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적이 사방을 둘러싼 상황에서도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5-6)
-주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심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의 거인 다윗에게 치욕스런 사건이 있었다면, 아마도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쫒겨 달아난 사건이지 싶다. 다윗은 사랑하고 신뢰하는 아들로부터 배반을 당한것도 견디지 힘든 고통이었으나 주위에서 그런 상황을 비웃으며 ‘하나님은 너를 돕지 않는구나’ 라며 내뱉는 조롱이 더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성경의 보면 항상 의인에게는 대적들이 많이 모여들고 공격을 일삼는것을 자주 볼수가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할수록 마귀의 공격이 거세지는 법이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많은 대적들이 의인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 시편을 아침에 쓴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이 간증때문인것 같다. 다윗은 천만인에게 에워쌓일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자고 깨는 일상의 삶을 반복하였다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안함으로 인해 현실의 두려움까지 극복하였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믿는 신자라면 우리도 다윗처럼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편안함을 누릴수 있지 않을까? 850명의 우상숭배자들이 한사람 엘리야를 이기지 못한것처럼 오늘도 성령의 불로 충만함을 얻어 열정을 가지고 믿음의 삶을 영위하길 소망한다.
(5/2)
*주님께 피신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5:11-12)
-누구나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거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수 있도록 주님이 지켜 주실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누구나 아는 기도의 사람이다. 그의 기도는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을 가리지 않는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의 기도패턴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다. 어려운 순간과 시기에 자기의 어떤 힘이나 지혜, 그리고 경험을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피할수 있다면 그 순간이 은혜의 순간이다. 은혜는 아무때나 오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 맡기고 기댈때 임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스스로 할수 있다고 자만할때 은혜는절대로 임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달았던 다윗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허구한 날 주님만, 주님만 찾았던것이다.
다윗이 무언가 하나님께 잘못하여 하나님이 분노하시기라도 하면 다윗은 탄식하며 눈물로 이불을 적시고 그의 표현 그대로 침상을 띄울 정도로 하나님께 바짝 엎드린것을 알수가 있다. 다윗이 억울한 일을 당하기라도 했을때는 사람앞에서는 그렇게 침묵하다가도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입이 쉴틈없이 열리며 답답함을 쏟아내버린다.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바라볼때는 시인으로 돌변하여 자기가 표현할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진기한 어휘들을 뽑아 내어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노래하였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그의 아름다운 손길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일수 밖에없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지혜를 구하라. 주께 피하여 그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영혼의 쉼을 얻으라.
(5/3)
*시인은 고아와 학대받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합니까?
(10:14-18)
-그들의 억울함을 살펴 주시고 악인의 악함을 벌하시고 불쌍한 자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억울한자들의 피난처와 요새가 되어 주신다.
인생을 살다가 억울한 일을 당할때가 빈번할거라고 생각한다. 다윗은 인생자체가 억울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많은 형제들 가운데 억울하게 혼자만 양을 치다가 사무엘앞에 얼굴도 보여줄수 없을뻔 하였다. 사울왕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뻔 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이 반역하여 억울하게 왕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길뻔 하였다.
그런데 억울함을 수도없이 당했던 다윗의 인생은 왜 억울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을까? 그 억울함 가운데 하나라도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었다면? 다윗이 혼자 양치는게 억울해서 집으로 뛰쳐들어와 아버지에게 대드는 모습을 사무엘선지자 앞에서 보였다면,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부을수 있었을까? 사울왕을 자기 손으로 처치했다면 그는 어떤 왕이 되었을까?
억울한 일을 참고 하나님께 맡긴사람이 또 있다. 이삭이 그랬고 요셉이 그랬다. 그들도 억울함을 주는 자를 찾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찾은 공통점이 있다. 모든 억울할 상황에서 다윗은 말한다. ‘주님, 어찌하여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주님은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이시며, 고난받을 때에 피신할 견고한 성이십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한 상황들을 풀어주실까? 당연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억울하게 억눌림을 당한 자의 꿈을꺽지 않으신다. 악인들에게 그들이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와 강청해야 한다.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실뿐만 아니라 솔루션을 가지고 있으시다.
