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
*예레미야는 그를 죽이려는 백성들의 손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26: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그를 죽이려는 백성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6장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 그 뜰에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일어난 반응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주의 성전에 경배하러 오는 사람에게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일러주어라. 혹시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내가,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거둘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대로 성전에 제사드리러 오는 백성들에게 담대히 회개와 순종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반응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것과 반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고 소리질러 죽이려고 하였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삶이 끝나는거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무리들 가운데 있었던 장로들가운데 몇 사람의 입을 통해 그의 생명을 지켜 주셨고, 아히감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를 죽이려는 손길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우셨다.
예레미야는 23년동안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주의 성전에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인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는가? 세상의 타락은 교회, 성도의 타락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전하는 자가 거짓을 전하고, 듣는이는 듣고 싶은 말만 듣고싶어한다. 이같은 현상이 망할 징조이다.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할때 탈선이 시작되듯이, 학생이 교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때 낙제하게 되듯이, 믿는 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서 들으려고 하고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것은 죄의 길을 가겠다는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시고 인내하시지만, 전혀 돌이킬수 없다고 판단하실때는 징계의 손을 드신다.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는 재앙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원망할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그 재앙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기다리고 또 참으셨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죄가 차가 넘쳐 더이상 틈이 없을때까지 유보되다가 결국 징계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이시대 교회와 성도는 더욱 정신을 차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찔림을 주실때 회개해야 하고 순종의 길로 돌아가야 할때이다.
(9/28)
예언자 하나냐가 그해 일곱째 달에 죽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28:16)
“내가 너를 이 지면에서 영영 없애 버릴 것이니, 금년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네가 나 주를 거역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반대하며 자신이 받은 예언을 백성들에게 선포한 사람이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백성이 2년만에 돌아올 것이고 빼앗긴 성전기구들도 모두 다시 가져올 것이며 바벨론왕도 하나님이 꺽어 버리실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며 사람들 민심을 얻으려는 수작(?)이었다.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는 때에 선지자가 ‘평화, 평화’ 만을 외치는것이 올바른가? 물론 주님은 평화와 왕이시고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그 평안도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 살아갈때
우리의 마음에 주시는 것이다.
회개없이 무조건 ‘다 잘될거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니’ 이건 아닌거 같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전매특허같은 ‘만사형통’ 의 은혜는 고난과 핍박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주의 말씀만을 따라 인내할때 우리 심령에 찾아오는 고퀄리티 하나님의 은총이다.
사도바울은 그 은혜로 인하여 고난이 내게 유익임을 고백해 버릴 정도였다. 예레미야는 유다백성의 완전멸망을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전하고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하나님의 평화는 진실한 회개를 통하여 내 영혼에 밀려오는 놀라운 선물이다.
팬데믹으로 어려운 요즈음 하나님의 고퀄리티 은혜가 회개하며 하나님앞에 무릎꿇는 세대위에 기름처럼 흘러넘치길 기도합시다.
(9/29)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가서야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30:24)
“주님께서는 마음 속에서 뜻하신 바를 시행하고 이루실 때까지, 그 맹렬한 진노를 그치지 않으신다. 마지막 날에야 너희가 이것을 깨달을 것이다.”
오늘 말씀은 유다백성들을 향한 미래의 소망에 대한 말씀이다. 정확하게 70년이라는 기간을 알리시면서 그들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올것을 말씀해 주셨다. 물론 엄청나게 긴 시간임에 틀림없지만 정확한 소망의 메세지인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당신이 무슨일을 하시고 왜 하시는 지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유다백성들이 포로생활이 끝나고 본국으로 결국 모두 돌아오는것처럼 신자들의 삶의 끝도 천국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시작, 끝이없는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이 땅에 살면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두려워 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결단코 악이 의인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시며 악이 잠시 득세하는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악을 완전히 벌하시고 의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천국 본향의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며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9/30)
*주님은 그때가 오면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무엇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31:31)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이 새언약은 신약시대에 메시야를 통해서 주실 언약을 말한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이 무엇이 다를까? 옛 언약은 돌비에 새겼으나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넣는 것이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메시야가 오셔서 율법을 이루신후부터 달라진 가장 큰 변화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혈통, 언약 백성이라는 표식인 할례, 율법이행에 따른 신앙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리스도를 대속으로 인하여 오신 성령께서는 비가시적인 우리의 심령에 거하시며
믿는 자의 삶을 주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생명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 새 언약을 지키도록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이다. 이 새 언약은 혈통과 상관없고, 민족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고 성령을 모시게 되면 이 새 언약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 이라고 다시 불러주셨다. 이미 범죄하고 타락하여 심판받은 민족이지만 그 가운데 회개하고 돌아온 백성들에게 불러주신 호칭이다. 처녀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며 자신의 몸을 순결하게 하듯이,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다.
