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스라엘의 선하고 악한 왕들과 여러명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은혜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 하루에 한장씩 빠짐없이 읽고 묵상하여 귀한 말씀의 보물을 캐내기 소망합니다.
(11/1)
*아도니야가 잔치에 초청한 사람과 초청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1:9-10)
-초청한 사람은 요압, 아비아달 제사장, 모든 왕자들이었고 초청하지 않은 사람은 나단선지자, 브나야, 솔로몬, 다윗의 경호병들이었다. 간단하게 분류하면 다윗측의 사람들은 배제하였다. 다윗측의 사람들이 아도니야에게 동조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때문이었다. 특히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게 그의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후계자라고 지명하셨다는것은 기억하면서 아도니야는 왕이 될 인물이 아니란걸 지적하였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의 후계자라고 떠벌리고 사람을 모을때 안타깝게 요압과 아비아달 제사장은 그의 설득에 빠졌는데 아도니야의 용모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리더쉽에 그가 왕이 될 인물이라고 여긴것이다.
그반면 나단 선지자와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었고 주춤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확인시키면서 다윗이 대세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언약의 말씀에 순종할수 있도록 적극 개입하여 도움을 주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마음을 모을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이든, 가정이든, 직장이든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시는데로 마음을 같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요소들에 담대하게 맞설수 있어야 한다.
(11/2)
*아도니야는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50)
-그는 솔로몬이 두려워서 제단 뿔을 잡고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도니야의 행동을 통해 그가 왕이 절대로 되어서는 안될 인물임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자기밖에 왕이될 사람이 없다고 큰 소리치던 패기는 간데없고 솔로몬이 왕이 되자 제단뿔을 잡았는데 그 의미는 자신이 범죄자란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도니야가 한때 사람들을 포섭하고 왕이 될려고 했다가 스스로 무너진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사람 중심의 모임은 나누어짐이 순식간에 찾아올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거나 불리하다 싶으면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아도니야를 따르던 무리들도 솔로몬이 왕이 되자, 다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신앙 공동체안에도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사람중심이 될때 아도니야의 무리들과 크게 달라질것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크든 작든 신앙 공동체는 오로지 하나님 중심,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거기에 소망이 있다.
(11/3)
*위기에 처한 아도니야는 밧세바에게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2:17)
-솔로몬의 엄마 밧세바를 찾아온 아도니야는 수넴여자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도니야 무개념 민폐 시리즈를 보는듯하다. 어제는 재단뿔을 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더니 오늘은 나이 늙어 온기를 잃은 다윗을 위해 간택된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을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와 했던 말들속에는 아직까지 솔로몬보다는 자기가 왕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남아있었다. 아도니야가 다윗의 첩의 역할을 했었던 아비삭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다윗의 왕위를 다시 취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에게 오지않고 밧새바에게 찾아간 모습을 보면서 뱀으로 가장한 마귀가 아담이 아니라 하와에게 찾아가 유혹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뱀은 하와에게 이세상에서 가장 좋은것을 주려고 한다면서 거짓말을 하였고 하와는 거기에 속아 넘어갔다. 아도니야는 기회주의자이다. 권력의 기회를 차지하기위해서 자존심, 질서따위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 모습이 마귀의 본모습이다. 어떻게든 사람들의 마음을 현옥해서 자신을 따르도록 한다.
밧새바가 그말에 혹해서 솔로몬에게 부탁할 정도였으나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솔로몬은 단번에 아도니야의 검은 계략을 알아차리고 그를 처형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이고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게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분별할수 있도록 하심을 기억하고 쉬지않고 읽고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아야 한다.
(11/4)
*시므이가 왕과의 약속을 어기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2:39-40)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찾으러 가드땅으로 직접 건너갔다.
