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과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역대하1:10-12)
-지혜와 지식을 얻어 수 많은 백성들을 잘 인도하게 해 달라고 구했더니 하나님은 ‘이런 왕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다시 없을 것이다’ 라고 극찬하시면서 부와 재물과 영화도 주셨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칭하신 ‘이런 왕’ 이 참 멋지게 들린다.
하나님도 감동을 받으신 솔로몬의 간구가 깊은 인상을 준다. ‘지혜와 지식을 주셔서 이 백성을 인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취향을 저격한거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취향을 잘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의 취향을 맞추어 주기만 해도 좋은 얘기를 많이 들을수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취향을 맞출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축복이 임함은 당연지사!
어떻게 솔로몬은 하나님의 취향을 맞추어 감동을 선 사 할수 있었을까? 계획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이 간구는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순수하게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필요한 것을 생각한 것 뿐이다. 마음이 순수하니 간구도 거품없는 진액같은 말이 흘러 나온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솔로몬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덤으로 얻은 것들(부와 영화) 위주로 부르짖고 간구 할때가 많다. 결국 그런 간구는 하나님의 취향이 아닌거 같다. 그래서 소위 솔로몬의 대박사건이 우리의 구함으로 인하여 터지는 적이 없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간구를 좋아하신다.
여호수아는 자신을 속인 기브온 족속을 돕기 위해 전쟁 하면서 잠시 태양과 달을 좀 멈추어 달라고 간구 했더니 그걸,그걸 하나님이 기뻐 받아 주신것을 보면 하나님의 취향이 무엇인지 좀 알거 같지 않은가? 하나님의 취향을 저격하는 기도자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2/2)
*솔로몬은 어디에 성전을 지었습니까? (3:1)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주님의 성전을 지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 모리아 산에는 공통되는 사연이 존재하는데 멀리는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했던 곳이며, 다윗이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 나갈때 자신의 교만으로 인구 조사한 죄를 회개하고 희생 제사를 드린 곳이다.
종합해보면 이곳에 성전이 지어진 것이 우연이 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바로 모리아 산에서 이루어진 사건들이 모두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될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서 수천년 전부터 희생과 은혜를 상징하는 사건을 탄생 시키시면서 이곳을 철저하게 예비하셨는데 그 이유의 하이라이트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이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오르신 그 산이 바로 골고다라고 불리는 이 곳 모리아산이다.
그러므로 이삭의 번제물로 바쳐진 희생이 그리스도가 유월절 어린양이 된 희생과 같은 의미인 것이며 이삭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아래 진행이 되었고 솔로몬 시대에 영광 스럽게 지어지게 된것이다. 성전앞에 두 기둥을 세웠는데 하나는 견고하다는 의미의 ‘야긴’ 이며 하나는 그 안에 능력이 있다라는 뜻의 ‘보아스’ 이다.
모리아 산에 성전이 세워진 것과 이 두 기둥의 의미는 왜 성전이 중요한지를 가늠케 해 주는 것인데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오는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것이며, 이 예배와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이시대 교회 혹은 예배당으로 불리는 성전에도 똑같은 의미가 부여 되는 것이다. 예배하는 자가 희생과 헌신없이 예배드려서는 안되며 하나님은 철저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자신의 삶을 드릴 수 있는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신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2/3)
*나팔 부는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5:13-14)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을 통해 성전을 가득 채워서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다.
살아가다가 가끔 생각나는 것중에 한가지는 내가 구약시대에 살았다면 여호와의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가득한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비록 가시적으로 ‘쉐키나(하나님의 임재)’ 를 보진 못하지만 더 귀중한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주신 복음이라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빛이 그것이다.
이 복음의 빛이야 말로 기적중의 기적이요 축복 가운데 최고의 축복임을 믿고 아는 사람은 비록 눈에 보이는 쉐키나가 아니더라고 영안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법궤나 그 안에 들어있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것을 믿을 수 있는것이 고귀한 신앙이다.
‘너는 보고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여 달라고 간구하지 말고 보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간구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계신 성령께서 오늘도 나의 맘 속에 강하게 역사하셔서 영적인 눈으로 말씀을 보고 세상을 바라 볼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며 올바르고 진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함이 참되고 복된 것이다.
(2/4)
*성전이 완성된 후 그곳에 무엇을 옮겨 보관했습니까? (6:11)
-솔로몬은 그곳에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넣은 궤를 두었다. 누차 이야기 하는것이지만 언약궤는 성전에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가장 소중하게 다뤄진 국보급 보물이다. 그 궤 안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십계명이 또한 보관되어 있었다.
언약을 기록한 십계명을 궤에 보관 하도록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특히 택하신 백성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부으시길 원하신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그 사랑을 부으시진 않으신다. 아무리 사랑하는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공급 하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영원히 사랑을 끊어 버리시진 않는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자복할때 다시 그 보급로를 오픈 하신다. 솔로몬이 그의 기도에서 거듭 거듭 사용했던 구절이 있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라는 문구이다.