이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 마음에 넣어주신 생명의 말씀을 지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살아갈때만이 영육간에 순결함을 지킬수가 있는 것이다. 신랑을 기다리며 등불의 기름을 채워놓았던 신부들처럼 오늘도 우리의 심령에 말씀과 성령으로 가득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10/1)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는 어떻게 아나돗의 밭을 살 수 있었습니까? (32:8)
“주님의 말씀대로,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근위대 뜰 안으로 나를 찾아와서, 내게 부탁하였다. 베냐민 지방의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을 나더라 사라고 하였다…그 때에 나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임을 깨달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을 한 이유로 갇히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는데 뜬금없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와서 밭을 사라고 말하면, 그것을 사야 한다고 하셨다.
이해가 되는가?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를 찾아온 친척이 와서 한다는 말이 위로도 아니고 밭을 사라고 권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듣기에는 이상하게 들리는데도 예레미야는 전혀 그렇게 받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그 말씀처럼 하나멜이 찾아와서 그대로 자신에게 밭을 사야 한다고 말하는것을 보고 예레미야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고 은 열일곱을 주어 그 밭을 사게 되었다. 그리고 매매 계약서에 서명하고 봉인된 계약서를 받았다. 그 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옹기 그릇에 담아 보관하여라.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을 포도원을 살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상황이 감옥이란 환경에 매이게 되었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역사를 믿어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거짓이 없고 틀림이 없음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어야 한다. 말씀에 대한 불신은 결단코 성숙하고 올바른 믿음을 가질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덮어놓고 믿지말고 펴서 한자 한자 읽으며 묵상할때 성령님이 조명하셔서
영감을 주며 바르게 이해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신다.
(10/2)
*한 의로운 가지가 돋아나면 세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33:15-16)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그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예루살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 하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한 의로운 가지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도저히 넘볼수 없는 최고의 왕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의 완전한 신본주의 국가를 이루셨을뿐만 아니라 나라가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잘 섬겼던 때이며, 국가또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속에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21명의 왕이 교체되는 시기동안 신본주의 국가는 인본주의가 되었고 백성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나버렸다. 성전 공동체는 우상숭배로 전락되었고 이루 말할수 없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마저 성전을 떠나버리시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왕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예언이 떨어졌지만 그는 끝내 불순종하였고 그렇게 남유다의 왕조가 끝이나는듯 하였다. 그러나,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은 다윗의 집안에서 한 의로운 가지가 나와서 유다를 구원하며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희망을 주셨다.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시나리오임에 틀림없다. 왕조가 무너지고 끝이났는데
다윗의 후손가운데 왕이 될거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생이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일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시며 오직 없는 가운데서도 있게 하시는 전능자이시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비록 인생의 계획과 일은 망쳐지고 미래가 불투명해 보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취하심을 맛보게 될것이며, 인생이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하늘의 은밀한 것으로 지혜를 얻게 될것이므로 믿는자가 결단코 삶을 포기하지 말고 비천에 치우치지 않고 주만 바라보면 된다.
(10/3)
*레갑족속과 이스라엘 백성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35:13-14)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령한것이 이렇게 엄수되고 있다. 그 자손은 조상이 내린 명령에 순종해서, 이 날까지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직접 말하고, 또 거듭하여 말했으니,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은 레갑의 자손들이 대대로 걸쳐서 말씀에 순종하도록 교육받았고 그대로 믿고 따랐던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 모습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이다.