시므이는 다윗왕을 조롱하고 멸시한 죄로 평생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는 금족령을 솔로몬에게 받은 사람이다. 시므이는 살 수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그가 자신에게 내려진 왕명을 알면서도 왜 지키지 못했을까? 첫째는 교만함이다. 몰래 갔다오면 아무도 모를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피할수 있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숨겨지는것이 없다는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둘째는 이기심이다. 과거에 다윗을 무시했던것처럼 솔로몬왕도 무시했던 것이다. 두 종이 도망을 간것을 붙잡아오기위해 왕명을 어긴것은 그 종들을 자신의 재산의 일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적인 욕심이 자신의 생명까지 중히 여기지 않게 만든것이다.
시므이라는 사람의 결말을 바라보면서 교만함과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우리의 믿음생활에 치명적이라는것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다윗과 솔로몬에 의하여 생명을 보장받았음에도 스스로 그 길을 벗어나 버린 시므이를 기억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새생명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에 빠져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영역을 스스로 떠나 죄악의 길을 걷지 않도록 늘 점검하고 살피는 삶을 살아야 한다.
(11/5)
*솔로몬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고,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3:9-13)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을 구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고 그가 구하지 않은 다른것까지도 허락해 주셨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 아버지 다윗과 같이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모든 제사를 정성을 다하여 드렸을때 감동을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원하는것을 구할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는데 그 이유가 많은 백성들을 올바르게 재판을 하기를 원했고 사람들의 선과 악을 분별할수 있기를 원한다는 말에 하나님은 한번더 감동을 받으시고 그가 구하지 않았던 부와 영화도 더불어 허락해 주신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지혜를 받음이 증명이 된 사건이 곧바로 이어진 두 창기에 대한 사건이다.
이 재판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알 정도로 기상천외한 지혜를 보여주어서 역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세상사람들이 얻지 못한 명철한 지혜를 받았음이 확인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처럼 지혜롭기를 원할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얻은 지혜는 학문이나 정보를 통해서 얻어지는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땅에서 우리도 인간의 머리를 뛰어넘는 지혜를 하나님께 얻을수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철저히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때 소위 감동 감화를 통해 영감을 얻는다.
성경을 통해서 얻는 지혜는 우리의 모든 삶 구석구석을 모두 커버하고도 남기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정보나 경험으로 지식을 쌓음보다 오직 말씀으로 영감을 얻어 지혜로운 삶을 사는것이 바람직한것이다.
(11/6)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과 주변국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4:24-25)
-솔로몬이 주변국가들의 왕을 다스리며 모든 민족과 평화를 유지했고 그 덕분에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도 안정과 평안을 누리며 살수 있었다. 성경은 그당시의 삶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이 의미는 그당시 전쟁이 없었고 침략이 없었다는 증거다. 개인사유와 재산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화평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갈수 있었다.
솔로몬시대에 안으로 밖으로 모두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두말할 필요없이 솔로몬의 정치능력때문이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과 넓은 마음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한없이 많이 주시니’ 라며 솔로몬의 정치 노하우가 어디서부터 임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믿는 사람들도 솔로몬이 받은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다른것들을 과감히 포기할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깊이 깨달아 알수있는 지혜만 얻으면 살 길이 열린다. 삶이 보인다. 솔로몬은 삼천가지 잠언을 말했고, 천다섯편의 노래를 지었고, 모든 창조물들을 보며 하나님을 설명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힘써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수 밖에 없다. ‘야다 = 하나님을 알자’ 여호와를 알며 경외하는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11/7)
*솔로몬과 히람 왕 사이의 교역 내용은 무엇입니까? (5:8-9)
-성전을 지을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을 보내주기로 하였다. 다윗왕의 숙원이었던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아들 솔로몬왕이 시작하게 되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로 마음을 결정한 것은 아버지 다윗의 영향이 상당했지만 결정적으로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그 건축을 자신에게 맡겨주셨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하였는데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 계획을 세울수 있었는지 알수 없을정도로 뛰어난 지혜를 보였다. 학자들은 다윗의 성전건축에 대한 열정으로 다 준비해놓은것을 솔로몬이 진행만 한것으로 말하지만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가 아니었다면 성전건축사역이 순조롭지 못했음이 자명한 사실이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 하나님을 만나 예배드리는 첫 성전이니만큼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고 하나님은 조금의 불평과 원성이 없는 건축을 위하여 온 심혈을 기울인것을 볼수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때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놀라운 방주를 완성한 사실을 알수있듯이 믿는 사람들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진행할때 공동체의 편리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먼저 염두에 둘수 있어야 한다.
