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4/26)
엘리후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이 잊지 말아야 할 것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하였다. 물론 여전히 엘리후는 욥에 대하여 오해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것을 그의 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끝까지 분노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대적하다가는 결국 망할것이고 그의 죄악도 사함받지 못할것이다’
욥을 오해하고 있는 엘리후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엘리후가 끝으로 전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말들은 그의 깊은 영성과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영성과 자연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력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올무에 스스로 갇혀있는듯하다.
하나님이 내리는 비에 대하여 그가 표현하기를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땅에 물을 주시려고 비를 내리신다’ 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을 벌하실 때에도 비를 내리시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에도 비를 내리신다고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은 하나님이 어떤 목적으로 비를 내리시는지에 대하여 알길이 없기 때문에 그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만 비에 대하여 하소연을 하게 된다.
마치 짚신장수와 나막신장수를 둔 어머니와 같이 비가와도 걱정, 오지 않아도 걱정할뿐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욥도 자신에게 닥쳐온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했으나 계속되는 질병의 아픔과 잃어버린 자녀들로 인한 심적고통이 더하여 믿음은 희석되고 친구들의 공격을 받아 오히려 이런 상황을 연출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과 의심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엘리후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쏟아붓고 있으나 정작 하나님께서 욥에서 주신 비극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하지 못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고난당하는 욥에게 더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겨주게 된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해 주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하시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겸손히 자신을 하나님앞에 다 내려놓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같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외면하는 일을 같이 외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4/27)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38:2)
-무지하고 헛된 말로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하나님이 입을 여셨다. 아마 독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속 시원하게 욥을 죄인이라고 공격했던 세 친구들과 엘리후에게 사이다같은 한 방을 날리실줄로 알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을거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입을 여시자 곧바로 욥을 책망하시면서 의구심을 자아 내셨다.
하나님이 욥의 믿음을 자신하셔서 사탄에게 기회를 주셨는데 왜 이제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던 당사자인 욥에게 칭찬대신 책망을 하시는걸까? 욥의 신앙은 인정하셨지만 그가 고난 가운데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무지에서 나오는 의심에 대하여 꾸짖으신 것이다. 욥 자신도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평생 한번도 나타내지 않았던 원망과 의심의 모습들을 보면서 많이 놀랐을 것이다. 고난과 위기가 오면 자신의 상태를 자세히 보게 되는거 같다.
‘서 있는자는 넘어질것을 조심하라’ 는 말씀처럼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자만해서는 안된다. 이제부터 길게 설명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 전능하심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창조주앞에 나약한 미물같은 존재인지를 생각해야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모르는게 없는거 같은 사람이나 컴퓨터도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와 자연을 과연 몇 %나 이해할수 있을까? 구구절절 욥은 하나님의 브리핑앞에 한숨과 탄식만 내뱉게 된다.
정말이지 우리가 아는건 정말 미약하고 기초수준에도 못미치는거 같다. 설령 조금 깨닫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우주의 질서와 법칙 그리고 자연계를 먹이시고 보호하시는 손길을 무슨수로 인간이 감당할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일순간의 부재라 할지라도 그것은 곧 인류에게는 멸망과 같은 재앙 수준으로 다가옴을 깨달아야 할것이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고 말했던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것이 금을 얻는것보다 나은것이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브리핑에 귀기울여 보자!
(4/28)
*생태계의 법칙을 만드신 분은 누구입니까? (39)
-계속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만드신 빈틈없는 창조세계와 친히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할수가 있다. 여러가지 동물들을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각 동물들이 가진 특성을 설명하시면서 그렇게 태어나 살아가게 된 이유를 욥이 대답할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그 중에 시선을 잡는 동물이 ‘타조’ 인거 같다. 타조가 날개를 가졌으나 날지는 못하고, 알을 모래안에 낳고 떠나지만 그 알이 스스로 부화를 하거나 다른 짐승에게 밟힐수도 있음을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가끔 알이 짐승에게 짓밟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어미 타조도 똑같이 땅바닥에 알을 낳고 떠나버리는데 인간의 시선으로 볼때 그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금방 깨달을수 있음에도 타조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같은 방식으로 알을 낳는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은 타조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그러나 타조에게는 말보다 더 빨리 달릴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인간이 생각으로는 너무 답답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행동을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따른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타조알이 다 잡혀먹거나 짓밟혀 멸종될거 같은데 인간만 건들지 않으면 타조는 절대로 멸종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법칙이며 동물들이 그 법칙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만약 동물들에게도 인간의 지혜를 주셨다면, 동물들은 과연 지금보다 더 편히 잘 살수 있을까?
