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한나는 왜 하나님 앞에 괴로운 마음으로 울며 기도했습니까? (1:10)
-한나는 대적 브닌나에게 한없이 괴로움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였다. 남편의 사랑을 빼앗긴 브닌나의 복수가 아마 한나의 마음을 갈기 갈기 찢어 놓은듯하다. 한나는 자식없는 서러움에 브닌나에게 그렇게 공격을 당하고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였지만 브닌나에게 별다른 대처를 하지 않았다. 같이 머리끄덩이 붙들고 싸울만한데도 말이다.
집안이 격투기 싸움터처럼 될수 있었을수도 있었는데 한나가 선택한 싸움터는 하나님의 성전이었다. 한나는 기도를 선포하고 브닌나를 이용해 자신을 공격하는 마귀에게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고 흐느껴 울며 하나님께 매어달렸다. 한나의 기도의 영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를 위해 그의 어머니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을 엿볼수가 있다.
성도의 삶에 는 항상 위기가 도사리고 있지만 믿는자는 위기를 기도를 통해 또다른 은혜의 순간으로 만들수가 있어야 한다.
(9/2)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과 사무엘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2:12-21)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은 현직 제사장들이었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바쳐진 어린 나실인 이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의 타이틀을 권력으로 삼아 남용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였으나 사무엘은 비록 어렸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성경에는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자가 나중 된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직분을 받았다고 다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지금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가운데서 보여주는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신앙이라고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운명적으로 제사장이 되긴했지만 그 귀한 직분을 받고서도 오히려 교만하여 거룩한 직분을 권력시하며 하나님의 규정을 무시했던 두 아들들과 그들의 아버지는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되지만, 비록 제사장 가문은 아니지만 어머니 한나의 진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무엘은 그들보다는 한창 늦게 신앙을 시작했고 또 나이도 어렸으나 주님을 진심으로 기쁘게 섬기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현재 신앙상태는 먼저 되었으나 나중된자 혹은 나중된 자이지만 먼저 된자?
(9/3)
*어린 사무엘은 어떤 음성을 들었습니까? (3:10)
-먼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부르실때 항상 이름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모세, 사울(바울)아,,,. 이처럼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당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주신다. 그당시 엘리, 홉니, 비느하스등 제사장들이 버젖이 살아 있었음에도 어린 사무엘을 불러주신것은 하나님께 경건히 제사드리는 종이 놀랍게도 어린 사무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불러서 앞으로 엘리 가정에 임하게될 무서운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시대에도 하나님의 음성은 말씀을 통하여 믿는 자들의 귀에 들리도록 하신다. 성경을 날마다 읽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다. 사무엘은 무서운 재앙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엘리 제사장에게 담대하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마치 선지자와 같이 그 말씀을 자신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부모된자는 꾸준히 말씀으로 자녀들을 양육해야하고, 자신이 살고 일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데로 순종하고 전할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9/4)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에서 언약궤를 들고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4:3-4)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실패한 원인이 언약궤를 가져가지 않은 까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얼핏보면 그들의 결정이 틀리지 않은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을 의지하려는것처럼보일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분이 아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신분이 하나님이시다. 블레셋을 통해 범죄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시려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관계회복을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간사하고 교만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용해 그저 전쟁을 이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두번째 전쟁에서 대패하고 많은 손실이 있었다. 엘리제사장, 두 아들 제사장들, 그리고 언약궤도 빼앗겼다.
블레셋을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징계하실때 하나님 마음은 좋으셨을까? 언약궤를 빼앗겼을때 하나님의 자존심은 심하게 손상을 입으셨다 .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대로 두셨다. 왜? 당신의 백성들이 죄악가운데서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피조물로 태어나주셨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십자가위에서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시고 비참하게 죽어주셨다. 왜? 당신의 양들이 죄를 뉘우치고 구원받게 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를 원하는가? 먼저 관계를 회복하라. 죄악을 버리고 씻음을 얻으라.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이성전투에서 실패하고 먼저 성결케한것을 보라. 관계회복없이 절대로 승리도 능력도 얻을수 없다.
(9/5)
*아스돗 사람들은 신전에 들어가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5:2-5)
-우상 다곤이 언약궤앞에 쓰러져서 머리와 두 팔목이 부러져 엎드러져 있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진영으로 넘어가자마자 블레셋의 신을 부숴버리고 그 지역에 재앙이 내렸다. 불과 몇일전만해도 전쟁터에서 아무런 능력이 없어보였던 언약궤가 왜 갑자기 큰 능력으로 나타났을까?
