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려주게 될 사람은 누구인가요? (1:6)
-여호수아이다. 그런데 애굽시절부터 광야 40년동안의 시간들을 생각해볼때 백성들은 모두 모세가 이 일을 할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여호수아 자신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하나님께서 진행해 나가신것이다. 믿음안에 사는 자들도 성심껏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때 새롭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될것이다.
(7/2)
*라합이 정탐군을 숨겨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2:9-12)
-라합의 말대로 ‘당신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되었는지’ 를 소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라합은 그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과 타협한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받고있는 ‘하나님의 은혜’ 라는것을 상당히 부러워했던 것이다. 라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모든 어려움에서 은혜로 구하시고 보존하신것처럼 자신과 가족도 보존하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은혜를 사모했던 것이다.
성도는 은혜를 떠나서는 살수 없는 존재이다. 라합은 은혜의 소문만으로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의 삶에 주의 은혜가 넘쳐야 더 잘 전하고 증거할수 있다. 오늘도 은혜받고 사는 티를 팍팍 내며 삽시다.
(7/3)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닿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3:16)
-범람하던 물이 멈추고 멀리서부터 둑이 생겨 흐르던 물이 모두 말라 버렸다. 이와같은 사건이 40년전에도 있었다. 바로 홍해사건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물을 건넜다는것은 같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홍해는 하나님이 갈라놓으신후에 눈으로 확인하고 백성들이 건넜지만, 요단강은 제사장들이 첫발을 강물에 들여놓을때 물이 멈추었다. 홍해때 백성들의 믿음이 젖먹는 어린아이 같았서 하나님이 다 떠서 먹여주셨다면, 요단은 스스로 밥을 먹는 어른의 신앙을 요구하셨다고 본다.
성도는 믿음이 항상 자라고 성숙해져야 한다. 믿음의 성숙을 이루길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것이 바로 요단강의 첫발걸음이다. 부담과 염려를 이기고 첫 걸음을 내딛을때 당신의 믿음은 이전과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될것이다.
(7/4)
*여호수아가 길갈에 열두 개의 돌을 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4:21-23)
-열두개의 돌은 범람하는 요단강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넌 이스라엘을 상징하는것으로 후손들에게 어떻게 요단강이 말라지고 그곳으로 선조들이 건너올수 있었는지를 교육하도록 명령하셨다. 먼저 믿은 부모들은 이제 신앙을 가지려는 자녀들이 보고 따라하는 거울과 같다.
부모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면 그 모습 그대로 영향을 받는것이 자녀들이다. 믿음생활의 거울은 오직 말씀이다.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받았던 은혜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들을 아이들과 나누는것보다 더 귀한 교육은 없을것이다.
(7/5)
*지금 세대가 할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5:4-7)
-지금 세대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들이다. 할례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태어난지 8일만에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미의 의식을 행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이들이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니라’ 고 기록하고 있다. 광야생활의 일정하지 못한 스케줄로 인하여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것이다.
그러므로 1세대들의 신앙이 얼마나 광야에서 마치 광야처럼 메말라 졌는지 볼수있는 한 예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전쟁이 시작된 현시점에서 군인들에게 할례의식을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깜짝 놀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대로 순종한다.
왜? 어차피 가나안 정복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라는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7/6)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리고 성 정복 방법은 무엇입니까? (6;3-5)
-조용히 여리고성을 6일동안 하루에 한바퀴식 돌다가 7일째는 일곱번을 연속으로 돌고 소리쳐서 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소리질러서 성을 무너뜨리는 전쟁인셈이다. 마지막에 큰소리를 지르기 위해서 6일동안은 아무소리도 내지않도록 하셨다. 6일동안 한마디도 못하고 지내는것과 마지막날 소리지르는것중 어떤것이 어려울까? 대개 말하는것보다 말하고싶은것을 참는것이 더 힘들다. 그래서 여리고성 전쟁은 ‘침묵전쟁’ 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침묵해야한다. 우리의 주장, 나의 뜻을 내세우려고 하면 안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도록 침묵해야 한다. 오늘도 나의 인간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앞서가지 않도록 주님께 맡겨드림이 옳다.
(7/7)
*여리고 성 전쟁에서 라합과 그의 가족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6:25)
-라합이 정탐군들을 숨겨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라합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라합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을수 있는 확실한 기회가 왔을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라합이 하나님을 믿기를 원했기 때문에 정탐군들을 숨겨주고 그들과 맹세도 할수 있었던것이다.
