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시인의 찬송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칩니까? (40:1-3)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새 노래를 담아 주셨기에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상과 거짓 신을 섬기지 않도록 하셨다.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에 넣어주신 새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어떤 역경으로부터 구원함을 얻은 경험으로 인하여 부르는 노래를 말하는데 다윗은 그 경험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계획을 다 열거 할수 없을만큼 많이 세우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간증하고 전파하려고 해도 넘치고 넘쳐서 헤아릴 수 조차 없다고 고백한다.
다윗의 고백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믿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시는 계획들을 신뢰할수 있어야 한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으로 묘사한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열악한 형편이나 이해할수 없는 기막힌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계획을 수만가지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인생을 향한 주님의 미쁘신 계획을 전하고 감추지 않겠노라고 고백한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깊은 수렁에서 절망하지 않고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해 주셨음을 간증한다. 하나님의 계획의 신실함을 믿고 부르짖어야 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의 계획은 단시간안에 해결을 보고싶어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단정할수 없다. 하지만 믿고 인내하는 자에게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을지라도 분명히 이루실것을 확신함이 옳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은 절대로 낭비가 아니라 순종이다. 우리의 인내하는 순종을 통해 세상이 당신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당신을 통해 주께 돌아올것이다
(5/19)
*낙담한 시인은 스스로를 어떻게 격려하고 있습니까? (42:11)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항상 하게되었다. 시편42편은 고라자손의 노래이다. 고라 자손은 그닥 명예로운 이름이 아님을 알것이다. 그들의 조상이었던 고라는 일찍이 모세와 아론의 리더쉽에 반기를 들고 반역을 주동했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음을 당했던 인물이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에서 고라자손들이 받아야 했던 멸시와 차별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고라자손이라면 누구나 숨기고 싶은 조상의 이름까지 밝히면서 하나님께 호소한 용기가 대단해 보인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배반자 자손이라는 타이틀로인해서 무수히 많은 시련과 고난을 받았을 그들의 심정을 그누가 이해할수 있었을까? 애타는 그들의 호소를 들어보라.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여호와 신앙 공동체였던 이스라엘에서 고라자손은 자신들의 뜻과 무관하게 붙여진 ‘반역자 자손’ 이라는 꼬리표로 인하여 하루 하루가 힘든여정이었을 것이다. 살아갈 소망이 보이지 않을때 고라자손에게는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어달리길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에는 애절한 마음과 애통함이 있는것이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하나님을 찾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같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여 불안해 하느냐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시리라’ 고 노래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을때는 생명을 걸고 찾는다. 찾아도 그만 못찾아도 그만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아야 한다.
민수기에 나오는 고라의 반역사건이 시편에 등장하는 고라자손의 노래를 통해 그 이름의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짐을 느끼는가? 그렇다. 고라의 반역은 죄악이었으나 고라자손의 노래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메세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더욱 그들이 고라자손임을 밝힌것이다.
성전 문지기로 봉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뢰를 회복했으며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손이 되었다는 증거로 하나님은 그들의 노래를 말씀안에 기록해 주신것이다.
(5/20)
*시인이 전쟁의 승리에 대해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4:6-8)
-시인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가 그들의 칼로 인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리가 모두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아는것은 올바른 신앙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귀한 신앙이 있으니 전쟁에서 패했을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는 모습이다.
시인은 갑자기 닥친 고난을 통해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은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원수들의 압박과 조롱은 날로 더 해진다. 이런 상황이 초래하면 신자라 할지라도 절망과 의심속에 갇히거나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범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어닥친 수난과 고통을 바라보며 다시 영적인 허리띠를 묶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능히 이 상황도 물러가게 하시고 인자하심을 보이시길 간구한다. 이유없이 고난이 찾아오고 원인모를 문제들이 엄습해 와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변하지 않는것이 신앙이다.