(11/8)
*성전 건축을 마친 후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6:11-12)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함께 사시며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에 전제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솔로몬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불순종의 삶을 살아간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올수 있다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사용하고 좋아하는 말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이 있다. ‘늘 항상 함께 하여 주세요.’ 라고 기도할때가 많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수 없는 곳에 거하며 살고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God is everywhere) 의 하나님이시지만 죄가 있는곳, 악을 행하는곳에 거하지는 않으신다. 죄를 심판하시고 징계는 하시지만 그곳에 임재하시지는 않으신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하면서도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기도에 대하여 응답받기를 기대조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곳에는 은혜가 아니라 무서운 징계가 임하게 될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켜야지 솔로몬에게 말씀하신 ‘은혜의 공식’ 이 성립이 된다.
(11/9)
*솔로몬이 불러온 후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7:13-14)
-후람은 두로 사람 대장장이의 아들로서 기술과 전문 기술을 두루갖춘 지혜로운 사람이며 솔로몬의 성전과 왕궁의 건축을 도맡아 했었던 인물이다. 특히 후람이 성전 기둥을 세우고 두 기둥의 이름을 야긴과 보아스로 지은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야긴’ 의 의미는 ‘그가 견고하게 하신다’ 는 뜻이고, ‘보아스’ 는 ‘그 안에 힘이 있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는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의미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의 삶을 견고하게 세우고 힘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신데 그분을 성전에와서 만난다는 의미로 이와 같은 이름을 붙인것이다.
그는 두로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영적인 의미를 담고 기둥을 세웠을까? 후람은 두로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를 정확하게 숙지 하고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납달리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신앙이 자녀세대에까지 미치게 하는것은 이세상의 어떤 기업이나 유산을 넘겨주는것보다 소중한 선물인것이다. 자자손손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리는 가문이 명문가문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가정이다.
(11/10)
*솔로몬이 주님의 성전 건축을 마친 후 한 일은 무엇입니까? (7:51)
-다윗이 거룩하게 구별해서 바친 성물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주님의 성전 창고에 넣었다.
솔로몬은 그 성물들을 성전 창고에 보관한 이유는 그 성물들을 그누구도 개인을 위해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이었다. 훗날에 히스기야왕은 이 창고까지 열어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자랑을 했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모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성경은 성도의 믿음이 정금같은 것이라고 했다. 정금100% pure gold 이다. 그러나 정금이 되기위해 수많은 제련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성도의 믿음도 이렇게 연단되고 또 연단받아야 정금같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금같은 신앙을 절대로 마귀가 빼앗지 못하도록 천국 창고에 보관하신다. 그리고 그 귀한 신앙을 이땅에서 잘 지키도록 도우신다.
고난의 아이콘, 욥의 고백속에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가리라’ 고 표현한다. 그렇다. 믿는 자는 정금같은 믿음을 위해 연단의 과정을 인내하고 견뎌야 한다. 그렇게 얻은 정금같은 믿음은 그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할것이다. 과연 성도가운데 정금같은 신앙을 가진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잘 연단받은 사람, 연단의 과정을 인내할줄 아는 사람이 그와같은 믿음을 얻게 될 것이다.