하나님은 누구편이신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길때만해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제 블레셋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는가? 라고 의구심을 가질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죄인들의 편에 서지 않으신다는것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또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뜻을 발견할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섬기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용기와 사기를 높여주신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징계의 심판을 통해 그들의 의지와 사기를 꺽어버리신다. 하나님은 이세상에서 한분뿐이신 유일한 창조주이시다. 온 우주와 이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앞에 무릎꿇을수밖에없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믿는 자들에게 복이 임할것이다. 의인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9/6)
*주님의 궤를 멘 암소들은 어디에 멈춰 섰습니까? (6:14)
-벳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멈춰섰다. 기적이다. 애시당초 블레셋사람들은
주님의 궤를 싣은 암소들이 가는 방향을 통해 블레셋에 내린 재앙의 출처를 판가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은 공정치 않았다.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송아지를 둔 엄마소에게 그것도 한번도 멍에를 매어보지 않은 암소두마리에게 멍에를 메개했다. 왜 공정치 못한가? 새끼들이 우는 소릴듣고 한번도 가보지 않은 외딴지역으로 가는 짐승은 없기때문이고, 처음 멍에를 맨 소들은 거의날뛰거나 움직이지 못한다. 이 말은 그들이 당한 재앙이 우연한일이며 하나님의 개입이 아님을 알리고 싶었던 사악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암소들이 본능을 거부하고 오른쪽이나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고 울면서 이스라엘땅인 벳세메스지역으로 곧바로 나아갔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싶었지만 암소들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린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짐승이 본능을 거스리지않는다는것을 인간은 이용하려했지만 암소들은 본능을 거스르면서 하나님께 순종해버렸다. 우리도 암소들처럼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가?
(9/7)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7:5)
-엘리제사장과 그의 아들 제사장들의 영적 무감각으로 인하여 온 나라가 우상숭배와 인본주의 사상에 빠졌을때 하나님은 블레셋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탈취하고 이제 자신들의 신이 하나님까지 꺽었다고 자만했으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며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언약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려 보내게 되었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율법에 의거하여 잘 지키는 사이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 세워지고 이스라엘의 죄를 해결받기위해 백성들에게 우상숭배금지와 우상제거를 명령한다. 그리고 미스바로 모두 모여서 하루 금식하며 하나님께 회개의 부르짖음을 이끌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스바 영적 대각성’ 이었다. 블레셋이 그 틈을 타서 올라왔으나 금식하며 기도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지키시며 블레셋을 물리쳐주셨다.
영적 각성은 신앙생활의 기본중에 기본이다. 회개없이 믿음의 성장은 없다. 내가 주인삼던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약속하고 결단하는 삶이 필요하다. 나의 영적 미스바 운동을 시작하라! 하나님이 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실것이다.
(9/8)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왜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합니까? (8:5)
-지도자 사무엘은 늙었고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와 다르게 불의한 사사들이었기때문이다. 그들의 요구가 타당한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가 무엇인지 하나님은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들이 너를 버린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빼앗기는 모습을 보았기에 더이상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시지 못할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방나라처럼 인간의 왕을 요구하게 된것이다. 사무엘이 왕이 생기면 발생하게될 여러가지 조건을 설명했음에도 장로들은 막무가내였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왕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앉으셔야할 왕좌를 지금 차지하고 있는것이 무엇인가? 혹 물질인가? 혹 자녀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는자가 그리스도인이지만 그 통치를 외면하고 자신의 판단만을 추구할때 그 인생은 사무엘의 경고를 무시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될수있다. 오늘도 나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의 경고를 새겨들으며 의의길을 향해 나아가자.
(9/9)
*본문에서 사울은 어떤 사람으로 묘사됩니까? (9:2)
-두가지로 그의 성품을 발견할수 있는데 하나는 아버지의 말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착한 품성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가장 작은자 (the least important) 라고 부르며 스스로 겸손한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기 싫은데 억지로 주셔야하니 아무사람이나 대충 기름붓게 하시는것일까? 세상적으로 보면 사울은 왕의 근처에도 올수없는 스팩이나 배경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완전히 세상과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하나님의 관심은 스팩이나 배경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의 중심이 우선이다. 하나님이 보신 사울은 분명히 그런 사람이었다. 하나님께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모든 예의와 겸손을 두루갖춘 사람이었다.