칼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할때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실패와 좌절속에서도 회복하게 하실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징계하실때는 두말할 필요없이 상한 심령으로 엎드려 회개해야 하지만 경건한 삶 가운데서 찾아오는 실패와 힘든 시련에 대하여는 더욱더 날카로운 영성으로 하나님의 연단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경건한 신앙은 하루 아침에 쌓여지고 만들어 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시험과 연단을 통해 믿음의 근육이 생기고 신앙의 굳은살이 박히는 것이다. 고라자손은 그렇게 탄탄한 경건의 삶을 얻기까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본것이다. 그것만이 길이다!
(5/21)
*임금님의 옷에서는 어떤 향기가 풍겨납니까? (45:8)
-몰약과 침향과 육계 향기가 풍겨난다. 세가지 모두 독특하면서도 귀한 향료이다. 왕의 옷은 마치 향기로 만들어진 거 같다. 과연 이 왕이 누구일까? 학자들도 연구하고 조사하지만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은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45편을 인용하면서 왕이신 메시야에 대한 구절을 기록한것을 볼수가 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답도다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내 기쁨되도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의 왕이시며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름답고 미쁘신 하나님이시다. 사도바울은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수 있는 사람은 먼저 그 향기를 알고 맡을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봄바람 타고 홀씨를 나르는 민들레처럼 예수님의 향기도 우리의 삶을 통해 퍼져 나가야 한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온 집에 진동한것처럼 신자들이 거하는 곳곳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향기, 사랑의 향기가 자신의 삶의 모습에서 풍겨나기를 소망해 본다.
(5/22)
*하나님의 오른손에 가득한 것은 무엇입니까? (48:10)
-구원의 선물이 가득차 있다. 고라 자손은 시온이 즐거워 해야할 이유에 대하여 노래한다.
시온Zion 이란 단어는 성경에 무려 150번이나 거론될만큼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도 다양하다. 시온산은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요새이며 다윗은 이곳에 자신의 성을 짓는다. 솔로몬은 이곳에 성전까지 건축하며 명실공히 ‘시온’ 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중심인 예루살렘성을 지칭하게 되며 신약시대는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단어가 된다.
시인은 시온이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한다’ 고 노래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곳에 특별한 은총을 내리시기 때문이며 재앙의 날에도 그곳이 안전한 피난처가 되는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시온성의 성전에 거하시듯 이시대 하나님은 영적인 시온인 교회에 거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예배하는 그곳이 터가 높고 아름다워 악한 대적이 넘보지 못함은 여전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즐거이 모여 하나님께 큰 기쁨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이다.
고라자손은 시온에 거하시며 시온에 있는 백성들을 영원히 인도하신다고 노래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되 흔들리지 말고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이다. 암탉의 날개아래 들어온 새끼들은 그곳에서 염려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주의 날개아래, 주님의 요새이신 시온에 거하는 자들이
참된 평안을 누리며 회복의 은혜를 얻게 됨을 믿으며 즐거이 구원의 노래를 올려 드리자
(5/23)
*하늘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0:6)
-하나님 한분만이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 시편기자는 인생이 부요함을 의지하지것은 하나님을 신실히 믿을수 있는길이 될수 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부자라도 죽음을 피할길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와 자신의 쌓아온 무언가를 믿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될것이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앞에 서게 될때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생이 아무리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삶을 변호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른채 살아온 인생은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을 뿐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잘 깨달아 살아가는자가 의로운 사람인데 그는 어떤 사람인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자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니’
하나님은 오직 마음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진실하게 나와 예배드리는 자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제물이나 헌신 그리고 찬양이 아니라 전심으로 그의 구원하심을 노래하며 감사하는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길 소망한다.
(5/24)
*시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51:16-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새와 그의 남편 우리아에게 범죄한 후 찾아온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비통하며 자복하는 시편이다.
다윗의 죄의 고백을 통해 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볼수가 있다.
‘나를 주님 앞에서 쫒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우리가 범죄했을때 하나님께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혹시 다윗같은 큰 죄가 아니어서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않는가? 아니면 아예 언급도 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지는 않은가?
하나님 앞에 죄악은 모두 회개해야할 대상이지 크고 작음을 거론해서는 안된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낙엽이 쌓이듯이 우리의 심령에 쌓여진다. 그리고 잡초가 자라듯이 심령에서 성장해야할 우리의 알곡같은 믿음이 자라지 못하도록 한다.