(11/11)
*회막과 장막 안의 기구를 옮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8:4)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것들을 옮겼다. 다윗은 언약궤 한번 잘못 옮겼다가 큰 낭패를 당했던 경험이 있었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이 훗날에 성전을 짓고 언약궤를 옮길때에 분명히 기억하도록 당부를 했을것이다. 다행히 솔로몬은 율법에 명령대로 순종하였고 하나님은 구름가운데 임재하셨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사회, 문화, 인식이 달라져도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은 변할수가 없는것이다. 말씀이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자유신학이 추구하는 개념이다.
실제로 미국의 진보주의 신학교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한 내용이 충격을 주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모세가 기도해서 홍해를 갈랐다는것을 믿는 사람은 없겠죠?’ 믿기지 않을수 있겠으나 사실임을 말하는 나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다. 그곳에서 동성애관련은 애시당초 성경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된지가 오래다.
악한 마귀는 어떻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과 권위를 떨어뜨리려하고 있다. 마귀가 똑바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성경을 부인하면 하나님을 부인하는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성경을 더더욱 떠나서는 안되고,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성경이라는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무너지면 믿음도 같이 변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주님의 뜻(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는 분이시다.
(11/12)
*솔로몬은 이방인을 위하여 무엇을 간구합니까? (8:41-43)
-이방인일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부르짖을때 그대로 다 들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것은 맞지만 구원이 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란것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구약시대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유일한 창조주로 믿으며 경배하며 예배하는 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8장전체에서 유독 눈에 자주 띄는 구절이 있는데 ‘성전을 바라보면서’ 라는 말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어떤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특히 죄가운데 빠졌거나, 인생의 재앙가운데 빠졌을지라도 마음에 깨닫고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할때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그 행위대로 갚아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성전을 바라보는 기도가 그래서 중요하다. 성전을 바라본다는 의미는 비록 성전에 지금 거하지 못하더라도 누구든지 어디에 있을지라도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사모하며 간구할때에 응답하신다는 의미이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기간에 하루에 세번씩 예루살렘성전이 있던곳을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굳이 자기 교회가 있는곳을 바라보며 기도할 필요는 없다.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개념으로 성전을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을 바라보는것이 곧 하나님을 바라보는것이기 때문이다.
(11/13)
*솔로몬은 한 해에 세 번씩 주님의 제단 앞에 무엇을 하였습니까?(9:25)
-일년에 세번(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번제, 화목의 제물, 그리고 제단에 분향을 하였다. 이것은 솔로몬이 율법을 준수하는 왕이었음을 알려주는 일이다. 성전이 세워진 이유는 한가지이다.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함이며 제사의 핵심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무의미한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물이 곧 제사를 판가름할만큼 중요한 사항이었다.
지금은 더이상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배드리는 제물이 사라지거나 의미가 축소된것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신약의 예배는 더이상 구약의 제사를 답습하진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예배자는 하나님께 구별된 제물을 드릴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설명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다.
구약시대 흠없는 동물을 제물로 드린것처럼 이시대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흠이없이 인색함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영적인 예배이다. 어찌보면 구약시대보다 지금이 더 어려울수 있다. 눈에 드러나지 않고 본인만 알수있는 제물이기 때문이다.
이시대에도 변함없이 성전의 목적은 제사와 제물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구별되이 드려질수 있는 거룩한 산 제물로 날마다 준비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서야한다.
(11/14)
*온 세계 사람들이 직접 솔로몬을 만나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0:23-24)
-솔로몬을 직접 만나서 하나님께서 그의마음에 넣어 주신 지혜의 말을 들으려고 하였다. 그당시 솔로몬의 지혜는 얼마나 뛰어났을까? 얼마나 뛰어났으면 어떤 질문에도 막히는 법이 없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의 정답은 하나님께 있다. 솔로몬의 지혜를 발견할수 있는 성경이 잠언서와 전도서이다. 그곳에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 깨달아 기록한 수없이 많은 내용들이 있다. 솔로몬의 영성이 얼마나 깊고 넓었는지 그는 곤충한마리의 움직임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의 생김새와 기능들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하였다.