(5/4)
*시인이 바라보는 악한 세대의 모습은 어떠합니까?(12:1-4)
-서로서로 거짓말을 해대며, 아첨하는 입술로 두 마음을 품고 말하는 모습이다.
다윗은 하나님편에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세상은 자신만만하다. 마치 바벨탑을 쌓아올렸던 무리들과 같다. 그들을 당해낼자 없을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자신들의 혀와 입술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억누르고 제압할수 있다고 자신한다.
다윗을 위시해서 성경의 인물들이 악한 자들에게서 능멸을 당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뿐만 아니라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온갖 야유와 조소를 퍼부었다. 다윗은 주눅들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이와같은 말로 반박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다.’ (14:2)
그렇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실분만 아니라 그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아래에까지 허리를 굽히셔서 그의 자녀된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은 일곱번이나 걸러낸 은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일곱번’ 이란 의미는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씀을 통해 믿을수만 있다면 그 생명의 말씀이 악한 세대가운데서도 온전히 지켜주시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진실하신 말씀을 의지하여 악한세대와 악인들을 이겨낼수가 있었다. 지금 우리도 다윗이 믿었던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기때문에 우리도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때 이 악한 세대가운데서 능히 구원함을 얻을수 있다.
(5/5)
*시인은 자신이 받을 유산의 몫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6:5-6)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이 받을 유산의 몫이라고 말하였다. 다윗이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몫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그래서 기대만큼 얻어지지 못할때 낙심하고 원망을 하게되는거 같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의 명을 무시하고 땅에 달란트는 묻어버린것이 그런 이유일것이다. 기대와 달리 주어진 달란트의 양때문에 낙심했다. 그러나 다섯,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달랐다. 그들이 더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들은 주인이 그의 뜻대로 주신것임을 믿었다. 소위 그들에게는 Servant-ship 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주인이 제시하시고 명령하시는것에 원망없이 따르고 순종하는 자세이다.
그렇게 순종할수 있는 원인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주인이 가장 올바르신분이라는 경험과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이 한 달란트만 받았더라도 달라질건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고,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심을 의심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길을 가게 하시고 어떤 상황을 허락하시더라도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아껴주심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 믿음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늘 기쁜 삶을 누릴수가 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상황과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시며 아무리 작은 나의 고민이라도 그 안에 개입하셔서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우리의 목자이시다.
(5/6)
*시인은 자신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18:2)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으로 묘사한다.
다윗은 18편에서 하나님을 힘으로 묘사하는데 다윗이 원수들을 공격할때나 혹은 그들의 공격을 방어할때도 오직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의지하였다.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내달렸고 하나님을 의지하지할때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여 주시며 용기를 북돋우어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고 고백한다. 양을 지키기 위해서 곰과 사자와 맞설때, 골리앗에게 대항할때, 천만인에게 둘러쌓여 있을때에도 다윗은 배운데로 하였다.
하나님은 다윗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 승리할수 있는 합당한 기술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술은 정의롭게 싸울수 있는 노하우이다.
군인에게는 칼을 올바로 쓰도록 하시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펜을 올바로 쓰도록 하시며, 사업가에게는 물질을 올바로 쓰도록 가르치신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고 반석이 되심을 믿는 자에게 어떤 상황에도 올바르게 행동하고 당면한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할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죄를 짓도록 만드는 힘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그 죄를 이길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세상의 기술보다는 하나님께 싸우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지 좁은길을 향해 의롭게 나아갈수가 있다.
(5/7)
*주님의 교훈은 믿는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19:11)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 인생들뿐만 아니라 자연만물들에게도 유익을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준다고 시편기자인 다윗은 노래한다.
자연만물이 오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명령하신데로 존재할때 그들의 생명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윗은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고 정직하며 티 없이 맑으며 금보다 귀하고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사에 경고를 받고 지킬는 자는 온전한 삶을 살아갈수 있는것이다.