36장에는 바룩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가 자기 대신 하나님의 예언의말씀을 선포하라고 부탁하였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예레미야처럼 말씀을 선포하면 감옥에 갇히게 될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룩은 마치 예레미야가 해오던 그대로 성전문 앞에서 백성들에게 큰소리로 하나님의 예언을 읽고 선포하였다. 역시나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바룩을 잡으려고 했고 예언된 두루마리를 찾아내어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바룩은 예레미야와 함께 다시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또 다시 백성들에게 낭독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레갑 족속과 바룩에게 이런 복을 내리셨다.
“레갑의 자손 가운데서 나를 섬길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바룩은 자신을 죽이려는 왕의 손에서 꽁꽁 숨겨주심으로 인하여 목숨을 구할수가 있었다.
신앙은 레갑자손들과 같은 순종과 바룩과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순종하지 않는 신앙은 아무것도 아니며 용기없는 신앙도 힘이 없기 마련이다. 우리도 신실하게 순종하여 자손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이 끊어지지 않길 기도합시다.
(10/4)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히게 된 궁극적 원인은 무엇입니까? (37:18-19)
“제가 왕이나 왕의 신하들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를 감옥에 가두십니까? 바벨론 왕이 우리 나라를 치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왕께 예언했던 예언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히게된 원인은 결국 그가 거짓예언자들과 상반된 예언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레미야의 예언은 거침이 없었으며 왕 앞에서도 물러서거나 주저함이 없었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수 있는 깊은 웅덩이에 빠뜨림을 당하게 된 것이다.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 이 때에도 예레미야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만 머물러 있었다. 한마디만 민심을 다독여주는 말을 하면 고난의 시간을 피해갈 수 있었는데 그는 정말 강인한 마음과 정신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은 오직 주의 말씀만 신뢰하고 경외하는 사람을 굽어 살피시는데 예레미야가 깊은 웅덩이에 갇혀 있을때 뜻하지 않은 사람(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 을 통해서 왕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신 것이다. 그 이방인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의 왕과 신하들이 그런 대접을 하는것에 대하여 못마땅해하며 왕에게 따져 물었다.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나이다”
결국 파워있던 에티오피아 환관의 요구에 왕은 예레미야를 그곳에서 구출해 내도록 허락한다.
그런데 깊은 구덩이에서 그를 건져내는 장면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이 되었는데 그렇게 한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몸이 절대로 상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주의 깊은 처사이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굴속에서도 털끝하나 상하지 않게 구원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때나 요단강을 건널때도 옷에 물 한방울 닿지 않게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다. 당신의 자녀들의 생명을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달을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까지 맡겨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고 귀하게 대우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쉬지않고 찾고 사랑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0/5)
*석방된 예레미야는 누구와 함께 살게 됩니까? (40:5-6)
“그대가 이 곳에 머물기를 원하면, 사반의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동족과 더불어 사시오. 그는 바빌로니아 왕께서 유다 땅의 총독으로 세우신 사람이오. 예레미야는 미스바로 가서, 아힘감의 아들 그달리야를 찾아가, 그와 함께 그 땅에 남아 있는 동족과 더불어 살았다.”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유다왕 시드기야는 두눈이 뽑힌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나 감옥에 갇혀있던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의 명령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을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게 되었다.
과연 하나님은 그에게 순종하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말씀에 의지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살 길을 열어주신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갈때 누가 그것을 인정해주는가? 물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역사하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자의 삶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인정해 주신다. 바벨론왕과 그의 근위대장이 예레미야를 통해 그의 말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모습을 볼수가 있다.
“그대의 하나님이 이곳에 이런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그대로 하셨소.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하신 것이오 백성들이 주님께 죄를 짓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재앙을 당한 것이오”
믿는자가 믿는사람에게 인정받는것도 귀한 일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때 그것이 훨씬 가치있는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바벨론왕과 근위대장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임을 인정하고 그에맞는 대우를 해주었다.