세상은 이러한 사람을 중요한 요직에 앉히려고 하면 난리가 난다. 자격없다고 한다. 환경이 좋지 않아고 한다. 학력이 부족하다고 핀잔을 준다. 리더쉽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무엘을 보라. 하나님이 지정하시면 두말하지 않고 순종한다. 하나님께 왜 이런 사람을 세우냐고 원망하지 않았다. 왜? 사무엘은 인생들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확실하다는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사람을 현 위치에 세워주셨다. 자격있어서? 아니다.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사울이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길을 나선것이 사무엘을 만날수 있었던 첫걸음이란걸 잊지말자. 결국 그분이 잃었던 당나귀도 찾게하시고 자신의 새로운 앞길도 찾게하셨다.
(9/10)
*왕으로 뽑힌 사울이 보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0:21-22)
-자신이 왕으로 세워지는것이 당황스럽고 두렵고 부끄러워 짐짝뒤에 숨어 있었던것같다. 소몰고 밭을 갈던 농부의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한 나라의 왕이 되는것이니 그 일이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사울 자신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가족, 지파중에서 선택되었으니 가족들과 베냐민 지파사람들 모두가 무척 의아해 했을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부끄럽고 두려워 짐짝뒤에 숨은 사울을 발견하고 백성들앞에 세우시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이 두려워하는 사울을 짐짝뒤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뒤에 숨게하시는것처럼 보였다. ‘너 숨을려면 내 뒤에 숨어 내가 도울께’ 하시는듯하다.
하나님이 부르실때 인간적인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찾아올수 있다. 그때 하나님뒤에 숨을수 있어야 한다. 짐짝은 마귀가 두려워하는곳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이다. 사울은 사람들이 호응대신에 야유를 보낼줄 알고 숨었지만, 짐짝뒤에서 나와 하나님뒤에 숨으니 백성들이 만세를 부르며 자신을 맞이해 주었다. 요나도 배밑으로 숨었으나 하나님이 배위로 나오도록 하셔서 결국 사용하셨다. 인간의 조건, 상황만 보고 답답하고 두렵지만 하나님뒤로 숨는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경험할것이다. 피난처는 오직 예수뿐이다!
(9/11)
*백성들은 사울을 반대하던 사람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 말에 사울은 어떻게 반응했나? (11:12-13)
-사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신 날에 사람을 죽일수 없다고 말했다. 또 한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울의 성품을 만날수 있다. 이 말을 하기 앞서 사울은 엄청난 리더쉽을 발휘해서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단숨에 얻게 되었다. 사울이 왕이 되는것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며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왕으로서의 강력한 통치력을 보여줄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다. 자신을 반대하던 무리들을 향하여 손가락하나 까딱하면 모두 죽일수 있었던 순간에 사울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생각했다. 그리고 결단한다. 그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수 없다고 판단하여 반대하였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므로 인생을 만드시고 살리시길 원하신다. 성도된 자들은 하나님의 그와같은 성품을 본받아야 한다. 성도들의 삶의 목적도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것이 아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저주를 퍼붓던 사람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영광만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살리는쪽을 택했더니 그들이 다윗에게 무릎꿇게 되었다.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우물을 파면 뺏어가던 그랄 목자들을 선과 용서로 다스렸더니 그들이 오히려 이삭을 두려워하게되었다. 칼자루가 나에게 있어도 칼을 칼집에 도로 넣으라고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9/12)
*사무엘은 자신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무엘은 마지막 설교에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할것라고 고백했고 왜 이것이 진정한 약속인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에게 있어서 기도는 삶 그자체이다. 젖떼자마자 하나님께 받쳐진 이후 평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던 사무엘의 약속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한가지를 설명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기도하지 않는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도움없이 스스로 살겠다는것과 같은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상당히 큰 교만의 모습이다. 제사장이었지만 기도없는 삶을 살았던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운명을 볼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을뿐만 아니라 어떤일을 만나도 기도를 통해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흔히 우리가 많이 하는 말가운데 ‘기도할께요’ 라는 말이 있다. 과연 이 말에 책임을 지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기도하겠다는 말이 마치 그리스도인의 흔한 인사치례가 되어가는게 아닌지 두렵다.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것을 죄라고 말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님앞에 엎드리는 삶을 시작하자.
(9/13)
*사울은 왜 자신이 직접 번제를 올렸습니까? (13:8-9)
-삼고초려, 즉 세가지의 위기가 자신에게 닥쳤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이 세가지 위기는 ‘백성은 흩어지고, 제사장은 오지않고, 블레셋은 모여들고’ 이었다. 사울왕이 오직 제사장만이 해야할 번제를 직접드린 결정적 원인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말한다.