다윗은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고백한다.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마음의 생각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향을 끼칠수 있도록 온 종일을 말씀안에서 거할수 있도록 귀와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둘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으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지를 경험하는 자는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하고 주님만 항상 의지하는 신자가 된다.
(5/8)
*극심한 환란 가운데 있는 시인이 탄원 중에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2:21-24)
-하나님은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들을 외면하지도 않으시며,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응답하여 주심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극심한 환란이 찾아올때 신자들의 올바른 대처법은 그 상황을 영적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적이든, 심적으로든 찾아오는 환란은 인생을 무너뜨릴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영성의 허리띠를 강하게 잡아 당겨야 한다. 다윗도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도대체가 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환란의 시간이 길어지면 어느순간 영성의 끈을 놓아버릴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환란의 시간을 주시고 그때에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신자들의 기도가 더욱 간절해 지고 갈급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간절히 찾는자가 결국 은혜를 얻게되는 것이다.
다윗이 극심한 환란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보아도 반응이 없자, 그가 택한 방법은
더 간절히 찾고 부르짖는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찬송을 드렸다.
성도의 삶에 환난은 있을지 모르지만 결단코 절망이란 있을수 없다. 하나님이 연단은 하시지만 그 누구도 무너뜨리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게 하시는것이 그분의 계획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난을 통과하려면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찾고 또 찾아야 한다. 간절히 애타게 부르짖고 간구하는 자는 연단의 끝을 반드시 보게되는 것이다. 끝이 없는 경기가 없듯이 환난도 끝이 있지만, 환난이나 연단을 통해 부어주시는 은혜는 끝이 없음을 기억하자.
(5/9)
*시인은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무엇에 빗대어 묘사합니까? (23:1-3)
-하나님은 나의 목자되셔서 나를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 바르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심을 노래하였다. 시편 23편은 다윗 시편의 주제라고 할만하며 시편 전체의 메인이라고 간주해도 손색이 없을만한 시편이며 성경주석이나 해설이 필요치 않는 명확히 이해가 되는 말씀이다.
이 시편은 믿지 않는 사람도 인용할만큼 유명할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간절함이 묻어나오는듯 하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양을 돌보는 목자와 같이 친밀하게 보호하시고 지켜주심을 노래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좋은것으로 공급하시며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을때는 어떤 상황일지라도 양을 구하는 목자처럼 다가와 지팡이와 손을 내밀어 주심을 또한 노래하였다.
신자들이 시편 23편을 평생토록 암송하고 ‘인생말씀’ 으로 믿고 살아간다면 양과같이 제 각길로 가버리는 삶이 아닌 생명의 길 의의 길로 하나님과 동행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5/10)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보여주시는 선하심은 무엇입니까? (25:8)
-주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셔서 죄인들이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25,26편은 모두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구하는 기도이다. 시인은 주님만이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알고 계시고 인도하여 주실것을 확신하면서 온 종일 주님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알에서 금방 나온 새끼들이 하루종일 어미새만 기다리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교통해야 한다.
시인인 다윗은 악한 무리들로부터 자신을 변호해 주실것을 기도한다. 자신은 의뢰인으로서 죄에 대하여 결백함을 먼저 주장하고 있다. 마치 시편1편에 나오는 복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한 자신의 삶을 공개하고 있다. 악인의 꾀를 쫒지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을 발견해야 한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죄를 짓는나, 의로운 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를 범하면서도 주님을 언제나 바라본다고 고백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기도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용서함을 받고 정직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정직한 삶이 뒷받침되는 기도가 정직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직한 삶이란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것 뿐이다.
(5/11)
*시인이 어떤 환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7:1)
-주님이 빛이요 구원이시며 생명의 피난처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인생에 찾아오는 환란의 시간을 어둠의 때라고 표현한다. 칠흙같은 어두움을 경험해 본적이 있는가? 아무것도 볼수없는 지경에 이르면 누구나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미세한 빛이라도 있으면 곧바로 희망이 찾아온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빛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가 힘들고 어려울때 앞이 보이지 않는 형국에 처했을때에도 한줄기 빛과 같이 내 인생의 어둠속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비쳐주신다는 믿음이 귀하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또한 나의 구원이시며 생명의 피난처가 되심을 노래한것이다.