이 어둡고 타락한 세상가운데서 우리가정이 살아남을수 있는 방법도 오직 한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의 소문은 여리고성 모든 사람들이 들었지만 믿었던 사람은 라합과 그의 가족들밖에 없었다. 이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믿는 사람이 구원받는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 그 능력을 믿고 세상이 주는 환난과 고난가운데서 구원함을 얻어야 한다.
(7/8)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점령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7:11)
-지도자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의 승리도 잠시 작은 아이성에서 실패를 맛보았다. 여호수아는 정탐군의 말을 듣고 전체군대가 아닌 소수의 군인들을 데리고 올라간것이 패착이었다고 판단했을지 모르지만 아이성의 실패의 진짜 원인은 한사람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아간 한사람의 탐욕에 의한 범죄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징계하셨다. 한사람의 범죄가 공동체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성도, 한성도가 그의 지체들로서 유기적인 공동체이다. 신앙공동체에서 한사람의 안일한 불순종이 공동체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수 있다. ‘나 하나쯤’ 이라는 개인주의는 자칫 주님의 몸인 교회공동체를 약화 시킬 수가 있다.
(7/9)
*여호수아가 들고 있던 단창으로 아이 성을 가리키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8:18-19)
-성 뒤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나와서 아이성을 공격하였다.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완전히 진멸하기 전까지 단창을 내려놓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예전생각이 났을것이다. 모세도 과거에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할 당시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는것을 보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손을 들고 있었다. 여호수아도 이 전쟁이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끝까지 승리하길 원해서 단창을 든 손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것이 바람직한 믿음생활이다. 작다고 무시하고 적은 일이라고 사소하게 여긴다면 성도는 큰 낭패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오늘도 하나님께 더욱 맡기고 기도하는 삶이 필요하다.
(7/10)
*아이 성을 점령한 후 여호수아가 처음 한 일은 무엇입니까? (8:30-31)
-신명기 27장에 서 모세가 명령한것을 그대로 행하였는데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돌에 새겼고, 율법을 모든 백성들에게 일일이 낭독하는것이었다.
여호수아는 아무리 전쟁준비가 바쁘고 할일이 많아도 제일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을 읽는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나갔고 그 이후로 모든 전쟁에 승리할수 있었다.
똑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삶에 적용해야하는 승리방식이다. 영적전쟁을 인정하고 그 모든 전쟁을 승리하도록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을 읽되 하나도 빠짐없이 매일 읽어 나가자.
(7/11)
*기브온 사람이 평화조약을 요청했을때 여호수아는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9:14-15)
-여호수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그들과 화친하여 살려 준다는 조약까지 맺어버렸다. 물론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여호수아를 속였으나 특별한 검증절차도 없이 쉽게 받아들인 여호수아는 자신의 성급함을 자책하게 된다.
어제 승리했던 사람이 오늘 실패할수도 있는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는 파수꾼이 될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브온 사람들처럼 화친하려고 다가온다. 분별할수 있는 능력을 말씀을 통해 기를수 있도록 하자.
(7/12)
*오늘 본문 중 태양이 멈춘 사건은 ‘야살의 책’ 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10:12-13)
-‘해가 중천에 머물러 종일토록 지지 않았다.’ 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이적은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것이니 만큼 사람들은 쉽게 믿지를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적을 사실 그대로 말한것뿐이고 훗날 여호수아는 그날의 기적을 기록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야살’ 도 그날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임을 기록했다는것을 인용했다.
여호수아가 그렇게 야살의 책을 인용한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정확히 일어났다는것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자연을 주신것이나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셔서 기적을 만드시는것이나 모두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7/13)
*여호수아가 모든 전쟁에서 단번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0:42)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싸우셨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굳건한 믿음을 얻을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을 밝히고 있는것이다. 하나님은 신앙 공동체에서 편가르기를 정말 싫어하시며 그것을 증오하신다. 하지만 악에 대해서는 세밀한 편가르기를 하도록 명령하신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회색신앙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할 뿐이다. 성도는 세상에서도 하나님편에 늘 서 있어야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받을수가 있다.