글쎄, 얼마지나지 않아 먹이사슬은 사라지고 생태계는 스스로 무너질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물에게 사람의 지혜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주셔서 가끔 그 지혜를 보고 인간이 감탄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여러가지 동물의 특징과 습성을 알려주시는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 가운데 돌보아 주시지 않는 종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좋든 싫든지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모든 피조물들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지혜롭게 창조된 인간만이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
예수님도 자연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먹이고 입히신다고 하시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하셨다. 우리 인생이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전능하신 창조주의 솜씨와 주권을 볼수 있으련만…
(4/29)
*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40:4-5)
-욥은 자신이 하나님앞에 비천한 사람임을 고백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더이상 입을 열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욥이 말한 의미는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광대하신 섭리와 주권에 완전히 굴복하며 자신의 경거망동함을 회개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욥은 고난이전에도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믿었었다. 물론 이런 믿음은 그가 귀로 듣고 아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신앙적 체험에 의해 영의 눈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보게 되고 다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볼수가 있다.
하나님은 더욱 깊이 욥의 심령을 감찰하시고 물으셨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은 욥이 당하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자칫 자신은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욥이 하나님이 의롭지 못하시다는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고 하신다. 그리고 욥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을 정당화 함으로서 결국 하나님이 허물이 있으신분으로 나타나게 되는것에 대하여 물으셨다.
이것은 너무나 조심스럽고 중요한 신앙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본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공의를 실현하시고 그의 백성에게 가장 좋은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의심하지 않는것이다. 자신의결백을 주장하고 정당화하는것은 틀린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역에 실수가 있다거나 실수하신것이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불신이다.
참으로 힘든일이지만 어려울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경외하는것이 귀한 믿음임을 욥을 통해 보여주시고 있는것이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연약한 욥에게 자랑하시는것이 아니라 그 크신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할 난제는 없다는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으려면 온전히 믿는 믿음을 보이자, 내가 아프고 힘들고 어려울때도 그 난제를 푸실분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4/30)
*욥의 친구들이 용서받을 방법은 무엇입니까? (42:8)
-용서 받을수 있도록 번제를 드리고 욥이 하나님께 그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여 주신다고 하셨다. 욥기의 마지막장은 이렇게 회개와 용서 그리고 회복과 축복으로 막을 내린다. 정글을 지나듯 한치앞도 알수없는것이 우리의 인생사이지만 욥은 고난을 통해서 잃은것보다 얻은것이 더 많다.
그가 얻은것은 과거보다 정확히 두배로 가축이 늘어났고, 다시1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눈에 띄는 축복보다 더 큰 복은 욥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깊이가 달라졌다는데 있다. 욥은 여전히 고난의 진짜 이유를 하나님께 듣지는 못했지만 더이상 그의 마음에 그것으로 인한 원망이나 의심이 존재하지 않게되었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못하실일이 없다는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인생이 원하는것만 있는것이 아니라 때로는 원치않는 상황도 만나게 하신다는것을 알았을뿐 아니라 전자나 후자나 모두 결국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욥은 ‘이제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는데 하나님을 자신의 눈으로 보는것은 불가능하지만 자신의 삶과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충분히 바라볼수 있음에 감사하며 이제 귀로만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볼수있는 신앙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욥이 고난가운데 얻은 가장 큰 복이요 은혜이다. 그리고 욥기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이 복을 향한 도전이 전달되길 소망한다. 듣기에만 익숙해지면 반쪽자리 신앙이 될수 있다. 내가 말씀을 들어 믿게 되었다면 이제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볼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그리고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는 말씀을 기억하자.
욥기는 평안가운데 가지는 신앙보다 고난을 통해 얻은 믿음이 더 가치있고 성숙한 신앙인을 만들어 냄을 나타내 주고있다. 고난이나 환난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그 시간을 믿음으로 인내하여 연단의 기회로 삼을수 있다면 욥처럼 축복의 지경이 넓어지는 기쁨과 은혜를 얻으리라