51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심령이 있는데 바로 “자원하는 심령 (a willing spirit) 과 상한 심령(a broken spirit)” 이다. 자원하는 심령은 죄에 대하여 둔감해져서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오지 못하는 상태를 이길수 있도록 구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상한 심령은 나 스스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갈수 없고 예배할수 없는 깨어진 영혼이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예배할수 있도록 구하는 마음이다.
이 두가지의 심령이 변질되지 않고 항상 마음에 품으며 살아갈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지게 될줄로 믿는다. 기억하자 자원하는 심령 & 상한 심령.
(5/25)
*시인이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5:22)
-주님께서 짐을 맡긴자를 붙들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이 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다윗은 참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이고 신실한 왕이었으나 다윗만큼 적이 많았던 왕도 드물것이다. 그런데 그 적들이 다윗의 원수가 되기까지 다윗이 그들을 악하게 대했다거나 비방했거나 억울함을 준 사실이 없다는것이 더욱 아이러니하다. (예:사울, 압살롬…)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악감정이 없었던 다윗을 배신하고 치게 되었을까? 사울왕, 압살롬 이들이 다윗을 배반하며 공격한 이유는 질투와 욕심때문이었다. 다윗이 잘 되는게 질투나고 자신이 그 인기와 축복을 뺏고 싶은 욕심이 만들어낸 사건들이다.
당면한 문제로 인하여 심령이 많이 상한 다윗은 차라리 비둘기가 된다면 멀리 멀리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표현한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니, 내 원수였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원수가 되지 않아야할 사람들이 자신의 원수처럼 공격하니 더 버티기 힘들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친한 친구나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이와같은 아픔을 겪는다면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것이다. 배신당한 아픔이 다른 고통보다 몇배나 더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다윗을 억누르던 마음의 짐을 이제 주님께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나님께 짐을 맡긴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과연 짐을 맡긴다고 마음에 아픔이 사라지는가?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다윗이 짐을 주님께 맡기라는 진짜의미는 하나님께서 벌주실이에게 벌을 주시고 지켜 주실이는 붙잡아 주실것임을
믿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짐을 맡긴 다윗에게 그대로 행하여 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의 상황을 모두 맡기면 마음의 짐, 인생의 수고, 모두 지키시고 회복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낙심되고 아픔이 있어도 주님만을 끝까지 의지하자.
(5/26)
*환난 중에도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6:11)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하여 사람이 주는 환난을 이겨낼수 있었다. 다윗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의 편이시라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원수들은 자기에게서 뒷걸음질치게 될것임을 믿었다.
누군가 항상 자신의 편에 서 있다는것은 어떤 상황에도 상당히 안전감을 주게된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언제든지 피할수가 있으며 그곳에서 위로를 얻을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환난의 시간이 지나가기까지 자신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한다고 고백하였다.
주님의 날개는 암탉이 자신의 새끼들을 위험한 순간에서 품에 안아 보호하듯이 지구상의 모든 백성들도 한꺼번에 보호하실만큼 안전할뿐만 아니라 공간도 충분하므로 누구라도 주님께 피하기를 원한다면 받아주신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내 마음을 정했다고 노래한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정한다는것은 아주 귀한 일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마음을 정할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굳게하는 자는 언제나 돌보심을 얻을것이 확실하다. 다윗은 ‘내 영혼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고 약속한다. 그리고 뭇 나라 가운데서 오직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만을 노래하였다.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마음이 느슨해지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시 우리의 마음을 정해야 할때인거 같다.
(5/27)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라 고백합니까? (59:16-17)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며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시편 59편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 집을 지킨때에 기록한 시편이다.
감옥은 아니지만 집안에 억류된채 나날을 보내고 있는 다윗의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다.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도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다윗이 깨달은것은 자신의 집이나 능력이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요새요 피난처가 되심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원수들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족하여 구원하시지 못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선포하였다. 이 믿음은 진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무언가 부족하신데? 이거 해결 못하시는거 아냐? 라는 생각을 할때 더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된다.
믿음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이상 피난처도 요새도 되지 주시지 않지만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맡겨드리는 자에게 강력한 요새가 되어주신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수 있도록 주님만 신뢰하며 그분에게만 피하여 도움을 얻자.