신자에게 믿음이란것은 이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도구이다. 믿음을 보여야 할때가 언제인가? 삶이 곤핍하고 길이 열리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을때 사용하라고 주신것이 믿음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기위해서 주신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일 뿐이다.
신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 사용할지 모를때가 많은거 같다.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니 그 입에서 항상 ‘죽겠다. 어렵다. 괴롭다.’ 만 나오는 것이다. 믿음은 신자를 살리는 능력이다.
믿는자에게 능치못함이 없다고 하신것도 그 때문이다. 믿음은 뒀다가 도대체 언제 사용하려는지 모르겠다. 제발, 믿음을 사용해서 믿는 자의 자존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워주는 은혜가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0/6)
*유다에 살아남은 백성이 저지른 실수와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42:20-21)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께 보내면서 나에게 간구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 드려주십시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알려 주십시요.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유다땅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의 말씀만을 따르겠다고 예레미야에게 호소하는 모습은 그들이 이제 정신을 차린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말뿐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나타났다.
유다백성들은 왜 하나님의 명령이 선포되었음에도 반대로 행동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을 사용하셔서 바벨론을 심판해 주시기를 원하였다. 그것이 기도를 간청하기전에 가졌던 그들의 시나리오였다.
왜 기도하기전과 후가 이렇게 달라지는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대개 여기서 신앙의 팩트가 나오게 된다. 자신의 생각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무조건 따르는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시나리오데로만 밀고 나간다면 그것은 껍데기만 있는 신앙이다.
애굽으로 가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도를 통해 전해졌음에도 애굽으로 가버린 모습이 그들 신앙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순종할 마음도 없으면서 도대체 왜 하나님께 간구해달라고 간청한걸까? 아마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들어줄거라고 생각했던거 같다. (너희는 애굽으로 가서 도움을 구하라)
바로 이런 모습이 육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이다. 철저히 자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을 이끌고 가려는 모습이다. 영적인 기도자는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삶의 방향을 정하는 사람이다. 기도하는가? 자아를 쫒아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으로 기도하자.
(10/7)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43:1-3)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우리가 이집트로 가서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을 리가 없소. 이것은 틀림없이,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우리를 바빌로니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주어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거나 잡아가도록 하려고 당신을 꾄거요.”
역시나 예상한대로 유다백성들은 자기들이 생각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하나님의 예언을 전한 예레미야를 의심했고, 서기관 바룩을 모함하였다. 유다백성들이 한가지 간과한것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조건 복만 내려주시는 분인줄 알았던거 같다.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은 축복만 약속한게 아니었다.
불순종할때는 축복의 정반대의 저주가 임한다는 약속도 하셨다. 하나님은 순종에 대한 복을 한없이 주시지만 불순종에 대한 징계의 약속또한 철저히 지키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렇게 큰 악을 행하여, 너희 자신을 헤치고 있느냐? …백성 가운데서 남자와 여자와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까지 다 죽게 하여서, 너희 가운데 살아 남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할 작정이냐?” (7)
자녀의 나쁜행실을 보고도 눈감아주는 부모와 엄하게 질책하는 부모중 누가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일까? 자녀입장에서는 전자의 부모가 좋을지 모르지만 결과론적으로는 후자의 부모를 통해
자녀는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게 될수 있다.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시민이 많은 나라는 무질서하지만 엄격히 법을 시행하는 나라일수록 건강한 나라로 발전하는것을 볼수가 있다. 교회도 가정도 똑같이 적용이 된다고 본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것이 아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언약, 옆으로는 공동체와 맺은 언약이 있다.
때로는 그 언약을 우리 스스로 깨버릴때가 있다. 그래서 징계를 당할수 있다. 하지만 그 징계를 통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깨달을수가 있어야 한다.
“몇명의 피난민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14)
사람들 말만듣고 이집트로 내려왔지만 선지자의 충고를 듣고 다시 유다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진노중에라고 긍휼을 잊지말아 달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긍휼은 회개하고 돌아오는자에게 언제나 임하신다. 이 땅이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진노가운데 있지만,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는 주님의 긍휼하심을 얻을 것이다.