자연을 통해서 학문을 익히면 과학자가 되지만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면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이세상의 시작과 끝 전부를 계시해 놓으셨기 때문에 누구라도
성경을 깊이 읽고 묵상할수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넣어주시는 지혜와 영감을 얻을수가 있다.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기위해 IQ (Intelligence quotient) 보다 하나님을 더 알아갈수 있는SQ (Spiritual quotient) 가 높아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을 의로 교육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바르게 한다.
(11/15)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우상을 섬긴 결과는 무엇입니까? (11:11-13)
-하나님께서 왕국을 떼어서 신하에게 주게되므로 나라가 갈라질것이며 오직 한 지파만 솔로몬의 아들에게 돌아갈 것임을 듣게 되었다. 솔로몬이 하나님앞에 불순종한것은 두가지인데 다른 민족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과 다른 신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두번이나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특히 우상 숭배를 멈추라고 경고하셨지만 솔로몬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 성경은 솔로몬이 그의 마음을 여자와 우상에게서 돌리지 못한것이 결국 나라가 깨어지도록 만든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한치의 틈이없이 견고했던 솔로몬왕국에 금이 가기시작했다. 동서남북에 대적이 없을만큼 강력한 이스라엘에게 대적이 일어나게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지혜의 왕 솔로몬은 속수무책이었다. 지혜의 왕이 대적들을 능가할만한 지혜가 없어진걸까? 여전히 지혜가 있었으나 하나님이 솔로몬의 범죄로 일으키신 대적들을 당할수는 없었던 것이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인생이 망가지는 이유가 자신의 꾀를 만들어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솔로몬이 1000명이나 되는 아내들의 원성을 막기위한 방편으로 각자가 섬기는 신을 위해 산당을 지어주는 꾀를 내어 그들의 원망은 잠시 돌려막을수 있었으나 그의 꾀는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받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솔로몬은 꾀를 내기보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어야 했지만 결국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11/16)
*하나님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은 이스라엘이 갈라지지 않을 거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1:34)
-전적으로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규를 지킨것으로 인함이었다. 성경에서 솔로몬처럼 아버지덕을 많이 본사람이 있을까? 왕이 된것부터 이스라엘 최초의 성전도 건축할수 있었고, 다윗이 좋은 관계를 가졌던 나라의 왕들이 다윗과의 우정으로 인해서 솔로몬이 그 혜택을 적지 않게 누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라가 나누어질 예언의 원인이 솔로몬의 범죄였지만, 솔로몬이 살아있을때 갈라지지 않을것이라는 예언이 아버지 다윗의 신앙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다윗, 다윗 하시는것일까? 가끔은 다윗이 질투가 나기도 한다.다윗도 한때 하나님께 범죄한 경력이 있다. 하나님은 죄를 멀리하는 자를 사랑하시지만, 죄로부터 마음을 돌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자도 편견없이 사랑해 주신다. 어린목동시절부터 쌓아온 다윗과 하나님의 애증의 관계가 잠시 균열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기에 하나님은 비록 솔로몬이 타락했음에도 다윗의 왕국을 지켜나가길 원하셨다.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
(11/17)
*원로들의 대답과 젊은 신하들의 조언은 어떻게 다릅니까? (12:10-11)
-원로들은 여로보암과 백성들이 요구한 솔로몬이 지여둔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는 요청을 수락해 주라는 것이었으나 젊은 신하들은 솔로몬보다 더 강압적으로 백성들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행하게도 르호보암은 자기와 함게 자란 젊은 신하들의 손을 들어주게되는데 결국 이 그릇된 결정이 분단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을 닮지 않았다. 지혜롭지도 명석하지도 못했다. 신중한데는 찾아볼수도 없고 그저 경솔하기 짝이 없었다. 솔로몬의 강압정치로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더 그들의 숨통을 죄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에 설득당하는 모습은 어디를 봐도 한나라의 왕의 자질이 부족해 보인다. 믿는 성도들은 들리는 소리에 잘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소리에 반응해야할까?