이 고백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고 있는지 잘 나타내어 주고 있는데 ‘하늘에서 들으시고’ 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전지 전능하신 분이란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온 우주 뿐만 아니라 지구 자체가 하늘 아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어디든지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을 바라보며 두 팔을 펴고 간절히 기도할때 하나님은 언제라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고 통찰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때 ‘창조주를 기억하라’ 는 말씀을 그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생은 어두운 세상에 파 묻혀 살 수밖에 없다 비록 그가 교회에 발도장을 찍는다고 해도…
(2/5)
*하나님은 성전에 대해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7:15-16)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를 귀담아 들으시고 또 거룩하게 하신 성전에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지은 성전을 인정해 주신것이 흥미롭다. ‘내가 이 곳을 택하여 제사를 받는 성전으로 삼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는것을 기뻐하시며 좋아하신다.
그래서 그렇게 예배하고 기도하는 자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귀 기울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특히 예배하는 자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할지 말씀해 주셨는데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이라고 하셨다.
‘스스로 겸손하라’ 는 명령이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키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는 때가 언제인가? 범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행동할때가 아닐까?
범사란 나의 삶 속에 발생하는 모든 일을 포함한다. 내가 원하는 일이나 그렇지 않은 일 조차도 결국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라는 것을 믿어 버리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겸손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악한 길에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생의 기도를 귀 담아 들으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이 관계를 끊어 버릴수 있다고 경고하셨는데 바로 그 인생의 마음이 변질되어 말씀을 외면하고 다른 우상(세상의 것) 을 섬길때이다.
솔로몬의 성전을 극찬하시고 기쁘게 받으셨지만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이 타락하고 죄를 멀리하지 못할때 그 성전을 버리실 것이며 더 이상 그곳에 하나님의 쉐키나(임재)를 보지 못할것임을 경고하셨다.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곳은 죄가 넘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믿는 신자는 부지런히 자신을 돌아보아 스스로 겸손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그늘 아래 거하는 축복을 가장 고귀한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2/6)
*솔로몬이 바로의 딸이 살 궁을 따로 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8:11)
-다윗의 궁은 주님의 궤를 모셨던 다윗의 장막이 있었던 거룩한 곳이므로 이방인 아내가 거기서 계속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밀로’ 를 건축해서 거기에서 살도록 배려하였다. 물론 그당시의 솔로몬의 생각은 경건하고 오직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하는 것임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방나라 공주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일들로 인하여 솔로몬은 훗날에 스스로 감당할 수도 없는 큰 어려움을 겪으며 곤경에 처하게 된다.
솔로몬왕의 신앙을 ‘반 심’ 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최초의 왕이 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이나 계획들을 세워 나가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를 절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여 천 명의 아내를 두기까지 했으며 그 아내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우상 산당을 지어주게 되었다.
왕이 된 자는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솔로몬왕은 처음과 달리 하나님의 눈에서 점점 멀리 가게 되었다. 솔로몬은 자신이 가진 지혜와 권력을 가지고 누리고 행했던 일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삶 인지를 깨닫고 기록한 것이 ‘잠언’, ‘전도서’ 이다.
그러나 솔로몬왕만 탓할것이 아닌것이 우리의 삶도 혹시 ‘전심’ 이 아니라 ‘반심’ 이 아닐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솔로몬의 잠언과 전도서를 읽어보면서 스스로 겸비하여 자신의 현재 신앙을 꼼꼼히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전심으로 믿고 온 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뿐이다.
(2/7)
*세상의 왕들이 솔로몬에게 모여 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9:22-23)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에 넣어 주신 지혜의 말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스바의 여왕이 방문하고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깊은 인상을 담아간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솔로몬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다른 나라에 퍼졌고 수 많은 왕들 뿐 아니라 지혜를 견주기 위해서 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방문하였을 것이다.
스바의 여왕이 방문해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온 갖 까다로운 질문들을 해 보았지만 솔로몬이 대답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더 감탄을 금치 못한것은 솔로몬이 만들어 놓은 것들 때문이었다. 왕궁의 시설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신하들의 모습, 성전 제사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넋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소문과 실제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굉장 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의미 심장한 말을 던진다. “왕의 백성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신하와 백성들이 왕의 지혜를 배우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과연 앞으로 이와 같은 왕이 또 다시 세워질수 있을까? 어려워 보이지만 불가능하진 않다고 본다. 오직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날 수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지도자를 기다리는것 보다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각자가 솔로몬같은 지혜를 얻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했던 말처럼 ‘내가 들은 소문보다 훨씬 뛰어나다.’ 는 말의 근원은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지혜로 솔로몬이 그런 영향을 끼친 왕이 된것이다.
예수 믿는 신자들이 더욱 지혜로와 져야 한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그분의 지혜가 당신에게 전수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자’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분의 창조적인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영적 유전자가 믿는 신자들에게 심겨졌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 높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영위할 수 있는 신자로 세워지기 소망해 본다.
(2/8)
*르호보암은 주변에 조언을 구합니다. 원로들과 젊은 신하들의 조언은 어떻게 다릅니까? (10:7-11)
-솔로몬이 죽은후에 온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세우려고 세겜에 모였을때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가서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지어준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주면 왕으로 섬기겠다고 제안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을 섬겼던 원로 신하들의 말을 들어 보았다. 그들은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그들을 품에 안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르호보암과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솔로몬보다 더 강경하게 백성들에게 멍에를 메우고 쇠(전갈) 채찍으로 그들을 다스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햇볕 정책 VS 압제 정책” 르호보암은 압제 정책의 손을 들어 버림으로 그것에 분노한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은 다윗의 집안을 불신하면서 르호보암을 반역하게 되었다. 성경은 이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하나님은 르호보암이 나라가 뻔히 쪼개질수도 있는 정책을 선택하도록 하셨을까?