평안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가 되지만, 징계또한 하나님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이유이다.
자녀를 싫어서 징계하는 부모는 없다. 자녀가 아프거나 말썽을 피울수록 더 깊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부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없고 내가 약할때 어려울때 더 깊은 사랑을 주심을 잊지말자.
(10/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46:27)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스라엘아, 너는 무서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여 데려오고, 포로로 잡혀 간 땅에서 너의 자손을 구원할 것이니,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평안하고 안정되게 살 것이며,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살 것이다.”
본장은 유다 백성들이 의지하려고 했던 애굽(이집트)이 결국 전쟁에서 패하게 될것을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그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을 더 믿었는지 대거 그 땅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예레미야는 예언을 통하여 애굽땅도 바벨론에 의하여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게 되는데
이 땅위에서 제아무리 강력하거나 높아짐을 얻은 민족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높을수가 없다.
에베레스트 산이 밑에서야 높아 보이지만 비행기를 타고 위에서 내려다 보면 보잘것 없어지는것과 같다.
애굽도 남유다를 보호할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앞에서 그 누구도 교만할수가 없다. 교만을 일삼는 나라든, 개인이든, 교만은 패망의 선봉임을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은 교만했던 유다 백성들이 더 교만한 애굽을 의지했으나 그 결말은 무너짐뿐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비록 남유다, 애굽을 벌하시기 위해서 바벨론을 들어 쓰셨지만 그 나라 또한 교만으로 인하여 더 강력한 페르시아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다.
다니엘의 환상을 통해서 보듯이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강력한 나라와 군대를 가지고 전세계를 호령하는 나라가 일어날지라도 결국 뜨인돌에 의하여 모두 무너지게 된다. 이 뜨인돌의 정체가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소망은 오직 한분뿐이심을 다시 경각시키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신다.
이세상 소망 다 사라져가고 고난이 끝이 없이 닥쳐와도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믿는 자의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는 전능자의 날개아래에 피하는 것만이
우리의 소망이다.
(10/9)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모압을 향한 마지막 예언은 무엇입니까? (48:47)
“그러나 훗날에 나는 사로잡혀 간 모압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겠다.”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동안 유다를 괴롭혔던 가시같은 나라들의 심판을 예언하셨다. 블레셋의 멸망을 선언하셨고 또한 모압의 심판을 예언하셨다. 모압이 심판을 당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모압아, 이제 까지는 네가 이스라엘을 조롱거리로 삼지 않았느냐? 네가 이스라엘을 말할 때마다, 너는 마치 이스라엘이 도둑질이나 하다가 들킨 것처럼, 머리를 흔들며 조롱하지 않았느냐?
모압족속은 이방나라이면서도 이스라엘의 옇은 피가 흐르는 민족이기도 하다. 모압과 암몬은 과거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들이 대를 잊기위해서 아버지에게 술을 마쳐 취하게 한후 근친상간하여 낳은 아들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 두 족속은 이유없이 이스라엘이 미웠던 것이며 원수를 대하듯 하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는 범죄하고 잘못한것이 많지만 솔직히 모압을 해롭게 한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모압이 이스라엘을 허구한날 깔보고 무시하며 조롱한것은 그와같은 피해의식으로부터 나온 결과라고 볼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유없는 범죄를 저지르는것이 하나님께 진노를 얻는 결과가 되어 결국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이상하게 이유없이 밉고 싫은 사람이 있을때가 있다. 나에게 뚜렷하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도 괜히 보기싫은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 마음에 있는 죄의 본성은 이렇게 나랑 전혀 상관이 없는 어떤 인물을 미워하도록 만드는 사악한 것이므로 그와같은 죄에 노출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에 파수꾼을 세워두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숫꾼의 수고가 헛것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고 다스리시도록 맡겨드릴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멸망당하게 되는 모압에게도 소망의 끈을 쥐어 주셨는데 바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예언을 주신것이다. 신약시대가 도래하고 메시야가 오심으로 그 땅에도 복음이 들어가게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죄에 대하여 참으시고 인내하시지만 회개없는 백성에게 임하게 된다.