혹 신중하지 못한채 경솔한 반응을 보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성도들이 있다.
자칫 시대의 흐름만 따르거나 소위 세상의 대세만을 쫒는 모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때가 많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자가 하나님 나라의 흐름을 쫒아갈수 있다. 자신의 삶에서 늘 성령의 조명아래 신중한 결정을 이루어 내는 자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이다.
(11/18)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후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12:28-29)
-금송아지 우상 두개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중부지역)에 하나는 단(북부지역)에 세워놓고는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거롭게 유다땅인 예루살렘까지 제사드리러 내려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하였다. 이 행위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무서운 범죄행위였다. 이 행위로 인하여 북쪽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나라로 들어서는 첫 걸음이 되었다.
기가막힌 사실은 백성들의 영적인 무지함이다. 아무리 르호보암왕이 싫어도 하나님을 믿는 다는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가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듣고 멀리 북쪽 단에까지 가서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리러 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왕기상의 부록과 같은 역대하11장을 보면 북쪽 이스라엘에 있던 레위지파 사람들은 여로보암의 정치가 우상숭배라는것을 눈치 채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유다땅으로 옮겨온것을 볼수가 있다.
마귀가 뿌려놓는 가라지를 말씀으로 베어버리지 못하면 이렇게 영적으로 무지함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라도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말씀으로 분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과악을 올바로 구분할수 있는 것이다. 믿는 성도는 정치나 문화적으로 세상적인 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언제나 말씀에 따라 세상의 물살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갈수 있어야 한다. 그 곳 끝에 영적인 본향인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11/19)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예언자의 거짓말에 속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13:21-22)
-죽음을 당하게 될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들었고 결국 사자에게 물려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왜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 앞에서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고 말씀대로 순종했으면서도 늙은 예언자의 말에는 한점의 의심도 없이 속게 되었는가? 늙은 예언자가 자신처럼 하나님의 메세지를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거짓말에 쉽게 속게만든 속마음을 살짝 들여다본다면 그 사람 마음을 움직인것이 사람의 말이었다는것이 보여진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늙은 예언자가 아무리 자신에게도 말씀하셨으니 와서 먹고 쉬라는 말을 의심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으신데도 그 예언자를 통해서 진짜 바꾸셨는지 자세히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당한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여로보암왕앞에서도 담대히 말씀을 전했던 사람이 겨우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끝까지 붙드는 강인함이 있어야 한다. 원수마귀는 항상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모든것을 이용하려 들것이다. 마음이 약해져서도 흔들리지도 않도록 더욱 굳게 말씀을 붙잡을때 마귀는 물러갈것이다.
(11/20)
*여로보암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에 미친 영향은 무엇입니까? (14:16)
-여로보암은 자기도 죄를 지었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죄를 짓게 하였고 그 댓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기로 작정하셨다. 공동체안에서 리더의 성향은 공동체 전체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수 있음을 생각나게 한다.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세움을 얻었음에도 나라를 하나님 제일주의가 아닌 우상 제일주의로 물들게 하는 바람에 온 나라 전체가 우상숭배라는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한 지도자의 이와같은 타락이 공동체 전체를 썩게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받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우리는 저마다 속해있는 크고 작은 공동체가 있다. 누군가는 리더, 누군가는 그곳의 한 일원일수 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어느 역할에 있더라도 신앙의 색깔을 분명히 할수 있어야 한다. 특히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만큼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온 나라가 극심한 우상숭배에 빠졌을때에도 거기에 맞서서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면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선포한 선지자들과 소수의 의로운 신앙인들이 있었다. 성도는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시대는 세상이 쉽게 감당할수 있는 사람들이 성도가 된거 같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것밖에는 답이 없다.