이세상에서 아무것도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것이다. 이 믿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앞에 당당히 맞서게 했고, 전쟁중에도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말들의 발 힘줄을 모두 끊어 버렸던 것이다.
다윗이 가진 믿음을 한 마디로 정의해 주는 구절이 눈에 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는데 내평생에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그것만 구하겠습니다.”
솔로몬은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이 등불이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신다고 말했다.
너무 귀한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친히 내 삶의 내 안에 등불이요 빛이 되신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형편과 환경을 만나도 그 빛으로 인하여 두려움을 이길수가 있는 것이다. 왜 믿는 자들이 담대해지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지 명쾌하게 알려주는 말씀이다. 지금 당신의 눈과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무엇때문에 힘든가? 내 영혼을 밝히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말씀의 등불을 켤수 있다면 그 빛으로 길을 찾게 될것이다.
(5/12)
*시인은 어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30:11-12)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고, 슬픔의 옷을 벗기고 기쁨의 옷으로 갈아입혀주셨기에 주님을 찬양함을 멈출수가 없다고 노래하였다. 다윗은 어떻게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늘 경험하였을까?
첫째, 멈추지 않고 은혜를 간구하였다.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때까지 기도하고 부르짖었다.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은혜는 자동적으로 오지 않는다.
구하고 갈망하는 자에게 임하는것이 은혜이다. 과부가 재판장에게 강청하며 매달린것처럼 은혜도 구하는 사람이 얻을수가 있는 것이다.
다윗은 ‘내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셨다’ 고 노래하고 있으니 다윗이 구하여 얻은 은혜가 얼마나 컸었는지 상상할수가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의 감정까지 순식간에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찬양하지 않을수가 없다고 고백하였다.
둘째, 하나님의 진노까지 은혜안에 포함시켰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것은 결국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 목적이시므로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의 진노도 은혜의 한 통로임을 알게된 것이다. 이제 다윗은 그런 시간마저 은혜로 받아 들이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함을 깨닫게 된것이다.
다윗처럼 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않고 구하고 기다릴때 새벽이 밤을 깨고 찾아 오듯이 은혜로 인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노래와 춤이 될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5/13)
*시인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기쁨을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1:7-8)
-자신의 고난과 영혼의 아픔을 잘 아시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때문이었다.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은 가히 상상이 안될 정도인거 같다. 그는 만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은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그냥 하나님 없는 삶에 대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 없이는 끈 떨어진 연이 아니라 아예 끈 없는 연과 같은 존재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이 그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은 그냥 전부이다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앞날은 주님의 손에 달렸으니,,,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시려고 하나님이 쌓아놓으신 은혜가 무한하다고 말하는데 그 은혜와 복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렇다. 항상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복을 베푸신다고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믿는 자들, 즉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힘을 내고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말한다. 자신을 좌절시키고 약하게 만드는 사람이나 환경을 만날때 주눅들지 말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어가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비를 만나게 될것이다.