그들이 믿는 자들이든지 불신자들이든지 상관없다. 그러나,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도 구별없이 허락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혹시 나의 마음속에 까닭없이 싫고 미워지는 누군가가 있는가? 마음으로 범죄하지 않도록 성령님께 그 마음을 맡겨 드리길 원합니다.
(10/10)
*다마스쿠스는 이전에 어떤 성읍이었습니까? (49:25)
“칭찬을 받던 도성, 나의 기쁨이었던 성읍이, 이처럼 버림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셨다. 모압, 암몬, 애굽, 에돔,아람,,,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핍박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방하고 핍박할때 그것을 자신에게 하는것으로 간주하셔서 반드시 징계의 벌을 내리신다.
다메섹은 아람이라는 한때 강력했던 나라의 도시로서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문둥병을 치료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것으로 잘 알려졌다. 다메섹은 사도바울이 회심을 했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에돔은 강력한 요새로 만들어진 나라여서 어떤 나라에게도 함락되지 않는 강력함이 있던 나라였다.
그리고 애굽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한시대를 휘어잡은 바로왕이 집권했던 초강대국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하고 한때 칭찬과 기쁨이 넘치는 도시라고 할지라도 그 나라, 도시들이 죄악의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내지 못하게 된다. 신자들이 한때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영원히 그렇게 거룩함을 유지하지 못할수도 있다.
그러므로 선 자는 넘어질것을 늘 조심하며 하루 하루 경건의 삶을 진지하게 사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것이다. 과거의 화려함과 능력에 사로잡히는 왕년병(?)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 신자들은 철저히 오늘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주실 새 은혜를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쟁기질을 오직 앞만 바라보고 진행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10/11)
*하나님은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은혜를 허락하십니까? (50:20)
“그 날이 오고 그 때가 되면, 내가 살아 남게한 사람들을 용서할 터이니, 이스라엘의 허물을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고, 유다의 죄를 아무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 소위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핍박했던 나라들을 하나 하나 손봐 주시고
끝으로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을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예언해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회개한 그들의 죄들을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지워버리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먼저, 이방 강대국들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패망의 원인이 교만함에 있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수가 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강력하게 일으키셨음을 깨닫지 못하고 모든 공을 자신들에게로 돌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상과 자신들의 권력을 의지하는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셨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나라도 극빈국가이든, 초강대국이든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물질들을 우상으로 삼는 나라와 백성은 철저하게 심판의 대상에 포함됨을 깨닫게 하신다. 미국이 21세기 초강대국이 된것도 이 나라가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우는 나라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미국만이 위대한 나라인냥, 오직 미국만을 위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발상은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수 없는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수 없다. 나그네를 돌봐주고 약한자를 외면하지 않던 의로운 나라가 그 모습을 지워나가기 시작하는거 같아 마음이 안타깝다.
이제 미국 대선이 얼마남지 않아 신자들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다윗왕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을 가장 가치있게 여겨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그런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다같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10/12)
*기자는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합니까? (51:17)
“사람은 누구나 어리석고 무식하다. 금속을 부어서 만든 신상들은 거짓이요, 그것들 속에 생명이 없으니, 은장이들이 자기들이 만든 신상 때문에 모두 수치를 당하고야 만다. 금속을 부어서 만든 신상들은 속임수요, 그것들 속에는 생명이 없으니, 그것들은 허황된 것이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아서, 벌 받을 때에는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는 인간과 온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권능으로 땅을 만드시고, 지혜로 땅덩어리를 고정시키시고, 명철로 하늘을 펼치신 분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모든 창조물들이 요동하며 순종한다.
그러나 인간이 제 아무리 값비싼것으로 우상을 만들고 삼아도 인간의 요구에 반응하는 우상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리석게 세상의 것들을 마치 우상과 같이 의지하고 섬기기까지 한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간섭을 받으면서도 이방의 우상들을 가져와 섬겼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시면서 그곳에서 탈출하여 자기의 목숨을 건지라고 하셨다.