애굽왕 바로에게 하신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된다. 하나님은 선한 왕이었던 르호보암의 마음을 일부러 강퍅하게 만드셔서 악한 정책을 택하도록 하신것이 아니라, 그의 본래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그대로 이용하셔서 솔로몬의 범죄로 인하여 예언하셨던 이스라엘의 분단을 이루어 가신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분열의 책임은 누가에게 있는가? 먼저는 솔로몬의 범죄에 있고 그 다음은 르호보암의 악함에 두어야 하는것이다.
여로보암은 어떤가? 그는 르호보암보다 더 악한 자로써 신본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정신을 더럽히고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역사를 망치는 존재이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마귀의 교활함까지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왜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의 죄악으로 인하여 징계를 내리시지만 결국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으신것이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을 노래로만 부를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좋은 일을 실천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2/9)
*르호보암이 전쟁을 일으키러 가던 발걸음을 돌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11:2-4)
-하나님께서 스마야를 통해 동족간의 전쟁이 옳지 않음을 알리셨고 르호보암은 그 말씀을 듣고 마음과 발걸음을 돌이켰다. 르호보암의 순종은 한 민족간의 유혈사태를 막을수 있었으며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한 르호보암을 축복하셨다.
한편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고 여로보암은10개 지파를 선동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과 일반 백성들이 북 이스라엘을 떠나 남 유다인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여로보암이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고 우상을 섬기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와 영적인 배교를 참지 못하고 정든 고향땅을 떠나 온 무리들을 보면서 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그들을 생각하니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에 온 청교도들이 떠오른다. 모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이 분명함에도 그들이 그 길을 택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마음을 굳힘’ 그들은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인지 알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이 취해야 하는 첫번째 행동 강령은 하나님이 계신곳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 즉 어느곳이나 계신다. 그러나 유일하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있다면 바로 죄 짓는 곳이다.
이주를 결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이 우상 숭배로 물들게 되자 그곳에 있는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닫고 짐을 샀던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자 먼저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한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죄가 만연한곳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을까? 만 생각하는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결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게 될것이며 그분의 선하고 높으신 뜻을 깨닫게 될것이다.
(2/10)
*주님께서 진노를 거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2:12)
-르호보암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기 때문이었다. 잠시(3년) 동안 다윗과 솔로몬의 신앙을 따랐던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되자 스스로 교만해지게 되었고 말씀을 져버렸다. 이에 하나님은 이집트의 시삭을 세워 남유다를 공격하도록 하셨고 위협을 느낀 왕과 신하들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되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신다. ‘무릇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하시나 죄를 짓는 사람들의 삶은 분명히 고통과 좌절을 맛보게 하신다.
그러나 그 고통과 아픔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회개한 르호보암과 남 유다를 멸하시지는 않겠다고 하셨지만 그들의 범죄에 대하여는 징계의 손을 거두진 않으셨다. 그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깨닫게 될것이다.’ 그래서 이집트왕 사삭을 통해서 그동안 축적했던 부와 권력을 치도록 하셨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외도의 삶이다. 그러므로 신자된 사람이라면 이와같은 일은 생각도 하지 않는것이 옳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미혹되어서 외도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손에 채찍을 들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실 것이다.
택하신 백성들을 죄악 가운데서 돌이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으신다.
당신의 백성들이 깨달을때까지 몰아가실 것이다. 회개하고 그 회개의 열매가 맺힐때까지 고난을 이어가신다. 그러므로 회개의 열매인 의의 삶으로 속히 돌아오는 길이 하나님의 진노를 축복으로 바꿀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회개에서 머물지 말고 회개의 열매까지 나아가야 한다.
(2/11)
*아사 왕 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4:4-6)
-남 유다20명의 왕들 가운데 다윗의 신앙과 성향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했던 왕들이 많았다. 그만큼 다윗왕은 모든 후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멘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과 행동은 달랐다. 처음에는 조금 따라 하는것 같다가 금방 우상 숭배나 물질과 권력에 빠지는 예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보석처럼 빛나는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아사’ 왕이었다. 아사왕과 다윗왕의 공통점은 ‘평안’ 에 있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상황에서 평안을 누렸다는 차이가 있기도 하다. 다윗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원수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늘 죽음의 위기가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시편을 기록하는등 마음에 평안을 잃지 않았다. 반면에 아사왕때는 물리적인 전쟁이 없을 정도로 그가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조용하였다.
말그대로 무사평안한 날들을 보내었는데 그 이유를 여러 군데서 발견 할수가 있다.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올바른 일을 하였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우상을 부수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뜻을 찾게 하였고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게 했다.’
이와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통치 기간동안 평안을 주셨고 나라가 조용하였으며 아무도 그에게 싸움을 걸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사왕이 평안을 끝까지 누린 원인이 있는데
그는 평생을 한결같이 오직 하나님만 마음에 모시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당신은 다윗의 평안과 아사의 평안 중 어느것을 원하는가? 당연히 누구나 아사의 평안을 원하지 싶다. 허구한 날 원수를 상대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누구나 아사의 평안을 얻고 싶지만 그런 평안은 힘들거 같은데 한결같이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한결같이 하나님만 사모한 예가 나타난다. 그의 유일한 전쟁 스토리가 에디오피아 세라왕이 공격해 왔을때인데 엄청난 군사를 이끌고 온 그들앞에서 아사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께서 돕고자 하실 때에는, 숫자가 많고 적음이나 힘이 세고 약함을 문제삼지 않으십니다…인간이 하나님을 이기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요.”
