하나님은 깨닫게 하셨다. 인구조사를 하는 것 자체보다 시행하려는 다윗의 태도나 목적 및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불순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더 큰 것’ 이 어쨌든 ‘ 더 낫다’ 라는 생각을 하고 대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보다 맞다고들 생각한다. 다윗도 인구조사를 할때는 깨닫지 못했으나 인구조사의 결과를 듣자 마음에 큰 찔림을 받았고 그 일이 자신의 자만심과 욕심에 의하여 시작되었음을 고백하게 된것이다. 다윗이 왕으로서의 말년에 자신의 업적을 계수해 보려는 욕심이 앞섰다고 본다. 하나님은 많이 모이는것보다는 올바로 믿는것을 더 원하신다. 물론 많이 모여서 모두 올바로 믿으면 최선이겠지만 많이 모일때 옳은 한 마음을 얻기란 그만큼 어려운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대세를 따를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고 넓은문이아닌 좁은 문을 향해 외롭고 힘들지만 기어코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