(11/21)
*아사가 왕이 된 후 한 일과 하지 못한 일은 무엇입니까? (15:11-15)
-성전 남창(male prostitutes)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고 조상이 만든 우상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아세라상을 만들어 섬기던 할머니를 왕 대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그 우상들도 불살라 버렸다. 그러나 유다에 있었던 모든 산당(high places) 들을 모두 제거하지는 못했다. 그 말은 얼마나 산당이 유다땅에 많았었을지를 가늠하게 한다.
유다왕국의 세번째 왕이었던 아사는 20명의 유다왕들가운데 선한왕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사이다’ 처럼 시원한 정치를 한 사람이다. 41년이라는 시간동안 남 유다왕국을 우상주의에서 다시 신본주의로 되돌려 놓았고 마치 다윗을 보는것처럼 여호와 신앙에 충실한 왕이었다.
그의 업적가운데 아주 중요한 한가지는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바아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제사하러 왕래하지 못하도록 라마를 건축하려 했던것을 막은것이었다. 아사왕이 그렇게 한 이유는 남유다 뿐만 아니라 북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했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가서는 남과 북 모든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는것은 멸망의 길이라는것을 알기 때문에 기어코 라마성읍건축을 막았던 것이다. 믿는 자들을 미혹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의 역할을 감당하는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고 그와같은 존재들이 세워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막아내는 일에 한마음이 되길 소망한다.
(11/22)
*베델 사람 히엘은 여리고를 건축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가? (16:34)
-맏아들과 막내아들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들의 죽음과 여리고 건축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여리고는 가나안땅에서 무너질때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다시재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히엘이라는 사람이 성을 재건하다가 그런 화를 당한것이다. 오늘 구절의 첫머리에는’아합시대’ 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아합은 이스라엘 왕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큼 악한 정치를 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살았던 히엘이라는 사람의 무분별한 행동은 그 시대가 얼마나 죄악이 관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백년, 수천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아마도 히엘이라는 사람은 여리고성을 지음으로 많은 이익을 생각했던것같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댓가는 너무나 끔찍했다.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미래도 동일한 진리는 말씀을 떠나 사는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악한 모습이 된다는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11/23)
*사르밧 과부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음식을 아들과 먹으려 합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17:13)
-과부와 아들의 마지막 음식을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인간적으로 볼때 엘리야의 요구는 너무나도 과하고 비도덕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엘리야의 인간성을 따지기 이전에 그와 같은 몰인정한 요구를 할수 있었던 배경을 알아야 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그곳으로 갔었고 사르밧과부의 사정을 뻔히 들어 알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신을 먹이실것을 믿었다. 믿음이 나타나는 곳에는 언제나 공급하시는 은혜가 임한다. 과부는 마지막음식으로 계산하고 죽을 작정이었으나 엘리야는 믿음있는곳에 끊어지지 않는 축복이 있음을 예언했다.
결국 그 말씀을 믿은 과부의 집에 기적이 임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그래서 믿음은 눈으로 보이는것을 초월해야만 효과가 나타난다. 감사의 계절에 이런 믿음의 모습들이 성도들의 삶속에서 경험되어지길 소망한다.
(11/24)
*엘리야가 기도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18:38-39)
-그 유명한 갈멜산에서의 영적전쟁이야기이다. 850명의 바알, 아세라 예언자들과 엘리야 한사람과의 대결에서 엘리야는 간단히 승리를 거두었다. 850명이 하루종일 미친듯이 저희들의 신을 부르고 자해를 해보았으나 무심하게도 그들의 신은 인기척도 하지 못했다. 엘리야가 한번 하나님께 부르짖었을때 즉시로 응답하셔서 오직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분임을 모든 백성들에게 증명을 하셨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움직여주신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기도할때 어떤일이 벌어지겠는가? 기도의 대상과 목적이 올바른것이라면 오늘도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저 나의 이익과 기도내용을 나타내는것이라면 반응하실리 만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