이렇게 기도하고 온전히 맡겼더니 칼 한번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적을 무너뜨려 주셨다. 매사가 이러했으니 아사의 삶에 평안히 끊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맡김이 아닌가!
다윗의 평안도 중요하지만 아사의 평안을 날마다 얻기를 갈구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기억하자 그의 이름, 앗사~
(2/12)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쳐들어오자 아사 왕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16:2-4)
-시리아(아람)의 벤하닷 왕에게 은과 금을 보내어 동맹을 맺고 그가 바아사를 막아주길 원했다.
아사왕의 통치기간에는 거의 전쟁이 없다시피 했었다는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싸움을 거는 나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가 싸우러 와도 전쟁을 해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사왕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하나님보다 이방 나라의 왕을 더 의지했기 때문이다. 아사왕이 그렇게 신실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다가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된것일까? 이런 일 정도는 하나님의 도움없이도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결국 이와같은 아사왕의 생각이 하나님 보시기에 망령된 행동을 이끌고 말았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따를때 우리의 행동에서도 아사와 같은 행동이 분명히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성경은 교만함이라고 말한다. 아사는 결국 자신의 뜻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꼬여 버렸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그의 잘못된 생각을 말해 주었으나 아사왕은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감옥게 가두고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와같은 행동이 말해주는것이 교만함을 이기지 못하면 폭발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평온하고 하나님의 뜻만 따라 갔던 아사왕의 마음에 사탄이 교만의 씨를 뿌리니 그가 거둔것은 분노의 열매였다. 35년을 전쟁없이 평안을 누리던 아사의 삶이 어그러지면서 말년에는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더 의지하게 되면서 안타까움을 더하였다.
나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할때 어느 쪽으로 기울어 지는가는 너무나 중요한 순간이다. 머뭇거리다보면 어느샌가 세상쪽으로 기울어지기 쉽상이다. 그쪽으로 기울어지면 문제도 해결되고 일이 잘 풀리는듯 보인다. 그러나 잠정적으로 그 기울어짐으로 인해 더 고달픈 삶이 시작될 것이다. 지혜로운 성도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 져야 한다.
그것이 신자의 행복이며 믿음의 삶이다.
(2/13)
*전쟁에 나가기 전 여호사밧은 아합 왕에게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18:4)
-먼저 주님의 뜻을 알아보기를 제안했다. 여호사밧은 아합 왕과는 다르게 여호와 보시기에 그나마 정직한 왕이었다. 아합의 예언자들이 아합에게 잘 보일려고 무조건 왕이 원하는 쪽으로 예언을 하는것을 보고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진짜 예언자가 없냐고 물었다.
여호사밧은 400명의 선지자들이 아합의 말을 따를때에도 그 다수의 선택을 따르지 않는 강직함을 보여주었는데 이 모습은 마치 마치 이새의 아들들을 살펴본 후에 또 다른 아들이 없냐고 물었던 사무엘 선지자와 같았다.
사무엘이 인간적으로는 첫째 아들이 왕의 외모를 가져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는 말씀을 듣자마자 마음을 즉시 돌려 버렸고 결국 그 자리에 없었던 목동 다윗을 불러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아합은 ‘미가야’ 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여호사밧은 그 예언자를 보기를 요청했고 미가야 선지자는 그 자리에서 400명의 선지자들이 모두 거짓 예언을 한것을 끄집어 내었고 그 거짓예언을 통해 아합왕이 죽을 것임을 거침없이 예언하였다.
다른 선지자들을 협박에도 불구하고 미가야는 뜻을 굽히지 않고 예언했으나 여호사밧은 1%가 부족했다.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그 전쟁에서 아합이 죽을것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말리지 못했고 함께 그 전쟁에 참여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으며 결국 미가야의 예언대로 아합은 그 전쟁에서 죽고 말았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을 고수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아무리 다수가 원해도 그것이 말씀과 다르다면 그 원칙을 깨고 소수 혹은 단독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개혁신앙이다. 여호사밧은 다수를 따르지 않으려는 모양은 있었지만 결국 대세에 자신의 뜻을 접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마틴 루터가 홀로 종교개혁을 단행했을때 그가 직접 지어 만든 찬송이 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개혁은 나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살아갈때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나 홀로? 힘들다.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의지가 꺽이지 않도록 하나님께 맡기고 행동하는 것 뿐이다.
(2/14)
*여호사밧은 ‘재판’ 에 대해 어떻게 설명합니까? (19:6)
-재판장들은 삼가 조심하며 재판하되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여호사밧이 전쟁에서 돌아온 후 예후 선지자에게 책망을 당하게 되었다. 악한 자의 편에 선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이었고 그 댓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실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참고로 예후는 아사왕의 잘못을 꾸짖다가 감옥게 갇혔던 하나니 선지자의 아들이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왕과 다르게 선지자의 질책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개혁을 실행하였다. 여호사밧은 재판관들이 재판을 집행할때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온 마음을 다하여 수행할것을 주문하였다.