(7/14)
*여호수아가 가나안 원주민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고 전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1:20)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가나안 족속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시는가?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다. 완악함은 죄의 수위가 넘쳤다는 뜻이다. 소생할 가능성이 제로인 상태이다. 노아시대,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왕에게처럼 가나안 거민들의 완악한 마음도 그대로 두셨다. 가나안땅의 모든 족속의 영적상태가 오직 죄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통하여 심판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죄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할수 있는것이 죄짓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이 죄가운데 거할때 양심의 종을 울리게 하셨지만 그것마져도 외면하고 죄의 길을 가는 완악한 자를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누구든지 마음에 울리는 죄의 질책을 받고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는 자에겐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7/15)
*여호수아는 정복한 땅을 어떻게 나누어 주었습니까? (12:7)
-가나안 정복전쟁이 끝나고 여호수아는 지파들이 이전에 제비뽑은데로(구분에 따라) 땅을 나누어 주였다. 정복전쟁전에 이미 자기 지파가 받을 땅을 받았으니 혹시 자기 지파가 받을 땅이 아닌지역에서는 대충싸우고 외면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아마 그랬다면 정복전쟁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가나안 정복전쟁이 상징하는것은 이시대의 성도들이 죄와의 싸움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서다. 성도들은 이미 천국의 땅을 얻은 사람들이다. 구원을 약속받은 성도라면 이제 더 치열하게 죄와 싸우고 세속의 물결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싸움을 증진해야 한다. 선한싸움을 날마다 싸우는 성도에게 빛난 면류관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7/16)
*모세가 이미 정복하였음에도 이방인이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섞여 살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13:12-13)
-이스라엘 자손이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쫒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않지만 짐작할수 있는것은 그들의 존재가 이스라엘에게 유익이 될수 있다고 판단했거나 이들이 아주 강한 힘을 가졌을것이라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가나안 땅에서도 정복전쟁은 끝났지만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고 남겨둔 족속들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이들이 결국 이스라엘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혼잡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성도의 삶속에서도 제거하고 버려야 할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품에 안으면 훗날 그것들이 자신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고 말것이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하고 가지면 유익이 될것같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과감히 정리하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7/17)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14:12)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 산지를 요청하였다. 왜 하필 그 땅이었을까? 갈렙에게는 꿈이 있었다. 45년전에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을 언젠가는 얻게되는것이었다.공교롭게도 그 땅은45년전에 가나안 정탐이후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를 강력하게 반대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가 되었던 아낙자손들이 사는 헤브론 산지이었다.
45년이 지났지만 여호수아는 이 날이 올것을 기대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준비하였고 그 때가 이르자 쉽고 편안한 땅이 아닌 그날 하나님이 약속하신 헤브론 산지, 최강의 민족들이 버티고 있던 그 산지를 자기가 정복하겠다고 요청한 것이다. 믿음의 삶은 끊임없이 개척하고 도전할때 강력해지고 성장하는 법이다. 편안하고 쉬운길만 찾는삶에는 솔직히 믿음의 성장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갈렙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믿음의 성숙을 원하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리고 도전을 시작하라. 그뿐이다.
(7/18)
*갈렙이 옷니엘과 딸 악사를 결혼시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15:16-17)
-갈렙은 가나안땅의 기럇세벨이라는 땅을 쳐서 점령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할수 있도록 약속했는데 옷니엘이 그 일을 감당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약속대로 결혼할수가 있었다.
갈렙은 그당시 나이가85세였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운것처럼 유다지파에서도 갈렙의 뒤를 이를 사람이 필요했고 갈렙은 자신처럼 용기있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헤브론 산지를 두려워하지않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기위해 다음세대에게 영적도전을 한것이다. 갈렙의 바람대로 훗날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사사로 부름을 받게된다.
독수리가 자신의 새끼들을 둥지에서 내 몰고 강한 바람을 가를수 있는 독수리로 키우는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다음세대들을 둥지안에서 키우기 보다 그들이 믿음의 훈련과 연단을 위해 도전하고 기회를 주도록 해야한다.
(7/19)
*오늘 본문의 땅은 어느 지파가 받은 유산입니까? (15:20-63)
-유다지파가 받은 유산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정해진 ‘여부스’ 족속을 쫒아내지 못했고 그 대가로 유다자손이 그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유다지파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파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에서 그곳 거민들을 모두 쫒아내지 못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미 정복전쟁은 그쳤고 이제 정착하기 위해 땅을 가꾸고 집을 짓고 터전을 마련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또 다른 전쟁보다는 가나안땅에 안착하는것을 위해 시간과 땀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쫒아 내지 못한것은 엄연히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일수 밖에 없고.
장차 그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시대 그리스도인들도 죄악을우리의 삶에서 내쫒기위해 고군분투하여야 함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죄의 씨앗을 남겨두면 어느샌가 잡초처럼 자라서 나무로 자라서 뽑아내기조차 힘들수가 있다. 우리의 삶에 보이는 죄악은 보이는 즉시 잘라내는 결단이 필요하다.