바벨론은 한 나라의 이미지이면서 계시록에서는 영적으로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물질에 얽매여서 이 세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때 그곳에 남았던 사람들이나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은 마치 깊은 늪지대와 같아서 거기에 빠진자가 속히 정신을 차리고 나오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그리고 더 깊이 빠져 결국에는 탈출하지 못하고 생명을 잃게 된다. 이세상은 죄악으로 인하여 마지막날 멸망하게 된다. 미련하게 이 세상의 죄악으로 인하여 함께 멸망당하는 일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밝혀 주셨으니 이세상의 악함을 인식하고 우리의 발걸음을 오직 주님께로 향하길 소망합니다.
(10/1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무엇을 호소합니까? (51:34-35)
“시온의 백성이 이렇게 호소할 것이다. “바빌로니아 백성이 나의 피를 흘렸으니 그들에게 그대로 갚아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호소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곳의 바다를 말리고, 그 땅의 샘들을 말려 버리시며 그 땅이 페허가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포로생활가운데 있으나 주만 의지한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땅에서 들리는 소문에 낙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해에는 이런 소문이 떠돌고, 저 해에는 저런 소문이 떠돌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에는 항상 원치않는 루머들이 생기는 법이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엄청난 루머들이 늘 따라 다녔다. 이처럼 신자들의 삶에도 루머가 생길수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좋은 사례를 살펴보면 좋을거 같아서 나는 다윗의 예를 들어보려고 한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다윗의 대처방법은 침묵하는 것이었다. 그는 속에서 마음이 불붙는것 같았지만 루머에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나와서 억울한 심정을 터트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와같은 하나님 대면 방식이 어떤 효과를 줄수 있을까?
나에 대하여 루머를 퍼뜨리고 악한 말을 하는 사람과 대면하여 입을 열기 시작하면 좋은 말이 나오기는 어렵다. 분명 험한 말이 오고갈것이며 입술로 죄를 범할수 있다. 다윗은 ‘내 혀로 범죄하지 않겠다’ 고 말하며 악인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님도 온갖 루머와 상처를 뒤로 하고 덤덤히 십자가에 오르셨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승리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신자가 믿음대로 살려고 할때 마귀는 루머를 만들고 질투심을 유발하여 믿는자를 현옥하고 무너뜨리려고 한다.
들리는 소문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반응없이 하나님앞에까지 나아갈수 있어야 한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나보다 더 지혜롭게 꼬인 실을 풀어가실수 있으시다.
내가 나서면 더 꼬일수 있지만 주님께 맡기고 침묵할때 조금 시간이 지체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침묵의 결정에 손을 들어 주실줄로 믿는다.
(10/14)
*예레미야는 시드기야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52:2)
“그는 여호야김이 하였던것과 똑같이 ,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본문은 예레미야의 마지막 장이며 그동안 예레미야가 남유다를 향하여 예언을 선포했던 내용이 그대로 실현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 할것없이 앞다투어 우상숭배에 빠졌던 암울한 시대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가 이제 자신의 두 눈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공포와 참담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것이야말로 징계와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남유다는 피할 방법이 있었음에도 스스로 악한길을 택했으며 왕들은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여 화를 자초했다.
선한 왕 요시야 이후로 그의 아들들과 손자가 왕의 자리에 앉았으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하지만 이와같은 불순종의 역사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시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데 여호야긴(3개월 왕위에 올랐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가 37년동안 감옥살이함) 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고 그의 손자 스룹바벨을 통해 귀환을 이끄셨다.
마태복음은 바벨론포로에서 14대가 지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셨음을 기록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스펙타클한 은혜임이 분명하다. 아무리 시대가 악하고 험해도 믿는 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전천후적인 보호하심을 의심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사막에 강을 여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것이 구원받은 인생이 가져야할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길을 만드시는 전문가이신 주님께 오늘 우리의 삶을 맡겨드리며 그 길을 따라 한걸음씩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