여호사밧의 이와같은 행동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가 바탕이 된것이다. 이처럼 회개는 말보다 행동으로 이어지는 열매가 있어야 진정한 회개라고 본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청을 듣고 한 아들은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않았지만 한 아들은 못 간다고 거절했지만 뒤에 뉘우쳤고 뉘우침으로 끝나지 않고 포도원으로 달려가 일을하였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신자들도 많지만 이왕 회개의 단계까지 나아갔다면 이제 회개한데로 액션을 취할때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여호사밧에게 진노를 내리셨지만 회개하고열매를 맺은 그의 삶을 어떻게 축복하시는지 볼수 있다.
여호사밧은 개혁을 실행하고 힘써 그 일을 행하라고 백성들에게 지시하며 이런 약속을 한다.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 그렇다. 하나님은 절대로 악한자의 손을 잡지 않으신다.
그 인생이 비록 죄악 가운데 살았을 지로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 인생의 손을 붙잡아 주시고
그와 함께 하실것이다.
(2/15)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주민은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0:18-19)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서서 목소리를 높여,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모압과 암몬의 공격은 여호사밧이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과 연합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온 백성들에게 ‘금식’ 을 선포하며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전쟁, 전염병, 기근과 재난이 닥쳐올때 성전에 모여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큰 대군을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고, 어찌할 바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주님만 바라보고 있다고 기도 하였다.
이에 하나님이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적군이 아무리 많다 하여도, 너희들은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아라. 이 전쟁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맡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여호사밧은 사상 초유의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백성들과 상의한 후에 노래하는 사람들을 뽑아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게 하였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힘찬 찬양을 들은 군사들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적들을 대파하게 되었고 그렇게 많던 적들은 서로 싸우며 스스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날의 놀라운 기적의 승리를 안긴 장소에 이름을 붙였는데 ‘찬양의 골짜기’ 라고 부르게 되었다.
괴로울때 주를 보라 외로울때 찬양하라는 글이 있다. 괴롭고 외로울때 대개 눈물의 골짜기와 같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눈물을 찬양으로 바꿀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믿는 사람들이다.
여호사밧이 그 열악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하자 마음에 확신을 얻게 되었다.
찬양이 힘이 있는것이 아니라 찬양이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될때 능력이 임하는 것이다.
괴로울때 주를 바라보며 기도하고 눈물날때 찬양하며 찬양의 골짜기를 구축해 보라.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모든 악한 상황에서 건져 내실것이다.
(2/16)
*요아스는 여호야다 제사장과 함께 어디에서 숨어지냈습니까? (22:12)
-6년동안 하나님의 성전에 숨어 지냈다. 요아스가 성전에 숨어 지낼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친 할머니였던 아달랴가 그의 아들 아하시야왕이 죽은후에 다윗의 왕가를 모두 섬멸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피 바람이 불던 중 요아스는 고모였던 여호세바와 그의 남편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하였고 훗날 아달랴가 처형된 후에 남유다의8번째 왕에 등극하게 된다.
여호세바가 죽음의 위기에 놓여있었던 어린 요아스를 구해낸 모습을 보면서 요게벳이 그의 아들을 나일강 피 바람에서 부터 구해내고 몰래 키우다가 모세를 광주리에 담아 살렸던 사건이 떠오른다. 요게벳도 여호세바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모세를 구해내었고 훗날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데리고 나와 가나안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기적과 같은 이 두 사건이 가진 공통점은 하나님의 언약을 끊으려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언약의 계승자들을 구해 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두 여인은 각각 엄마와 고모라는 입장에서 했었던 행동이었지만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 또한 구속사를 이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방해하고 파괴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음을 깨달을수가 있다.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인생을 마귀가 아무리 가로막을지라도 하나님은 마귀의 사악한 책략을 부수시고 그 인생을 생명싸게에 싸셔서 지켜 주심을 늘 기억해야 한다.
(2/17)
*요아스가 왕위에 오른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입니까? (23:16-17)
-여호야다를 통하여 하나님께 언약을 맺는 일을 하였다. 제사장 여호야다와 그의 아내 여호세바의 희생적인 도움으로 요아스는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북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 아합의 딸이었던 아달랴가 남 유다를 바알 우상숭배지로 바꾸어 놓고 다윗의 혈통을 끊어 놓으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로 인하여 무산이 되었다. 여호야다는 살인자 아달랴를 처형했고
그녀가 죽은후에 예루살렘 도성은 평온을 되찾게되었다.
여호야다는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하나님께 유다 백성들과 왕이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것으로 언약을 맺었고 아달랴가 곳곳에 세워놓은 바알 제단과 우상들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통하여 성전을 관리하며 돌보는 일을 정해 주었다.
성전 문마다 문지기를 두어서 부정한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특별히 조치하였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아직 어린 요아스 왕을 지키면서 남유다에 영적인 개혁을 마치 혁명처럼 여기면서 실행함으로써, 온 나라가 여호람부터 시작되어 아달랴에서 극에 달했던 우상 주의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쾌거를 달성하며 남유다를 다시 하나님께로 돌린 영웅이었다.
여호야다가 이렇게까지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만이 유일한 길임을 알았던 여호야다가 우상숭배에 빠졌던 나라와 백성을 하나님의 법아래로 인도한 일은 하나님이 누구보다 가장 기뻐하신 일이었기에 어려운 여건과 환경에서도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감당하도록 해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한 길로 믿고 자신의 삶을 개혁해 나갈때 가장 기뻐하시고 도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심을 기억하며 끊임없는 각성과 개혁이 신자의 삶 속에서 전개되기를 소망한다.