(5/28)
*약속의 땅에 대한 주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60:6-7)
-두말할 필요없이 하나님께 속해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의 백성에게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순종하지 않을때는 그 땅의 거민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에게 징계를 내리시는것은 결국 그들을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들이 해야할 행동은 하나님편에서서 부르짖고 애원하는것이다.
‘하나님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소서 주님은 원수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는 견고한 망대(a strong tower)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그의 백성들을 지켜보시며 관찰하신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견고한 망대이시므로 원수가 아무리 강하게 득세할지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시고 무너지지 않으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지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약해질때도 땅 끝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온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찾고 부를때 들으시고 우리의 견고한 망대, 강력한 요새가 되어 주신다. 인간의 보안, 경보장치가 우리를 지켜주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만이 우리를 원수에게서 건지시고 지켜주심을 기억하며 오늘도 하나님편에 서있기를 간구하자.
(5/29)
*본문에서 시인이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며 찬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63:3)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인자하심)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다. 다윗은 이 시편을 기록할때 유대 광야에 피신하여 있었던 상태였다. 물도 없고 먹을것도 없는 광야의 메마름이 그를 지치게 하고 황량하게 만들수 있었지만 그는 물보다 음식보다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며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자신의 몸은 성소에서 주님을 뵙기를 애타게 그리워 하였다.
왜 시인은 그렇게 애타게 하나님만을 찾고 찾았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이 기름지고 맛깔스런 음식을 배불리 먹은것처럼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상황을 누려도 영혼이 평안하지 못하고 불만족하면 그 사람의 삶은 덩달아 불만족한 삶이 되는 것이기에 다윗은 자신의 안전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사모한것이다.
‘내가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이와같은 심령을 가진 다윗을 하나님께서 어찌 이뻐하시지 않으시겠는가? 우리도 할수 있다.
예수님은 팔복가운데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세상에도 의가 있지만 완전한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다윗처럼 애타게 찾고 그리워 하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엄마만 보면 배고프다고 조르는 아이처럼 신자는 하나님께 생명의 양식, 한결같은 사랑으로 먹여달라고 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만이 배부를것이다.
(5/30)
*어떤 사람이 주님의 뜰에 머물 수 있습니까?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이들이다. 하나님이 택정하신 사람은 이세상에서 가장 복받은 사람이다. 주님의 택하심을 받은것 만으로 말로 형언할수없는 축복을 이미 얻은 존재임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집,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주님을 만나는것이야말로 인생이 얻을수 있는 가장 크고 놀라운 복이므로 그 복으로 만족하겠다고 노래하였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복 가운데 가장 놀랍고 귀한 것은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여 주시는데 죄에 대하여 회개할때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죄의 짐을 가볍게 하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다.
어떤이는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다만 그 응답의 방법을 내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엄선해서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해뜨는데부터 해지는데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심이 합당하다.
(5/31)
*시인은 온세상이 무엇을 깨닫기를 구합니까? (67:2)
-온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시편기자는 ‘온 땅이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 지어다’ 라고 독촉하였다. 이와같은 행동은 모든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본다.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믿는 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알리고 선포해야 하는것은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갖추어야 할것이 있는데 자신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을 깊이 감사하고 이해할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경험한 자가 어찌 하나님을 알리고 세상에 선포할수가 있겠는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하나님을 구하고 찾아야 하는것이 우선적으로 해야할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깊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그 사명을 열정적으로 감당할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증언가운데는 자신을 연단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마치 은을 달구어 제련하듯이 때로는 그물에 걸리게도 하시고,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시기도 하시고, 물에도 불에도 뛰어 들도록 하셨지만 주님께서 믿음으로 인내하고 순종하는 자를 건져주셔서 의의 길로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음을 간증하였다.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지만 그 복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항상 믿는 자들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이해해야한다. 연단받을때 영적인 근력과 근육이 생기는 법이다. 좋으신 하나님을 항상 올바로 믿고 경험하고 깨달아 전하는것이야 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 세상에 선포하는 자의 진짜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