사무엘은 사울의 변명이 합당치 않다며 이렇게 말한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사울이 해서는 안 될 일이란 무엇인가? 그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을 제사장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을 통해 알려주셨다. 이 과정을 건너띄고 사울왕이 홀로 번제를 드려버린것은 하나님의 은혜베푸시는 통로를 무시한 행동이며 번제를 형식적으로 생각한 큰 잘못이었다.
사울의 상태, 심정이 되면 우리는 어땠을까? 우리는 사무엘이 오기까지 무조건 기다렸을까?
하나님의 은혜는 기다리며 믿는자에게 임하는것이다. 조급하거나 두려움에 빠지면 은혜를 얻을수가 없다. 사울은 블레셋을 두려워하기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 했다. 우리의 삶가운데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자.
(9/14)
*요나단이 말하는 승리의 요인은 무엇입니까? (14:6)
-아버지 사울과 달리 요나단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했던 신앙인이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도와주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요나단은 마치 다윗이 거인장수 골리앗에게 달려든것처럼 홀로 블레셋의 적진에 달려들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 요나단의 승리는 그의 고백안에 있었고 그의 믿음의 행동이 그것을 증명해 내었다.
모든이가 승리를 원하지 실패를 원치않는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외적인 환경을 탓하지도 개의치도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손만 바라보며 순종의 자리에 뛰어든다.
요나단은 특급군인이 아니었으나 블레셋을 기습하여 승리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이 보내신 크나큰 공포가 그들을 휘감았다.’ 라고 승리의 원인을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행동을 보일때
힘이 되어주시며 그 믿음의 행동이 왜 중요하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명해 주시는 것이다.
(9/15)
*사울이 사무엘에게 함께 하나님께 경배드릴 것을 요청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5:30)
-사울은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기보다 이일로 인하여 왕직을 잃어버리는것을 더 두려워하여 사무엘을 통하여 자신의 행동을 무마하길 원하였다. 그는 사무엘에게 백성들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달라고 간청한다. 다른번역은 ‘나를 높이사’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렇게 겸손했던 사울이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는 교만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울은 사람앞에서 자신의 체면세우기에 급급하였을뿐 하나님이 그를 통해 원하시는바를 깨닫지 못하였다. 결국 이번사건으로 사울은 사무엘과 결별하게되고 불행하게도 하나님과의 관계도 무너지고 말았다.
인간의 탐욕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불러일으키는지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절대로 실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정욕에 따른 외도가 하나님을 근심하게 할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고 당부한다. 오늘도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께 근심을 드리는 행동이 없는지 살펴보자.
(9/16)
*젊은 신하가 본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6:18)
-수금(harp)을 연주하고 용사처럼 용감하고 말도 잘하고 인상이 좋고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다윗을 이렇게 소개한 왕궁의 소년과 다윗이 어떤 사이인지도 정확히 알수가 없다. 그러나 다윗에 대하여 정확하게 묘사한것을 볼때에 어떤 친분이 있는듯하다. 나는 이 소년이 그저 친분이 있다는것때문에 다윗을 자기왕에게 소개했다고 보지 않는다. (왕에게 사람 잘못소개했다가는 자기의 생명이 위태로울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 소년이 다윗을 묘사한데로 그가 정확히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치 술맡은 장관이 요셉을 경험하고 그를 기억하여 왕에게 소개한것처럼 이 소년도 자신의 기억에 있는 다윗이 적임자라고 확신해서 기쁘게 소개한것이다.
소년의 말을 통해서 다윗의 평소의 모습이 그려지는것같다. 자기의 실력과 능력과 재능을 뽐내려고 사람들앞에 스스로 나서지도 않았는데 어떤 한 소년이 그의 삶을 기억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너무나 기막힌 타이밍에 다윗이 왕궁으로 들어올수 있도록 그 소년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언제나 보내신곳에서 주신일을 감사하며 기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등을 돌리실 일을 꾸미지 않는 사람이다.