(2/18)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은 후 요아스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24:18-19)
-불행하게도 유대인 지도자들의 꼬임에 빠져 성전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더 놀랍고 경악스러운것은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범죄를 책망하자 그를 죽이는 일이 발생된 것이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은인이 아닌가?
인간적으로 봐도 절대로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한것이다. 은혜를 그렇게 갚아서는 안되는데..
무엇보다 요아스의 행동에서 보이는 가장 큰 문제는 그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로 하여금 요아스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아 죽음까지 당하게 되었고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 인격적인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
하나님은 아사왕, 여호사밧왕때에는 그렇게 많은 대군이 유다를 공격했어도 적은 숫자로 쉽게 이기도록 하셨는데 요아스때에는 적은 숫자의 적군을 세워 수많은 군대를 가진 유다를 이기도록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것이 아니겠는가?
진실한 신앙은 믿음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것이라고 본다. 아무리 과거에 혹은 한때 뜨겁고 깊은 신앙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현재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진실한 신앙이 아니다. 신자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소망을 두고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요아스왕이 믿음의 본질이 분명 했었다면 스가랴의 책망을 듣고 다윗이나 여호사밧처럼 회개 했었을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졌던 스가랴는 비록 상대가 왕과 지도자들이었으나 거침없이 예언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믿음의 본질이 하나님께 깊게 뿌리내린 사람은 변질되지 않는다. 씨 뿌리는 비유에 등장하는 옥토밭이 될 수 있도록 믿음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깊이 내려 세상의 풍조에 당당히 맞설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19)
*아마샤가 반역자들의 자녀까지 처벌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25:4)
-모세의 율법에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샤왕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소심하고 교만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수가 있다. 하나님을 문자그대로 그냥 무서워하는 사람같아 보인다. 율법 안 지키면 혼날거 같으니까 그게 두려워서 할 수없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신앙은 곧 한계점에 부딫히게 되어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순종하다가도 삶이 평안하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을 외면하는 경향이 나온다. 아마샤가 전쟁에 승리하자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서 자기의 본성에 이끌려 죄를 범하자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어 책망 하셨다.
하지만 교만이 극에 달한 아마샤는 더이상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대범함을 보이며 그 선지자를 무시하였고 그 징계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에는 무작정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잘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말씀 순종하는 자에게는 의를 베푸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항상 무서워하다가 그 무서움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자기 멋대로 행동하게 된 아마샤왕의 삶을 보며 인간이 얼마나 간사하고 기회주의적인 성향인지를 볼수 있어야 한다.
아마샤는 하나님과 우상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스스로 떨어져 죽은 인생이었다. 예수님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어야 할 대상이지 인간이 시험해 볼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지 않으신다.
(2/20)
*웃시야는 왜 이마에 나병이 생겼습니까? (26:16-19)
-성전안 분향단에서 스스로 분향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을때부터 성소안에는 오직 제사장들만 출입할수 있었고 분향단에서 분향하는 일은 더더욱 제사장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만 할 수 있도록 하셨다.
웃시야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힘이 강해지자 교만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웃시야는 자기 나라에서 자기가 간섭하지 않는곳이 없고 모두가 자기 영향권 아래 두었다고 생각했으나 오직 한 가지 예외가 있었던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곳은 성전이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제사장의 일을 간섭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장의 임무까지도 관장해 보고 싶었던것이다. 힘이 너무 강해져 눈에 보이는게 없었던 웃시야는 스스로 성소에 들어가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이 해야할 분향을 시도했다. 그야말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가 넘어 버린것이다.
용감한 아사랴 제사장이 비록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센 제사장들을 대동하여 무력으로 왕의 범죄를 가로막았으나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그 즉시 그의 이마에 나병이 발병하여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모든것을 잃어 버리고 비참한 삶을 맞게 되었다.
두사람의 용기있는 행동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듯 하다. 신자로서 해서는 안될일에 용기를 낸 웃시야의 결말과 비록 권력을 가진 왕이었으나 하나님앞에서 그릇되이 행하려고 할때 물러나지 않고 용기있게 나서서 왕을 저지하고 옳은 말을 했던 아사랴의 담대함을 통해 신자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본 받기를 소망해 본다.
(2/21-22)
남유다 12번째 왕 ‘아하스’ 의 범죄는 정말이지 극에 달하였다. 자신의 자녀를 인신제사로 드리는 제단을 만들었으니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선했던 아버지 요담과 달리 아하스는 죄악이 극도에 달했던 왕이었다.
하나님은 대노하셔서 아하스와 남유다를 치셨는데 온 사방에서 적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 유다땅을 초토화시켜 버렸으며 특히 북 이스라엘의 베가왕은 잔인하게 남유다를 공격한후에 수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사마리아 땅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일으키셔서 남유다의 범죄를 징계하셨으나 북 이스라엘의 행실이 너무 지나치자 예언자와 지도자들을 통해서 포로를 다시 되돌려 보내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왕에게 수차례 회개를 촉구했으나 그는 오히려 더욱 열심을 내어 우상을 숭배했으며 성전에 있는 성물들을 파괴하는 대담성을 보이며 결국 유다의 최악의 왕으로 등극하는 불명예를 얻었다.