(7/20)
*요셉의 자손은 어떻게 나뉩니까? (16;4)
-이스라엘의 지파는 총12개로 나누는데 이 12개의 이름은 야곱의 12아들의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12아들중 요셉이 형들의 질투로 애굽에 팔려가 하나님의 은혜로 총리가 되었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며 이스라엘의 지파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러므로 애굽의 총리인 요셉의 이름이12지파이름에서 빠지는 대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이름을 올리며 가나안에서도 땅을 유산으로 받게된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후손에게로 축복의 은혜가 연쇄적으로 임하여 다음세대들도 은혜와 축복의 혜택을 얻는것이다.
(7/21)
*슬로브핫의 딸들이 가문의 남자들과 함께 유산을 상속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17:3-6)
-그들에게 아들이 없어서 딸들이 대신 받았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형편에 앞서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하신것을 그대로 실행한것이다. 45년동안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헤브론 산지를 얻으려고 기다린 갈렙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준것이다. 슬로브핫의 딸들도 눈에 보이는 형편과 처지를 가지고 호소하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은것이 결국 땅을 상속받는 축복까지 얻은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말하고 행동할때 자신들도 복을 받지만 하나님의 권위를 높여드릴수가 있는것이다. 교회나 가족공동체에 평화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높이면 된다.
(7/22)
*오늘 본문에서 남은 일곱 지파가 여호수아에게 책망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18:3)
-일곱지파들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미루었기 때문이었다. 85세 갈렙의 도전과 너무나 상반되는 모습이다.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호수아에게 책망을 얻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축복을 약속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렸던 종과 같이 게으르고 하나님의 축복에 둔감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내리지 않으신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열심과 순종이 있어야 한다. 하늘나라의 ware house 에 준비해두신 당신의 축복을 위해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칭찬받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7/23)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땅 나누기를 마쳤습니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땅을 나누었습니까?(19:51)
-제비 뽑기를 통해서 땅을 나누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제비뽑기는 흔히 말하는 복불복의 의미가 아니다. 운에 맡긴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결정을 맡겨드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은‘실로의 회막 문 곧 주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서’ 라고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실로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둔 곳이란것을 고려할때 모든 사정과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실행하므로 이 행위안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불평이나 원망혹은 우연이나 운을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성도들의 삶도 그렇다. 우연이나 운을 바라는 마음은 믿는자의 모습이 아니다. 이들은 목숨바쳐 열심히 정복전쟁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데로 순종하려고 했다. 성도들도 운을 바라지말고 열심히 주신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결정을 하나님손에 맡기는 기도자가 되어야 한다.
(7/24)
*도피성(the city of refuge)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0:9)
-실수로 사람을 죽인사람의 생명을 피의 복수자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장소이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포장이 잘 되어있고 안내판도 붙이도록 하여서 도피성으로 피하는 죄인들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복수를 하려는 사람을 피해서 안전하게 들어올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도피성은 레위사람들이 관리를 맡았는데 깨끗하고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잘 보살펴주었다. 한편 도피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곳의 장로에게 사고를 설명하는 간단한 절차가 있었고 일단 그곳에 들어온 사람은 철저하게 보호를 받도록 하였다.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는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죄인들이 들어오는 곳이며 어떤 죄인이라도 교회는 기쁜마음으로 받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죄를 깨닫고 갱신의 삶을 살수 있도록 인도하여야 한다. 그리고 특히 도피성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어떤 죄를 지은 자라도 그앞에 나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새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교회들이 도피성의 의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지 영적레위사람들인 성도들이 도피성으로 오는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사랑하는지 생각해보자.
(7/25)
*레위 사람이 받을 몫은 무엇입니까? (21:2-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유산 가운데서 성읍과 목장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도록 하셨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레위지파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의 회막에서 봉사하는데 집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다른 지파들 처럼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지 않으시면서 ‘내가 너희의 기업이 되어주겠다’ 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어주시는데 왜 우리는 툭하면 염려가운데 사는가? 하나님은 이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공급하여 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자기만족에 빠지면 하나님의 공급마저도 불평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주시는 자도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몫에 항상 만족하며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릴수 있다.
(7/26)
*레위 지파의 유산은 다른 열두 지파와 어떻게 다릅니까? (21)
-앞에서도 보았지만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와 달리 독립적인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지파들이 자신들의 분깃을 조금씩 나누어주어서 레위지파가 살아갈수 있도록 하셨다.