(5/14)
*시인은 어떠한 태도로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까? (32:5)
-그는 자신의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 털어 놓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용서받은 기쁨을 고백하고 있지만 자신이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뼈가 녹아 내렸고, 주님께서 밤낮으로 자신을 짓누르셨기에 자신의 혀가 말라 버렸다고 말하면서 죄의 고백을 통한 용서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노래한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찬양해야 한다.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한다. 아름답게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릅답다고 칭찬하실 찬양은 어떤 찬양일까? 수준높은 노래, 연주일까? 하지만 인간의 수준을 얼마나 높여야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창조주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연주와 노래는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지으시고 우리의 행위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 거짓없이 꾸밈없이 진실하고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노래할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굽어 보시며 한결같이 살펴 주시고 날마다 크신 사랑을 베풀어 주심을 믿고 감사하며 주님을 기뻐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5/15)
*시인은 젊은이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걸어야 할 이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합니까? (34:11-22)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시며 주님의 눈은 의로운 사람을 살피시며, 주님의 귀는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을 젊은 사자에 비유하여 마치 사자가 먹잇감을 향해 조금의 자비도 없이 잔인하게 먹이를 취하듯이 자신의 이익과 배부름을 위해서 거침없이 살아가지만 궁핍해질 염려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므로 마치 연약한 초식동물처럼 젊은 사자의 먹잇감이 되는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결단코 먹잇감이 되게도 굶주리게도 하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윗은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심을 간절히 사모하였다. 이유없이 자신을 해하고 고난을 주는 대적들로부터 낙심치않고 기도하며 견디어 내는 신앙을 가지기를 당부하고 있는데 시인은 이것이 자신의 뼈 속에서 나오는 고백이라고 간증한다.
“주님같은 분이 누구입니까? 주님은 약한 사람을 강한 것에게서 건지시며 가난한 사람과 억압을 받는 사람을 그들로 부터 건지십니다.”
약할때 강함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주님이 품에 안아 주심을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가는것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신자의 삶이리라.
(5/16)
*악인의 형통으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시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7:1-6)
-악한 자들이 잘 될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잘 됨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사그러지고 말지만 주님만 의지하며 선을 행하는 자의 의로움을 빛과 같이, 정오의 빛같이 빛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잠잠히 (Be still) 주님만 바라며 애타게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길을 형통하게 해 주시며 혹시 흔들리는 상황이 올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므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심을 믿어야 한다.
시인은 고백하기를 ‘나는 젊어서나 늙어서나 의인이 버림받는 것과 그의 자손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고 말한다. 이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하나님을 신실히 의지하는 성도의 삶이 망가지는것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이 진리를 나는 어떤 상황에도 믿으려고 노력한다.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한다면, 나는 결국 잘될것이고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에 변함없다. 믿는데 돈드는거 없지 않은가? 기왕 믿을거면 확실히 믿는게 옳은것이리라.
믿으면서도 쓸데없이 의심병에 빠진다면 얼마나 자신에게 마이너스인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의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인 말씀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며 그 말씀으로 인하여 믿음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베뢰아 성도들처럼 말씀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읽고 묵상하며 삶 속에 적용하는 신자의 삶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며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처럼 나아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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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악인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9:9)
-시인이 악인 앞에서 침묵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악인들의 조롱을 받고 있는것이 마땅한 줄로 여겼기 때문이다. 다윗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침묵’ 일것이다. 그렇다고 다윗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란건 잘 알것이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아무도 말 못할때 나서서 사이다 처럼 시원하게 할말을 쏟아 내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다윗의 삶을 ‘침묵’ 이라는 단어로 연상할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폭발할거 같은 감정을 사람들 앞에서 토하지 않고 침묵하였다가 하나님앞에서 그 뜨거움을 냉각시켜 버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읆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다윗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속상함으로 인한 입술의 실언을 막기 위하여 침묵을 선택하였는데 이것이 신앙인의 지혜라고 믿는다. 그는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한다고 말한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빨리 지나간다. 인생 역시 그와 같아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
다윗이 그런 일을 만날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한것은 자신의 삶의 희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지하심을 알기에 군소리없이 입에 자물쇠를 채울수가 있었다. 살다가 보면 원치않는 억울함을 당할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입을 열어 대응할때 발생하는 실언들과 폭언들은 고스란히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다. 이기고도 진거같은 경험이 없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달려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말한 다윗이 실제로 말(word)의 전쟁까지도 하나님께 맡겨버렸더니 오해는 풀리고 억울함도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시므이가 욕하고 조롱할때 침묵했더니 후에 스스로나와 무릎꿇게됨)
신자들인 우리의 삶 속에서 말을 해야할때와 말아야 할때를 항상 잘 분별할수 있기 위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더디하라’ 고 충고하고 있다. 그럴때 지혜가 생기고 단어를 올바르게 사용할수 있는 능력이 배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