아하스가 완전히 망쳐놓은 남유다를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 ‘히스기야’를 그의 어머니 아비야를 통해 어릴적 부터 경건하게 훈련을 시키신 덕분에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마자 성전을 정화하고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곳을 성결하게 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성전 성결과 정화가 마무리되자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조상이 저질러 놓은 죄악에 대하여 속죄를 드렸다. 그리고 다윗시대처럼 찬양의 소리가 성전에서 다시 울리도록 했으며 온 백성들이 주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는데 이 사건이 히스기야 왕의 성전 재봉헌이다.
이 모든일이 가능했던 이유가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감동 감화를 받은 덕분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는지부터 살피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경멸하시는것과 구별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케하여 하나님께 성전을 재봉헌한것과 같이 성도의 신앙도 정화가 필요한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성결케 되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새롭게 봉헌하는 시간이 믿는 자들에게 항상 임하길 소망합니다.
(2/23)
*히스기야 왕이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기로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0:3)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유월절은 첫째달에 지켜야 하지만 히스기야이 둘째 달로 미룬 이유는 두가지로서 성결하게 된(우상주의를 완전히 버린) 제사장들이 부족하였고 백성들도 모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히스기야왕은 유월절이라는 중요한 절기를 연기하면서 곧이어 온 이스라엘에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께 유월절 제사를 드릴것을 공포하였다.
히스기야의 결단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당시만 해도 남과 북이 나누어져있었고 왕래도 쉽지 않았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남유다만이 아닌 온 이스라엘에 유월절 지킴을 공포한 이유는 한가지 였는데 백성들의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얻기를 원함이었다.
그 일을 위하여 지금 남, 북 따질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국경도 뛰어넘고 정치도 초월하며 어디든지 전파 되어야 하고 선포 되어야 한다는것이 히스기야왕의 생각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공포를 들은 북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는 조롱하는 자들도 많았으나 몇 몇 사람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찾게 되었다.
유월절을 첫번째 달에 드리는 것은 율법이지만 준비되지 못한채로 형식과 전통을 따를때는 더 심각한 죄를 범할 수 있음을 깨달은 히스기야 왕의 결단은 탁월했다. 결국 두번째 달에 거행된 예루살렘의 유월절에 수 많은 백성들이 모여 들었고 영적 각정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비록 과거에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났지만 결심하고 하나님께 용서를구했으며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그들의 죄가 사하여 지기를 기도했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백성들을 고쳐 주셨다.
하나님의 죄사함은 이제 유월절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하여 누구에게나 임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용서하신다. 지금도 회개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길이 있음에도 그것을 외면하는 자는 심판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언제라도 회개의 자리에 나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용서와 긍휼이라는 축복을 부어 주신다.
(2/24)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킨 후 한 일은 무엇인가? (31:1)
-각각 유다의 성읍으로 돌아다니며 우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리는등 유다지역 전체에 있는 산당과 제단을 없애 버렸다. 이 개혁은 북 이스라엘의 에브라임, 므낫세 땅에서도 일어났다.
히스기야왕의 영적개혁이 이렇게 곳곳에서 철저하게 이루어 지게 된것은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왕은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가지고 모든 종류의 우상과 목상을 쳐 부수었고 산당또한 허물어 버린것이다. 그리고 안으로는 레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영적 질서를 잡는데 주력하였다. 이와같은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신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안으로는 자신의 영적인 삶을 말씀에 비쳐 올바르게 질서를 잡고 밖으로는 자신의 육체가 범죄하지 않도록 죄의 유행에 빠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구별하는 것이 참다운 신자의 모습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하나님이 끔찍히 싫어하시는 이단 신천지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수십년동안 한국 국민들과 기성교회안에 바이러스처럼 침투하여 신자들을 미혹하여 거짓믿음에 빠뜨렸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더 확장되어 덩치가 어마어마한 영적인 악종 바이러스 덩어리가 되어버린 사실에 아연실색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예방이 필수적인것처럼 이단사상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도 예방이 절실하다. 영적인 악종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예방은 오직 하나님을 바로 믿는것 밖에 없으며 그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것밖에 없다.
“알자, 알자, 하나님을 알자.” “알자, 알자,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알자.”
(2/25)
*산헤립의 부하들이 백성들을 교란할 때 히스기야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32:20)
-그는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이 모습은 흡사 엘리야가 850명의 우상 숭배자들과 대결하던 장면을 연상시키는듯하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루종일 자신들의 신들앞에서 날뛰고 소리지르고 자신들의 몸까지 자해하면서 부르짖어 보았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반면에 엘리야는 한번의 부르짖음으로 불의 응답을 받아 거짓 선지자들을 불태워버렸다.
산헤립의 부하들이 온갖 거짓 미혹을 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며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했으나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한번의 부르짖음으로 인하여 그들을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찌를수가 있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한번의 기도로 단지 역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 장에서 보았던 뼈를 깍는 영적인 개혁과 말씀 순종의 삶의 영향임이 확실하다.
신자는 겉으로 강한 척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강하게 무장될때 외적인 모습도 당당해 지는 법이다. 속은 텅 비어있는 쭉정이 같은 사람은 아무리 겉으로 강한체해도 바람이 불면 어느새 날아가 버리는 허약한 인생인 것이다.