레위지파가 자신의 몫을 여호수아에게 청원한것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분량만큼만이었지 더이상도 아니었다.
성도의 삶에서도 레위지파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것에 만족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한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그리고 그 죄가 쌓이면 사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7/27)
*여호수아는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는 르우벤 자손, 갓 자손과 므낫세 반쪽 지파 사람들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있습니까? (22:4-5)
-요단강 동쪽의 땅, 자신들의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땅으로 돌아가도록 했고, 그곳에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좇아서 지키도록 하였다. 여호수아는 정복전쟁전에 그들과 약속했던바를 그들이 온전히 지켜준것에 감사했고 앞으로도 그들의 지파를 오직 하나님의 법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당부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언제나 공동체 중심의 삶이어야 한다.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며, 주어진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공동체의 삶의 중심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
(7/28)
*르우벤 자손, 갓 자손,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단을 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22:27)
이들이 다른 지파처럼 요단강 서쪽에 정착한것이 아니라 동쪽에 정착했으므로 훗날 서쪽에 정착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후손이 자신들의 후손을 한 민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것을 염려하여 그들이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공동체안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곳은 오직 한곳뿐인데 동쪽에 단을 쌓은것이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던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곳에 단을 쌓아 제사드리는 행위를 적대시하고 반역으로 여겼으므로 자칫 동족간에 큰 화를 초래할뻔했던 사건이었다.
믿는 자들 사이에 이렇게 오해가 생길수가 있다. 서쪽의 지파사람들이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흥분했을때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먼저 대표들이 찾아가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수 있었던 것이 대재앙을 막을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친구를 순식간에 적으로 만들수 있다. 그러므로 범사에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7/29)
*여호수아는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명령을 어기고, 이방 민족들과 가까이 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거라 예언합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 가나안 땅에서 망하게 될것이라고 예언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예언은 이시대 성도들이 말씀을 읽고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다. 자기 귀에, 눈에 좋아보이는 것만 마음에 담거나 읽으려고 하는 편식신앙은 그 사람의 삶을 오히려 망가뜨릴수가 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하고 읽을때 축복과 저주가 늘 같이 존재함을 기억해야 한다. 복만 바라보는 기복신앙인이 되지말아야 한다. 잠언에 나오는 의인과 악인의 극명한 대조를 항상 묵상하며 믿는 자들에게 믿는 삶이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빼거나 더하지 않고 모두 믿고 순종하는것이다. 말씀에 대하여 편식하고 있다면 당신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그 습관을 버려야 한다.
(7/30)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전쟁을 비롯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24:12-13)
-첫째는 ‘내가 너희보다 앞서~’ 이 구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전쟁을 친히 승리할수 있는 길로 이끌어 주신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어려워 보이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거기에 대한 순종.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와 말씀에 순종하는것이 어렵다. 우리는 무언가 승리하고 이기게 되거나 잘 나가면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치하할때가 많다. 잘되면 내탓이요 못되면 하나님 탓으로 돌린다. 이것은 불신앙이다.
여호수아는 고별설교에서 이것을 강조했다. ‘이 두 왕을 몰아낸 것은 너희의 칼이나 활이 아니다.’ ‘너희가 일구지 아니한 땅과 세우지 아니한 성읍을 내가 너희에게 주어서.’ 누가 순종하는 자인가? 무엇이든지 내가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것이고 나의 공로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이심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자가 순종의 자리로 나아갈수가 있다.
(7/31)
*이스라엘 자손은 요셉의 유해를 어디에 묻었습니까? (24:32)
-세겜땅에 묻었다. 이것은 요셉의 유언이었고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장사지낸 유골을 들고 나와서 가나안땅에 묻기까지 40년이 넘게 걸렸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히 믿었던 요셉의 마지막 당부가 이루어지는 감격을 볼수가 있다.
한달동안 여호수아서를 읽고 이제 마지막 장을 보면서 저마다 느낀점이 많을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땅에 묻히는 날이 올것이다. 물론 그전에 주님이 오실수도 있다. 구약시대와 달리 지금은 예언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요 은혜시대이다.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죽음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죽느냐, 어디에 묻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구원을 받았는지가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런것에 대단한 관심을 두겠지만 적어도 믿는 자라면, 구원의 감격을 얻은 사람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믿는자는 ‘마라나타’ 즉 아멘,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의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뭔가 문제가 있는것이다.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깊게 생각을 해보아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