(9/17)
*다윗은 어떻게 골리앗과 싸워 승리했습니까? (17:49-50)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골리앗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잘라 승리하였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비록 간단하게 끝났을지 모르지만 이 싸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골리앗같은 문제나 시험을 만날때 우리는 다윗처럼 간단히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린 다윗이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얼만큼 하나님을 의지했었으면 골리앗 앞에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수 있을까? 이시대 다윗같은 믿음을 볼수가 있을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다윗의 영성을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골리앗앞에 당당히 맞설수 있는 베짱있는 믿음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것이 아니다. 다윗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울왕에게 자랑질을 좀한다.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장난이 아니라 분명한 믿음이 보여주는 확신이다. 다윗은 어렸지만 이미 믿음이 왜 승리할수밖에 없는지를 수도없이 경험해 본 영적싸움의 베테랑이었던것이다. 직분이나 교회다닌 기간이 믿음을 말해주는것이 아니다. 진짜 믿음은 현실에서 믿음으로 싸우는가 그렇지 않은가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골리앗은 최강의 전사였지만 다윗은 최고의 믿음을 가진 소년이었다.
언제나 믿음이 이긴다. 주 예수를 믿어야 이긴다. 예수의 이름앞에 마귀는 쫒기는 법이다.
(9/18)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때 백성들은 어떤 노래를 불렀습니까? (18:6-7)
-여인들이 춤추며 지어부른 노래의 가사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었다. 이 노래는 정확히 다윗이 그당시 얼마나 많은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안겨주었는지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런데 하필 다윗을 왕과 빗대어 말한것이 사울의 질투와 시기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백성들의 눈은 정확했다. 그러나 표현방식이 옳지 않았다고 본다. 내가 사울이었어도 당연히 질투가 날것같다. 사람을 비교하는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일이 아니다. 하지만 왕이었던 사울의 태도도 아쉬운건 마찬가지다. 왜 자꾸 사울이 왕이되기전의 모습이 떠오르는걸까? 그렇게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다윗의 출현으로 그렇게 기뻐하고 집에도 보내지 않을정도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던가? 교만함은 사랑도 걷어차버릴정도로 안하무인이 된다.
이렇게 교만은 우리 인생을 실패자로 만드는 선봉임을 다시 깨닫게 한다. 교만함은 마귀가 우리에게 쏘아대는 불화살이다. 믿음의 방패가 없으면 겸손한자도 순식간에 교만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믿음의 방패가 있으면 누군가 나를 비하하고 조롱해도 크게 반응하지 않을수 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이미 못박은자이기 때문이다. 죽었다면서 뭘 그렇게 억울해하고 핏대올리며 반응하는가? 아직 안 죽었기때문이다. 예수님 앞에서 칼빼들고 설쳤던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명령하셨던 주님의 음성을 모두 믿음으로 따르자.
(9/19)
*다윗은 어떻게 사울 왕의 암살계획에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까? (19:11-13)
-다윗의 아내 미갈의 재치있는 도움으로 도망칠수 있었고 또한 그에 앞서 친구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에게 애절하게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미갈은 아버지의 추궁에 요나단처럼 다윗의 무죄를 변호해주지 못하고 자기 살길만 챙기는 모습을 볼수있다. 그래서 요나단의 우정이 더 깊이있게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것이다. 다윗을 향해 살기가득한 아버지 사울앞에서 요나단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당당하게 말하였다. 그저 ‘아버지 내 친구 다윗에게 그러지 마세요’ 가 아니라 ‘아버지 이런 죄를 지으시면 안됩니다.’ 라고 하나님께 범죄하고있는 아버지의 옳지못한 행동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혹시 아버지에게 건방진 아들처럼 보일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요나단의 용감한 발언에 사울이 놀라운 고백을 하게되는데 ‘내가 결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
그리고 다윗은 당분간이지만 다시 전처럼 사울옆에서 섬기는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요나단의 용기는 진리를 붙잡아야하는 성도들이 본 받아야할 귀한 모습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비진리와 적당하게 타협하는 삶은 비진리에게 날개를 달아주는것과 같다. 미갈도 요나단처럼 적극적으로 사울에게 진실에 대하여 눈물로 호소했다면 어땠을까? 우리의 삶속에도 비진리되는것과 적당히 타협하며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지 잘 돌아보아야 한다.
(9/20)
*요나단은 왜 어린 종에게 화살이 더 먼 곳에 있다고 말했습니까? (20:19-21)
-이것은 다윗과 요나단사이에 있었던 비밀신호로서 요나단이 이렇게 말하면 다윗은 왕궁에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이와같은 비밀약속을 요나단이 제안했을때만해도 그는 아버지를 설득할수 있었다고 믿었던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변호하는 자신에게까지도 창을 드는모습을 보고 마음을 굳힌것이다. 생명처럼 사랑했던 친구 다윗에게 마지막 이별의 신호를 보내야만 하는 요나단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둘만아는 이 신호를 이해한 다윗과 요나단이 마지막 작별하는 모습에서 다윗은 요나단보다 더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왜 더 울었을까?