질병의 문제도 인생의 문제도 같다고 본다. 헛되고 거짓된 신념을 가져도 신천지처럼 무서울거 없이 야단스러운데(결국은 멸망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올바른 믿음으로 자신의 영이 강하게 무장될 수 있다면, 어떤 외적인 공격에도 요동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진실한 믿음과 말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던 히스기야왕과 같이
이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인내하며 오히려 신앙을 더욱 강건히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2/26)
*므낫세가 돌아온 후에도 백성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 제사는 이전과 어떻게 다릅니까? (33:17)
-오직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므낫세왕은 아버지 히스기야왕의 길과 정반대로 살았던 왕이었다. 아버지가 부숴버린 우상을 다시 세우고, 제거해 버린 산당을 다시 짓고 더군다나 그가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든일은 하나님의 성전안팎에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세운것이었다.
아무리 부모가 선한 신자였다 하더라도 자녀가 그대로 신앙을 답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므로 얼마나 철저하게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깨달을 수가 있다.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때가 12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것을 보면 히스기야왕의 신앙 교육이 부족했음도 알수가 있다.
사무엘도, 모세도 자녀들 세대에서 영적 지도자가 나오지 못한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것도 느낄수가 있지만 굳이 지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녀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거듭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주님께로 나아갈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야 한다.
이시대는 잠시 눈을 돌리면 비성경적인 문화가 널려있는 시대이다. 앞으로 더 심각해지는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므낫세가 후에 회개의 삶을 살긴 살았지만 완전히 돌아서지 못했다고 보는것은 그의 아들 아몬왕이 아버지가 행한대로 그대로 또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신앙의 유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부모세대가 더욱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자녀와 후손에까지 이어지며 더 강해지도록 말씀 가운데 서서 요동하지 않음이 중요하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2/27)
*율법책은 어떻게 다시 발견되었습니까? (34:14)
-힐기야 제사장이 성전에서 궤에 보관된 돈을 꺼내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악한 왕 아몬이 일찍 죽자8살 밖에 안된 요시야가 왕이 되었다. 어제도 거론했지만 부모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요시야를 통해 볼수가 있다. 할아버지 므낫세부터 시작된 우상숭배를 손자때에 다 제거해 버리는 일이 일어난것은 요아스의 어머니 ‘여디다’ 의 경건한 신앙때문이었다.
그리고 요아스왕을 영적으로 조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했던 선지자 스바냐와 예레미야 그 외에도 힐기야 제사장과같이 유독 요아스왕의 정치기간에 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활동한것이 요아스의 영적개혁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요아스가 영적개혁을 단행할수 있도록 했던 제일 큰 역할을 했던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성전 수리도중에 발견된 모세의 율법책 때문이었는데 요시야왕은 율법책을 읽으면서 애통하면서 옷을 찟었다. 그 이유는 그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고 범죄한것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요시야왕은 모든 백성들을 성전으로 모으고 발견한 율법책을 크게 읽어 주도록 하였고 자신의 개혁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계명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하나님은 기가막힌 타이밍(섭리)에 율법책을 발견하도록 하셨고 율법책을 통하여 요아스는 어느 왕보다 확실한 개혁을 이루어 나갈수가 있었다. 우리의 삶에도 개혁이 필요한데 오직 말씀이 메뉴얼이 되어야 한다. 말씀없는 개혁은 극히 인간적이고 기회주의적으로 전락될수가 있으나 말씀이 바탕이 된 삶의 변화는 거짓없이 진실하게 개혁을 이루게 된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주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라’
(2/28-29) *역대기 마지막
역대기 마지막은 선한 왕 요시야의 죽음과 나머지 4명의 왕들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요아스는 앞서 읽어본것처럼 남유다의 20명 왕 가운데 가장 신실했고 무엇보다 율법을 통한 유다의 영적 개혁을 일으키고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하는 민족에서 율법을 순종하는 민족으로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그렇게 한평생 여호와의 뜻을 순종하였는데 마지막에 잠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것이 옥의 티와 같았다. 그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던것은 그가 더 백성들을 개혁시키고 나라를 신본주의국가로 더욱 굳게 세웠더라면 하는 마음이 들게되었다. 그 이유가 그 다음 4명의 왕들의 통치 기간에 남유다가 급격히 붕괴되고 결국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시야를 통해 깨달을수 있는 것은 아무리 신실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의지하게될때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요시야가 죽자 그와 같은 신실한 왕이 더이상 나오지 못했고 그렇게 남유다는 꺼져가는 등불처럼 힘도 신앙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고군 분투하면서 끝까지 회개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스스로 자폭하듯이 나라의 멸망을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북 이스라엘이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당한 후 마지막 희망이었던 남유다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선지자들, 예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은 단어는 딱 한가지였는데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쫒겨 나리라’ 이 말이었다. 그러나 4명의 왕들과 종교 지도자들, 정치인들은 듣지 않았고 멸망이라는 청천병력같은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것이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세우신 나라와 백성들이 결국 멸망이라는 결말로 막을 내린 사실이 마음에 안타까움을 더하였으나, 하나님의 언약은 아무리 백성들이 불순종의 삶을 살더라도 결국은 다시 회복의 길로 인도하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벨론 포로기간에도 선지자들은 쉬지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라고 외치며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였고 70년만에 다시 유다로 돌아오는 길을 열어 주셨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19 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있다. 이 또한 믿는 자들이라면 우연의 일이라고, 재수가 없다고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본다.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깨닫고 나라와 민족의 영적 회복을 위해서 더욱 기도해야 할때이다. 믿는 자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애통하며 자복할때 남유다가 포로에서 귀환하는 길이 열리고 신앙이 회복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다시 영적 귀환하는 역사가 임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