다윗은 왕자였던 요나단이 양치기였던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허물없이 친구로 삼아준것부터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때마다 사울왕앞에서 자신을 늘 지켜주었던 요나단에게 받은 은혜가 주마등처럼 지나갔지 않았을까?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생각나는건 나혼자 만이 아닐것이다.
‘내 친구되신 예수님 날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몸을 버리사 내 죄를 대속했네,,, 내 진실하신 친구여 큰 은혜내려주사 날 항상보호하시고 내 방패되옵소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손을 잡아 죽음에서 생명을 주신 예수님.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이 보인다. 십자가에서 끝까지 약속을 지키신 예수님께서 ‘내 증인이 되어라’ 말씀하셨다. 이시대 다윗과 같은 용감한 신앙인도 필요하지만 요나단처럼 주님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Promise Keeper 도 필요하다.
(9/21)
*다윗은 왜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까? (21:12-13)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해 보려던 다윗의 인간적인 방편이었지만 씁쓸한건 어쩔수가 없다.
골리앗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하게 마치 대 장수처럼 행동했던 그가 왜 이런 추한 꼴을 보인걸까?
어떤 독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인 다윗의 비겁함을 꼬집기도 한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다윗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는가 아니면 이해가 되는가? 선뜻 답이 나오지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모습을 보시고 어떠셨을까? 일단 성경을 다 뒤져봐도 이번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책망받는 장면은 볼수가 없다. 그렇다면 혹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와같은 생각을 주신건 아닐까? 성경은 하나님과 다윗사이에 무엇이 오고갔을지를 풀수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아둘람굴에 숨어있던 다윗에게400명가량의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그들은 모두 사울의 통치아래 환난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다윗을 찾아온 목적이 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다윗과 함께 사울을 공격하기원해서다. 다윗은 그당시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시편34편이며 제목까지 붙여놓았다. ‘다윗이 미친체하다가 쫓겨나 굴에 숨었을때에 쓴 시편’ 다윗이 자기 믿고 모인 400백명에게 무슨말을 했을거 같은가? 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사울을 공격합시다? 그렇지 않다. 다윗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솔직히 고백하고 자신도 연약한 인생임을 말하며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것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듣고 기뻐하리라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원수곁에 있으면 사울로부터 안전하겠다 싶어 얄퍅한 꾀를 내어보았으나 오히려 큰 두려움과 망신을 당하였다. 다윗은 무언가 깨달았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9/22)
*사울은 왜 제사장들을 몰살시켰습니까? (22:17)
-사울은 제사장들이 다윗이 그곳에 왔음에도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것과 다윗을 도운 사실이 자신을 해치려는 공모라며 오해하여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다. 이 무서운 살육뒤에는 사울의 악독함이 극에 달하였다는것을 면밀히 보여주고 있다. 사울은 이제 다윗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을 잃어버리고 달려든다. 하나님의 제사장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오히려 사울의 신하들이 제사장들을 헤치는 일을 꺼려한걸 보면 사울의 마음에는 더이상 하나님께대한 존중이나 두려움마저도 사라져 버린것이다.
결국 다윗을 향한 질투에서 시작된 일이 제어가 되지 못하니 무서운 비극으로 번지게 되었다.
질투하는 사람은 스스로 오해를 만들고 범죄하도록 만드는 무서운 마귀의 무기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누군가를 향한 질투와 오해가 일기 시작할때 거기에 휩싸이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성령님께로 돌려야 한다. 지혜의 영인 성령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해 주신다.
(9/23)
*다윗이 날마다 자신을 찾아온 사울에게서 무사히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3:14-15)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숨기시면 알고 찾아가도 발견하지 못하는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사울과 다윗의 쫓고 쫓기는 상황이 계속 전개되는데 마치 첩보영화를 방불케하는 정보전쟁이 이어진다. 다윗의 행적을 누군가 밀고하면 다윗을 옹호하는 사람이 사울의 위치를 알려주어서 피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 정보전쟁은 다윗이 더 우위를 점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울은 인력을 통한 정보를 얻은 반면에 다윗은 하나님을 통해 정보를 얻기때문이다. 하나님은 적재적소에서 다윗의 눈이 되어주셔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얻고 적인 블레셋이 쳐들어오게해서 사울에게서 피하게도 하셨다. 애시당초 이 싸움은 게임이 성립되지 못할것이었다. 사람의 정보가 아무리 빠르고 정확해도 하나님의 네비게이션을 앞지를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의지함보다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것이 빠르고 정확함이다.
다윗이 몸은 산과 들로 숨었으나 그의 심령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피했던것이 매번 사울의 레이더망을 피해갈수 있었던 이유이다.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당신의 자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 항상 피할수 있을때가 가장 안전하다.
(9/24)
*동굴에 혼자 있는 사울을 발견한 다윗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24:3-4)
-살짝 옷자락만 베어서 나왔다. 다윗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실망하고 놀란 부하들에게 다윗은 자초지종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감히 손을 들어,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치겠느냐?”
다윗은 그저 왕을 치는것이 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왕임을 강조하여 자신들이 함부로 행해서는 안됨을 가르쳤다. 무슨의미인가? 세우시는것도 패역시키시는것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뜻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경고의 뜻으로 옷자락을 몰래 베어낸일까지도 양심에 큰 가책을 느낄정도로 그의 심령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맑은 상태였다. 사울을 해하지도 않았는데 이정도의 죄책감을 느낄수 있을까?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것이요’ 라고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사울의 옷자락을 베어낼때 다윗의 마음에는 해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을것이다.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가 내 눈앞에 무방비상태로 있는데.. 누구나 이 순간이 오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받아들여 행동할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그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곧바로 답을 찾을수 있었다. ‘주님께서 나와 왕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요즘 하늘을 보면 너무 푸르고 맑다. 우리의 마음도 푸른 하늘처럼 맑아야 하나님을 바라볼수있다.
하나님을 통과하면 악이 선으로 바뀌고, 욕심이 양보로, 염려가 찬양으로 변화하는것이다. 주님, 오늘도 내 자아가 출동하기전에 하나님을 먼저 거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9/25)
*다윗을 맞은 나발과, 아비가일의 반응은 어떻게 다릅니까?
-나발은 다윗을 하찮게 여기며 오히려 그의 분노심을 자극하였다. 다윗을 그토록 화가나도록 만든 나발은 참으로 교만한 사람이었는데 수많은 재물이 그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성경은 설명한다.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는 물질을 아끼지 않고 마치 날마다 잔치를 배설하는 악한 왕처럼 살았지만 단한번의 도움을 구하는 다윗의 손길에 대하여는 아주 야박했다. 그와 반면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현명하고 지혜롭게 상황에 대처하는 바람에 그녀의 온 가족들을 비극으로부터 구출해낸 여인이다. 나발과 아비가일의 가장 큰 다른 반응이 있다. 나발은 다윗을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 으로 취급하며 무시한반면,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소서’ 라고 말하며 다윗의 분노를 달래는데 공을 세웠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부부는 너무 닮지않아서 가정을 살린 케이스라고 본다. 선한일에 합력하는 부부는 아름다운 커플이지만, 악한일에는 더 마음을 합하여 그일에서 발을 옮기는 부부는 훌륭한 커플이다.
(9/26)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이려는 아비새를 말렸습니까? (26:9-11)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사람이 죽이는 일을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윗의 철저한 신앙관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답답해하는 아비새에게 왜 이것이 중요한 일인지 설명한다. ‘주님께서 사울을 치시든지, 죽을 날이 되어서 죽든지, 또는 전쟁에 나갔다가 죽든지 할것이다.’ 이 뜻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사람은 주님의 손으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하신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지조를 굳게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아비새와 다른 신하들은 이런 다윗의 행동을 지금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한결같은 신앙을 기쁘게 받아 주셨다.
잠언16: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우리의 행동이 아무리 정당한것처럼 보일지라도 그속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교만함이 있기때문에 믿는자는 자신의 모든 행사를 주님께 맡기는 신앙이 필요한것이다.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사모하는자에게 하나님이 그의 의로움이 되어주시는 것이다.
(9/27)
*다윗은 블레셋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27:8-11)
-다윗은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망명을 요청하여 살고 있었지만 유다와 적국이었던 나라들을 습격하곤 했다. 그러나 아기스 왕에게는 유다땅의 어느 부분을 공격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로인하여 다윗은 아기스 왕의 신뢰를 얻게된다. 과연 이와같은 처신이 올바른것인가?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 신뢰를 얻으므로 후에 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큰 화를 자초하게된것은 다윗의 그릇된 선택에 있었다.
1절에보면 ‘다윗이 혼자서 생각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서 내린 결론은 ‘여기있으면 언젠가는 사울에게 죽을것이니 차라리 블레셋으로 도망가서 사는게 상책이다’ 였다.
어제까지 다윗의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오늘의 다윗의 결정이 너무 성급하고 아쉽게 느껴진다. 이번에도 다윗이 혼자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호소했었다면 어땠을까?
공교롭게도 다윗이 블레셋지역으로 망명했을때에는 아무런 시편을 기록하지 않았다. 예전에 아기스 왕앞에서 미친체하고 쫒겨났을때도 시편을 썼던 다윗이었는데 이곳에 망명하는동안 한편도 쓰지 않은것은 다윗이 영적으로 아주 연약해져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뜨거운 신앙을 가진사람일지라도 어느날 자신이 혼자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기 시작한다면 그 좋았던 신앙을 잃어버리는것은 결국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지 않도록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해야 한다.
(9/28)
*사울은 왜 무당을 찾았습니까? (28:6-7)
-블레셋과의 전쟁이 두려워서 하나님께 이 전쟁에 대하여 물었으나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했고 초조해진 사울은 자신이 이미 다 내쫒았던 무당가운데 용한(?) 무당을 찾아서 이미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려고 한것이다. 사울의 상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것을 볼수있고 왜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는지 알수있다. 한편 무당을 통해 사무엘의 영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뜻은 정말 천국에 있는 사무엘의 영이 무당을 통해 나타났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무당의 주문에 움직이시거나 당신의 선한영들을 보내실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사울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한 그 영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악한영을 통해 역사하는 무당이 불러낸것은 땅에서 나온 어떤 유령이었고 하나님은 그 영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행하실 일을 알리신것뿐이다.
하나님은 악한 존재나 어떤 피조물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전하실수 있는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무당이 신 끼(?)가 있다고 그런자들을 찾아가 애원하는 모습은 절대로 하나님께 옳은 행실이 아니다.
사울의 행실이 너무나 애처롭고 불쌍하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얻은 성도가 자신의 욕심과 탐욕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게 될때 그 영혼도 사울의 전철을 밟을수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흔들리지 않도록 늘 깨어 주님과 교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9/29)
*블레셋 군인들이 다윗과 함께 출전할 것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29:4)
-그들은 다윗이 결정적인 순간에 유다편으로 돌아서서 블레셋을 공격할것을 염려하였다. 아무리 가드왕 아기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다윗이었지만 신하들은 신중할수 밖에 없었다. 첫째는 다윗이 왕의 신임을 얻어 자기들보다 더 높은 서열에 오를것을 염려했고 둘째는 다윗의 배신여부이었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데 신하들의 반대에 부딫혀 자신의 의지를 꺽는왕은 보기 드물다.
그런데 아기스 왕은 무슨일이 있어도 다윗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를 떠나 보내게 되는데 이 모습에서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보인다. 과연 다윗 자신은 비록 사울이 무서워 유다를 떠나 블레셋에 들어오긴 했으나 유다와의 전쟁에 블레셋군이 되어서 참여하게 될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마 이대로 전쟁에 투입되어 유다와 전쟁을 치렀다면 다윗은 아마 유다왕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약해진 다윗의 그릇된 결정이 결국 자신을 올가미에 걸리게 했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구사일생하는데 성공을 거둔다. 다윗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심을 믿게되었을것이며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싸인을 주실때 속히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것이 최우선이다.
(9/30)
*군인들 가운데서 악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함께 출전하지 않은 군인들에게는 되찾은 물건을 돌려주지 말자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들을 어떤 말로 설득합니까? (30:22-24)
-다윗은 전쟁에 나갔던 사람이나 남아서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똑같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이 전쟁을 이기도록 하셔서 승리한것을 자신들의 공으로 돌리는것이 교만한 생각임을 깨닫게 하였다. 공동체의 연합을 무너뜨리는 주범이 바로 교만한 생각이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너는 뭘했니?’ 라는 말은 상당히 마귀적인 발언이다. 그러므로 어떤 공동체라도 그 모임안에 속해 있을때는 입에 파수꾼을 세워 혀에서 불이 나오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 할수 있어야 공동체가 건강해진다. 다윗이 아말렉의 습격사건으로 인하여 함께 한 사람들에게 비난과 외면을 당하였으나, 이번 계기로 다시 선한 리더쉽의 영향력을 끼치게 된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신것이다. 물론 으뜸이 되고싶어서 일부러 남을 섬기는 사람은 없다. 마음속에서 기쁘게 섬기는 것이 좋은 영향을 미칠때 으뜸의 자리에 올림을 받는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이땅에 성육신하시고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죄인들을 먼저 섬겨주셨지 않은가! 섬김의 언어훈련이 우리의 삶속에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